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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 이정선생 행장(龜巖 李楨先生 行狀)
선생의 휘(諱 :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높여서 부르는 말)는 정(楨), 자(字)는 강이(剛而)이며, 성(姓)은 이(李)씨, 호(號)는 구암(龜巖)으로 동성(東城 : 경남 사천의 옛날 지명) 출신이다. 국자감 진사를 지내셨던 휘(諱) 세방(世芳)의 후손이다. 5대조인 휘(諱) 자(稵)는 일찍이 사마(司馬 :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하나. 생원과 진사를 뽑는 소과를 이르는 말)에 올랐다가 담양교도(潭陽敎導)가 되었는데 향년 90세 때 은대(銀帶 : 종6품에서 정3품까지의 문무관이 두르던 은으로 새긴 장식을 가장자리에 붙인 띠)를 하사받았다. 할머니 정(鄭)씨 역시 향년 90세여서 문경공(文景公) 강맹경(姜孟卿 :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조때 영의정을 지냈다)이 장수를 축하하는 수서시(壽瑞詩)를 지어 찬미하니 일시에 선비들이 다투어 시를 지어 올렸다. 후에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선생이 서문(序文)을 쓰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말미에 발문(跋文)을 써서 별도의 책으로 갖추어졌다.
고조부인 휘(諱) 이륜(彛倫)은 진사(進士)로서 효로써 부모를 섬기니 임금께서 특명으로 벼슬을 내려주었다. 할머니 소(蘇)씨는 본관이 진주이다. 증조부인 휘(諱) 맹주(孟柱)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通禮院) 좌통례(左通禮)로 증직되었는데 역시 효행이 두터웠으니 수서시(壽瑞詩)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할머니 숙인(淑人) 정(鄭)씨는 본관이 진주이다. 조부인 휘(諱) 이번(以蕃)은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증직되었다. 할머니 숙부인(淑夫人) 조(曹)씨는 본관이 창녕이다. 부친인 휘(諱) 담(湛)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로 증직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정(鄭)씨로 본관이 진주이다. 모두 구암선생 때문에 존귀하게 되었다. 고조부이신 진사공(進士公) 위로 12대까지는 사마(司馬)를 지냈고 증조부 이하 3대까지는 비록 과거(科擧)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역시 모두 문장과 학문으로 향리에 명성이 높아 이와 같이 임금의 은혜를 입게 되었다. 이 어찌 거듭 생기는 경사(慶事)의 징표가 아니겠는가?
선생은 정덕(正德) 7년 임신년(壬申年 : 1512년) 12월 계해(癸亥)일(23일)에 태어나셨다. 채 7, 8세가 되기 전에 능히 책을 읽고 문장을 지었으며 12세 때 경상도에서 실시한 여름과거(夏課)에 장원급제함으로써 시험관을 탄복시켰다. 17세 때 성균관으로 유학하여 학문과 덕망이 날로 높아졌다. 이 때 규암(硅巖) 송인수(宋麟壽) 선생이 사천에 귀양 와 있었는데, 선생이 돌아와 그분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로부터 자기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익혀 가정(嘉靖) 15년 병신년(丙申年 : 1536년) 봄에 시행한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선무랑(宣務郞 : 조선시대 종6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을 제수 받고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이 되었으나 얼마 후 사정 때문에 그만두었다. 7월에 군기시(軍器寺) 주부(主簿)를 제수 받았으며 9월에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제수 받고 가을에 실시한 과거의 감시관(監試官)으로 차출되니 이때가 선생의 25세 때였다.
정유년(丁酉年 : 1537년) 4월 선교랑(宣敎郞 : 조선시대 종6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 벼슬이 더해져 명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단인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갔다. 9월에 승훈랑(承訓郞 : 정6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이 더해지고 12월에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어떤 일 때문에 그만두었다. 무술년(戊戌年 : 1538년) 10월에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제수되었으며, 기해년(己亥年 : 1539년) 4월에 승의랑(承議郞 : 정6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이 더해지고 한성부(漢城府) 판관(判官)에 제수되었다. 이 때 한 관원의 어린 아들이 아비가 죽고 그 집을 권세가에게 빼앗기자 한성부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있었다. 선생이 그것을 사실대로 밝히려 하였으나 당상(堂上)의 관원이 권세에 눌려 왜곡되게 상대방을 감싸주었다. 선생이 이에 맞섰으나 어쩔 수 없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말았다. 그 후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이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이 되어 선생의 뜻과 같이 결정하자 모든 사람들이 이를 기뻐하였다.
6월에 호조정랑(戶曹正郞)에 제수되고, 12월에 봉훈랑(奉訓郞 :조선시대 종5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이 더해졌다. 경자년(更子年 : 1540년) 2월 봉직랑(奉直郞 : 조선시대 종5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이 더해지고, 4월에 일 때문에 서반(西班)으로 보내져 부사직(副司直 : 조선 시대 오위의 종5품의 무관 벼슬)을 제수 받았다가, 6월에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제수되었다. 신축년(辛丑年 : 1541년) 정월(正月)에 영천군수(榮川郡守 : 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榮州市))에 제수되었는데, 정무(政務)는 공평했고 송사(訟事)는 순리에 따랐으니 관리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평안했다. 6월에 통선랑(通善郞 : 조선시대 정5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이 더해지고, 계묘년(癸卯年 : 1543년) 6월에 통덕랑(通德郞 : 조선시대 정5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이 더해졌으며, 12월에는 조봉대부(朝奉大夫 : 조선시대 종4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에다 조산대부(朝散大夫 : 조선시대 종4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가 더해졌다.
갑진년(甲辰年 : 1544년) 중종(中宗)임금이 승하하고 을사년(乙巳年 : 1545년) 인종(仁宗)임금이 이어서 돌아가시자 선생께서는 두 대왕(大王)을 위하여 3년상을 치렀다. 그해 5월 봉렬대부(奉列大夫 : 조선시대 정4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가 더해지고 8월에 봉정대부(奉正大夫 : 조선시대 정4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가 더해졌다. 병오년(丙午年 : 1546년) 2월 중훈대부(中訓大夫 : 조선시대 종3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가 더해지고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 3월 중직대부(中直大夫 : 조선시대 종3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로 고속승진 하셨는데, 영천군수(榮川郡守)로 있을 때의 치적이 임금에게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5월에 통훈대부(通訓大夫 : 조선시대 정3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가 더해지고, 9월에는 숙천도호부사(肅川都護府使)를 제수받았으나 연로하신 부모님 때문에 가까운 고을을 원하여 결국 임지가 경북 선산(善山)으로 바뀌었다.
선생께서는 이 고을이 다스리기 어렵다는 소문을 들었으나 정사(政事)를 오히려 엄정하고 명백하게 하니 간사한 무리들이 두려워하며 감히 방자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선산부(善山府) 내에 고려시대 주서(注書) 길재(吉再)가 살았던 터가 있었다. 선생은 부임 초에 바로 사당에 나아가 정성껏 제사지냈다. 사당의 모습이 법도에 맞지 않음을 보시고 장차 그것을 새롭게 하고자 마음먹었으나 큰일을 얼마 하기도 전에 사직하게 되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한 백성이 그 누이를 무고하여 옥에 갇혀 죽게 된 일이 있었다. 선생께서 그 억울함을 살펴 사정이 분명하게 밝혀졌는데, 방백(方伯 : 관찰사)이 소문만 듣고 잘못 판단하여 그를 반드시 죽이고자 하여 오히려 선생이 송사를 늦추는 일에 대해 화를 내면서 여러 차례 형리로 하여금 고문을 하게 했다. 선생의 뜻은 확고하여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바로 그날로 관인의 인끈을 풀어놓고 돌아와 버렸다. 학식 있는 사람들은 청렴결백했던 송나라의 유학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수판(手板 : 홀(笏). 벼슬아치가 조복(朝服)을 입고 임금을 뵐 때 오른손에 쥐던 패)을 버리고 떠난 일과 같다고 말했다(주돈이가 남안(南安)의 사리(司理)로 뽑혔을 때 어떤 죄인이 법으로 부당하게 죽게 된 일이 있었는데, 전운사(轉運使) 왕규(王逵)라는 사람이 강력하게 그를 치죄하고자 하였다. 주돈이가 왕규와 의논을 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자 수판(手板)을 버리고 사직한 뒤 떠나며 “이와 같이 하는데 어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남에게 아첨하는 짓을 나는 못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규는 깨닫는 바가 있어 죄수를 풀어주었다 한다). 방백이 제 마음대로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고 임지를 떠났다고 하면서 상소로써 벼슬에 다시 임용하지 말 것을 청했으니 바로 정미년(丁未年 : 1547년) 9월의 일이었다.
경술년(庚戌年 : 1550년) 3월 12일 부친상을 당하여 죽으로 연명하며 슬픔으로 야위어 거의 목숨이 끊어질 정도였다. 무덤 근처에 여묘(廬墓)을 짓고 사는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다. 임자년(壬子年 : 1552년)에 3년상을 마치자 6월에 공주목사(公州牧使)를 제수 받았으나 병 때문에 부임할 수 없었다. 8월에 전적(典籍 : 조선시대 성균관의 정6품 관직)을 제수 받고 9월에는 직강(直講 : 성균관에 소속된 정5품 벼슬)으로 승진했다가 또다시 사성(司成 : 성균관에서 유학을 가르치던 종3품 관직)으로 승진했다. 이때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대사성(大司成)으로 계셨는데, 선생이 영천군수로 재직할 당시 일찍이 퇴계선생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결의를 맺은 바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서로 함께 있으면서 더불어 강론하고 경학의 뜻을 밝히며 여러 유생들의 능력을 계발(啓發)시키고, 또 백성들을 깨우치는 글을 높이 내걸었으며, 묻고 배우기를 숭상하도록 힘쓰고 염치(廉恥)의 의미를 깨닫도록 애썼다.
10월에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제수 받았는데, 이듬해 방백(方伯)으로부터 정사(政事)에 최고라는 소문이 있어 명종(明宗)임금께서 임금이 입는 한 벌의 겉옷과 속옷을 하사하여 그 일에 대하여 포상하였다. 이 때 사천현령(泗川縣令) 이광진(李光軫)이 선생의 효행이 탁월하다는 소문을 들었고, 갑인년(甲寅年 : 1554년) 9월에 이를 칭찬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 조선시대 정3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가 더해졌다.
을묘년(乙卯年 : 1555년) 여름 왜구가 호남지방을 노략질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태수를 죽이는 등 그 세력이 제 마음대로 날뛰었다. 방백(方伯)은 선생을 도장수(都將帥)로 삼아 13고을의 병사로써 가서 이를 구원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군사를 정비하여 여정에 올랐는데 규율이 엄정 했으며 대오가 매우 질서정연하여 그러함을 본 왜구는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였다. 중도에 왜구가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돌아왔다. 이러한 일로 사람들은 처음으로 선생이 장수로서의 재능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병진년(丙辰年 : 1556년) 정월(正月)에 천재(天災)로 수확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애모의 정을 표시했다.
정사년(丁巳年 : 1557년) 8월 부호군(副護軍 : 조선시대 오위에 둔 종4품 무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모친의 봉양을 위해 봉록을 사양했다. 3년 동안 집에 있다가 기미년(己未年 : 1559년) 6월에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제수 받았다가 곧바로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했다. 8월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체임(遞任 : 임기만료나 기타 다른 사정에 의하여 벼슬이 갈려 다른 벼슬을 맡음)되었다가 12월에 다시 좌부승지(左副承旨)로 돌아왔다. 한 번은 당직을 서는 한밤중에 임금이 사온서(司醞署 : 조선시대 궁중에 술과 감주 등을 마련하여 바치던 일을 담당하던 관서)에서 제조한 술을 내리시고 한 쌍의 표범가죽 요를 하사하면서 “추운 밤에 모피침구를 하사한 까닭은 마땅히 신하에게 충효를 장려하기 위함”이라는 글을 짓도록 명을 받고 두 가지 제목으로 율시(律詩)를 지어 바쳤다.
경신년(庚申年 : 1560년) 정월(正月)에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여 고향의 모친에게 문안을 갔는데, 이때 임금께서 전하여 말하기를 “승지(承旨) 아무개가 돌아가 노모를 뵌다고 하니 음식과 물품을 보내주어라”고 하였으며, 경상감사(慶尙監司)에게 글을 내려 “이 사람이 충효의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그를 위해 이와 같이 한다”고 하셨다. 2월에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다가, 4월에 대호군(大護軍 : 조선 시대의 5위에 속하는 종3품의 무관직)으로 체임(遞任)되었다가, 5월에는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제수 받았다. 얼마 후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제수 받았으나 간절하게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은 본래 변변치 못한 가문 출신으로 천성도 둔한데다가 시골변방에서 자라 본바탕이 학식이 없음에도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낭관(郎官)의 반열에 설 수 있었으며 지방수령으로 나아가서는 세 고을을 연임하였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때로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때로는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어, 집에 있은 지 전후 약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조정의 체면을 세우는 일과 여러 사람에 대한 평판과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는 아둔하여 들어 아는 바가 없고, 게다가 여러 가지 병으로 인해 눈은 흐릿하고 귀는 잘 들리지도 않으며 정신은 깜빡거려 자꾸만 앞뒤의 일을 잊어버리니 태평성세를 위하는 일에는 무용지물임을 제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전하의 성은(聖恩) 아래 연로하신 어머니와 더불어 지내던 중 작년 가을 생각지도 못한 가운데 갑자기 전하의 은혜로운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외람되게도 중책을 맡아달라는 것으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명령을 내렸습니다만,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니 부끄러움만 더해질 뿐입니다. 더욱이 대사간(大司諫)이라는 중책은 재능도 평범하고 기개와 절조도 부족하며 학식도 부족한 자로서는 하루라도 감히 맡아서는 안 되는 지위입니다. 어찌 감히 부끄럽게도 그 중요한 자리를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글로써 올립니다.
이에 대한 임금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만약 본 직무에 적합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허락했겠는가? 비록 병이 깊다고는 하지만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위에 있는 나는 어리석은 군주이니 아래에 어찌 정직한 신하가 있겠는가? 대간(臺諫)을 맡지 않는다면 누구를 이 자리에 임명하겠는가? 마땅히 직무에 힘쓰고 충언을 매일 행하여 위로는 군주의 잘못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조정을 맑게 해 나가야 할 뿐이다. 사양하지 말라. 아무리 사양해도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대사간의 직에 나아갔다.
경연(經筵 :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론하는 일)의 아침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군주의 근본은 치도(治道 : 다스림의 도리)로써 나타나는데, 그것은 마음을 바로 세우고 충간(忠諫)을 따르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군주가 마음을 바로 세우면 조정이 바로 서게 되고, 조정이 바로 서게 되면 백관이 바로 서게 되며, 백관이 바로 서게 되면 만백성이 바로 서게 됩니다. 이러한 까닭에 옛날 선현(先賢)들은 “한 사람의 군주가 바로 서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했습니다. 요(堯), 순(舜), 우(禹)가 다스리던 하(夏), 은(殷), 주(周) 3대에는 성군(聖君)이 위에 있었으니 좌우의 백관들이 모두 성인과 현인에 버금가는 신하였으며, 임금과 신하는 서로 깨우쳐 주면서 반드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丹朱 : 요(堯) 임금의 아들. 단주가 충신(忠信)한 말을 좋아하지 않고 다투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전위하지 않았다고 함)처럼 오만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은나라 주왕(紂王 : 중국 은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폭군의 대명사)처럼 술에 탐닉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단주(丹朱)와 주왕(紂王)을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 출입(出入)에 정해진 바가 없어서 성인(聖人)인 순(舜)임금과 미치광이 도척(盜跖 :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대도적)의 차이는 실로 순식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이란 지위는 숭고한 것이기에 옛 성인(聖人)의 마음을 가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순간이나마 충간하고 경계하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가르침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땅히 재앙과 변고가 생기지 않아야 백성들이 평안한 법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재앙과 시대의 변고가 연이어 나타난다면 백성들의 고통은 마치 진흙탕에 빠지거나 숯불에 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른다면 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바깥에서 그러함을 방관(傍觀)하게 된다면 백성의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비게 될 것이고, 군졸들은 과반수가 도망가 흩어지게 될 것이며 단지 거짓 이름이 장부에 기록될 뿐이니 만약 사변이라도 생길 때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실로 통곡할 일입니다.
마땅히 언로(言路)를 활짝 여시고 원인을 찾아 핵심을 다스려 쌓인 폐단을 물리친 이후에야 비로소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또한 비록 한 사람의 말이라도 때로는 매우 강직할 때도 있고 때로는 온순하고 인정이 두터울 때도 있는데, 오직 온순하고 인정이 두터운 말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온순하고 인정어린 말에만 치우치게 되면 강직한 말은 없어지게 되어 날로 쇠락해지게 될 것인즉 위급함이 눈앞에 닥쳐도 끝내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마음으로 충간(忠諫)의 도리에 따르려는 생각을 더욱 더하시기 바랍니다.
또 임금에게 차자(箚子 : 조선 시대 관리가 국왕에게 올리는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근래에 천재지변이 날로 더해 갑니다. 금년에는 몇 달에 걸쳐 가뭄이 극심하여 붉게 타들어가는 땅이 천리에 이릅니다. 최근에 비가 내리기는 했습니다만, 가을의 수확을 바라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로부터 군주는 능히 재앙을 상서로운 조짐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니 반드시 하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극한 정성을 다해 허물을 살피고 직언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처음과 끝이 일관성이 있으며 안과 밖이 하나가 된 연후라야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일을 처리하거나 의견을 들을 때 조금이라도 성의를 다하지 않고 충언이나 직언 듣기를 꺼려하며 겉으로는 좋은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거부하시는 것은 하늘을 감동시켜 재앙을 물리치는데 부족할 것입니다.
며칠 전 어떤 재상이 경연의 자리에서 우연히 시세의 폐단에 대해 발언했습니다. 그 말은 생선가시처럼 그렇게 심하지도 않았습니다만, 성상(聖上)께서는 순후(淳厚 : 양순(良順)하고 인정(人情)이 두터움)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강직함은 순후함과 처음부터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의 순함은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에게 있어 다른 삿된 마음이 섞일 수 없고, 그 마음의 두터움은 임금을 애모하는 사람에게 있어 간절함만 있을 뿐입니다. 자신에게 닥칠 화를 걱정하지 않으면서 힘써 직언을 다해야 마침내 기강이 바로잡히고 상하가 서로 안정될 것이니 순후한 기풍은 강직함 속에서 저절로 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오직 순후함만 숭상한다면 그러한 폐단은 우물쭈물하고 구차한 곳으로 흘러 어느새 나태함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설령 절박한 화가 닥칠지라도 아침저녁으로 엎드려만 있으면 군주는 위로 외로이 있으면서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위에서 좋아하고 숭상하면 세상의 풍속도 그렇게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지금 이후로는 정성을 다하시어 간언을 따르시고 힘써 언로를 개방하시어 오직 강직하고 정직한 말이 아닐 경우에만 책망하신다면 장차 거리낌 없는 바른 말만 듣게 될 것입니다. 군신간에 서로 잘 이어나가면서 듣게 되면 시정에는 잘못이 없게 될 것이며 눈과 귀가 막히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군신 상하간에 이끌어 주어 서로의 뜻이 합치되면 서로가 단절되어 통하지 않는 근심이 없어지게 될 것이고, 하늘이 응답하는 열매와 재앙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그러한 가운데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시옵소서.
또 임금에게 차자(箚子)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임금이 치도(治道)로 삼는 것은 반드시 학문에 근본을 두어야 할 것이어서, 그런 연후에라야 그 다스림이 진실로 훌륭하고 삿됨이 없을 것이며, 학문의 요체는 반드시 성(誠 : 유교에서 하늘의 도(天道)라고 일컬어지는 개념. 여기서 말하는 하늘(天)은 곧 자연이요 우주이니 일체 인간의 작위가 가미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한 하늘의 도는 만물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덕성을 가졌다. 하늘(자연)의 도(道)는 의지(意志)와는 무관하게 자연히 그리되는 것이 마치 물이 밤낮을 쉬지 않고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誠)은 억지로 힘쓰지 않아도 모든 이치에 합치되며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되어 자연스레 도리와 일치하는 것이니 성인(聖人)이 그것이다)과 경(敬 : 성(誠)을 이루는 방법 또는 수단으로서 실천윤리. 성(誠)이 천도(天道)를 의미한다면 경(敬)은 인도(人道)이며 성(誠)이 선천적이고 절대적이라면 경(敬)은 후천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에 속한다)을 주체로 삼아야 할 것이어서, 그런 연후에라야 그 학문이 정일(精一 : 정일집중(精一執中)의 줄임말. 정밀하게 살펴 사욕이 없게 하고 한결같이 의리(義理)의 정도(正道)를 지켜야 참으로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다는 뜻으로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편에 나오는 구절)하고 거짓이 없게 될 것입니다. 고대의 제왕(帝王) 중에 누구라서 시종일관 경전에 대한 학문을 하지 않고 훌륭한 정치의 효과를 거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엎드려 살피건대 전하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는 정성은 천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출입(出入)은 정해진 바가 없는 것이어서 성인(聖人)인 순(舜)임금과 미치광이 도척(盜跖)의 구분은 털처럼 미세한 짧은 순간에 판가름됩니다. 진실로 학문을 근본으로 삼지 않고 성(誠)과 경(敬)을 위주로 하지 않으면서 공(功)을 이룰 여지만 생각하신다면, 비록 인의(仁義)를 외부로 베풀더라도 제왕(帝王)의 다스림은 끝내 회복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대학(大學)>은 성현의 도(道)를 전하는 책으로, 마음을 바로잡아 자신을 수양하며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위하여 송(宋)나라 유학자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지었고, 명(明)나라 구준(丘濬)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지어 이를 다시 보충하고 있는데,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중 <심기미(審幾微)>편은 으뜸 중의 으뜸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매일 경연(經筵) 중에 틈을 내시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세 책을 열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항상 열심히 살피시면서 조금의 소홀함도 없다면 사람의 마음과 하늘의 도리에 대한 존망의 기미와 국가의 치란흥폐(治亂興廢)에 대한 도리를 온 마음으로 깨닫게 되어 의심이 없어지게 될 것이고, 만사(萬事)에 불합리와 마땅함을 밝히어 시행할 수 있을 것이며, 성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날로 길러지게 될 것이고, 다스림의 도리는 저절로 순정(純正)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무릇 임금은 숭고한 지위에 있어 사대부의 접견에는 정해진 때가 있으니 아침저녁으로 좌우에 있는 자들은 환관과 궁녀들뿐입니다. 업무를 처리하는 정무시간 외의 여가시간이 되면 태만한 생각이 마음속에 싹트게 되니 조금이라도 그러한 기미가 나타나면 여러 무리들이 그 틈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 방탕함에 빠지지 않겠으며 그칠 곳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맹자(孟子)의 하루 일하고 열흘 노는 게으름인 일폭십한(一曝十寒 : 하루 햇볕을 쬐고 열흘 춥다는 뜻으로 일을 꾸준히 하지 못하고 중단되거나 자주 끊김을 비유하는 말. 일을 하다 말다 하여 성과가 없을 때 쓰는 말)으로, 제(齊)나라 왕도 두렵게 했던 바입니다. 그리고 정자(程子 : 송나라의 유학자 정이, 정호 형제를 높여서 이르는 말)도 현사(賢士)와 대부(大夫)의 접견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대저 제왕(帝王)이 학문하는 바는 문사(文士)의 그것과는 달라 비록 학문에 종사한다고 말할지라도 혹 정력을 사장(詞章)이나 잡기(雜記)에 분산하게 되면 비단 다스림의 도리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은 뜻이 날로 황폐해지고 잡다해지게 되어, 그 폐단은 말로 다할 수 없게 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聖上)께서는 오직 다스림의 근본 원류에 대한 학문에만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참되고 망령되지 않음을 주로 삼는다면 어찌 사람의 기용과 정사를 돌봄에 잘못됨이 있겠습니까? 각각의 마땅함을 얻을 것이니 정성을 다해 오직 치우침이 없이 마땅하고 떳떳한 도리를 다하는 학문으로 변고의 시기에 세상을 화평하게 다스리는 정치를 오늘날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시옵소서.
선생은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로써 임금께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심기미(審幾微)>편을 한시도 잊지 않고 마음에 새겨 그 뜻을 지니도록 하였다. 다음날 임금께서 아래에 교지를 내려 홍문관에서 편찬한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바치도록 하였다.
7월에 병 때문에 3번이나 사직서를 제출하여 상호군(上護軍 : 조선시대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 정3품 무반직으로 고려 때의 상장군(上將軍)이 고려 후기에 개칭된 것이다)으로 체임되었다가 곧이어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 받았다. 8월이 되어 예조(禮曹)로 옮겼다가 얼마 후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제수 받았다. 경주는 신라의 옛 도읍으로 여러 왕들의 능묘가 무너지고 황폐해져 호미와 쟁기가 침범하고 용머리(螭頭)와 거북받침(龜趺)은 백성들이 섬돌이나 주춧돌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선생은 개탄하며 분묘의 둘레에 흙을 돋우고 지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한 태종무열왕과 각간 김유신의 묘에 나아가 ‘그 군신이 서로 힘을 모아 삼한을 통합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어육(魚肉)신세가 되는 것을 면하게 해주었다’는 내용의 제문을 쓰고 제사지냈다. 또 서형산(西兄山) 아래에 서당을 건립하여 백성들이 학문을 닦는 장소로 삼게 했는데, 현판은 서악정사(西岳精舍)로서 퇴계선생의 글씨이다. 계해년(癸亥年 : 1563년) 정월(正月)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가게 되었을 때 경주의 선비와 백성들은 비석을 세워 그 은혜를 칭송했다.
6월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제수 받았으나 병 때문에 나아가지 못했다. 9월에 다시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 받았으며, 11월에 순천부사(順天府使)를 제수 받았다. 연산군 시절 선대의 현인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선생이 순천부에 귀양 와서 성 서쪽의 옥천(玉川) 위에 살았는데, 돌을 쌓아 누대를 만들고 임청대(臨淸臺)라 이름 지었다. 그 흔적은 선생이 부임했을 때까지도 완연했다. 선생은 부임 초에 제일 먼저 이 누대를 방문하여 날이 저물도록 사모의 정에 잠겨 돌아다니면서 차마 떠나지 못했다. 나중에 누대 위에 경현당(景賢堂)을 건립하고 봄가을로 제사지냈으니 정기적인 제사로 계속 전해지게 되었다. 또 옥천정사(玉川精舍)를 그 옆에 세워 선비들의 학문 수양장소로 삼았다. 또한 경현록(景賢錄)을 간행하여 스승과 벗에 대한 연원을 서술했는데, 세계(世系)와 이력(履歷)이 특히 상세하였다.
병인년(丙寅年 : 1566년) 4월 모친께서 병이 들자, 선생은 밤낮으로 약을 시중들면서 옷의 허리띠도 풀지 않은 채 병수발에 힘을 기울였으나, 한 톨의 쌀이나 물조차 입으로 넘기지 못하는 날이 여러 날 계속되다가 그달 25일에 모친께서 돌아가셨다. 운구를 고향으로 받들어 부친의 무덤 옆에 장사지냈다. 이 때 선생의 나이 50이 넘었는데, 평소 앓던 병 때문에 기력이 쇠약해졌으나 상제(喪制)의 예를 다함에 영전 앞에서 조금의 소홀함도 없었다.
융경(隆慶) 원년(元年) 정묘년(丁卯年 : 1567년)에 명종께서 승하하셨는데 선생은 이 때 무덤 옆 여막(廬幕)에 기거 중이었다. 갑작스런 승하 소식을 듣자 통곡이 부모님 상을 당한 이상이었다. 기절한 후 깨어나 초막 밖에 장막을 설치하고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분향하면서 거친 베로 지은 참최복(斬衰服)을 입으셨다. 무신년(戊申年 : 1568년)에 모친의 삼년상이 끝나도 여전히 명종임금을 위하여 다시 1년 동안 상제(喪制)의 도리를 다했다. 기력이 너무 쇠약해져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친척과 오랜 친구들이 억지로 고기국물을 권하니 마지못해 따랐다. 6월에 부호군(副護軍)을 제수 받고, 9월에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 겸 지제교(知製敎 : 조선시대 국왕의 교서(敎書) 등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한 관직)를 제수 받았으나 병 때문에 나아갈 수가 없어 상소로써 사양했다. 그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말씀드리옵건대, 이번 달 7일 신에게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을 제수한다는 승정원(承政院)의 교지를 삼가 받들었습니다. 관원이 말을 타고 달려와 전하는 어명에 삼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고, 엎드려 감격으로 흐느끼며 감히 얼굴을 들기가 어렵습니다만, 신의 나이 60이 가까운 데다가 병은 날로 깊어만 가고, 마음은 또한 날로 혼미해져가며, 눈병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이러한 상태였기에 사람을 대하여도 알아보지 못하고, 사물에 접촉해서도 형체분간이 어려우니 장님과 다를 바 없으며, 이미 버려진 물건과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폐하의 수레바퀴 아래로 힘써 나아가 일월과 같은 밝은 빛을 바라보고자 하지만 운신할 수가 없습니다. 밤낮으로 근심과 두려움으로 엎드려 신의 죄를 벌해 주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신은 변변치 못한 가문 출신으로 바닷가 궁벽한 곳에서 자랐기에 견문도 부족하고 몸가짐도 모자란 바가 많습니다. 비록 여러 가지 나라 일을 맡아보는 대열에 있기는 했지만 그 소임을 제대로 다하지도 못했는데, 하물며 옥당(玉堂 : 홍문관을 달리 부르는 말)의 수장(首長)자리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임명하신 그 직무는 가장 엄중한 자리이니 어찌 감히 분에 넘치는 은총을 받을 수 있겠으며 일국의 중요한 자리를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삼가 명을 내려 신의 직책을 거두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또한 신은 외람되게도 벼슬길에 들어서서 네 임금을 섬겼으니 분에 넘치는 영광으로 더할 나위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혹심한 재앙을 만났으니 명종 임금께서 승하(昇遐)하신 것입니다. 갑작스런 붕어(崩御)소식에 통곡소리조차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근심걱정 없이 지내려 해도 병 때문에 거의 죽게 되었으니 장례식에 달려가 통곡할 수도 없었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올리는 제사도 곁에서 모실 수 없었습니다. 지금 또 병을 이기지 못하고 은혜로운 명령을 받들지 못하게 되어 천지간에 죄를 짓게 되었으니 만 번을 죽어도 속죄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계시는 북쪽을 향해 해가 저물도록 두 손 모아 바치는 정성스런 마음은 질병과 상(喪)을 당한 근심 속에서도 털끝만큼도 줄어든 바 없으니, 감히 전하께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전하께서는 대통을 이어받으셨으니 정치의 폐단을 말끔히 고쳐 새롭게 해야 하며, 짙게 드리워진 구름을 모두 걷어내고 해와 달처럼 크게 밝혀야 합니다. 대신 중에는 원로도 있고 시독관(侍讀官 : 조선시대 경연청(經筵廳)의 정5품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가 겸임하였으며, 임금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하는 일을 맡아보았음) 중에는 뛰어난 학자들도 있으니 틀림없이 학문은 날로 더해지고 정치업적도 나날이 융성해질 것을 머지않은 날에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의 움직임에는 정해진 바가 없고 사물의 기미와 조짐 또한 지극히 미약한 법이어서, 오늘의 맑음은 비록 믿을 수 있으나 후일까지 그러함을 지켜나가는데 대해서는 더욱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주의 마음은 만물변화의 크나큰 근본인바, 올바른 마음을 기르는 도리는 학문의 수양과 연구에 있으며, 학문수양과 연구의 요체는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져 덕성을 닦음으로써 마음을 보전하는데 있습니다. 지금 초야의 선비들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보다 나은 상태로의 향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때로는 세운 뜻이 굳세지 못하거나 꾸준하게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못하다가 늙음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득실을 저울질 하는 사이 본심을 잃어 이전과 같은 상태가 된다면 이는 마치 각각 다른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하물며 군주는 숭고한 지위에 있어 인척과 근신(近臣) 및 노복(奴僕)과 환관(宦官) 등이 좌우에서 시중들고 있기 때문에, 얼핏 군주의 권태로운 모습을 보는 순간 그 사이를 타고 틈을 바로 파고들어 군주의 환심을 얻게 됩니다. 달콤한 말 한마디가 적중되면 충언(忠言)은 나아가기 어렵게 되어 전하께서는 아첨하는 말만 듣게 되는 날이 계속될 것입니다. 기생충이나 좀과 같은 무리들과 함께 하는 사이에서 삼가 경(敬)을 지키려는 마음을 가진들 하려는 바는 오늘과 다를 바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말씀드리고자 하는 ‘오늘의 맑음은 비록 믿을 수 있으나 후일까지 그러함을 지켜나가는데 대해서는 더욱 근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부지런하셔야 합니다. 지금 세상에는 교양(敎養 : 학식을 바탕으로 배워 닦은 수양)에 법도가 없고, 풍속은 순박하지 못하며, 백성들은 근심하고 원망하고, 군졸들은 사기가 저하되어 있다는 소문이 흉흉하니 가히 눈물과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정이(程頤)의 학제를 참고하시고, 주자(朱子)의 학규로써 거듭 자세히 밝히시며, 돈후(惇厚)함과 본질(本質)을 가려 스승으로 삼아 영재를 기르고,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의 네 가지 도를 숭상하도록 하십시오. 도(道)를 밝히고 중정(中正)을 추구하는 주자학파의 학문으로 다스리고, 공(公)과 사(私),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구분을 명백히 하신다면 교양(敎養)에 어찌 법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충신과 효자, 열녀를 기록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풀이하여 널리 펴시고, 충(忠), 효(孝), 의(義), 용(勇), 인(仁)의 다섯 가지 가르침은 너그러움에 있음을 삼가 펼치시며, 교화와 훈육으로 점차 물들이신다면, 저절로 감화될 것이며 풍속은 점차 변하여 순후함으로 되돌아갈 것인즉 풍속이 어찌 불순할 수 있겠습니까?
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근무하는 관리를 가려 뽑아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리게 하시고, 세금을 줄이고 홀아비와 과부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면, 농부는 정성 들여 곡식을 가꾸는 공을 세울 것이며, 백성들은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보살피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니, 백성들이 어찌 근심하고 원망하겠습니까?
당나라 말기 뇌물로 장수가 되는 일과 같은 폐해를 단절시켜 부패한 풍속을 개혁하시고, 지혜와 덕을 갖춘 장수를 가려 뽑아 중요한 군사(軍士)의 일을 맡기시며, 훌륭한 기상을 권장하고 용감함에 상을 주며, 군대를 위로하고 지원하여 앉고 일어서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도를 가르치며, 자손이 끊어져 이웃이나 친척이 세금이나 군역을 대신 부담하게 되는 폐해를 제거하신다면 군졸들이 어찌 사기가 저하되겠습니까?
맹자는 “착한 마음만 가지고서는 바른 정치를 하기에 부족하고, 단지 법도(法度)만으로는 그것이 저절로 행해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정치의 규범은 현인(賢人)을 얻어 어진 정치를 행함에 있지만 변화의 기회는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진실로 경(敬)으로써 그러함을 세우시고 성(誠)으로써 그러함을 행하신다면 털끝만큼의 번잡함도 없을 것이며 한 호흡 순간만큼의 단절도 없을 것이니, 어찌 정치를 행함에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선대의 현인들이 말씀하시길 “한결같은 경(敬)은 천 가지의 사악함을 대적하기에 충분하고, 한결같은 성(誠)은 만 가지의 위선을 소멸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삼가 소(疎)를 올립니다.
성상께서 교지를 내려 이를 칭찬하셨다. 또한 몸조리를 잘 하도록 타이르시고 이어 호군(護軍 :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두었던 정4품 무관직)을 수여하셨다. 기사년(己巳年 : 1569년) 9월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제수 받고 또 상호군(上護軍)을 수여받았으나, 모두 병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였다. 신미년(辛未年 : 1570년) 6월 발에 종기가 났는데, 침으로 치료해도 효과가 없자 탄식하여 말하기를 “부모님께서는 온전히 나를 낳아 주셨는데 나는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불효자로다”라고 하면서 눈물 흘렸다. 7월 병자일(丙子日)에 정침(正寢 : 집 안에서 가장 주가 되고 중심이 되는 방)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0세였다. 부음을 들은 임금께서는 예관(禮官)을 파견하여 제물(祭物)을 내려주고, 제문(祭文)을 지어 조문시켰다.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영령께서는 도량과 재능이 크고도 깊었으며, 풍채는 엄숙하면서도 조용했다. 평소의 언행은 반드시 신중했으며, 효도와 우애는 천성이었다. 사물을 대함에 있어서는 너그러움이 있었으나, 자신을 다스림에는 법도가 있었다. 바탕이 확실했으며, 경서에 관한 학술로 임금을 보좌했다. 가정의 모범을 충성으로 옮겨 와 그 힘을 다 쏟았고, 재주를 굽혀 작은 일을 맡았을지라도 뜻은 언제나 청렴함에 두었다. 먼저 정치의 기강을 세웠으며, 학문을 존중하고 덕을 숭상했다. 부하관리들을 위엄으로 다스리니 백성들은 편안히 생업에 임할 수 있었다. 고인의 자비롭고 사랑스러운 기풍을 비석에 남기니 맑은 유풍은 후대까지 전해질 것이로다. 전대 임금님의 은총이 두터워 특별히 높은 벼슬을 내렸다. 마침내 승지(承旨)에 임명되어 언제나 물 흐르듯이 간언과 의론이 이어졌다. 서술한 상주문은 상세했으며, 바야흐로 짐(朕)의 뜻과 일치했다. 큰 은혜를 베풀어 선현을 장사 지내주니 경주 지방에서 바로 이러한 도리를 행했다. 무너진 왕릉을 흙을 북돋우어 보수하니 이 또한 어진 자의 일이다. 호남지방의 한 고을은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알려져 있었으나 교활함을 물리치고 자비를 다하며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베풀었다. 사당을 건립하여 어진 이의 덕을 본받아 풍격과 명성이 이룩되었고, 많은 서적을 인쇄하여 후진들을 깨우치는데 힘썼다. 어진 관리의 떠나감을 만류할 틈도 없이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대의 3년이라는 상복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려 경연의 직책을 내려 의론으로써 나의 부족한 점을 보좌하도록 명했다. 그대가 사양하여 오려 하지 않아 아득히 멀어져 모습을 접하기 어려웠으나 한 통의 상소문은 모두 참된 마음의 정성이 담겨 있었다. 어찌하여 오늘 그러한 본보기에 대한 영원한 이별을 말하게 하는가? 그대는 말년에도 삼가 학문을 좋아했으니, 집에서 기거하는 몇 년 동안 뜻은 오직 사물을 연구하고 뜻을 넓히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두었다. 학문의 방향은 태평성대를 이루는 다스림의 요강에 두었으며, 반드시 신비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러한 조예는 더욱 현묘했다. 충성스런 말을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이 이렇게 갑자기 떠나가니 이에 변변치 못한 제물이나마 보내어 나의 슬픔을 기탁하노라!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침착하고 의지가 강했으며 행동이 단정 성실하고 망령되이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의젓한 모습을 보였으며, 커서는 문사의 문장을 학문으로 삼았다. 평생토록 빠른 말소리와 급히 서두르는 얼굴빛을 보이지 않았으니 설령 집안사람일지라도 일찍이 그 기뻐하는 모습이나 분노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학문은 제자백가의 이단서적을 보지 않았으며, 반드시 사서오경과 송나라 여러 유학자의 문장만을 취했다. 소매를 바로잡고 단정히 앉아 침식을 잊고는 고개를 숙여서는 책을 읽고 고개를 들어서는 생각에 잠겼다. 게다가 의리의 무궁함을 알아 서로 왕래하는 선비와 친구들이 많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반드시 사리의 옳고 그름을 반복하여 밝힘으로써 학문의 폭이 넓어졌는데, 그것이 마음속에 요약되었을 뿐만 아니라 몸에 체화되었다. 스스로 문장이 부족하다 말씀하셨지만, 문필에 종사하지 않았음에도 간혹 시가(詩歌)를 서로 주고받는 사이에 보면 성리학의 발로가 아님이 없었고, 암암리에 성리학의 여운에 합치되었으며 스스로 세속의 기호에 동조하지 않았다.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학문을 향한 일념은 일편단심과 같이 빛나고 선명했다. 동도(東都)인 경주(慶州)에서 재직할 때에는 밤새도록 찧은 양식을 수레에 싣고 해마다 가서 문안인사를 드렸는데, 다른 사람의 비난을 피하지 않았다. 벼슬로 떠돌거나 집에 있은 수십 년 동안 지은 문장이 쌓였으니 거의 허송세월 한 적이 없었다. 의문 나거나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질문하고 실행할 때에도 반드시 자문을 구했으며, 한두 마디의 짧은 말과 글일지라도 반드시 모아 엮었다. 서로 믿고 의지하였으니 그 돈독함이 이와 같았다.
중종임금 시절 성리학에 관한 서적은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것이 미진한 부분도 있었는데 이 또한 퇴계선생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바로잡았으며, 서로 그 발문을 써 주기도 하였다. <공자통기(孔子通紀)>, <이정수언(二程粹言)>, <정씨유서외서(程氏遺書外書)>, <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 <염락풍아(濂洛風雅)>, <격양집(擊壤集)>, <연평답문(延平答問)>, <주자시집(朱子詩集)>, <범태사당감(范太史唐鑑)>. <구경산가례의절(丘瓊山家禮儀節)>, <설문청독서록(薛文淸讀書錄)>, <호경재거업록(胡敬齋居業錄)>, <황명명신언행록(皇明名臣言行錄)>, <이학록(理學錄)>, <의무려선생집(醫無閭先生集)>등과 같은 서적은 벼슬을 역임한 고을에서 반드시 간행했으며, 비록 벼슬길에 있지 않았을 때라도 만약 성리학 서적이 경전에 도움이 되는데도 판본이 없는 경우를 보면 또한 힘써 고을 수령들에게 권하여 반드시 간행한 후에 그만두었다. 또한 일찍이 <성리대전(性理大典)>과 여러 서적 중에서 가장 요긴한 내용을 간추려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이름을 <성리유편(性理遺編)>이라 하였고, 책을 만든 뒤 선비들을 만나면 청하지 않아도 항상 나누어 주었다. 성리학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후학에게 은혜를 베푸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으로 이와 같았다.
그 학문을 좋아하고 힘써 행함은 만년(晩年)에 이를수록 더욱 독실해졌다. 옛 성현의 말씀에서 학자들에게 도움 되는 바가 있으면 그러함에 대해 반드시 그때그때 기록해 두었으니, 이름을 <구암일과(龜巖日課)>로 짓고, 장차 자료를 모아 분류한 다음 종류에 따라 다시 한데 묶어 정리함으로써 일상사물의 연구에 대해 유추하는 방법을 편리하게 하고자 하였으나 돌아가시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하였다.
부모를 섬기는 일을 보면, 진실로 그 효도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린 시절 언제나 몸소 어부의 집에 가서 맛있는 생선을 가져왔으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새벽에는 문안을 드렸으며,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보살펴 드렸다. 비록 벼슬길에 나아갔을 때에도 기쁜 마음으로 부모에게 효도를 다함은 처자식의 부양과 함께 조금의 게으름도 없었다. 서모(庶母)가 계셨는데 섬기기가 친아들과 같았고 또한 그 서모에게서 난 남동생 한 분과 여동생 둘을 속량(贖良 : 돈을 내고 양민이 되는 것)해 주었으며 그들과의 사이가 좋아 그 우애에 변함이 없었다.
조상을 받드는 일을 보면, 보통 때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띠를 매고 집 안의 사당을 참배하였다. 지독한 추위와 더위 또는 비가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 뿐 아니라 철따라 지내는 제사도 반드시 몸소 친히 행했다. 만약 병 때문에 직접 모실 수 없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리움에 가슴아파했다. 제삿날이 돌아오면 10일전부터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했는데, 생강처럼 매운 음식은 입에 대지 않고 옥색(玉色)의 의복과 관을 단정히 갖추고 삼베 허리띠를 맨 채 하루 종일 풀지 않았다. 제사지낸 이틀 후에야 비로소 다시 휴식을 취했다.
임금을 모시는 일을 보면,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은 쉽게 여겨 조정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선생의 의견을 묻는 임금의 물음에 상소(上疏)로써 의견을 제시할 때에는 한 마디라도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 성의정심(格物致知 誠意正心 :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여 지식을 확고히 하며 자신의 뜻을 진실 되게 하여 마음을 바로 정하는 일)의 요체가 아님이 없었다. 학문을 강화하고 간언을 받아들이게 하는 직무에서는 만년에 물러나게 되었는데, 역시 하루도 조정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정치가 잘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말에 기쁨이 넘쳐흘렀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 임금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벼슬에 나아가건 아니건 간에 한결같았다. 오직 참되고 충성스런 마음뿐이었으니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끝이 났다.
관직을 수행할 때를 보면, 자기 자신을 다스림에는 청렴으로써 하였고 백성을 위무함에는 인(仁)으로써 하였으며, 공평하면서도 정당했고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했다. 위엄으로 정무(政務)에 임하고 공명정대함으로써 송사를 처리했다. 간사한 관리에게는 용서가 없었으며 횡포를 부리거나 교활한 관리는 방종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교화(敎化)에 힘쓰고 학교를 일으키는 일을 임무로 삼았다. 이르는 곳마다 효자와 열부를 찾아내어 그 집을 회복시키고 후손을 도왔다. 마을에 부모에 대한 효도와 우애가 깊은 사람이 있으면 비록 천인(賤人)일지라도 마치 빈객을 맞이하는 것과 같이 대했고, 뛰어난 공적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내려 우러러보도록 하였으니 위로는 선비로부터 아래로는 아전과 백성에 이르기까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력 2월과 8월에 문묘(文廟)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나 사직(社稷)의 제사를 지낼 경우에는 반드시 몸소 나아가 정성을 다했으며, 제기와 제물은 지극히 청결함에 힘썼다. 큰 가뭄이 들었을 때 또한 반드시 몸소 기도하였는데 아무리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일지라도 엎드려 정성을 다함으로써 격을 갖추어 밝히기에 이르렀다.
친구의 사귐에 대하여 보면, 소홀히 대하거나 넘침이 없었다. 선생과 서로 더불어 교유(交遊)한 일세의 명사 중 정4품 사인(舍人) 정황(丁熿)은 거제에 귀양 가 있었고 사간원 정6품 정언(正言) 김란상(金鸞祥)은 남해에 귀양 가 있었는데, 선생은 배를 타고 그들을 찾아가기를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이때는 권신과 간신들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때라 귀양살이 하는 사람과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반드시 중상모략 하려하였다. 사람들이 선생의 그러한 위태함 때문에 말렸으나 선생은 일소(一笑)에 부치고 왕래에 더욱 힘썼다.
선생은 고아하여 산수를 좋아했으므로 매일 아름다운 곳에 가서 거닐면서 유유자적하였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과는 도의로 맺어져 매우 돈독하였다. 남명선생이 지리산 덕산동에 거처를 마련하자 선생 역시 그 가까운 곳에 땅을 마련하였다. 속세를 떠난 동반자의 결의를 본뜬 것이다. 노년에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의리로써 사귐은 자못 끝나지 않았다. 선생은 오직 이러했으니 검불부스러기만한 혐의도 없었다. 그 학문적 힘은 견고했으며 그릇의 크기는 매우 컸으니 대체로 이와 같았다.
만년에는 선영 곁에 서실(書室)을 갖추고 편액을 구암정사(龜巖精舍)로 이름 하였다. 왼쪽 방은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져 덕성을 닦는다’는 뜻의 거경재(居敬齋)로 이름 짓고, 오른 쪽은 ‘의로움을 밝힌다’는 뜻의 명의재(明義齋)로 이름 지었다. 상복기간이 끝나도 병을 핑계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학문과 심성을 닦았다. 공(功)을 한 근원으로 거두어들이니 조예는 더욱 깊어졌다. 만년에 <역경(易經)>에 대한 깨달음이 지극하여 더욱 힘써 실마리를 풀어내었다. 항상 선비와 벗들에게 “내가 일찍부터 한 가지 일에 뜻을 두었는데 만약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기회를 더 준다면 크게 성취할 것 같은데 미치지 못할까 두렵다”고 하면서 탄식하곤 했다. 서재의 네 벽에는 주자(朱子)가 친히 쓴 글의 필사본인 ‘연비어약(鳶飛魚躍 : 천지간의 도리는 어디에나 있다)’과 역의 괘를 설명하는 ‘징분질욕(懲忿窒慾 : 분한 생각을 경계하고 욕심을 막는다)’ 등의 문구를 걸어두었다. 항상 그것을 바라보며 ‘아직도 이 마음은 일부러 지어냄을 면하기 어려우니 부끄럽다’고 말씀하셨다. 학문의 수양에 공을 들임이 말년에도 이와 같았다.
훌륭한 선비가 찾아오면 정성을 다했고, 교제할 때는 겸손했다.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삼가 공경으로 일을 처리했다. 친척이나 친구를 도와줌에는 사랑을 다 쏟았고, 고향마을을 도울 때는 기쁜 마음을 다했다. 이러한 일들은 선생이 평소부터 쌓아온 바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로 그러함을 알 수 있었다.
선생의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심씨(沈氏)인데 병절교위(秉節校尉 : 조선시대 종6품 무관에게 주던 품계)와 호분위(虎賁衛 : 조선 초·중기에 군사조직의 근간을 이루었던 오위(五衛) 가운데 우위(右衛))의 좌부장(左部將)을 지낸 침(琛)의 따님이다. 본적은 의령이며 선생보다 8년 먼저 돌아가셨으니 갑자년(甲子年) 9월(명종 19년, 1564년)이었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응인(應寅)으로 종6품 선교랑(宣敎郞)이 되었다. 선무랑(宣務郞) 남지(南至)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으니 생원 호변(虎變)과 진사 곤변(鯤變)이다. 이 해 9월 임신(壬申)일에 선생은 구암동(龜巖洞) 감좌리향(坎坐离向)의 언덕에 선조의 묘를 따라 장사지냈다. 아아! 슬프도다! 선생의 세계(世系)와 이력, 학문과 행실의 대강을 서술하면서 머리 숙여 바라노니 후인 중에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고치기를 바란다.
생원 정두(鄭斗)가 삼가 행장을 쓰다.
* 정두(鄭斗) :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이남(以南), 호는 동산옹(東山翁)이다. 1558년(명종 13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재주가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또한 역학에 밝아 천문과 지리에 능했으며 문장에도 밝았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그를 보고 “고결한 선비로 강좌(江左)에는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조수(鳥獸)와 말이 통하여 산 속에 들어가 휘파람을 불면 조수가 와서 순종하였다 한다.
구암선생의 친구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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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암선생의 업적을 잘읽어 보았습니다.
긴문장 올려주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수고 하셨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 족보책에 있는 요약본을 올릴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요약본의 내용이 충실하지 않아 구암집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다 읽기에 조금은 부담스럽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읽어보는 것이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