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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80
창세기 29:1-15
야곱의 우물
야곱이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난 것을 우리의 입장에서 옛날 물레방앗간에서 만나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 정도가 아니다. 우물에 관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주시는 언약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이 하란으로 가게 된 것은 단순히 에서가 죽이려는 것을 피한 도망이 아니라 신부를 얻어 결혼을 하는 것으로 아들 낳는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신부로 삼으시는 구원과 생명에 대한 말씀이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1절). “야곱이 길을 떠나”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야곱이 발을 들어 올렸다’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로서 그 언약을 드러내는 발걸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언약을 드러내야 하는 곳은 “동방”이다. ‘케뎀’은 성경에서 성막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떠나 지성소의 반대편에서 대적자의 입장에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동방 사람의 땅”이란 ‘동방 아들들의 땅’이라는 말인데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4:16)에 거주한 가인의 후손, 아들들이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발걸음으로 이 땅에 찾아오셨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5 / 참고 사 52:7)
“2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2-3절). “본즉”이라는 말은 ‘라아’로 ‘바라보다, 숙고하다, 고려하다, 주시하다’라는 뜻인데 여기에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힌네’라는 단어가 있는데 ‘보라, 자’라는 뜻의 감탄사로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즉 ‘본즉 보라! 들의 우물, 보라! 거기에 양과 염소 세 무리가 누워 있는 것을’이라는 말로 동방의 상태에 집중하라고 강조한 표현이다.
“누워 있으니”라는 말의 ‘라바츠’는 자기 의지로 물을 먹을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우물이 말씀을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자기 의지로는 도무지 진리를 접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세 떼”란 완전수 ‘3’을 강조하여 완전히 죽어 있어 무능한 죄인의 상태를 나타낸다.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라고 하였는데 진리의 물을 양에게 먹일 수 있는 목자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물을 덮고 있는 돌은 율법을 상징한다. 진리의 물을 먹고자 하나 율법이 장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율법을 완성하시는 목자가 오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야곱이 그곳에 갔다는 것은 언약의 아들이 목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진짜 언약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로서 하실 일을 보여주는 차원이다. 죄의 권세에 매여 죽어 있어 완전히 무능한 죄인들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은혜로 윗물인 진리를 주시는 것이 구원이고 생명이다.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라는 말씀은 문화적 배경으로 말하자면 우물을 보호하거나 위생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약적으로는 인간이 필요하다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진리의 영이 열어 주셔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아귀”라는 말의 ‘페’는 ‘입’이라는 뜻이다. 진리의 말씀을 나타내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을 닫으시면 죄인들이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4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4-6절). 야곱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형제여”(히, ‘아흐’)라고 하였다.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라는 말씀은 “하란”이라는 진리가 마른 땅에 자기 백성이 있음을 알려줌으로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야곱이 묻는 것은 “평안”(히, ‘샬롬’)인데 동방의 아들들은 평안을 알지 못하고 이 땅의 평안으로 답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형제로 찾아오셔서 죽음을 이루심으로 주어지는 평안만이 진짜 평안이다(12절과 15절에서 우리 성경에 “생질”이라고 번역하였으나 ‘아흐’로 ‘형제’이다).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4-16)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라는 표현에 대하여 어떤 주석서에는 라반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가 양을 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라반에게 아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30:35). 고대 근동에서 여자가 양을 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갔을 때 때마침 라헬이 양을 몰고 오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도하셔서 라헬을 만나게 하심으로 언약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7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7-8절)라고 말씀한다. 야곱은 양들에게 물을 먹이라고 제안을 하지만 그들은 거부한다. 저들의 세계에서 정해진 법칙대로 목자들이 물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들이 가진 율법이라는 것을 법칙으로 삼고 그 율법대로 살려는 것 때문에 진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9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10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9-10절). 야곱과 라헬의 우물에서 만남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정된 하나님의 언약 성취이다. 성경은 우물에서 일어난 일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신다.
15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16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창 24:15-16)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출 2:15-17)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3-4)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헬라어 ‘데’는 ‘반드시 ~하여야 한다’라는 뜻으로 ‘사마리아를 반드시 통과하여야 한다’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0-14)
그리고 여자가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갑자기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 4:16)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답하니 예수님께서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7-18)라고 하셨다. “남편 다섯”은 율법을 상징한다. 그 율법에 매여 율법을 다 지키려고 하였지만 여섯째 남편으로 비진리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의 상태임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일곱째 남편으로 “수가라는 동네”(요 4:5)의 여자를 신부로 부르기 위해 가신 것이다. “수가”는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다섯 남편을 섬기듯 율법을 섬기며 여섯째 남편, 즉 비진리에 사로잡혀 있던 여자에게 일곱째 마지막 남편으로 찾아가셔서 언약을 완성하신다. “내가 그라”(요 4:26)라는 표현은 ‘에고 에이미’로서 구약에서 언약의 말씀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을 신부로 삼으시는 언약의 성취를 이루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야곱의 우물은 바로 언약의 실체이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이다.
“11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11절)라고 하였는데 만남의 과정에서 일의 순서가 바뀌었다. 먼저 입맞추는 인사가 있고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라헬이 목자로서 양을 치고 있었지만 “라헬”이라는 이름 자체도 ‘암양’이라는 뜻으로 목자를 만나야 할 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라헬도 언약 안에서 야곱이 목자로서 주는 물을 먼저 먹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언약의 아들 야곱이 라헬을 만나 양 떼에게 우물물을 먹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잃은 양을 찾아오셔서 진리의 말씀을 먹이시는 언약을 설명한 것이다.
“12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13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15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12-15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라는 하였을 때 “모든 일”은 ‘다바르’로 썼고 “말하매”는 ‘싸파르’로 ‘기록하다, 열거하다, 선언하다, 보여주다, 서기관’이라는 뜻으로 야곱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을 기록하듯이 전하였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라반은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라고 하여 혈통적인 관계임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야곱은 언약 안에서 “내 고향, 내 족속, 아버지의 집”(24:4, 38, 40)으로 삼기 위해 라반의 집으로 간 것이다. 그 대상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신부로 삼기 위한 결혼이 목적이다.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한 달”이란 말의 ‘호데쉬’(초승달, 월, 월삭)는 ‘새 것이 되다, 새롭게 하다, 다시 세우다’라는 뜻을 지닌 ‘하데쉬’에서 유래한 단어로 야곱이 신부는 얻는 일을 시작하는 새로운 달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출 12:2)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첫 달이 되었다는 것은 구원이 세상에는 전혀 없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새로운 생명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죽고 살려주심의 은혜를 입은 새 생명이다(20240623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