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김바다(동시인, 동화작가)
내 청춘을 돌려다오 할머니
지난 1월 3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황금주 할머니가 끝내 빼앗긴 청춘을 돌려받지 못하고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열세 살에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려고 빌린 돈 100원을 갚기 위해 함흥의 부잣집에 양딸로 가게 되었다.
1941년, 양딸로 간 집의 세 언니 공부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할머니가 대신 일본의 군수 공장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간 곳은 일본의 군수 공장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일행을 실은 기차가 정차한 곳은 중국 길림역이었고, 다시 트럭에 실려서 도착한 곳은 군인들의 막사가 빽빽이 들어선 군부대였다. 이때부터 할머니는 날마다 죽음과 대면하며 살아가야 했다. 길림성과 만주 등지의 전쟁터로 끌려다니며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가 되어 스무 살 청춘을 짓밟히고 또 짓밟혔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버려진 할머니는 걸어 걸어 춘천으로 돌아와 청량리에서 상처를 끌어안은 채 살아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30년을 훌쩍 넘기고 1992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피해자 신고를 하고 사회로 나온 할머니는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폭로하러 다니셨다.
1992년 8월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 인권소위원회에 참가하여 ‘일본군 위안부’로서 겪었던 참담했던 경험을 세계인에게 알렸다. 그 후 할머니는 미국의 워싱턴, 뉴욕, 애틀랜타와 캐나다, 일본, 세계 방방곡곡을 다니며 일본이 아시아의 여성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는 데 남은 일생을 바쳤다.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내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외치며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래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청춘을 돌려다오.’ 할머니로 알려졌고,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 앞에서는 분노로 치를 떨며 ‘내 청춘을 돌려다오.’라며 외쳤다.
할머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 수요일마다 열리는 수요 시위에도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던 할머니는 데려다 키운 딸에게 이끌려 부산으로 가서 어느 요양원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간의 활동을 묻어 버릴 만큼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부산에서의 삶은 쓸쓸히 죽음만을 향해 걸어간 시간이었다.
지난 1월 5일, 황금주 할머니는 부산에서 화장되어 천안 망향의 동산에 예약해 둔 최후의 안택지에 모셔졌다. 이날 우리나라 일간지와 방송사에서는 아무도 취재를 나오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수요 시위가 1,000여 회를 넘기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까닭을 알 수가 있었다. 반면 그날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조직 폭력배 두목의 장례식장에는 경찰과 기자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했다. 조직 폭력배 두목이 그렇게 우리 사회의 주요 인물인지는 세상을 떠난 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황금주 할머니는 이십여 분 조문객의 안타까움 속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흙으로 돌아갔다. 영정 사진에는 수요 시위에서 목이 터지라 외치던 할머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병색이 짙고 머리를 짧게 자른 초점 잃은 눈의 황금주 할머니만 있었다. 잃어버린 청춘을 영원히 되찾지 못하고 망향의 동산에 영원히 잠들었다. 눈 덮인 망향의 동산에 터 잡고 살던 동장군도 잠깐 자리를 비켜 주고 떠났는지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최근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군이 직접 나서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증거는 없다.’며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지난해 10월 야스쿠니 신사의 추계 대제에 참배했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 것을 진출이라 가르치고,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은 없었다며 매춘하기 위한 자발적 참여라는 주장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하다.
연세가 드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지난 1월 9일, 황금주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서도 수요 시위에 참석해서 사진으로나마 한 자리 차지하고서 외치고 있었다.
“일본은 사죄하라! 내 청춘을 돌려 달란 말이다!”
첫댓글 일본은 사죄하라. 조선처녀의 봄날앞에 정중히 사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