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거리 <책을 한권 읽거나 완전히 배우고 나면 하는 책걸이 유래>-발췌
조선시대 서당에서는 책 한권을 마칠 때마다 훈장에게 평가를 받았다. 여기서 합격하면 책걸이, 또는 책씻이(洗冊)라는 작은 잔치를 마련했다. 책걸이 잔치 때는 형편에 따라 곡식과 의복을 선물했다. 스승은 친필이 든 봉투 하나를 내리는데, 안에는 그 제자에게 알맞은 좌우명을 적어 놓았다.
머리가 잘 돌아 일을 설치는 성격이면 어리석을 ‘우(愚)’자를, 독불로 남과 어울리지 못하면 합할 ‘협(協)’, 입이나 행동이 가벼우면 삼갈 ‘신(愼)’자를 써주어 평생 머리맡에 두고 근신토록 했던 것이다.
이규경(李圭景 1788~)이 쓴 `중용변징설(中庸辨澄說)'이라는 책에 `졸업'이라는 단어가 보이기는 하나 널리 쓰인 것은 개화기 이후 근대적인 학제가 확립되고 난 후의 일이다. 정해진 과정이나 학업을 모두 마친다는 의미로 정규학교뿐 아니라 각종 교육기관에서도 쓰이는 말이 됐다.
조선시대에도 졸업과 유사한 행사가 있었다. `책걸이(책씻이)'가 그것이다. 서당에서 학동이 책 한 권을 떼면 학부모가 훈장을 상객으로 모시고 잔치를 벌였다. 궁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원자가 책 한 권을 떼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스승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발표회를 가졌다.
이를 `배강(背講)'이라 하는데 일종의 졸업고사와 같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원자가 책을 다 외고 묻는 말에 답변을 잘하면 왕은 노고를 치하하면서 스승들에게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다과상을 차려주었다.....
掛冊禮(괘책례)...
옛날 서당에서 학생이 책한권을 떼면 " 책거리 "라고 하는 축하행사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최근에는 "축하 합니다,축하 합니다,사랑하는 **의 책거리를 축합니다 "의 생일 축하곡에 맞추어 노래와 박수를 치고 시루떡, 다과 술 등등 을 나누어 먹는 서실 문화로 접목되고 있다는데..
서당은 고구려 경당에서 비롯하여 고려의 경관을 거쳐 조선 사회로 넘어와 講讀,製述,習字 를 내용 으로 하는 사설 서민 교육 기관 으로써 年中 여가지 행사를 치룬다. 그 종류로는괘책례, 장원례, 開接禮, 相輯禮, 위로회 등 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책거리" 이다.
학생이 한권의 책을 끝내면 그책을 걸어 둔다는 뜻에서"掛冊" 이며, 다음 사람에게 물려 주기 위해서 책을 깨끗이 손질하는 習俗에서 洗冊禮(세책례)라는 "책씻이" 행사 과정도 거친다.
그리고 서당에서는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을 주로 배우는데, 테스트는 매일, 일주일, 보름 , 한달 단위로 암기와 받아쓰기를 했고, 훈장님 앞에서 일대일로 시험을 보는데 통과를 해야만 다음 진도를 나간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책 한권을 다 배우고 나서 종합 테스트를 통과 하면 그 책을 메어서 기둥에 걸어둔다고 해서 책걸이라는 유래가 있다.
아이들이 달초에 매여 살면서 책걸이를 하게 되면 상으로는 형편에 따라서 음식이나 곡식, 옷을 준다. 이때 스승은 제자에게 修身之戒라 하여 글을 써서 봉투에 넣어서 준다. 수신지계는 제자의 성격을 보고 좌우명으로 수신하라 적은 글이다.
행동이 느리고 우둔한 자에게는 말 마(馬)자를 ,
게으르고 늦잠을 자는 자에게는 닭 계(鷄)자를,
머리가 잘 돌아 일을 설치는 성격이면 어리석을 '우(愚)'자를,
독불로 남과 어울리지 못하면 합할 '협(協)'자를,
성품이 모질고 배려함이 없으면 어질 인(仁)자를,
효성이 부족한듯 싶으면 어미에게 효도한다는 반포지효(反哺之孝)의 까마귀 오(烏)자를,
겸손치 못하고 오만하면 공손 공(恭)자를,
매사에 조급하고 서두르면 소 우(牛)자를 ,
입이나 행동이 가벼우면 삼갈 '신(愼)'자를 써주어 평생 머리맡에 두고 근신하도록 했던 것이다. 뜻 글자인 한자(漢字)는 글자마다 일상과 수신에 교훈이 될 금과옥조(金科玉條)를 함축(含蓄) 한 글자의 짧은 글귀(短句)에도 요즘 책 몇 권 읽는 것보다 효과가 있다 할 것이다.
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정탁이라는 사람이 스승의 문하를 떠날 때 하직 인사를 하면서 스승께 수신을 위한 한 말씀을 청하자 빙그레 웃으시며 " 뒤뜰에 소 한 마리 메어 놓았으니 몰고 가게나" 했다. 평소 제자의 성품이 급해, 언행이 민첩하고 날카로워 조급한 언행이 질주하는 말과 같아서 넘어질까 염려가 되어 더디고 우직하게 살아야 대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제자의 단점을 바로 잡아주려는 스승의 사려 깊은 배려이다. 훗날 정탁은 "마음의 소"를 가슴에 새기며 처신의 길잡이로 삼아 오늘에 내가 있었다는 회고록을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