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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거대한 체스판
5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일행들을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양의 업무들이었습니다. 귀국 직후부터 각종 관직에 등용되어 밤낮없이 갈리던 이들의 눈에서는 시커먼 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신묘년(1891년) 8월, 일행들은 놀라운 소식을 접수했습니다. 제주도에 아라사 군선 4척이 무단 입항했다는 것입니다. 미리 막아내지 못한 것이야 조선 해군이 워낙 미약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 사건을 일본 공사관에서 먼저 알려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국태공 이하응은 몹시 격노하여 즉각 대책 마련을 지시했습니다.
곧바로 어전 회의가 열렸습니다. 호머 헐버트에게 서양식 교습을 받은 젊은 군주 이준은 굳은 표정으로 대신들을 하나둘씩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러시아 군선에 맞서 신민을 보호할 방책은 무엇이오?” 가장 먼저 제시된 것은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과 접촉해보자”는 박태양의 의견이었습니다. 반면 이현 등은 “가능하면 자력으로 해결할 방책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군부대신 조희연을 비롯한 보국당의 보수파들 역시 이현의 제안에 찬동했습니다. 농상공부대신 김옥균은 그에 맞서 박태양을 두둔하며 이이제이의 방책을 제시했죠. 그러자 듣고만 있던 이하응이 나섰습니다. 김한립이 “러시아의 의도를 면밀히 알아보는 것이 먼저 아니냐”고 말한 것을 그대로 잡아챈 것입니다.
러시아의 의도는 영국의 거문도 철수를 이끌어내기 위한 무력시위였습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것은 동양 삼국(특히 청)을 체스말로 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를 타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준은 즉각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초치했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베베르가 도착했습니다. 능숙한 외교관이자 친조선파 인사인 베베르는 모두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러시아 극동 총독 미하일 리하초프 공작이 황제의 허가를 받아 이 무력시위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리하초프 공작은 알렉산드르 베조브라조프 등 극동 강경파들을 다량 기용해 만주 등에서 매우 공세적인 대전략을 기획하고 있었고, 영국 함대를 치우는 것은 그들의 당면 목표였던 것이죠.
따라서 베베르는 “영국, 러시아, 조선이 삼자회담을 통해 상호 철수를 약속하는 안”을 제시했습니다. 평화로운 상호 철수가 실패한다면 조선 문제의 전권을 부여받은 베베르는 실각할 것이며, 그 후임자로는 리하초프 계열의 강경파가 올 것이라는 전언도 함께였죠. 그러나 독일에서 법학을 심도있게 공부한 김한립은 베베르의 주장의 허점을 간파해낼 수 있었습니다. 애초에 거문도 조차계약은 적법한 것이었고, 따라서 러시아와 영국이 공동 철수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김영천 또한 “영국이 거절하면 우리 땅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게 아니냐”며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준은 내부협판 최신우와 외부협판 김영천에게 영국 및 프랑스 공사를 만나 그들의 의중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러시아와 최근 동맹협상을 논의 중인 프랑스는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습니다. 영국 역시 유럽의 세력균형이 크게 변동하는 지금 극동에서 큰 분란을 감당하기를 꺼려하고 있었습니다. 즉 러시아가 영국과의 공동 철수를 주장한다면 영국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죠. 아주 순조롭고 평화롭게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수상했습니다. 경무청장으로 부임 중이던 이유하는 청국 및 일본군의 동향을 관찰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논의를 뒤집어놓았죠. 일본 공사관의 경비병들, 그리고 청국 공사관의 경비병들이 거의 전쟁 직전과 같은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몹시 놀란 각료들은 즉각 그 이유를 알아보았고, 그 결과 영국의 철수가 청-일 양국의 충돌을 부를 확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문도의 영국 함대는 그 규모를 떠나 “세계 최고 열강 영국의 함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동양 삼국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누름돌 역할을 하고 있었고, 나가사키 수병 사건 등으로 청일관계가 극히 악화된 현 상황에서 함대가 빠진다면 결과는 뻔했습니다.
청과 일본이 결전을 벌인다면 그 장소는 중간에 끼인 조선이 될 것이었고, 따라서 조선은 어느 편을 들던 반강제적으로 참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의도와 영국의 현실이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상황에서 거문도에 영국 함대를 유지시킬 명분도, 방법도 없었습니다. 이하응은 “피를 흘리지 않는 방책이란 없다”는 말을 되뇌이며 각료들에게 ‘더욱 과감한 책략’을 내놓을 것을 주문했습니다. 첫 번째 책략은 김영천의 것으로, “양측의 함대를 인수하여 몸집을 불리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멸치보다는 송사리가, 졸보다는 캐스팅 보터 역할을 할 수 있는 포가 더 낫지 않느냐는 말이었죠.
두 번째 책략은 이유하에게서 나왔습니다. 아예 본격적으로 베베르를 실각시키고 러시아 강경파들을 조선에 들여 러시아의 군병들을 주둔시키자는 안이었습니다.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으면서 그 누구보다 그러한 시도를 경계했던 그는 급격한 군비확장의 부작용을 이야기하면서 러시아에 의탁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의견은 일거 파장을 불러왔고, 각료들은 “저 제안을 진짜 실행하느니 차라리 (미덥지는 않지만) 김영천의 의견을 채택하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1891년 9월 1일 영국 전권공사 오코너와 러시아 전권공사 베베르 간의 협약이 체결되었고, 이하응 내각은 영국과 러시아에게 각각 함선 구매계약을 타전했습니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영국에서 2400톤급 방호순양함 “채리엇(HMS Chariott)”을, 러시아에서 코르벳함 4척을 구매하는 안이 확정되었습니다. 상당히 큰 금액을 투자한 데다 경의선과 경부선 부설권을 영국에게 넘긴 조선이었지만, 각료들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이 미루어진 것입니다. 이로써 조선은 귀중한 시간을 벌었고, 일전에 나서기 전에 내부 문제를 먼저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06. 의(義)로써 금수(禽獸) 국적(國賊)을 처단하리
조선 수군이 근대적 해군으로 정식 창설되는 데에는 만만찮은 대가가 수반되었습니다. 정부는 비용을 벌충하기 위해 애국공채를 발행했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독려했습니다. 수많은 농민들이 관아의 육모방망이에 애국심이 주입되어 ‘자발적’으로 국채를 구매했죠. 가뜩이나 경장 이후 저곡가정책과 (서구제 공산품 유입으로 인한)물가상승에 시달리던 향촌사회는 그야말로 초토화되었고, 원망은 곧 원한이 되었습니다. 임진년(1882)년 봄 보은에서 열린 동학도들의 집회는 그 예고편이었습니다. 부총리대신 어윤중이 선무사로 파견되어 대책 마련을 약속함으로써 그들은 일단 물러갔으나, 그 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죠.
임진년(1892년) 8월, 이유하의 후임으로 경무청장에 보임된 장석주는 지방에서 짤막한 보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일군의 '난병'들이 충청도 감영을 습격해 관찰사를 살해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천안군수와 제천군수를 살해하고 그곳 감영의 병사들 역시 해쳤습니다. 경무청장의 보고를 받은 내부대신 김옥균은 자연스레 이를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동학도들의 소동'으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와 전혀 달랐습니다.
내부대신 김옥균과 협판 김한립 등이 대책을 고심하던 그 때, 궁내부 대신 김가진이 조선국왕 이준의 윤허를 얻어 '누군가 성상께 보낸 밀서'를 공개했습니다. 밀서는 다름아닌 충청도의 향반이자 여러 차례의 척화 상소운동에 참여했던 유인석이 보낸 것이었죠. 유인석은 자신이 충청도 관찰사를 비롯한 '부패 지방관'들을 처단했으며 그 이유는 애국공채 발행 과정에서 재물을 착복하고 서양 오랑캐들에게 조선을 팔아넘겼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는 이하응 정권을 조선의 성리학 질서를 무너뜨린 주범으로 지목하며 국왕이 친히 이들을 몰아내어 법도를 바로 세우기 전까지 '의병'활동을 지속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충청도 각지에서 지방관들이 연이어 암살되는 사건이 터지자, '거의 바로' 한 통의 포고문이 날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 보은에서 집회를 벌였던 동학당 북접이 혼란을 틈타 관아를 습격하고 공주에서 궐기를 선포한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이들을 진압하려다 실패한 감영 군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동학군은 물경 1만명이 넘는 인원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는 유인석이 이끄는 소위 '창의군'을 합친 규모이며, 놀랍게도 이들은 함께 행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렇듯 상식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자꾸 일어나자, 이하응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부총리대신 어윤중은 통제권한을 내부에서 육군부로 이관하고 육군대신 조희연을 평난사로 임명해 사태를 진압하게 했습니다.
더 자세히 알아본 결과, 조희연과 일행들은 다음의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1. 창의군과 동학 북접이 협력하고 있는 것은 '일단' 사실이나, 그 '협력'이라는 것은 높게 쳐야 일시적 협력, 냉정하게는 공동의 적인 이하응 정권을 타도하기 전까지 서로 불가침을 맹약한 것에 불과함.
2. 동학 남접은 이 봉기에 아직 호응하지 않고 있음. 남접을 이끄는 인물은 러시아 유학파 손병희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북접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동학의 제2대 교주'로 여겨지는' 최시형과 결별했다고 전해짐.
3. 동학 북접은 전통적 가치의 회복을 통한 이상적 목가사회 건설을, 남접은 민중 계몽을 통한 농본 대동사회 건설을 주장함. 즉, 추구하는 이념이 매우 상이함.
프랑스 유학으로 공상적 사회주의자이자 보나파르트주의자가 되어 돌아온 이유하는 러시아에서 농본사회주의 이념을 배워온 손병희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 그리고 직감을 느꼈습니다.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들은 차르마저 폭탄과 총으로 암살하는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들이었지만, 조선 정부에는 그러한 사정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손병희를 그저 “후학을 양성하러 초야로 돌아간 선비” 정도로 평가하던 조정은 손병희를 만나 남접의 합류를 막겠다던 이유하를 아무 말 없이 보내주었습니다.
사실 손병희는 북접과 창의군의 봉기에 참여할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구시대로의 회귀를 외치는 그들이 조선 인민의 생활 증진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죠. 이유하의 ‘관선 의회 창설’ 제안은 따라서 사실상 두 반체제분자들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마찬가지였고, 결국 자유당 소속의 법부 협판 서재필이 이 아이디어에 홀랑 속아넘어가며 노농계급을 대표하는 ‘계급정당’ 신민당(新民黨)이 관선 중추원의 일각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동안 조정에 있던 관료들은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동학 북접과 협상하고 유인석의 창의군을 진압하여 파장을 최소화하는 방책을 택했습니다. 최신우의 공작으로 창의군 내부에 신분차별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자 양반, 평민 출신 지휘관들의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이는 총대장 유인석이 무단으로 평민 지휘관 한명을 처단하는 사건으로 비화되었습니다. 동학 북접은 창의군과의 연대를 취소했고, 정부에 폐정개혁안 6조 수리를 협상 조건으로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내부 협판 김한립은 탁지부의 이현, 육군부의 박태양 등과 논의하여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회복하고 탐관오리와 악덕 지주를 처벌하며 노비제를 완전 폐지하고 미곡수매제, 환곡이율 상한제 도입을 통해 농촌 생활을 조금이라도 개선해주기로 했습니다. 내부대신 김옥균은 이를 실행할 방법으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감영을 경무청 휘하에 배속시키고 근대적 공소기관(즉, 검찰)을 창설해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보국당과 자유당의 타협으로 경무청이 경찰부로 독립해 대신급 기관으로 자리잡았고, 이 ‘비대한 내부무력기관’은 지방에 대한 대규모 수사를 실시했습니다. 물론 초대 경찰부 대신 이상재는 온건한 인물이었기에 당장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이유하가 했던 말처럼 “칼을 안쪽으로 겨누는 무력집단은 언젠가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었습니다.
아무튼 동학 북접이 봉기를 멈추자 창의군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지방군인 진위대가 이들을 철저히 진압하며 조선은 또 다시 위기를 넘겼습니다. 유인석은 압송되어 총살되었고, 많은 지휘관들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죠. 조선은 외적에 대항하기 전에 천만다행으로 내부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밖으로 그 눈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07. 동아대전
대청제국과 일본 제국의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모든 곳에서 전쟁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죠. 조선에 있는 일본 공사관과 청 상무위원부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고, 조선 조정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각각 천진 조선상무위원과 주일본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된 김영천과 이유하는 외부 협판 최신우와 함께 조사에 나섰습니다.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은 의외로 거리낌없이 질문들에 답변해주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예방전쟁안은 이홍장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 젊은 개혁관료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청류파’의 견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청의 사실상 최고권력자인 서태후는 이들의 의견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이홍장은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서태후가 쥐락펴락하고 있는 대청제국은 조선의 신종(臣從)을 바라고 있었기에, 이홍장이 약속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조선의 명목적 복종, 실질적 자주를 보장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또한 조선이 일본과 연합했다가 전쟁에서 패배할 경우 이는 조선의 멸국을 의미한다는 사실 역시 알 수 있었습니다. 최신우는 청에 대한 불쾌감과 함께, 김영천은 한숨과 함께 천진항을 나섰습니다.
일본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습니다. 일본의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는 주일공사 이유하와 외부 협판 최신우의 군항, 병영, 관청 순방을 직접 수행하며 조선과의 동맹을 타전했고, 조선에게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할양 등 상당한 대가를 제시했습니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순조로운(???) 개화정책을 고평가하여 반드시 조선을 친일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 내각은 전력으로 조선을 꼬드겼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는 쪽에 베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전체적인 전쟁의 판세는 해군간의 함대전에서 결정될 확률이 높았고, 일본 해군이 청 북양함대에 비해 훈련도가 월등하고 내실 또한 탄탄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청과의 연합을 주장한 김영천, 그리고 “먼저 침공하는 쪽에 맞서 그 상대국과 연합하겠다고 공언하는” 중립국안을 주장한 이현이 있었으나, 중론은 일본과의 연합을 선택했습니다. 1893년 1월 21일 일본국 공사 오오토리 게이스케는 경복궁에 입궐하여 조선국왕으로부터 일본과의 연합에 대한 의사를 확인했습니다. 그로부터 5일 뒤인 26일 일본국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가 한성에 도착해 정식으로 “대조선대일본군사원조조약”을 조인했습니다. 이는 조선과 일본 간의 한시적 공수동맹을 골자로 했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이 부산항과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조선군 역시 역량을 총동원해 일전을 준비했으며, 평양에 합동참모본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2월 17일, 압록강변의 청군이 국경무역소 10개소를 장악하고 그곳을 경비하는 조선군 진위대를 무참히 도륙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육군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는 제1군과 오야마 이와오가 지휘하는 제2군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조선군 참모들과 함께 평안도를 돌파해 오는 청군 병력 35,000명을 요격할 방도를 고심했고, ‘홈 그라운드의 이점’과 철저한 준비성을 무기로 일본군 장성들을 설득한 조선군이 일본 제1군 3사단(가쓰라 다로)과 함께 우익을 맡아 우회기동을 통한 포위섬멸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는 통렬한 성공으로, 청군의 선발대는 그대로 섬멸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의 포로 학대행위와 조선군의 (상대적으로 온건한) 대우가 외신에 알려지는 일이 있었고, 청군 탈영병들 중 일부가 조선에 정착하는 소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다시 압록강변에 다다른 육군이 해군의 지원을 받아 안정적으로 진격하라는 연합참모부의 지시로 대기하는 동안, 조일 연합함대는 청 북양함대를 격파할 방법을 고심했습니다. 일본 해군 총사령관 이토 스케유키는 북양함대의 주력인 전함 정원과 진원의 위력을 고평가하고 있었고, 따라서 어떻게든 유리한 환경에서 함대전을 벌일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결국 방법은 돌고 돌아 육군과의 협조였는데, 문제는 일본에서 육해군 간의 긴밀한 공조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육군의 독단적 진격을 유도해 여순항의 청 함대와 위해위의 함대를 각개격파한다는 방안이 채택되었고, 이는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최신우의 공작이 성공하며 조선-일본 육군은 해군의 지원 없이 압록강을 넘어 봉천과 요동 방면으로 진격했고, 이는 상당한 피해를 낳았지만 결국 성공했습니다. 이홍장이 양성한 북양군(또는 회군淮軍) 주력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여순이 일본 육군 제2군의 직접적 위협을 받자 여순항에 주둔한 북양 분함대는 위해위의 본대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기다리던 조일 연합함대는 위해위 앞바다에서 본대를 만나 각개격파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해전의 역사가 다시 쓰였습니다.
3월 11일, 동양 최강의 함대 북양함대는 야음을 틈타 미끼용으로 접근한 조선 해군 어뢰정의 기습 한 방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800톤도 되지 않는 어뢰정은 무려 7400톤급의 기함 정원을 격침시켰고, 지휘부가 그대로 소멸한 북양함대는 일방적인 포격을 맞으며 장렬히 산화했습니다. 이후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 육군 제2군이 승리하면서 여순의 분함대마저 철저히 파괴되는 결말을 맞았고, 이는 청의 육해군 주력이 모두 궤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었죠.
1893년 4월 28일, 청 조정은 정식으로 강화를 청했습니다. “조선에 감국(監國)을 보내 사대의 예를 다하게 하고 일본을 정벌해 무릎꿇리자”던 청류파들과 그들이 후원하던 변법유신파들은 새로이 서태후의 친위군으로 떠오른 상군(湘軍)에 의해 숙청당했고, 이는 양무운동의 동력이 상실되어가는 상황에서 청국의 개혁을 위한 마지막 희망을 앗아가는 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청류파와 급진개혁론자들이 숙청되자 광서제는 아이신기오로 이신(공친왕 혁흔)을 총리대신으로, 이홍장을 각국통상교섭흠차대신(외무대신)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렇게 이홍장은 패전처리투수가 되어 일본과의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되었죠.
불과 세 달만에 결정적 승리를 거머쥔 일본 제국은 청이 항복의사를 전달한 뒤에도 근위사단들을 보내 타이완을 점령하고 회군 잔여병력들을 토벌하는 등 비우호적 행위를 일삼았습니다. 또한 일본은 이홍장에게 1) 천진, 대고, 산해관의 통제권 이양, 2) 관외 청군의 완전한 무장해제, 3) 상기 3개소의 무기 및 보급물자 관리권 이양, 4) 타이완 민주국 승인의 4개 조항이 수리된 후에야 종전협상에 나가겠다는 강짜를 부렸습니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강경파들을 달래고 달랜 끝에 가고시마에서 평화협상을 협상할 수 있었고, 전쟁은 그제서야 끝났습니다.
제1조.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무릇 조선의 독립 자주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예를 들면 조선이 청에 납부하는 공헌, 전례 등은 이 이후에 모두 폐지하는 것으로 한다.
제2조. 청이 관리하고 있는 지방(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 제도 등)의 주권 및 해당 지방에 있는 모든 성루, 무기 공장 및 관청이 소유한 일체의 물건을 영원히 일본 제국에 양도한다.
제3조. 청은 압록강변 무역소의 불법 공격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압록강 양안의 조선인 거주지역에 있는 모든 영토와 관리 권한을 영원히 조선국에 양도한다. 또한 의주, 단동 등 황해에 인접한 영역의 경우 청의 주권을 인정하되 북안 50리에서 조선국의 관리권한을 승인한다.
제4조. 아직 획정되지 않은 백두산 이동의 청-조선 간 국경을 토문강을 기준으로 확정한다.
제5조. 청은 군비 배상금으로 3천만 파운드를 일본 제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비준 교환 후 6개월 이내에 1천만 파운드, 12개월 이내에 또 1천만 파운드, 잔액은 6년 동안 부세하며, 미지불분에 대한 이율은 연 5%로 한다.
제6조. 청은 군비 배상금으로 1천 2백만 파운드를 조선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비준 교환 후 12개월 이내에 완납하여야 하며, 미지불분에 대한 이율은 연 7%로 한다. 또한 청은 배상함으로 순양함 ‘건청’, ‘숭제’, 코르벳함 (생략)을 즉시 조선국에게 양도한다.
제7조. 청·일, 청·조선 양국 간의 기존의 조약들은 이번 전쟁에 의해 자동적으로 폐기된다. 양국의 새로운 통상 조약은 청과 서양 제국 간의 조약을 견본으로 한다.
(이하 생략)
그렇게 조선은 완전한 독립국 지위를 인정받았고, 전비로 소모한 만큼을 제하고서도 기존 정부예산의 10배가 넘는 배상금을 손에 쥐었습니다. 또한 조선이 “별 볼 일 없는 땅”으로 여겨지던 간도 지역을 요구한 것은 꽤 좋은 선택으로 판명되었는데,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들이 일본의 요동 획득에 어깃장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압박으로 일본은 무력하게 요동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하는 수없이 다시 청국과 협상해 청도항에 대한 조차권을 받아냈고, 이미 비준된 조약을 다시 수정하는 행위는 한족 민중들에게 엄청난 굴욕으로 여겨졌습니다.
일본의 여론 역시 곧이어 매우 시끄러워졌습니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요동에서 쫓아낸 러시아가 곧바로 청 조정을 압박해 동청철도 및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여순항을 조차해 ‘포트 아르투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광폭 행보에 위기감을 느낀 영국은 조선과 일본을 끌어들여 극동 삼각동맹을 체결하는 안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조선 역시 외교전략을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유화파 베베르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고 극동총독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알렉세이 슈페이에르가 신임 공사로 부임하면서 그러한 고민은 더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894년 7월 20일 조선국왕 이준은 원구단에 제사를 올리고 조선이 황제국임을 선언했습니다.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개칭되었고, 이에 따라 이듬해 한청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한반도계 국가와 대륙계 국가가 동등한 위치에서 조약을 체결하는 역사적인 광경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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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지파일 앞을 가로막는 건 죄다 저격해버리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집니다… ㄷㄷ
@렌지파일 으악 공작 1등을 빼앗겼다...
@렌지파일 화술이...없어?
장악도... 없어??(..)
@통장 말로 안하겠다는 거죠(?)
@E.E.샤츠슈나이더 ㅗㅜ... 역시 말로 안하...다가 말하기 시작한 자의 동생(..)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ㅎㅎ!
언어)
한국어(4), ___(), ___() (…)
- 동아시아 계통
: 일본어, 중국 관화, 만주어, 몽골어, 광동어, 객가어, 민남어, 베트남어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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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힌디어, 벵갈어, 우르두어, 티베트어, 아랍어, 오스만조 표준 터키어 등등…
-> 1포인트 당 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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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헝가리어, 그리스어, 세르보크로아트어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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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신학언어 계통
: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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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샤츠슈나이더 아니 아람어 찍으면 거의 동아시아 최초 아닌가요 ㅋㅋㅋ
관화 3, 일본어 2, 독일어 3 이렇게 찍겠습니다.
@렌지파일
트레잇 부여)
[마르크스의 유령] 통찰 스킬에 +2, 의지 스킬에 +2.
@E.E.샤츠슈나이더 하나의 유령이 대한을 배회하고 있다...
@E.E.샤츠슈나이더 아참, 새벽에 쓰다보니 정신없어서 넘어간건데, 다음 이벤트에 이 캐릭터가 참가할 수 있나요? 참가할 수 있다면 다음 이벤트 날짜가 어떻게될까요? 스토리 후반부를 고쳐야 할 수도 있어서..
@렌지파일 다음 이벤트는 러일전쟁입니다. 날짜는 현실 시간으로 토요일 또는 월요일, 작중 시간으로는 1900년 하반기가 될 예정입니다.
신캐릭터 역시 참가 가능합니다.
@E.E.샤츠슈나이더 흠.. 그럼 아예 다다음 이벤트로 캐릭터를 넘기거나, 스토리 후반부(이유하가 출국한 뒤 정치권 데뷔)를 고치거나 해야겠는데..
추천은 무엇인가요 (?)
@E.E.샤츠슈나이더 크흡... 토요일날 참가가 어렵습니다... 아마 저만 그럴 가능성도 상당히 높아보이는 요일이기도 하네요. 토요일날 하시면 적절한 시점... 에 주안점만 올려두게 될 것 같습니다.
@렌지파일 ㅋㅋ... 제 추천은 후자입니다... 만 캐릭터는 너님 미쳤음...? 이라고 하겠네요 ㅋㅋㅋ 왜냐면 무서운건 나지만 뒤지는건 자기라(...)
@렌지파일 제9엽보병여단이 특작부대 비슷한 대우를 받는다는 설정도 꽤나 설득력 있으니, 그쪽 대표 오퍼레이터(...)로 회의 참가한다는 설정도 괜찮겠네요. ㅋㅋㅋ
동아전쟁 때 임관이면 벌써 장교만 7년차 이상이고, 창군 초기는 진급이 빠르니까 계급은 참령-부령쯤 될 것 같습니다.
@dear0904 사실 오늘 저녁일정 가기 전에 무리해서 작성해야 토요일 진행이 가능해서, 저도 확신은 없네요 ㅋㅋㅋ
오늘 내로 공지하겠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오호... 후자를 추천하신다 이말씀이시군요.. 고쳐보겠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수정했습니다. 이유하의 출국은 러일전쟁 종전후일테니, '은퇴'로만 바꿨습니다.
@렌지파일 그럼 아직 예편은 안 한 건가요?
@E.E.샤츠슈나이더 다음 이벤트가 전쟁이니.. 이벤트 끝나고 예편해야죠.
In a parallel world…
도강 김씨 병사공파 출신으로 1861년 태어난 김영천은 17세가 되는 1878년 식년시에 급제해 조선 조정에서 관직을 시작했습니다. 미관말직만 전전하던 그를 처음 발탁한 것은 중전 민씨의 사촌동생이자 당시 개화파의 거두였던 민영익이었습니다. 임오군란 당시 그는 중전 민씨의 밀지를 받아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결국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황제국의 군대‘는 양민을 무참히 학살하고 도성 여기저기서 각종 잔학행위를 저질렀죠. 흥선대원군이 천진으로 압송되던 날, 그는 자신이 어떤 짓에 가담했는 지를 여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민영익과 민씨 척족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던 영천은 ”조선 백성을 살리는 길은 곧 청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길로 그는 독립당에 몸을 담았고, 김옥균의 수하가 되었죠. 옥균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재주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상상하게 하는 이였죠. 그렇게 영천은 독립당을 따라 1884년의 정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독립당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영천은 거사 당일 옛 스승 민영익에게 불려가 야단을 맞다가 우정국을 습격한 아군의 칼에 맞는 바람에 오히려 무시무시한 연좌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정변 가담자들이 모두 숙청된 조정에서 영천은 일본 유학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일본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이길래 ‘그 김옥균’이 그리도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던 것인지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모습은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폐쇄적이고 폭력적이며 배타적인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재회했던 김옥균의 모습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죠. 기방에나 드나들며 예전의 총기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던 옥균의 모습을 보고 영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름 개화파 관료로서 오랜 기간 일했던 영천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중간관리자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혐오스러운 원세개의 얼굴을 계속 마주쳐야 한다는 것이 한스러웠으나, 성실하게 일해서 나라를 발전시켜야만 저 무도한 청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영천은 호조 정랑이 되었죠. 이제는 무슨 일을 하든 잘 해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동학농민운동이 터지며 영천의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본군과 청군은 조선 땅에서 조선 백성들을 죽이다가, 급기야는 서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명령을 받아 청나라의 편을 든 조선군과 일본 군사들이 장악한 조정의 명을 받은 조선군이 서로 총질을 벌이기도 했죠. 심지어 이듬해에는 일본 낭인들이 멋대로 궁궐에 들어와 중전을 살해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전하, 궁궐은 김홍집, 정병하, 유길준, 조희연같은 난신적자들에게 둘려싸여 있사옵니다! 어서 아라사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시어 당장의 화를 막으시고 저 역적들을 처단하소서!“
고종은 성실하고 충직한 영천을 꽤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그리고 영천에게 김홍집 일파는 청과 일본이라는 두 ’국적‘ 사이를 오가며 기회주의적 처신만을 일삼는 간자이자 희대의 역적이었죠. 영천은 처음에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려다 실패했지만, 두 번째 시도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러시아 공사관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임금이 파천해있는 동안 바깥에서는 박영효, 서재필같은 ‘역적’들이 들어와 독립협회인지 뭔지 하는 의심스러운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서재필은 필립인지 뭔지 하는 영어 이름을 짓고 와서는 제가 미국인이라며 고종에게 악수를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독립협회가 일본을 뒷배로 두고 고종을 협박해 수작질을 부리는 것을 두고볼 수 없었던 영천은 금상의 명을 받아 이용익과 함께 보부상들을 수배, 그들을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이제 금상을 위한 판은 모두 깔렸습니다. 일본이 러시아와 아귀다툼을 벌이는 이 때 조선이 뒤늦게라도 제도를 정비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며 민중을 구제한다면 그나마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도 믿었던 금상은 민비도, 원세개도, 일본군도 없는 이 기회를 허례허식이나 채우는 데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망해가는데 간도에 만칠천 명이나 되는 군대를 보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천은 눈 앞이 깜깜해졌죠.
러일전쟁이 벌어지고, 일본이 승리해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힘없이 외교권을 뺏기고 말았습니다. 두 아들과 막내딸만큼은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는 슬픔이 밀려들어왔습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영천은 일말의 미련 없이 내장원 별장직을 사임하고 무작정 가족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광산 노동자, 항구 노동자… 육체적으로 고된 일일 수록 좋았습니다. 그래야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벌하는 동시에 조선에 대한 감정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한성에 통감부가 들어서고 이제는 경무청까지 일본 헌병들이 접수했다는 소문이 들려오던 하루였습니다. 이제는 여순까지 흘러들어가 부두에서 일하고 있던 영천은 그만 실족했고,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한성에 있는 장남과 딸은 둘째치고, 집에 두고 온 둘째는 어쩌지..?“
추운 겨울 밤이었습니다.
???:
"안녕 얘야? 아버지는 어디 계시니?"
"너의 이름은 이제 앞으로 가네다 마사이치란다."
@E.E.샤츠슈나이더 ...눈물 없이는 못볼 평행세계 김영천 잔혹사 ㅠㅠ...
@통장 당직을 하다보니 일찍 일어나게 돼서
.. 뇌절 하나만 더하겠습니다(...)
한성에서 영천의 실종 소식을 들은 영천의 처 강화 노씨 희와 장남 경록은 당장 셋째 순을 데리고 여순으로 향했으나, 가서 마주한 것은 묘도 없던 그의 난 자리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둘째 경홍이었습니다. 이웃이 딴에는 위로한다고 그때 사람들이 입양이라도 해야된다 얘기가 돌았다, 애가 똘망똘망했으니 어디간들 굶어죽겠느냐란 소리나 일삼자 한바탕 난리를 피운 일가족은, 더이상 조선으로 돌아갈 이유를 못찾고 여순에 안착, 경홍의 행방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습니다. 경홍의 행방은 여전히 불명이었으며, 일제의 영향력이 여순으로 올라오고, 예전 조선에 충성을 바친 자들에게 보복한다는 소문이 돌자, 남은 가족들은 결심하고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만주의 한기가 너무 추워서일까, 연이은 상심에 몸이 약해져서일까. 가족을 보듬던 희는 만주로 향하던 도중 향토병을 얻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고 말았고, 이제 만주에 남은 건 경록과 순 뿐이었습니다.
@통장 게릴라 생활은 고되었고, 목적을 알 수 없는 전투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있을 곳과, 살아남을 이유는 주었습니다. 일제에 대한 복수, 그리고 조선의 독립이라는. 그리고 순의 행복이라는.
마치 그가 아버지 영천과 어머니 순이 된 것처럼, 순이 게릴라의 건실한 청년과 결혼할 때 경록은 울면서 기뻐했습니다. 혼란을 겪으며 혼기를 놓친 그로선 마치 딸이 결혼하는듯 했죠.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경록은, 언제나 시대의 꼬리로서 험난한 세상을 맞았던 가족들과 달리, 어딜 가든 우두머리가 되어 이 난국을 헤쳐나가길 바라며, 철수를 권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왔습니다.
결국 일제는 만주 게릴라의 본거지를 찾아낸거죠.
진압군이 본거지 앞에 왔음을 알게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였습니다. 그는 순과 아이를 그의 매형과 같이 호위했습니다. 마지막 순간, 그가 본 것은 비밀 통로를 통해 도망치는 동생과 외조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잘 도망갔을 겁니다.
@통장 이렇게 서로 다른 세 연대기가 이어지게 되었다(?) 근데 이거보니까 저도 시즌 2 캐릭터를 이현 사위+영강 아빠... 로 만들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ㅋㅋㅋ...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라는 생각도 드네요 ㅋㅋ
@dear0904 ???: 그래 그것도 나다
분명 처음엔 그냥 만든 캐였는데, 계속 진행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일본 만화에서 죄다 혈통이 이어진 이유구만(?)
@통장 ㅋㅋ 그렇죠. 다 처음엔 그냥 만들었는데 하다보니까(...)
@통장 와 쓸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다 쓰고 나이 계산하니 장난 아니네요
김영천 1861년생
김경록 약 1890년생(영천 30세)
김경홍 1898년생(영천 38세)
김순 약 1909년생(영천 49세)
이철수 1931년생(경록 42세)
이게... 늦둥이?
@통장 58-88-20으로 생각하던거랑 비교하면 조금씩 늦긴 하네요 ㅋㅋ...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니까... 다만 남편 나이가 더 많은건 이때도 그랬을테니, 어느정도 익스큐즈 되는거로(?)
이거 보니까 다른 세계의 신우도 써보고 싶은 생각이 ㅎㅎ... 정확히는 OTL or 경쇼년이겠지만?
@통장 위의 대화를 보니 한국의 미래가 보이네요 ㅋㅋ... "위대한 한국비" "내 국가는 저 제국처럼 되어야 해. 끝없이 확장 해야만 하지."
@dear0904 그러고보니 위대한 개츠비 읽었다고 아직 영화를 안봤네요(..)
한국.. 멋진 시나리오 기대합니다(?)
@dear0904 과연 폭주를 막을 수 있을지..?
@렌지파일 ... 개츠비 엔딩이...?
@dear0904 제가 총을 쏘는 쪽이 되는걸까요(??)
@렌지파일 맞는쪽은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
3화... 하-천 듀오 은퇴무대 올라왔습니다..
복귀각이 서지 않는 듀오에게 바치는 헌정사(?) 가 올라왔군요 ㅋㅋ... 이미 봤지만(?) 알람 감사합니다.
@dear0904 이런 감사... 저도 안하는데 감사합니다...
쓰고보니 천-하 듀오가 좀더 가슴이 웅장한 기분이네요. 하-천 듀오는 뭔가 더 유하지만 하찮은(..) 느낌이고
@통장 사실 이유하가 개그를 좀 하고 다녔다면 분위기를 얼리는 영-하 콤비도 가능했을지도(?)
@dear0904 한번 하긴 했죠 밖이 위험하다로(...)
@dear0904 ???: 그리고 여러분 중 대다수가 제 유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도요.
@렌지파일 지나보니 둘 다 위험했던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