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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사용법
조제희 (칼스테이트 플러톤 교수)
글은 목적 지향적 (goal-oriented)이다. 목적 없이는 글이 제시하는 방향이 불분명해진다. 불가피하게 애매한 표현이나 즉흥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한정을 시켜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단어마다 사용자의 목적과 논쟁의 법칙에 적합하도록 선택한다. 논쟁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1) 자신의 언어.
2) 청중/독자를 위한 언어
3) 경험이 배어 있는 진솔한 내용을 담은 언어
4) 표현이 간단하고 뜻이 명확
해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언어라야 한다.
표절은 유괴와 같다
논쟁은 자신의 언어로 해야 한다.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는 첫 번째 방법은 스스로 생각하고, 이를 자신의 말/글로 옮기는 것이다. 이런 능력이 있으면 표절을 방지할 수 있다. 표절(plagiarism)이란 남의 생각과 문장 혹은 작품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도용하는 행위를 말한다. 원래 이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괴(kidnapping)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남의 생각과 말/글을 무단으로 사용하면 아이를 납치하는 범죄와 같다는 소리다. 우리는 표절을 단지 남의 것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면서 인용하지 않은 경우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표절의 범위는 훨씬 넓다. 남의 말/글을 해석한다거나 설명하여 소개할 때에도 인용은 필수적이다. 만약 인용을 누락하면 이도 표절에 해당된다.
표절을 저지르는 원인 중에 하나는 어떤 이유로 생각과 표현을 할 수 없어서다. 배경이 되는 지식과 정보가 충분하지 않거나, 있다고 해도 이를 표현할 능력이 부족할 때 표절의 유혹을 받는다. 주제가 정해지면 관찰과 연구를 통해서 지식과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를 실행하지 못한다면 주제에 대해 무지한 채로 남게 된다. 결과적으로 할 말이나 쓸거리가 없게 된다. 아무리 논쟁의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주제에 대해 알지 못하면 설득은 불가능하다.
또한 지식과 정보를 갖췄더라도 남의 말을 소화할 능력이 없다면-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표현할 능력이 없다면-아는 것도 병이 된다. 결국 남의 말을 그냥 뇌까리는 앵무새처럼 될 뿐이다. 그래서 남의 생각을 단어나 표현의 변경 없이 그대로 반복하게 된다. 기초가 되는 부분 즉, 인생관, 가치관, 철학 등이 튼튼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안경이 없다는 뜻이다. 논술에서 – 논술도 논쟁의 한 장르이다 – 같은 형태, 같은 표현, 같은 내용의 답안지가 무수히 나오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의 능력이 앵무새와 닮았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쓰는 능력을 갖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표현하려면 오랫동안 많이 읽고 많이 습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경지에 오르려면 여러 능력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관찰력, 독해력, 사고력, 분석력, 종합구성력을 이용하여 재구성한 현실을 적합한 단어를 찾아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춰야 한다. 이에 더하여 언어를 문법적으로 바르게 사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는 읽고 쓰기를 연습하는 동안에 길러진다.
논쟁의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일은 위의 능력들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와 같다. 훌륭한 곡에 대한 연주 능력은 이를 완성하는 과정이 그리 만만치 않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표절을 통해서는 청중/독자를 설득할 수 없다. 만약 발각되면 인격(이토스)에 손상을 입어 신뢰를 잃는다. 신뢰가 없이는 독자들에게 내 말을 믿으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외면 당하게 마련이다.
청중/독자를 위한 언어를 사용하라
2011년 여름 수해는 예상보다 컸다. 대통령은 4대강 공사로 인해 피해가 줄었다고 했다. 누군가가 이 주장에 반박을 하며 견강부회牽强附會란 말을 사용했다 (가당치도 않은 말로 자기 합리화를 꾀한다는 뜻이다).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아마 이 말을 배운 사람들만 알 것이다. 모르는 이들은 사전을 찾아 무슨 뜻인지 확인한 다음에야 다시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수고를 요구한 것이다. 글 뜻을 모르면 배워서라도 작가 수준에 맞추라고 강요한 셈이다.
통상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식의 글쓰기가 인정된다. 즉 작가의 의도를 알려면 독자도 그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식이다. 글의 의미를 알고 모르는 것은 독자들에게 달려 있다면서 독자의 책임을 요구한다(reader’s responsibility).하지만 논쟁에서는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메시지를 작성하는 이는 반드시 청중/독자의 수준을 가늠하고 이들이 알고 있는 표현과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청중/독자는 배려하는 글, 편히 읽을 수 있는 글을 원한다. 이들이 나의 편으로 오겠다고 하는 마당에, 굳이 자갈밭을 걷게 할 이유가 있을까?
청중/독자를 위한 작업은 비단 단어/표현 선택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메시지 작성 전반에 걸쳐 배려가 이루어져야 한다. 주제, 구성/배치, 문체/문장, 소재 선택도 이들의 취향에 맞춰야 한다. 동화는 아이들이 주 독자층이다. 스토리 구성이나 이를 표현하는 단어 선택을 아이들에게 맞춘, 아이들을 위한 글이다. 주제 또한 아이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단순화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읽고 이해하고 문가를 배울 수 있도록 작성한다. 동화는 읽기도 쉽다. 작가가 아이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논쟁자는 자신의 청중/독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메시지를 작성해야 한다. 전문가든 일반인이든 이들 수준에 맞춰야 한다.
명확하게 표현한다
‘명확한 언어(clarity)’란 내 뜻이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언어다. 거울처럼 내 뜻을 있는 그대로 반사하거나 유리처럼 투명하게 내 속을 보여줄 수 있는 매개체를 칭한다. 따라서 정교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제대로 표현했다 생각하는데 이를 읽은 청중/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글이 어딘가 잘못 작성된 것이다. 너무 추상적이어서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할 수 있다.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고 범위도 매우 넓다. 내가 뜻하는 사랑을 보여주려면 사랑의 구체적 예를 들면 된다. 또한 문장이 문법적으로 틀리거나 단어/표현이 적절히 않아 이해 과정에서 장애가 일어날 수도 있다. 한 문장에 여러 생각들을 한꺼번에 표현할 때 발생하는 폐단이다. 작가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이 같은 잘못들을 수정하지 않으면 메시지 전달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메시지의 질은 마음속 이미지와 이에 대한 표현의 질에 좌우된다. 따라서 확실한 생각(image and thought)이 머릿속에 있지 않은 한, 그리고 이를 적절하게 표현 할 수 있는 능력(linguistic ability)이 없는 한 결과는 어설프게 나타난다. 몇 번씩 읽고 나서도 이해하지 못하면 독자는 중간에 포기할 것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작가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예방 차원에서 점검해야 한다.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를 확실히 하라
펜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 중 으뜸은 글을 쓰려하는 대상의 형상화(conceptualization) 작업이 되어 있지 않아서다. 형상화란 전체 그림 속에 정교한 작은 부분들을 차곡차곡 채워 완성하는 작업을 일컫는다. 머릿속에는 전체적 모습이 스케치 형태로 있는데 이를 이루고 있는 가 부분들이 없거나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의 형상(gestalt)이 뚜렷하지 않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듯 하지만 모른다. 물론 자신은 알고 있다고 여긴다. 이 장애를 극복하는 길은 생각을 하면서 전체 그림에 무엇이 필요한지 찾아내고 이를 완성하는 것밖에 없다. 영화가 머릿속에서 상영되듯이.
이미지를 표현할 단어/문장을 찾지 못할 때
사실 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이 읽고 쓰는 것이다. 읽으면서 단어의 뜻을 이해하게 되고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터득하게 된다. 알고 나면 단어들을 글에 써볼 수 있다. 단어를 많이 알면 알수록 표현의 선택 폭이 그만큼 넓어진다. 이렇게 습작을 함으로써 언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신만의 글을 작성하려면 부단히 갈고 닦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의 것과 차별되는 고유한 스타일의 글을 쓸 수 있다. 또 적시적소에 최적의 표현을 찾기 위해서 피가 마르고 머리가 터지게 고민해야 한다. 소설가 김훈은 글을 쓰면서 이를 하도 악물어 이가 다 빠졌다 고백했고, 극작가 김수현은 글쟁이를 일컬어 ‘천형을 받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이 부분의 향상이 힘들다는 소리다. 많이 읽고 많이 쓰면 능력도 점차적으로 향상된다.
대명사나 불 문명한 표현들을 남발하지 않는다
대명사는 앞에 사용한 단어(물체, 사람)를 다시 지칭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것, 이것, 저것, 이 사람, 저 사람, 이리, 저리, 여기, 저기와 같은 대명사를 느닷없이 사용하면 글의 문맥이 흐려진다. 무엇을 뜻하는지 독자가 추적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사용하는 게 좋다.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은 표현들도 조심해야 한다. 이런 표현들을 쓰는 이유는 알맞은 단어/표현을 찾다가 실패할 경우 너무 힘든 나머지 간단하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살펴보고 이를 청중/독자 입장에서 정확히 기술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나만 아는 표현을 사용해놓고 독자들에게 해석하라고 요구하면 안 된다.
문장이 지나치게 복잡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말의 구조는 주어와 동사 사이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끼어 넣을 수 있다. 따라서 일단 주어로 문장을 시작하고 온갖 표현을 하고 난 다음 이제 됐다 싶으면 동사나 형용사를 쓰고 끝낸다. 즉 한 문장에 여러 생각을 표현해도 문법적으로는 별 무리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어젯밤 우리 집을 떠난 외삼촌은 시장기를 느껴 잠깐 국밥 집에 들려 국밥 한 그릇을 말아달라고 주문하는 도중에 소주 생각이 나 친숙한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한 병 달래서 들이키고 국밥을 30분 동안 들고 안 후 집으로 향하던 도중 친구를 만나 근처 작은 술집에서 다시 매주 10병을 마시고 나서 비틀거리며 집에 도착하니 밤 3시가 되었다.”
작가는 배려 없이 이렇게 쓸 수 있다. 하지만 독자는 이 문장을 읽을 때 숨이 차다. 어렵지 않은 내용이지만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작가가 적어 내려간 생각들을 추적하고 분석하고 종합하여 이해해야 하니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작가는 이렇게 긴 문장을 삼가야 한다. 가급적 한 문장에 한 생각을 담아라. 따라서 위의 문장도 독자의 이해 능력에 맞춰 몇 개의 문장으로 나눠 써야 한다.
문법이 틀린 경우
초안을 작성하다 보면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이 나오게 마련이다. 잘못된 철자나 띄어쓰기는 독자에게 오해의 소지를 남긴다. 철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쓰면서 틀린 것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 만약 철자에 자신이 없다면 사전을 찾아 확인하라. 띄어쓰기를 하는 이유는 글을 읽는 사람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서다. 틀린 철자들, 예를 들어 ‘뽀(뾰)조록하니’, ‘아뿔사(싸)’, ‘몸뚱아(어)리’와 같은 말들은 간단히 고쳐 사용한다. ‘아버지가방에 들어간다.’는 띄어쓰기 잘못으로 의미가 애매하게 되어 있다. 이럴 때는 문맥에 따라 고쳐서 사용한다. 또한 일정한 아이디어로 시작했다가 쓰는 도중에 생각이 바뀌었는데 이것을 잊고 그냥 써내려 가는 경우도 주의해야 한다. 이럴 때 주어와 동사가 어긋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탓이다. ‘선우는 아침 밥을 먹고 난 후 친구를 만나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장미꽃들이 예쁘게 핀 정원을 바라보았다.’ 이 문장은 주어(선우)에 대한 동사(바라보았다)가 작가의 원래 의도대로 작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경우 전후의 문맥을 파악하여 재작성해야 한다.
간결하게 쓰라
문학에서는 긴 묘사나 대화를 사용할 때가 많다. 작가가 마음껏 상상하여 창조한 세계를 보여주려면 갖은 언어의 형태가 필요할 것이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신에게 말하는 형태로 오랫동안 기술해야 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을 묘사할 때도 그렇다. 때로는 한 문장이 거의 한 쪽이 되게 쓰는 경우도 있다. 헨리 제임스의 작품들이나 이문구의 <관촌 수필>이 여기 해당한다. 독자는 창조된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 탐험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논쟁의 글은 창조 목적에 따라 쓰인 글이 아니다. 독자들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작성하는 글이다. 따라서 중요한 사항들을 이해하기 쉽게 직설적이고 간단하게 표현해야 한다. 같은 뜻이라도 가능한 한 단어의 수를 줄여 필요한 말만 사용한다. 또한 표현이 뜻하는 현실을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는 단어를 사용한다. 만약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이 장황하거나, 설명하는 부분이 애매모호하면 축약된 비유적 언어를 사용한다. 그래야 머릿속에서 형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독자는 글을 더 빨리 읽고, 훨씬 더 쉽게 이해하고,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간결하게 쓰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또 다수의 말을 축약하여 대체할 수 있는 좋은 표현/단어를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간결하게 쓰는 법칙이 있으면 좋겠지만,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법칙으로 축약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를 제시할 수 없다. 다만 경험에 의해 발견한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하겠다.
1. 반복되는 단어/표현들을 줄여라. 글을 쓰다 보면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된다. 다시 읽어보고 축약할 수 있는 반복적인 문장과 단어의 수를 줄여라.
2. 경제적인 표현으로 대체하라. 개념은 이렇다. <개그 콘서트>가운데 ‘굿모닝 한글’이란 코너가 있다. 매튜가 복잡하게 영어로 장황하게 설명하면, 이종훈은 이것을 짧은 한국어로 줄여서 설명한다. 100개의 단어로 설명한 것과 10개의 단어로 설명한 것의 효력이 같다면 당연히 10개의 단어 표현을 사용하는 게 좋다.
3. 간결하게 쓰더라도 핵심적인 표현은 보존한다. 너무 간결한 문장은 의사 전달이 안 될 수도 있다. “쉽게 써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아마 제일 먼저 ‘어떻게?’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제시된 문장의 뜻이 너무 일반적이라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할 것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상황을 펜타드(5W’s and 1 H)를 통해 독자가 아는 표현을 사용하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설명하라.”고 한다면 “쉽게 써라!”보다 훨씬 자세해진다. 읽는 사람들이 어떤 액션을 취해야 할지 금방 납득하기 때문이다.
정확성을 추구하라
정확성(accuracy)은 사실이냐 거짓이냐의 문제다. 알다시피 논쟁은 사실(pistis)에 입각해야 한다. 사실을 이루고 있는 자료가 잘못되거나 왜곡되면 사실에 연관된 모든 것들이 의심을 받게 마련이다. 지난 번 서울시에서는 무상 급식에 대한 주민 투표를 하기 위해서 서울 시민들의 서명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서명에서 “서울시는 복지 포퓰리즘 추방 국민운동본부가 주민투표를 청구하면서 제출한 서명부에 대해 전산 확인 등 자체 검증 작업을 한 결과, 청구인 81만5천817명 중 67.2%인 54만8천342명의 서명이 유효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고 12일 밝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통계는 논쟁의 자료로서 부적합하다. 비록 올바른 절차를 거쳐 유효하게 처리했다지만, 약 27만 개의 서명이 거짓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자료가 오염이 되어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기술記述을 변경하여 거짓을 사실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남자를 여자로 바꿨다든가 어떤 목적을 위해 사건의 특성을 달리하여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용한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발견되면 이런 정보를 이용한 사람은 비난 받게 마련이다. 예전에 탤런트 김영애의 황토백 사건은 거짓 고발에 의하여 피해를 본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그녀는 2007년 10월 방송된 KBS <이영돈의 소비자 고발>프로그램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 승소했다. (소송도 논쟁의 한 장르다(forensic rhetoric)). 이 사건은 자료를 왜곡하여 거짓을 진실이라고 보도한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우리는 진리(the whole truth, agathon)를 있는 그대로, 신처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진실성을 바탕으로 검증된 자료를 제시하며 정확성을 추구할 수 있다. 정확한 마음을 가지고 자료를 기술하면 거짓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가치관에 맞는 표현을 선택한다
언어는 쓰는 사람의 가치관을 담는다. 반대로 생각 속 가치관이 어떤 특정한 언어를 사용하도록 조종하기도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어는 그 사람의 생각을 반영한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쪽과 찬성하는 쪽의 언어는 다르다. 학교급식을 유/무상으로 하자는 이들의 목소리도 다르다. 이들은 모두 주장을 하는 데 있어 자신들에게 유리한 단어/표현을 사용한다. 반대로 선택한 단어/표현들이 이들의 생각을 대변하기도 한다. 학교급식을 국가 혹은 자치단체에서 재정 부담하는 것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전면 무상 급식은 망국의 포퓰리즘’이라고 하고, 찬성 쪽에서는 ‘행복 급식은 진정한 의무 교육의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주제를 놓고 사용하는 용어가 사뭇 다르다. 반대편에서는 ‘무상, 망국,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들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행복, 진정, 의무, 실현’이란 단어들을 사용했다. 각각의 단어들은 이것을 사용한 사람들의 입장과 가치관을 나타낸다.
이처럼 가치관을 내포하는 언어들은 특히 정치나 상품을 선전하는데 자주 이용된다. 정치는 “우리 당은/나는 옳다.”는 주장을, 광고는 “이 물건 사세요.”라는 주장을 바탕으로 표현을 선택한다. 선전 중에 ‘패키지여행의 달인’이라든지, ‘음, 깨끗해. 넓고 청정한 곳에서 스트레스 없이 좋은 풀만 먹는 행복한 젖소들’이라는 문구를 보면 무엇을 팔고자 하는지 금방 알게 된다. 주장과 반박을 거듭하는 정치권의 언어 공방도 자신이 옳아 한 발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가정에 기반을 둔다. 물러서면 가치관의 상실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감성의 언어는 이성적 언어보다 가치를 더 많이 표현한다. 주장도 강해진다. 따라서 때로 사람들이 감정을 삼가고 이성적으로 주장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편들기나 편견을 없애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감정 없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성적으로 주장한다고 해도 거기엔 여전히 가치가 담겨 있다. 그리고 글에서 자신의 가치를 담고 있는 단어와 표현을 모두 없앤다면 이는 더 이상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글이 된다.
2011년 8월 11자 조선일보에 이한우 기획취재부장은 사설을 쓰면서 감정을 듬뿍 실어 ‘참을 수 없는 신문 읽기의 두려움’이란 제목을 달았다. ‘참을 수 없다’와 ‘두려움’이란 표현으로 그의 주장은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내용도 다수의 감성적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불안, 공포, 위기, 희망, 절망, 비관적, F학점, 한심한’등 감성의 언어가 사설 전반에 퍼져 있다. 읽다 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럼 같은 상황을 이런 언어 말고 이성적 언어로 다뤘을 때 사설의 주장이 바뀔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단지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어 강도가 약해질 뿐이다. 중립적 표현을 사용한다 해도 여전히 자신의 주장은 글 속에 내재하니까.
따라서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모든 표현은 사용자가 지닌 가치관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뒤집어 말하면 사용하는 표현과 단어를 주장에 담긴 가치관에 맞도록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낙태를 찬성한다면 이 영역에 맞는 단어/표현만을 사용해야 한다. 낙태 반대자를 위한 용어들을 이용해서 내 주장을 뒷받침하면 안 된다. 무상 급식에서 ‘무상’이라는 표현은 ‘공짜’라는 부정적인 면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찬성하는 이들이, 반대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무상급식’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무언중에 반대파에게 동의하는 꼴이 된다. 찬성파는 ‘행복’이라든지 ‘의무’라든지 다른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표현을 고르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표현한다. 주장의 표현은 차후에 필요한 하위 표현들의 선택 범위를 제한한다. 주장과 영역이 다른 것들은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주장의 관점에서 문제를 한정한다. 그리고 문제를 정의하는 데 적합한 단어/표현들도 찾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결정하고 난 후 해결책에 대한 표현을 찾는다.
감성적인 언어 사용을 자제하라
감성의 언어란 감정을 내포하고 있거나 자극하는 표현의 범주를 말한다. ‘울고, 웃고, 화내고, 슬프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측은하고, 귀엽고’등 감정은 참 많다. 청중/독자에게 어떤 감정이 생기게 하는 언어들이다. 이것들은 주로 시詩에 많이 사용된다. ‘인생은 환희로 가득 찬 길’, ‘사랑은 마음의 샘’, 혹은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오랫동안 서서 굽어져 보이지 않는 곳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와 같이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다. 감성의 언어는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을 할 때는 감성의 언어 사용을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 지나친 사용은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니다. 감성의 글은 청중/독자가 시간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듣거나 읽으면 마음속에 파문이나 풍랑이 일어난다. 평정심을 잃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다. 자신이 욕설이나 칭찬을 들었다고 가정해보라. 보통 사람들은 먼저 화가 날 것이다. 혹은 기분이 좋을 것이다.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이렇듯 자극적인 언어는 청중/독자를 흥분에 휩싸이도록 유도한다.
정치가들은 정치선전(propaganda)을 곧잘 이용한다. “내 주장이 옳다. 그리고 반대파는 틀렸다. 만약 내 주장에 찬성을 하지 않으면 넌 틀렸다.” 거의 이런 식이다. 청중/독자에게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감성적 어법을 즐겨 사용한다. 예를 들면 “당신은 4대강 사업을 찬성 혹은 반대하는 쪽일 것이다. 사업에 찬성한다고? 그럼 당신은 찬성하는 쪽이군.” 즉 이것인가, 저것인가의 이분법을 내세워 어느 한 쪽을 선택하게 한다. 양쪽을 가늠할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가운데 설 수 있는 자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족이냐 저쪽이냐’보다 훨씬 더 복잡한데!
논쟁의 참여자는 언어에 트릭을 거는 마술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감성적 언어의 이용 문제는 작가/연사의 도덕적 자질에 닿아 있다. 이는 마술사가 청중 앞에서 마술을 보여주는 것도 상통한다. 마술사는 트릭을 써서 청중에게 진실을 공개하지 않는다. 청중을 홀려 감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 가리고 저것 가리며 본질을 못 보게 함으로써 호랑이가 사라지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비록 공연 중에는 환상적이라 여길지라도 나중에까지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마술사가 트릭을 썼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이다.
감성적 언어의 특성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듣거나 읽다 보면 웃기도 울기도 하고, 화를 내거나 박수를 치게 되고, 또 감동하게도 된다. 하지만 막상 끝이 나면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분에 휩쓸려 오락가락한 탓이다. 감성의 언어는 청중/독자가 결정을 내리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다. 반면, 판단력을 흐린다. 하지만 이의 영향권을 벗어나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 반감反感은 오히려 배가倍加될 것이다.
암시는 시누중하게!
<표준국어 대사전>에 의하면 ‘고양이’를 “동물, 고양잇과의 하나. 원래 아프리카의 리비아살쾡이를 길들인 것으로, 턱과 송곳니가 특히 발달해서 육식을 주로 한다. 발톱은 자유롭게 감추거나 드러낼 수 있으며, 눈은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애완동물로 육종하여 여러 품종이 있다.”고 정의한다. 고양이란 단어를 동물 자체에 초점을 맞춰 설명한 것이다. 이 정의가 고양이의 원뜻이다. 그런데 단어는 원뜻에 더하여 또 다른 의미들을 지닐 수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든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맞긴 격’이라든지 ‘고양이 쥐 생각하듯’ 같은 속담들은 위에서 정의를 내린 고양이와 사뭇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고양이의 특성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용하여 ‘어려운 일 시행하기’, ‘믿지 못할 사람에게 일 맡기기’, ‘겉으로 생각해 주는 척함’과 같은 새로운 의미들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원래의 뜻을 벗어나는 의미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암시(connotation)라고 부른다.
논쟁자는 단어의 암시적인 의미를 고려하면서 논쟁의 메시지를 작성할 때 사용할 단어를 매우 조심스럽게 선택해야 한다. 잘 고른 단어 하나가 나의 주장을 살리기도 하고, 잘못 고른 단어 하나가 나의 의도를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논쟁 상대방이 자신의 주장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 서용한 말을 무심코 따라서 사용했다가 그 말의 의미에 갇혀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 낙태는 생명이 있는 태아를 없앤다는 의미다. 찬성론자들은 이 말을 그냥 사용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말 자체에 죽인다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찬성론자들은 태아는 생명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 말을 사용하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자신들이 살인자라고 인정하는 꼴이 된다.
학교 급식을 자치단체에서 전적으로 맡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것을 무상 급식이라 부른다. ‘무상은 공짜’라는 부정적인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고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듣는/읽는 사람이 무산 계급과 공산주의/사회주의자들이나 이것을 주장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찬성론자들은 심사숙고하지 않고 이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찬성하면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느낌을 받게끔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데도 말이다.
암시를 잘 이용하는 곳은 여론조사 기관이다. 목적에 따라 질문들을 어떤 단어로 제시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다르게 나타난다. 어귀에 따라 대답자의 심리 상태가 변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성인 남자들에게 강간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강간’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직석적으로 질문한 설문에는 상당히 낮은 비율로 ‘범하지 않겠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이 단어를 빼고 달리 묘사한 설문에는 높은 비율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느낌이 달라 반응도 달라진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설득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주장하고 설명할 때 사용한 표현들은 청중/독자가 친근감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청중이 다가 설 수 있다.
개정과 교정에는 순서가 있다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란 용의 그림을 그려놓고 눈에 점을 안 찍어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심혈을 기울여 훌륭한 작품을 만들지만 정작 마무리가 잘 되지 않으면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마무리 작업은 어떤 일에 있어서나 매우 중요하다. 건물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개인의 기술을 완성하는 일에서는 필수 불가결하다. <남자의 자격>이란 TV 프로그램에서 합창단을 구성하여 경연 대회에 참가하는 미션이 있었다. 이들은 노래를 배우고 끊임없이 연습하면서 합창의 완성도를 높이려고 했다. 틀리는 곳은 무수히 고쳐가며 지휘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무대에 섰을 때 자신들의 최고 역량을 선보였다.
언어로 된 작품도 마찬가지다. 초고를 완성하고 난 후 힘이 든다고 이를 마지막 원고로 여기면,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지는’꼴이 된다. 완성된 원고를 다시 읽어보며 글의 일관성(글 전체가 하나의 생각이어야 한다)과 연관성(문장이 전 문장의 흐름을 이어받아야 한다)을 점검하고, 문법적으로 잘못되고 틀린 부분이 없는지 꼼꼼히 살핀 다음 그것들을 다듬어야 훌륭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처음부터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가며 전체와 부분들이 잘 구성되어 있는지, 주어와 동사 관계가 원만한지, 형용사나 부사가 적절하게 쓰였는지 등도 점검한다. 반복적이거나 어색한 표현들은 다시 고친다. 좋은 작품은 개정과 교정의 과정을 통해서만 용龍처럼 승천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개정(revising)은 생각의 단위로 한다. 한 문단에서 생각을 이루고 있는 문장들을 모두 지우고 새로 쓰곤 한다. 그리고 글의 논리적 구조를 바로 잡는 데 초점을 둔다. 원고 전체를 중심적인 생각(주제문)을 염두에 두고 문단 단위로 살핀다. 그리고 삐뚤어진 곳들을 발견하면 모두 삭제하고 완전히 새로 쓴다. 주제문(주장)과 소주제문(이유)의 관계를 먼저 점검한다. 주장과 이유의 관계가 부적절하면 이들의 표현을 고친다(주장을 고치든, 이유를 고치든).각 문단에서 예를 들었거나 설명했는데 이것이 논리적으로 주제문이나 소주제문에 적합하지 않으면 문단 전체를 뒤엎고 다시 작업한다. 예, 통계숫자, 시나리오 등 지지하는 소재를 다시 찾아 인용한다. 때에 따라서는 최적의 소재를 다시 찾기 위해서 추가적인 리서치도 불사해야 한다.
개성이 끝나면 교정을 한다. 교정을 먼저 하고 개정을 하면 먼저 한 교정은 개정 중에 사라지게 된다. 시간 낭비다. 교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문장을 손보는 방법(editing)과 단순 실수를 바로 잡는 방법(proof-reading)이다. 문장을 고칠 때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전문장과 후문장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연결시키는 것과 문장의 문법적인 면을 바로 잡는 것이다. 문장은 한 생각을 다루는 것이 원칙이다.
문장을 쓰다 보면 생각을 별안간 무의식적으로 바꾸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쓸 글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긴 글을 쓰다 보면 이런 실수들이 종종 일어난다. 이를 방지하려면 반드시 글을 처음부터 읽어 보면서 연관성을 확인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뒤따르는 문장은 앞에 쓴 문장의 내용을 이어받도록 고치고, 문장 하나에 하나의 생각이 완전히 드러났는지 파악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온전하게 표현됐는지 점검한다. 이처럼 문장에 나타나는 실수를 고치면서 동시에 단순 실수를 확인한다. 철자나 띄어쓰기가 잘못 되었으면 고친다. 잘 모르면 철자법 책이나 띄어쓰기를 위한 책, 또는 사전을 옆에 두고 확인한다.
개정과 교정은 원고를 완성하는 전 과정에 걸쳐 일어난다. 쓰다가 말이 안 되면 통째로 지우고 다시 쓴다. 틀린 곳을 발견하면 즉시 고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초고를 완성하고 난 뒤에 다시 한 번 개정과 교정 과정을 거친다. 아무리 많이 손을 보았다고 하더라고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정/교정을 한꺼번에 같이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최종 원고를 완성하기 전후에 여러 번 읽어가며 단계별로 실시해야 한다. 시간을 두고 일고 또 읽고, 원고를 쓰며 눈으로 읽고, 소리를 내어 읽고, 원고를 완성한 후 친구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해서 본인이 직접 듣기도 한다.
개정을 먼저 하고, 교정을 나중에 하라. 눈과 귀에 거슬리는 곳들을 발견하면 주저하지 말고 손을 보라.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원고를 완성해야만 연설하거나 책을 발간할 때 자신의 최고 실력을 보여주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미주시학 2013년 통권 제8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