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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 (368일 째) ; 전쟁(戰爭)과 말(馬) <英雄馬 Sgt. Reckless>
* UN군, 탐색작전 중 인제지구 공산군의 완강한 저항 * 한국정부, 정전설(停戰說)의 유언비어 단속
장철부 중령, 기병대대장 국군 유일(唯一)의 기병대대(騎兵大隊) 지휘관으로서 뚜렷한 전공을 세운 장철부 소령은 마침내 방아쇠를 당겨 스스로 숨을 끊었다.
1921년 4월17일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일본 주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간 그는 일본군으로 싸워야 하는 치욕을 떨쳐내고자 중국 서주에 이르러 탈영을 감행했다.
그는 항일유격대(抗日遊擊隊)에서 활동하다 김구 선생의 추천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 기병과를 졸업했다. 광복 후 귀국해 육군사관학교 제5기로 임관한 후 기갑연대 창설과 더불어 기병대대장에 보직돼 근무하던 중 6·25전쟁을 맞았다. 하지만 이같은 선전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대는 대전·옥천·영동·김천을 거쳐 대구에 도착했다. 그동안 격전으로 300필에 달하던 말은 어느새 200여 필로 줄어들었다. 연대장으로부터 장 소령은 `청송지구에서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장 소령은 `현진지 사수'라는 결전의지를 대대원들에게 하달했다. 대대는 8월 3일까지 전선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며 적진을 기습하는 작전을 구사해 적 사단 사령부를 야습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기병대대 정면으로 적의 공격이 드세지기 시작했다. 장 소령은 “각자현위치를 사수하라”는 피맺힌 절규와 함께 고군분투했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적은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계속 포위망을 좁혀왔다. 아끼는 부하의 죽음을 보고 그는 격분, 어금니를 깨물며 돌진해오는 적진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복부와 팔에 두 발의 적탄이 명중돼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는 혼신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었던 것. 다시금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가운데 그와 병사 몇 명만이 죽음을 초월한 분전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는 `군인으로서 불명예스럽게 적의 포로가 돼 치욕을 당하느니…'하며 자결을 결심하고 스스로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후, 그는 중령으로
1계급 추서되고....
일제시대 때 애국지사로 활약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국군 유일의 장철부 기병대대장이 이끄는 기마부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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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영웅마(英雄馬), 레크레스下士 (Sgt. Reckless)
영웅마, 생존의 Sgt. Reckless
미 해병 제1사단 소속 영웅마 레크레스 하사
영웅마 레크레스 동상
영웅마 레크레스 동상 제막식
무반동총을 달고 진지로 향하고 있는 레크레스 하사의 모습
명성을 떨친 것은 1953년 3월 26∼30일 연천군 매향리의 네바다 전초 전투.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가 중공군 제120사단을 격퇴하기 위한 방어전투였다.
레클리스는 5일간의 전투 동안 총 386회(56㎞)를 왕복하며 부상을 당하면서도 탄약을 실어날랐다.
당시 미 해병은 적의 거친 공세 속에서 탄약이 떨어져 고지를 포기할까 고민할 때마다 나타나는 레클리스를 보고 용기백배해서 다시 싸웠다고 한다.
전쟁 후 레클리스는 피더슨 중위와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1968년 사망할 때까지 평안한 여생을 보냈다.
레클리스는 1957년 미군 최초의 말 부사관이 됐으며, 퍼플하트 훈장 2개와 유엔종군 기장, 미 대통령 표창, 그리고 한국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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