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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
배 영숙
나에게는 딸이 없고 아들이 두 명 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고 자란 아이들이라, 군에 간다고 걱정을 하는 그런 엄마는 못 되었다.
첫째 아이는 대학교 2학년이 되자 스스로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하더니 1학기 기말 시험이 끝나는 7월 4일로 입대 날짜를 받아서 일방적으로 가족들에게 통보를 하였다. 춘천 102 보충대에 오후 2시까지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생활 기반이 서울과 안동으로 흩어져 있던 우리는 각자 춘천 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 아이는 친구 세 명과 동생과 함께 서울 청량리 역에서 기차를 타고 왔고, 나는 안동에서 운전을 하여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휑하니 춘천으로 갔다.
머리를 어설프게 잘라 삐죽삐죽한 채 나타난 큰아들을 바라보면서 잠시 마음이 짠했다. 새벽부터 각자 춘천으로 향한 우리들은 우선 춘천 닭갈비를 주문해서 배를 채웠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양 시내를 돌아다녔는데 몸을 흔들어 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다녔지만 결국 집결해야 하는 시간은 왔다.
드디어 102 보충대 부대 그 입구에는 ‘장정 여러분 입영을 환영합니다’ 라는 현수막과 함께 노점 상인들과 인파들로 복잡하였다. 혼자 고독하게 서 있는 사람도 있고 서로 어색하게 마주 서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고 대부분 우는 사람들이 많은 풍경. 그 속에 우리도 있었다. “너무 멋있다, 짱이야” 이 기회에 아예 군대에 말뚝을 박으면 되겠다 하면서 친구들과 동생은 그 아이를 격려하였고 그런 유쾌한 농담들을 나누다가 이 어미에게는 주먹으로 하이파이브를 하더니 유유하게 걸어 들어갔다.
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큰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돌아섰다. 남은 사람들을 태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웃고 떠들고 중간 중간 맛있는 것도 먹었다. 내심 나는 계모인가 할 정도로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물론 그 아이의 옷이 집으로 배달되어 왔을 때는 입대하는 순간까지 아무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그 아이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잠시 울컥하였지만.
그러나 난, 훈련 받는 5주 동안 거의 매일 일기 쓰듯 편지를 썼다. 그동안 못한 엄마도리를 보상이라도 하듯 열심히 편지를 썼다. 그 주간에 속세에서 일어나는 신문의 뉴스와, 하다못해 연속극 줄거리도 썼다. ‘파리의 연인’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다. 박신양, 김정은이 엮어가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늘어놓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에 포병으로 배치 받았으니 최전방이라 할 수 있겠다. 드디어 첫 면회를 가는 날, 난 함께 먹을 것을 잔뜩 준비하여 작은아들과 머나먼 강원도 고성으로 향했다. 속초를 거쳐, 고성의 시골 동네를 지나 산길을 따라 들어가니 부대의 자그마한 보초소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누구 면회 왔다고 하니까, 그냥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면회실에서 거창하게 모자상봉 할 장면을 상상하곤 왔는데 이 부대는 면회실도 없는 듯하다. 한데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새까맣게 그을린 아들이 저벅저벅, 얼굴에 미소를 감추면서 의젓하게 걸어 나온다. 자꾸 손을 감추는 아들. 감춘 손 사이 벌겋게 동상 걸린 손가락이 보인다. 애써 못 본 척 한다. 눈 치우는 것이 지금의 주 업무인 쫄병 아들. 벌써 동상에 걸려 있으면 남은 겨울은 어찌 견뎌낼까 무척 걱정이 된다. 우리는 속초시의 한 콘도에 짐을 풀었다. 폭풍처럼 음식을 흡입하고, 동생과 함께 노래 부르고, 소리 지르고, 하루를 푹 쉰 아이는 다음 날 남은 음식 빵부스러기까지 비닐봉지에 꼭꼭 싸고 있다. 이 부대는 음식물 반입이 안 된다고 하면서 남은 음식을 모조리 싸고 있는 아이가 의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부대 앞 멀찌감치 차를 세워 달라고 하더니 땅을 파서 거기에 음식을 숨기고 있다. 일단 귀대 했다가 저녁에 보초 설 때 나와서 음식을 가지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 몇 달 사이 이런 생존요령을 터득하다니...
가족이 면회를 와야 토요일 외박이 가능하기 때문에 목욕이라도 하고 싶은 아이는 면회 오기를 기다렸다. 요사이 군 시설이 좋다고 하지만 이 부대는 겨울이 되면 변을 볼 때 땅을 파서 볼일을 보고 묻을 정도로 물이 부족하다고 한다. 허긴 4~5월 까지 눈이 오는 곳이라 지금도 큰아이는 눈만 보면 지긋지긋하다고 한다. 토요일 새벽에 먹을 것 챙겨서 서울서 죽어라고 달려도 8시만 넘으면 엄마 어디쯤이냐고 큰아이는 공중전화를 한다. 아마 한시라도 빨리 나오고 싶은 마음에 아침도 먹지 않고 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엄마만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정기적으로 부대에서 아이 빼주는 것이 임무인 양 시간만 나면 토요일 새벽, 강원도로 달려갔다.
작은아이도 큰아이와 똑같이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갈 준비를 했다. 작은아이는 형의 육군 복무 모습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지 해군에 지원을 했다. 작은아이가 입대할 땐 형은 아직 군 복무중이고 친구들도 부르지 않아서 저랑 달랑 둘이서 대구행 기차를 타고, 대구서 다시 진해행 버스를 타고 진해 훈련장으로 갔다. 큰아이 때와는 마음이 많이 달랐다. 내 마음 뿐 아니라 아이의 마음도 다른 듯 보였다. 군 입대를 큰아이는 비교적 덤덤히 받아들이는데 작은아이는 그러지 못한 것 같았다. 차창 밖의 풍경도 썰렁하고, 기차안의 우리의 마음도 또한...나는 그냥 작은아이 손만 자꾸 잡았다 놓았다 했다. 서울에서 저 남쪽 땅 진해가는 길이 왜 그리도 멀던지. 진해에 내려 그 좋아하는 회 정식을 먹으면서도 무슨 맛인지 모르게 식사를 하고, 입영장에 도착한 우린 서로 말이 없었다. 군악대는 울리고 이제 작별의 시간, 작은아이는 눈 맞춤이라도 한 번 더 하려는 어미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허둥거리며 들어갔다. 큰아이보다는 어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작은아이, 어미의 마음을 더 잘 느끼고 있는 섬세한 우리 작은아이, 어미와 눈을 마주치면 눈물이 날까봐 애써 외면하는 듯했다. 서울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 모습이 눈에 밟혀 많이 훌쩍 거렸다. 그 훌쩍거림도 잠깐 서울로 돌아 온 나는‘으, 이제 누구를 위해 밥을 하지?, 두 아이도 없는데 맨 날 굶어 다이어트나 짝 해볼까? 이놈들 모두 없을 때 난 어디 도 닦으러 들어가?’이리저리 궁리중이다. 역시 난 계모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진해에서 훈련 받은 작은아들은 동해해군 1함대에 배치를 받게 되었다. 이제 나는 고성과 동해, 두 곳으로 면회를 다녀야 할 판이다. 둘 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아무 말 없이 군에 갈 준비를 하기에 나는 군 입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군 입대 바로 전 작은아이가
“누구든 군에 안 갈 수 있는 방법 있으면 안 가고 싶은 것이 모두의 마음이다.”라고 한다.
아차 싶은 마음이 든다. 어미가 너무 무심했나. 무엇이든 칭찬 한번 하지 않고 당연히 받아들이는 우리의 처사를 불평 한 적이 있다. 두 아이가 부모의 기준에 맞추려고 아무 말 없이 순응하고만 살지나 않았는지. 아이들답게 불만을 토하고, 반항도 하면서 살지. 마음이 많이 불편하다.
작은아이가 동해 자대 배치 받고 이제나 저제나 면회 갈 수 있을까하고 기다릴 때이다. 아이에게서 간혹 전화가 오면, 면회 갈까하고 물으면 아이는 조심스럽게 “아직...”하고 뒤 끝을 맺지 못 할 때였다. 어느 날 난 아이의 허락을 기다리지 못하고 차를 몰아 무작정 동해로 향했다. 동해 톨게이트에 내리면서 부대에 전화를 했다. 일이 있어 동해를 지나는데 잠깐 면회가 안 되느냐고 사정을 한다. 선선히 외출이 가능하다고 한다.
큰아이 부대와는 달리 작은 아이가 배치된 동해 해군 1함대는 시내 한 복판에 있고 엄청 크다. 면회실에서 기다리는데 작은아이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난 무척 반가운데 아이는 겁에 질려 있다.
“엄마 이렇게 갑자기 오면 다른 사람이 보초를 서야 돼!”
주책없는 어미 땜에 아이 마음이 불편한가 보다. 우리에게 주어진 2시에서 6시. 아이는 자기가 보초 서는 까막득히 바다가 보이는 외딴 등대를 알려준다. 자그마한 저 아이가 깜깜한 밤에 무슨 생각을 하며 저기에 서 있을까? 잠시 마음이...아니다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4시간 동안 즐거워야한다. 일단 찜질방 가서 씻고, 즐겁게 맛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곤 동료들 줄 피자 몇 판과 음료수를 사갖고 들어가는 아이. 내내 근심스러운 표정이다. 나 두 괜히 미안한 마음이고, 몸은 피곤하고, 어찌 서울까지 운전해 갈까 걱정하고 있는데 부대에 들어간 작은아이가 공중전화를 해 왔다.
“괜찮아?”
“괜찮아요. 엄마를 만나서 기뻤는데 벌쯤은 아무렇지 않아요”.
“운전 조심해서 올라가세요. 사랑해요 어머니!”
아, 나는 차의 엑셀을 힘껏 밟아 서울로 향했다.
큰아이는 ‘느린 곰탱이’라는 별명 같이 눈(雪)만 치우며 몸으로 때우며 군 생활을 했고, 작은아이는 깔끔한 흰 세라복에 반짝이는 에스콰이어 구두를 신고 휴가를 나오는 것처럼, 두 아이의 성격대로 군 생활도 하게 된 것 같다. 어느 곳에 있든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는 것이니 시간이 해결하는 것이겠지만. 군에 있을 때 엄마가 필요하지 언제 필요하겠나 하는 마음에 시간만 나면 정말 열심히 고성으로, 동해로 차를 몰았다.
토요일 갈 때는 아이 만난다는 설렘으로 먼 길을 운전해 가지만 헤어질 때마다는 마음이 짠했다. 엄마 먼저 출발하면 시내에서 놀다가 귀대 시간 맞추어 들어가겠다고 하지만 어미 마음이 그럴 수가 없었다. 귀대 1~20분 전 까지 함께하다가 부대 앞에서 작별하는 일요일 저녁. 아이와 같이 부대 들어가는 길은 환하더니 아이를 내려 주고 나오는 길은 어느 사이 어둠이 나려진다. 들짐승이라도 나올듯한 한적한 강원도 고성 산길, 어디로 끌려가는 듯 구름위를 운전 하는 듯 허둥지둥 돌아서 나온다. 휑하니 강원도 땅에 혼자 남겨진 나는 이제 어디로 가지. 안동으로 갈까, 서울로 갈까, 어느 길이 쉬울까하고 많이 갈등했었다.
4월 어느 날. 서울의 쾌청한 날씨에 아무 방비 없이 큰아들 면회를 가서 하룻밤 자고 나니... 입춘이 지난 지가 언제인데 이놈의 동네는 절기도 모르는지 발목까지 덮는 눈, 강원도 고성의 하얀 세상이 말없이 사람의 발목을 잡고 꼼짝달싹 못하게 한다. 나는 결국 서울 돌아오기를 포기하고 속초의 어느 곳에서 혼자 웅크리고 잔적도 있었다. 이렇게 강원도 땅에 군 복무를 한 두 아들 덕에 속초와 동해 주변의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었다.
제대를 맞이하는 두 아들의 모습 또한 가지가지이다. 큰아이가 제대하는 날, 난 안동에 일이 있어 하루 늦게 올라와 아이를 한밤중에 잠깐 봤다.
“어이 큰아들, 무사귀환 축하해!”
큰아들은 덤덤하니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서 보니 큰아들이 없다. 비는 오는데 어디로 갔지? 제대 환영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화가 나서 가출을 했나? 전화기는 들고 나간 것 같아 일단 전화 버튼을 눌러 본다.
“어디?”
“인력시장예요. 알바하려고 줄 서 있는데 비가 와서 일자리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냥 끊을 수밖에. 저녁에 들어온 큰아이는 2학기 개학 전에 여행 다녀올 경비 벌려는 거라고 했다. 그때부터 목동 파라곤의 마무리 타일 붙이는 일을 3주가량 했다. 동상 걸린 손으로 어미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제대하자마자 한 달 내내 시멘트 묻은 옷으로 어미 마음을 짠하게 하였다. 하지 말라고, 내가 용돈 주겠다고도 했다. 아들은 군에서 노동을 많이 해서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몸이 근질근질하다고,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라고 했다.
또 작은아이는 제대를 하자마자 배낭을 챙기더니 지리산종주를 떠나겠다고 한다. 엄마가 해주는 밥이라도 좀 먹고 떠나지. 하룻밤 자더니 휑하니 가버렸다. 지리산으로 떠난 지 일주일 만에 할아버지 제사에 맞추어 안동 집으로 도착한 작은아들, 온몸과 발에서 얼마나 역하게 냄새가 나던지…. 쯧쯧!
두 아들은 우리나라 젊은이의 의무적인 한때를 그렇게 보냈다. 이제 두 아이 모두 제대하여 집이 그득하다. 열심히 자연식 집 밥을 장만해서 거두고 있다. 계란이랑 고구마 삶아 간식거리로 가방에 챙겨주거나, 또 어떤 때는 찰밥을 해서 작은아이 학교까지 찾아가는 주책을 부린다. 모처럼 맞이한 어미의 한가로움에 중 고등학교 시절 어미 밥도 잘 못 얻어먹고 자란 아이들이 늦게 횡재를 하고 있다. 올 가을엔 큰 아이가 교환 학생으로 미국을 간다. 공부를 하러 떠나든지, 결혼을 하든, 어미 밥을 먹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는 듯하다. 나는 모처럼 나에게 주어진 이 느긋한 행복을 열심히 즐기고 있다. 2008년 6
첫댓글 사모님 아들사랑 다시 느낍니다.
너무나 잘 생기고, 학업도 사회생활도 잘하고, 부모님이나 지인에게도 잘하고, 뭐든 잘하는 아드님과 두며느님...
믿고 맡기고, 방향성만 제시하고 스스로 헤쳐나가도록 가정교육 해주신 어머님의 결실이겠지요.
그러나 말씀처럼 성인이 되고나니 얼굴보기 힘드시죠? 그마저도 스스로에게 맡기시리라 생각합니다.~~~
시원한 여름 보내세요...^^*
이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짠합니다. 부모님 생각도 많이 나네요. 두아드님 인사성도 밝고 훌륭합니다. 부모님의 가정교육때문이시죠 무더운 여름 잘보내시기 바랍니다.
알구 미안 합니다.
집안 일을 들쳐 내어서.
2008년에 쓴 수필이군요.
군복무의 의무를 안 할수 있는길이 있다면 그길을 택하겠다는 젊은이들의 공통어.
내 아들도 언뜻 그런말을 했었지만, 의정부 306보충대대로 소집되어
김포 월곶의 포병부대에서 2년여간의 군생활을 하고 온 아들.
상지전문대학에서 남은 2학년을 다시 공부하고 대구대학으로 편입하여 4년을 마친후
전산세무회계를 전공하였으나 세무사 시험은 다시 공부를 해야 한다고,
고시원을 드나든게 벌써 6년짼가? 1차만 합격하고 2차에서 자꾸 떨어지다보니
더이상 고집할수 없어 공무원시험으로 방향을 바꾸어도 탈락의 연속이니...
현 시대의 청년 실업율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경목이 경록이는 훌륭한 아들입니다.
아드님 빨리 자리 잡아야 할텐데요.
이젠 두 아들 모두 출가하여 새로운 가장이 되었지요. 세월이 가는지 내가 가는지 마음이 가는지...
이샘 얼굴 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