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장
강하고 담대하게 직분을 감당하는 사도 바울:
직분자가 담대한 세 가지 이유
(찬송 180장)
2023-4-13, 목
맥락과 의미
고린도후서 전체는 직분에 대해 가르칩니다. 1-7장, 10-13장은 사도의 직분, 오늘날 말씀 전하는 목사의 직분을 말합니다. 중간에 8-9장은 일반 성도들이 헌금하는 직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직분을 주셨습니다.
3장은 사도가 은혜로 받은 직분을 말합니다. 직분의 영광이 있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합니다. 4장은 사도가 직분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낙심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사명을 다하는지를 간증합니다.
3장은 직분 자체의 영광을 말합니다. 4장은 직분자의 수고에 대해 말합니다. 사도의 직분을 배워서 목사, 성도, 부모의 직분을 신실하게 다하는 종들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1. 복음 거부해도 낙심치 않고 전함: 복음으로 영광 나타내시므로(1-6절)
2. 고난 가운데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전함: 생명이 나타나므로(7-15절)
3. 고난 가운데 낙심하지 않음: 내세의 영광의 소망 때문에(16-18절)
1. 복음 거부해도 낙심치 않고 전함: 복음으로 영광 나타내시므로(1-6절)
1절,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는 직분을 수식합니다. 긍휼은 불쌍하게 여긴다는 의미라기보다 자격 없는 사람에게 공짜로 은혜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는 은혜로 직분을 받았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한다는 이 단어는4장에서 한 번 더 나오고(16절), 같은 뜻인 다른 단어(8절)까지 합치면 3번 나옵니다.
사도는 은혜로 직분을 받았기에 담대합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자천합니다. 즉 스스로 추천서를 씁니다.
3장에서는 붓으로 쓴 추천서가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은 것 그 자체가 바울이 사도로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는 추천서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취지로, 4:2에서는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해 스스로 추천하노라”라고 합니다. 그가 “진리를 나타낸 것”이 바로 사도의 자격 증명서입니다.
그래서 하지 않는 일이 있다고 2절에서 말합니다. 첫째, 숨은 부끄러운 일을 버립니다. 둘째, 속이는 일, 즉 남을 조작하는 교묘한 수법을 행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습니다.
혼잡하게 한다는 것은 장사치가 자기 물건을 실제보다 값비싼 것처럼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2:17의 “혼잡하게 한다”와 단어는 다르지만 뜻은 비슷합니다. 2:17에서 “혼잡하게 하는 것”은 물건 값을 많이 받기 위해 흥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는 흥정하듯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4:2에서 “혼잡하게 하며 속이는 것”은 남을 조작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사도는 마치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칼빈 목사님은 이것을 “창녀들이 계속 자기 얼굴을 화장하듯이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복음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복음을 부패시킵니다. 현숙한 여인은 진실하고 순수한 얼굴로 남편을 대합니다. 남편을 섬기는 데 필요한 만큼 얼굴을 단장합니다. 그러나 창녀들은 얼굴 화장을 짙게 하여 거짓된 얼굴로 다른 사람을 만납니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종은 순수한 복음으로 그리스도만 섬깁니다.
사도는 각 사람의 양심에 복음을 나타냅니다. 사도의 추천서에 들어가는 자격은 순수한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입니다.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더 확실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3절,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사도가 복음을 순수하게 전하는데도 다른 장식물을 더해줄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적 내용을 섞어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혹은 아주 찬란한 수사법을 쓰면서 장식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이런 기대를 가진 성도들에게는 사도 바울의 순수한 복음이 가려졌습니다.
계속 그런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그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 중 재산이 많아 첩을 두면서 죄를 짓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가려졌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복음은 양심에 나타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망합니다.
망한다는 단어는 2:15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다”에서 나온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지만, 멸망하기로 선택된 자들에게는 복음이 마음에 흡수되지 않고 가려졌습니다.
목사가 복음을 잘못 전할 경우에는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가 바른 말씀을 전하는데도 순종하기가 싫어서 목사를 비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시대도 탐욕 때문에 복음 사역자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돌아볼 때입니다.
4절,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복음이 자신의 영혼 깊이 비추지 않을 때 우리는 위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그런 현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마음으로 복음을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신”, 곧 마귀의 유혹 때문입니다.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도 사도는 담대합니다. 복음을 순수하게 전하는 사도로서는 자신을 변호해야 복음 광채가 비치기 때문입니다.
5절, 사도는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합니다.” 6절,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빛을 받은 “우리”는 사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에게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십니다. 성도들에게 가게 하십니다. 지금도 말씀 사역자인 목사에게 먼저 복음 빛이 비칩니다. 그것이 목사의 말씀 선포를 통해 성도들에게 비치게 하십니다.
2. 고난 가운데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전함: 생명이 나타나므로(7-15절)
7절, 능력의 복음을 가지고 있지만 사도 자신은 질그릇입니다. 약하고 사람들에게 아무렇게나 취급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8절, 사도는 많은 핍박을 당했지만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10절, 사도 바울은 몸에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생명이 그의 몸에 나타났습니다. 12절, 그 목적은 죽음이 계속 사도 안에서 일하고, 생명은 성도들에게 일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전달하는 일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도도 죽음의 고통은 자기가 짊어지면서 생명은 성도에게 전달해줍니다. 그리스도적 중보 사역의 도구가 됩니다. 물론, 결코 사도 자신의 공로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와 마찬가지로 목사도 복음 아닌 것, 악한 것, 죄와 싸울 때 죽음과 같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체험한 생명을 성도에게 전달합니다.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13절에서, 사도는 시편 116:10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사도 바울이 고난 가운데 생명을 경험한 것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도 경험한 내용입니다.
“믿음의 마음”은 사람의 마음이라기보다 “믿음을 주시는 성령님”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 안에서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구약 성도보다 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합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이라”(14절). 로마서 8:11 에서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모든 성도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은 같은 사역을 위해, 사도가 전달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성도 사이에 끼어서, 사도는 “예수와 함께, 성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죽음 가운데 생명을 경험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전달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 목적은 많은 사람이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것입니다(15절). 사도의 복음 말씀을 통해 생명의 능력을 경험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3. 고난 가운데 낙심하지 않음: 내세의 영광의 소망 때문에(16-18절)
16절, 그래서 낙심하지 않습니다. 환난이 있지만, 이것을 통해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이룬다는 사실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1절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시는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에. 8절에서는 고난 가운데서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에게 나타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16절에서는 천국의 영광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16절에서 말하는 “겉사람”은 지금 이 시대의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속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 이미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삶을 말합니다. 사도와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시대와 다음 시대를 동시에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날마다 천국의 삶이 더 풍성해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받는 환난은 앞으로 받을 영광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이 가볍습니다(17절). 이 고난과 환난을 통해서 영원한 영광이 이루어져 갑니다.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가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보는 것, 즉 눈을 고정하고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18절). 지금 경험하는 고난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편리한 삶, 그것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에 다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 그것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을 목표로 살아갑니다. 그 천국은 사실은 사도가 고난 가운데 경험하는 생명과 위로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믿고 복종할 일
첫째, 직분자는 복음 말씀을 전하고 직분에 충실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의 광채를 사도를 통해 교회에 전달하십니다. 둘째, 말씀의 직분자는 고난 가운데, 죽음과 같이 힘든 일 가운데,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을 경험합니다. 그 생명을 성도에게 나누어 줍니다. 셋째, 천국 소망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이런 사명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도 사명자로 살아갑니다. 부모로서 우리는 이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을 신실하게 다할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부모의 직분에도 큰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소망 가운데서 이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는 이 땅에서 받는 환난을 가볍게 여기며 장차 받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것’의 영원함을 얻기 위해 ‘보이는 것’의 잠깐을 기꺼이 포기합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가지고 있음(1,7,13절)
직분의 영광스러움은 ”가지고 있다”는 것의 목적어를 통해 잘 나타납니다. 사도는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1절). 직분이 담고 있는 복음은 보배인데, 질그릇 같은 직분자가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7절). 또 직분자는 성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13절), 하나님이 죽음의 고난에서도 살리십니다.
<참고> 13절, 믿음의 마음(프뉴마)=성령님
“믿음의 마음”에서 ‘프뉴마’는 영입니다. 사람의 영을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믿음을 주시는 ‘성령님’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