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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화지맥 2구간(살(설)피재-화장산(859.4m)-노루재(31.35.36국도)-방고개).
◈ 산행코소와 거리 및 소요시간 : 도상거리 11km. 5시간 20분.
경북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1-2 . 샘골 마지막 농가-살(설)피재-754m봉(아홉사리봉)-742.3m 삼각점봉 왕복-높은터(아홉사리재)-
705m- 화장산(華獐山.859.4m)-노루재(31.35.36번 구 국도)-677m(콘크리트 산불초소)-682.7m삼각점봉-31번국도-법전면 눌산리 방고개(정자)
◈ 일시 : 2013. 8. 15(목.광복절).
◈ 날씨 : 연일 계속되는 폭염으로 봉화 31.7도 이나 바람끼가 있고 높은산이라 산행할만함.
◈ 동행인 : 요맥회 10명. 요맥 강형태 회장님. 최평칠님.이한원님.정영옥님.이선우님.장희익님.정환규님.최덕조님.정송자님. 나.
◈ 지도.
각화지맥 2구간(살(설)피재-화장산(859.4m)-노루재(31.35.36국도)-방고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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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정리.
06 : 20. 천안출발.
08 : 00. 일죽 대송휴게소에서 합류하여
08 ; 45. 박달령휴게소.자주 들리는 집인데 오늘은 대만원.
10 : 50/11 : 06. 제천,영주거쳐 봉화외곽 춘양거쳐 각화사도착.전엔 태백산사고지 수호사찰.지금은 수도도량.표고 650m에위치.
11 : 34/6.경북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1-2 . 샘골 마지막 축산농가. 수렛길따라 오른다. 옛 보부상길이란다.
11 : 49. 살(설)피재.고개 넘어엔 소천에서 올라온 세멘길과 종중묘와 농가집 한 채. 임도따라 오르다 우측능선으로
11 : 54. 간벌목능선에서 우측으로 각화산부터 지나온 능선이 보이고
12 : 06, 쭉쭉 뻗은 춘양목 지대의 둔덕봉을 넘어가며 옥돌봉과 문수봉을 건너다 보고
12 : 13. 754m봉 (아홉사리봉)삼거리.맥은 좌측이나 우측 건너편의 삼각점 찍으러 가고.
12 : 16. 742.3m 삼각점봉(춘양 421.2004재설).우측으로 각화산쪽이 겨우 보인다.
12 : 20/38. 다시 돌아온 754m봉 (아홉사리봉)삼거리에서 점심.아름드리 춘양목들
12 : 42. 능선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서 묘를 지나고
12 : 44/56. 바로 ㅏ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야할 것을 좌측으로 내려가서 알바하고 다시 올라옴.<주의지역>
13 : 01. 춘양목들이 즐비한 내림길에 우측으로 청량산이 조망되고
13 : 02/04. Y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야 하는데 입구가 잘 안 보인다.<주의>
13 : 09. 간벌목지대에서 화장산이 보이고
13 : 11/13. 아홉사리고개 임도 삼거리.높은터 안내판과 보부상길 이정표.좌측은 씨라리골,우측은 가마골.
13 : 26. 705m봉. 잔나무 조림지를 올라 넝쿨식물이 휘감은 낙엽송밭에서 좌에서 우로 사면길로 돌아가는데
여기서 좌측 마루금이 705m봉이고 좌측이 벌목하여 조망이 있는걸 사면길로 건너가서 못봤다.
13 ; 48/14 : 00. 된비얄 올라선 화장산(華獐山.859.4m).묘. 삼각점(춘양 306. 2004재설).화장산푯찰.
이한원님은 무릎에 있던 사마귀가 떨어져 피가 철철나는데 아스피린복용자라 지혈이 안된다.
14 : 05. 능선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직진하는 현동리 내려가는길로 내려가기 쉽다>
14 : 09. 뚝 떨어져 내려온 낙엽송조림지에서 다시 한번 좌측으로 뚝 떨어져 내려간다.
14 : 14. 화장암 갈림길에서 우측 화장암보러 내려가고
14 : 16/9. 화장암(華藏庵). 장자는 노루장 獐이 아니고 감출장 藏자라 화장산과는 다르다.
임진란때 이 근처에서 전사한 600명 의병들의 충혼탑을 세울 거란다.
멀리 일월산과 제비산(917m)이 정면으로 보인다. 다시 내려온 마루금으로 돌아가야 한다.
14 : 30. 된비얄 내려선 안부. 2,3분 올라가기 싫어 임도따라 가 요령 피우다 더 고생하고 복귀.
14 : 35. 노루재 터널위봉.넘어서면 묘가있다.
14 : 40/1. 노루재.31.35.36번도로이나 지금은 터널이 생겨 한가해 졌다. 우측으로 내려와 우측 임도에서 올랐는데
좌측으로 오르는게 낫겠다.노루재 630m표지판은 높이가 틀린다.임도초입에 563.4m수준점이 있는데 확인은 못했다.
14 : 57. 표고 100m를 단번에 올라가는 된비얄 오름길에 잠시 숨 돌리고
15 : 04. 677m봉. 순한길을 잠시가서 정점엔 오래된 세멘 산불초소.조망은 없고 좌측으로 꺽어간다.
15 : 07.임도삼거리.윗쪽 임도로 들어서며 좌측 능선으로 오름.이 임도는 삼각점을 우측 사면으로 건너가서 다시 만남.
15 : 12/19. 682.7m 삼각점봉. 묘2기.삼각점은 식별불가. 좌측으로 30여m가서 우측으로 내려감.
15 : 21. 다시 만난 임도 삼거리. 임도따라 직진해 감.
15 : 23. 임도는 우측으로 가고 100여 m가선 능선 갈림길에서 좌측 능선으로.좌측에 사면길 있다.
15 : 28. 우측으로 꺽임봉.빤빤한 직진길은 598m봉 가는길.여기서 부터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15 : 30. 길은 수렛길 정도로 넓고 "안전통로"푯찰. → 묘지 → 좌측 골짜기에 빨간집
13 : 35. Y길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13 : 36. 전신주가 나오고 이어서 세멘길이 나와 세민길따라 우측으로 내려간다.
15 : 41. 세멘길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간다.전신주 넘버. 99904 722.우측은 감성골 가는길 <주의할곳이다>
15 : 44. 임도에서 우측 전봇대 (99904 611)뒤가 맥이나 도로따라가도 된다.
15 : 45. 봉분을 석측으로 두른 묘. 묘앞으로 내려가면 바로 살짝 돌아온 임도를 만난다 .
15 : 47. 우측 계곡에 가정집같지 않은 잘 지은 집이 내려다 보이고
15 : 48. 임도가 좌측으로 크게 휘어 내려가는지점에서 직진하는 산길로 들어서 전봇대 뒤로
15 : 51. 둔덕봉에서 삼각점봉과 멀리 화장산부터 지나온 능선을 뒤 돌아 보고,
15 : 54. 넘어가면 좌측으론 일월산과 장군봉이 멀리 보이고 가까이엔 월암산과 우뚝한 제비산(917m)이 보인다.
15 :59. 마지막봉에서 직진 같지만 우측 묘지쪽으로 내려서고
16 : 02. 忠義衛 완산이공묘.
16 : 08/14. 절개지를 우측으로 내려온 31번국도.소천면.법전면 경계판. 적설량 측정대.잠시 쉬고.현동10km.
16 : 26. 봉을 세 개 넘어 살짝 내려선 좌측으로 꺽어 내려가는데 춘양목이 울창하다.
16 : 30. 도상 임기터널위.산야초재배지 입산금지 표찰이 수시로 나온다.
16 : 37. 도상 513m봉. 길 좌측은 철조망으로 막아놨고 감시 카메라(?)가 있다.
16 : 40. 넓은 밭이 나와 밭 우측 가장자리로 내려가며 제비산이 우뚝하게 보인다.
16 : 43. 세멘고개. 앞 둔덕봉은 잘라먹고 세멘길따라 우측 방고개로.마을과 정자와 월암산,장군봉능선이 보이고
16 : 47. 방고개. 정자와 큰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위.좌측에 마을. 고도가 480m쯤되는 고랭지.일월산과 덕산지맥조망.
옛우물터에서 등목하고. 길은 남쪽은 낙동강이라 길이 막히고 북쪽만 트여있다.
17 : 10. 봉화군 법전면 눌산리 방고개출발.
18 : 05/50. 영주 흑마늘 삼계탕집에서 정송자님이 내신 흑마늘 삼계탕과 정환규씨가 가져온 더덕주로 저녁. 감사합니다.
20 : 45. 오갑산휴게소 한번 들리고 일죽 대송휴게소 도착.
21 : 45. 천안도착.
◈ 산행후기.
※ 살(설)피재-화장산(859.4m)-노루재(31번국도). 6km. 2시간 40분.
06 : 20. 천안출발.
08 : 00. 일죽 대송휴게소에서 합류하여
08 ; 45. 박달령휴게소.자주 들리는 집인데 오늘은 대만원.
10 : 50/11 : 06. 제천,영주거쳐 봉화외곽 춘양거쳐 각화사도착.전엔 태백산사고지 수호사찰.지금은 수도도량.표고 650m에위치.
11 : 34/6.경북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1-2 . 샘골 마지막 축산농가. 수렛길따라 오른다. 옛 보부상길이란다.
11 : 49. 살(설)피재.고개 넘어엔 소천에서 올라온 세멘길과 종중묘와 농가집 한 채. 임도따라 오르다 우측능선으로
11 : 54. 간벌목능선에서 우측으로 각화산부터 지나온 능선이 보이고
12 : 06, 쭉쭉 뻗은 춘양목 지대의 둔덕봉을 넘어가며 옥돌봉과 문수봉을 건너다 보고
12 : 13. 754m봉 (아홉사리봉)삼거리.맥은 좌측이나 우측 건너편의 삼각점 찍으러 가고.
12 : 16. 742.3m 삼각점봉(춘양 421.2004재설).우측으로 각화산쪽이 겨우 보인다.
12 : 20/38. 다시 돌아온 754m봉 (아홉사리봉)삼거리에서 점심.아름드리 춘양목들
12 : 42. 능선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서 묘를 지나고
12 : 44/56. 바로 ㅏ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야할 것을 좌측으로 내려가서 알바하고 다시 올라옴.<주의지역>
13 : 01. 춘양목들이 즐비한 내림길에 우측으로 청량산이 조망되고
13 : 02/04. Y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야 하는데 입구가 잘 안 보인다.<주의>
13 : 09. 간벌목지대에서 화장산이 보이고
13 : 11/13. 아홉사리고개 임도 삼거리.높은터 안내판과 보부상길 이정표.좌측은 씨라리골,우측은 가마골.
13 : 26. 705m봉. 잔나무 조림지를 올라 넝쿨식물이 휘감은 낙엽송밭에서 좌에서 우로 사면길로 돌아가는데
여기서 좌측 마루금이 705m봉이고 좌측이 벌목하여 조망이 있는걸 사면길로 건너가서 못봤다.
13 ; 48/14 : 00. 된비얄 올라선 화장산(華獐山.859.4m).묘. 삼각점(춘양 306. 2004재설).화장산푯찰.
이한원님은 무릎에 있던 사마귀가 떨어져 피가 철철나는데 아스피린복용자라 지혈이 안된다.
14 : 05. 능선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직진하는 현동리 내려가는길로 내려가기 쉽다>
14 : 09. 뚝 떨어져 내려온 낙엽송조림지에서 다시 한번 좌측으로 뚝 떨어져 내려간다.
14 : 14. 화장암 갈림길에서 우측 화장암보러 내려가고
14 : 16/9. 화장암(華藏庵). 장자는 노루장 獐이 아니고 감출장 藏자라 화장산과는 다르다.
임진란때 이 근처에서 전사한 600명 의병들의 충혼탑을 세울 거란다.
멀리 일월산과 제비산(917m)이 정면으로 보인다. 다시 내려온 마루금으로 돌아가야 한다.
14 : 30. 된비얄 내려선 안부. 2,3분 올라가기 싫어 임도따라 가 요령 피우다 더 고생하고 복귀.
14 : 35. 노루재 터널위봉.넘어서면 묘가있다.
14 : 40/1. 노루재.31.35.36번도로이나 지금은 터널이 생겨 한가해 졌다. 우측으로 내려와 우측 임도에서 올랐는데
좌측으로 오르는게 낫겠다.노루재 630m표지판은 높이가 틀린다.임도초입에 563.4m수준점이 있는데 확인은 못했다.
10 : 50/11 : 06. 제천,영주거쳐 봉화외곽 춘양거쳐 각화사도착.
전엔 태백산사고지 수호사찰.지금은 수도도량.표고 650m에 위치.
대웅전뒤로 보이는 봉이 1174.5m 삼각점봉이고 그 우측 아래 골짜기에 태백산 사고지가가 있겠다.
각화사[ 覺華寺 ]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676년(문무왕 16)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으며, 1101년(숙종 6) 국사 무애계응(無礙戒膺)이 중건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쳐, 1777년(정조 1)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 중의 하나인 이곳에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를 건립하여 왕조실록을 수호하게 한 뒤 800여명의 승려가 수도하여 국내 3대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1913년 의병을 공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사고와 절을 불태웠다고 하는데, 혹은 1945년 해방 후 소실되었다고도 한다. 1926년에 달현(達玄)이 법당을 비롯한 다섯 동의 건물을 중건하였고, 1970년에 금오(金烏)가 요사채를 중건하였고, 1979년 범종을 주조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사고 건물을 발굴하고 사고지를 정비하여 1991년 2월 26일 사적 제348호로 지정하였다. ]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2층의 누각인 범종각과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귀부(龜趺)와 삼층석탑이 있다. 이 중 귀부는 가로 2m, 세로 1.85m의 방형석(方形石) 위에 놓인 길이 1.75m의 것으로서, 시대나 유래 등은 알 수 없으며, 비석이 꽂혔던 자리만 남아 있다. 삼층석탑은 완전히 도괴된 것을 다시 모아 조성한 것으로, 높이는 약 3m이며 체감률이 낮고 상륜부가 없다.
이 절이 있는 석현리와 인접한 서동리의 춘양고등학교(春陽高等學校) 부지에는 각화사의 전신인 남화사지(覽華寺址)가 있다. 원효는 이 절을 이건하여 각화사를 창건한 뒤, 옛 절인 남화사를 생각한다고 하여 각화사라 하였다는 설이 전한다. 이 남화사지에는 보물 제52호로 지정된 봉화서동리삼층석탑 2기가 있으며, 2기 가운데 동탑에서 사리병과 99기의 소형 토탑(土塔)이 둘려 있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사찰 남쪽 약 200m 지점에 백월대사(白月大師) 등 10기의 부도가 보존되어 있다.
10 : 50/11 : 06. 각화사.
대웅전뒷봉이 전망바위,우측봉이 999m봉.
10 : 50/11 : 06. 각화사.
태백선원.수도 도량이라 말소리도 조용조용.
안거하는 백일동안 하루 2,3시간씩만 자면서 18시간씩 정진하는 전국유일의 가행정진 도량이란다.
얼마전에 태백산사고지를 복원하려고 봉화군에서 예산을 확보했는데 각화사의 반대로 무산됐단다.
사유지에 수도에 방해가 돼서라는데 태백산사고지를 수호하는 목적으로 지어진졌던 수호사찰의 반대로
사고지를 복원못한다니 역사는 참 아니러니하다.
물론 지금은 개인소유에다 지금 사찰도 개인이 지엇고 정부에서 보태주는것 없으니 할말은 없지만....
10 : 50/11 : 06. 각화사 대웅전과 산신각.
저위 직선거리로 약 500m지점에 태백산사고지가 있다.
10 : 50/11 : 06.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 각화사 석탑.
삼층석탑은 완전히 도괴된 것을 다시 모아 조성한 것으로, 높이는 약 3m이며 체감률이 낮고 상륜부가 없다.
귀부(龜趺)는 절입구 긴계단있는 우측에 있는모양인데 계단따라 올라가서 미쳐 못봤다.
10 : 50/11 : 06. 각화사
10 : 50/11 : 06. 각화사에서.
사고[ 史庫 ]
조선시대는 처음에 춘추관과 충청도 충주(忠州)에 실록보관소를 두고 실록을 보관하다가, 1439년(세종 21) 경상도 성주(星州)와 전라도 전주(全州)에 사고를 신설하여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외사고인 충주·성주·전주 사고의 4곳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다.
이때 전주사고의 실록은 1593년(선조 26) 내장산, 해주 등을 거쳐 평안도로 옮겨 난을 피함으로써 임진왜란 중 멸실되지 않은 유일한 사고본으로 남게 되었다.
그후 조정에서는 1603(선조 36)∼1606년(선조 39)에 명종까지의 실록을 다시 인쇄하였는데, 인쇄된 실록은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정본 3부와 초본인 교정본 1부를 인쇄, 모두 5부로 만들어
평북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에 사고를 설치하여 전주본을 옮기고, 정본가운데 1본은 예전처림 서울 춘추관에 두고 나머지는 봉화(奉化)의 태백산,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에 사고를 마련하여 새로 간행한 실록을 보관하였고 초본인 교정본은 강릉(江陵)의 오대산(五臺山)사고에 보관하였다. 1628년(인조 6) 강화(江華)의 마리산(摩利山)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 묘향산 사고의 전주본을 옮겼다가, 1660년(현종 1) 강화 남쪽의 정족산(鼎足山)에 사고를 마련하여 마리산 사고의 전주본을 이곳에 비장하였다.
봉화 태백산사고지[ 奉化 太白山史庫址 ]
조선 후기에 나라의 역사기록과 중요한 서적 ·문서를 보관한 국가의 서적고(書籍庫)터.
사적 제348호. 1991년 지정. 지정면적 1,091 m2. 경북 봉화군 춘양면(春陽面) 석현리(石峴里) 산 126-5번지 소재.
각화사 뒤편 각화산(覺華山:해발고도 1,176.7 m) 정상부 가까운 사고지골에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해 오던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가 있던 자리로 조선시대 5대 사고 중 하나이다. 이 사고(史庫)는 1606년(선조 39)에 건립(建立)하여 1913년까지 약 300여 년간『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하여 왔었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춘추관(春秋館) 및 충주와 성주(星州)에 있던 사고가 불타 실록 등 중요한 서적이 소실되고 전주사고만 남게 되자 1606년 명종(明宗)까지의 실록은 다시 발간하고 영변(寧邊)의 묘향산, 강릉의 오대산, 무주의 적상산(赤裳山)과 함께 봉화의 태백산에 사고를 지어 새로 발간한 실록을 보관하였다. 태백산사고는 명종 이후에 편찬 간행된 역대왕들의 실록을 계속 보관 관리하다가 1910년의 국권침탈 뒤 실록 등 서적들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어 종친부(宗親府) 건물로 옮겨짐에 따라 그 기능이 정지되어 건물도 폐허화하였다. 태백산 사고본은 정족산본 ·규장각도서와 함께 1930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에 옮겨져 1985년 부산 정부기록보존소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태백산사고터에 대해서는 1988년 8~9월 대구대학 박물관(단장 이명식)이 발굴조사한 결과 실록각(實錄閣)터, 선원각(璿源閣)터, 책을 볕에 쬐게 하는 포쇄관(曝?館)터, 근천관(近天館)등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실록각은 중층으로 아래층이 정면 4칸, 측면 4칸, 위층이 정면 2칸, 측면 2칸이며 선원각은 중층으로 아래층이 정면 4칸, 측면 3칸, 위층이 정면 2칸, 측면 1칸이다.
당시의 사고 건물의 배치관계가 확인되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 연구에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에 있는 유적지.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보(璿源譜)》 등을 보관하던 조선 후기 5대 사고 가운데 하나인 태백산사고가 있던 건물터이다. 현재의 사고지는 태백산 주봉에서 남쪽으로 약 12㎞ 떨어진 각화산 중턱에 있으며, 수호사찰인 각화사(覺華寺) 북방 2㎞ 지점이다.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全州史庫) 이외의 왕조실록이 불에 타자, 전란 후 실록 복구사업을 일으켜 1603년(선조 36)부터 3년간에 걸쳐 전주사고본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3질을 새로 인출하였다. 따라서 인출 초본인 교정본과 전주사고본을 합하여 5질의 실록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춘추관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험한 지역을 택하여 외사고(外史庫)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런 소장처를 물색하던 중 새로 대두된 곳이 태백산과 오대산이었다.
태백산의 경우, 1605년에 경상감사 유영순(柳永詢)의 천거로 입봉(立峰)의 아래에 사고터를 잡고 이듬해 건물을 완성하고, 새로 간행한 태조에서 명종까지의 실록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30년이 채 되지도 않은 1634(인조 12) 대교(待敎) 유황(兪榥)이 현지를 방문하고 물이 빠지지 않아 건물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하여 위치가 적당치 않음을 지적하고, 그곳에서 1리쯤 떨어진 서운암(棲雲庵) 근처가 사고터로 적당하다고 하였다.
이는 즉각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그 후 언제가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사고터도 매우 가파른 곳에 위치하여 커다란 축대를 쌓아 집터를 마련한 것으로 보아, 이건하였다면 좀더 평탄한 곳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커 확신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태백산사고의 건물은 실록각·선원각·포쇄각(曝灑閣)·근천각(覲天閣) 등의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실록각은 중층으로 아래층이 정면 4칸 측면 4칸, 위층은 정면 2칸 측면 2칸이며, 선원각은 중층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 위층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였다.
하지만 현재는 사고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그 터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300여년간 이곳에 보관되었던 실록은 1910년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후 규장각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에 옮겨 보관하였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에 이관되었으며, 1985년 부산 정부기록보존소에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한편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55년부터 3년간에 걸쳐 태백산사고본 실록을 저본으로 축쇄영인본 48책을 간행하여 학계에 보급하였다. 태백산사고는 실록이 이관된 후에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해방 전후에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산사태와 잡목으로 유구들이 매몰되어 그 원형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다른 사고터에 비해 무너진 석축과 기둥, 초석과 기와 및 벽돌 등 그 흔적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어 이를 바탕으로 1988년 건물의 유구를 발굴 정비한 바 있다.
평창 오대산사고[ 平昌 五臺山史庫 ]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오대산사고는 임진왜란으로 춘추관·충주사고·성주사고와 여기에 보관한 역대의 실록이 불타버린 후 태백산사고·마리산사고·묘향산사고·춘추관사고 등과 함께 지은 사고이다.
여기에는 1606년(선조 39)에 재간행한 역대 실록 중 전주사고에 보관한 실록을 재인쇄, 교정을 본 교정인쇄본을 보관하여 이를 오대산본이라 하였으며 다른 사고에는 정본을 보관하였다. 오대산본은 그 후 일제가 일본의 도쿄대학[東京大學]에 옮겼다가,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그 중 59권 27책은 찾아오고 98권 30책은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오대산사고의 건물은 6·25전쟁 때 불타, 터만 남았다가 1989년 선원각(璿源閣)이 복원되고, 선원각 앞 사고 터에는 영감사(靈鑑寺) 법당이 자리잡고 있다.
마니산사고[ 摩尼山史庫 ]
5사고 중 하나로 임진왜란으로 4사고 중 전화(戰禍)를 피한 전주사고의 실록을 4부 재인쇄하여 유일본인 전주사고본 1질과 함께 나누어 보관하기 위해 5사고 설치가 논의되어 설치되었다. 그러나 마니산사고도 1653년(효종 4) 실화(失火)로 많은 서책이 소실되자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새로 사고를 짓고 남은 실록과 서책을 옮겨 보관하였다.
정족산사고[ 鼎足山史庫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내부의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있었으며, 실록의 보관이 중심 업무였다. 강화도에 사고가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1595년(선조 28)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 ·성주(星州)의 사고가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全州)사고의 실록이 해주(海州)를 거쳐 강화부 관아 건물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그 후 그것은 다시 영변의 보현사(普賢寺)와 객사(客舍)을 거쳐 1603년 새로 설치된 강화도 마리산(摩利山)사고에 옮겨져 복간되었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효종대 이후로 강화도가 국가의 위기에 대처할 기지로 적극 개발되었으므로 그 곳에 사고를 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 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관례대로 장사각(藏史閣)과 함께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 4)이었다. 이후 실록이 새로 만들어지는 대로 1부씩 보관하였고 그 밖에 왕실 족보나 의궤(儀軌)를 비롯한 여러 정부문서를 함께 보관하였다. 춘추관에 소속되어 그 곳에서 관장하였으나 현지의 관리는 수호사찰인 전등사에서 맡았다.
정조대에 강화부 관아 위쪽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설치되어 국왕의 초상화나 친필 외에 많은 서책이 보관되었지만, 이 사고는 그것과 별개로 계속 운영되었으며 외규장각과 달리 병인양요 때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10년 이후 보관 서적들은 규장각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모여져 함께 관리되었고 지금의 서울대학 규장각도서로 이어졌다.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장사각과 선원각의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다.
적상산 사고지유구[ 赤裳山史庫址遺構 ]
1995년 6월 20일 전라북도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었다. 안국사에서 소유하고 있다. 면적 6,083㎡이다. 한국의 사고는 고려 말기 이후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왕조의 실록을 보관하던 곳으로 선원전(璿源殿)과 실록전(實錄殿)을 두었다.
1439년(세종 21)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신설하여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외사고인 충주·성주·전주 사고의 4곳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다.
이때 전주사고의 실록은 1593년(선조 26) 내장산, 해주 등을 거쳐 평안도로 옮겨 난을 피함으로써 임진왜란 중 멸실되지 않은 유일한 사고본으로 남게 되었다.
그후 조정에서는 1603(선조 36)∼1606년(선조 39)에 실록을 다시 인쇄하였는데, 인쇄된 실록은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정본 3부와 초본인 교정본 1부를 인쇄, 모두 5부로 만들었으며, 전화를 피할 수 있도록 깊은 산중이나 섬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원본인 전주사고본은 강화의 마리산에 두었다가 정족산사고로 옮겼으며, 새로 인쇄한 정본 가운데 1본은 예전처럼 서울의 춘추관에 두고 나머지는 태백산사고와 묘향산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초본인 교정본은 오대산사고에 보관하였다.
이때 묘향산사고가 있는 북방에서는 후금(後金)의 세력이 확장됨으로써 이에 대비하여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1610년(광해군 2) 조정에서는 사관을 보내 적상산의 지형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뒤 1614년(광해군 6) 천혜의 요새로 이름난 적상산에 실록전을 창건함으로써 적상산사고가 들어서게 되었다. 또 1641년(인조 19) 선원전을 세우고 그해 11월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을 봉안함으로써 적상산사고는 완전한 사고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적상산사고에 비장되어 있던 실록을 서울의 왕실규장각으로 옮겨감으로써 사고가 폐지되었으며, 이곳은 안국사의 불구를 옮겨와 법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후에 선원전 건물은 안국사 경내로 옮겨왔고 실록전과 그밖의 부속 건물들은 모두 훼철되었다.
묘향산사고[ 妙香山史庫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사고에 보관한 실록이 재난을 당할 우려가 있어, 정읍(井邑) 내장산 용굴(龍窟)에 피난시켰다가 해주(海州)를 거쳐 이곳에 옮겼다. 1606년(선조 39)부터 28년(인조 6)까지 보관하다가, 박정(朴炡) ·강석기(姜碩期)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28년 7월 강화도 마리산에 사고를 세워 실록을 옮겼다.
봉화 태백산사고지[ 奉化 太白山史庫址 ]
태백산사고터에 대해서는 1988년 8~9월 대구대학 박물관(단장 이명식)이 발굴조사한 결과 실록각(實錄閣)터, 선원각(璿源閣)터, 책을 볕에 쬐게 하는 포쇄관(曝?館)터, 근천관(近天館)등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실록각은 중층으로 아래층이 정면 4칸, 측면 4칸, 위층이 정면 2칸, 측면 2칸이며 선원각은 중층으로 아래층이 정면 4칸, 측면 3칸, 위층이 정면 2칸, 측면 1칸이다.
당시의 사고 건물의 배치관계가 확인되어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 연구에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봉화 태백산사고지[ 奉化 太白山史庫址 ]
봉화 태백산사고지[ 奉化 太白山史庫址 ]
봉화 태백산사고지[ 奉化 太白山史庫址 ]
11 : 34/6.경북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1-2 . 샘골 마지막 축산농가.
수렛길따라 오른다. 옛 보부상길이란다.
샘골 마지막 축산농가에서 본 살(설)피재.
겨울에 눈이 많아 눈신발인 설피를 신고 넘엇다해서 설피재라 부르기도 하고
잠시후에 지날 높은터 이정표에 보면 이곳을 살피재라 적고있는데 보부상들이 봇짐지고 넘어갈려면
살이 피가나나다해서 살피재인가?
11 : 49. 살(설)피재.
고개 넘어엔 소천에서 올라온 세멘길과 종중묘와 농가집 한 채.
임도따라 오르다 우측능선으로
11 : 49. 살(설)피재 고개 넘어엔 소천에서 올라온 세멘길과 종중묘와 농가집 한 채.
우측 끝봉이 화장산.
.
11 : 54. 간벌목능선에서 우측으로 각화산부터 지나온 능선이 보이고.
사진 맨 좌측이 각화산,우측 낙타등같은 벌목지가 실질적이 형제봉.맨 우측봉이 산불감시탑이 있는 799m봉.
사진 한가운데 나무에 가린봉이 형제봉 갈림봉.
땡겨본 각화산.
12 : 06, 쭉쭉 뻗은 춘양목 지대의 둔덕봉을 넘어가며 옥돌봉과 문수봉을 건너다 보고
12 : 16. 맥에서 3분거리에 떨어져 있는 742.3m 삼각점봉(춘양 421.2004재설).
우측으로 각화산쪽이 겨우 보인다.
12 : 20/38. 다시 돌아온 754m봉 (아홉사리봉)삼거리에서 점심.아름드리 춘양목들
12 : 42. 능선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서 묘를 지나면서 바로 우측으로 꺽어가야. <주의>
13 : 01. 춘양목들이 즐비한 내림길에 우측으로 청량산이 조망되고
13 : 02/04. Y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가야 하는데 입구가 잘 안 보인다.<주의>
13 : 11/13. 아홉사리고개 임도 삼거리.
높은터 안내판과 보부상길 이정표.좌측은 씨라리골,우측은 가마골.
13 : 11/13. 아홉사리고개 임도 삼거리.
높은터 안내판과 보부상길 이정표.좌측은 씨라리골,우측은 가마골.
13 : 11/13. 아홉사리고개 임도 삼거리.
높은터 안내판과 보부상길 이정표.좌측은 씨라리골,우측은 가마골.
13 : 11/13. 아홉사리고개 좌측 사리리골 모습.
13 : 26. 705m봉. 잔나무 조림지를 올라 넝쿨식물이 휘감은 낙엽송밭에서 좌에서 우로 사면길로 돌아가는데
여기서 좌측 마루금이 705m봉이고 705m 좌측은 벌목하여 조망이 있는걸 사면길로 건너가서 못봤다.
13 ; 48/14 : 00. 된비얄 올라선 화장산(華獐山.859.4m).묘. 삼각점(춘양 306. 2004재설).화장산푯찰.
13 ; 48/14 : 00. 된비얄 올라선 화장산(華獐山.859.4m).묘. 삼각점(춘양 306. 2004재설).화장산푯찰.
이한원님은 무릎에 있던 사마귀가 떨어져 피가 철철나는데 계속 걷고 아스피린복용자라 지혈이 안된다.
결국 방고개에 가서 씻고 쑥을 붙이고서야 지혈이 됐다.
14 : 05. 능선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간다.<직진하는 현동리 내려가는길로 내려가기 쉽다>
14 : 14. 화장암 갈림길에서 우측 화장암보러 내려가고
14 : 16/9. 화장암(華藏庵). 장자는 노루장 獐이 아니고 감출장 藏자라 화장산과는 다르다.
임진란때 이 근처에서 전사한 600명 의병들의 충혼탑을 세울 거란다.
멀리 일월산과 제비산(917m)이 정면으로 보인다. 다시 내려온 마루금으로 돌아가야 한다.
14 : 16/9. 화장암(華藏庵).
14 : 16/9. 화장암(華藏庵)에서 본 조망.
14 : 30. 된비얄 내려선 안부. 2,3분 올라가기 싫어 임도따라 가 요령 피우다 더 고생하고 복귀.
14 : 40/1. 노루재.31.35.36번도로이나 지금은 터널이 생겨 한가해 졌다. 우측으로 내려와 우측 임도에서 올랐는데
좌측으로 오르는게 낫겠다.노루재 630m표지판은 높이가 틀린다.임도초입에 563.4m수준점이 있는데 확인은 못했다.
※ 노루재(31번국도)-31번국도-방고개. 5km. 2시간.
14 : 40/1. 노루재.31.35.36번도로이나 지금은 터널이 생겨 한가해 졌다. 우측으로 내려와 우측 임도에서 올랐는데
좌측으로 오르는게 낫겠다.노루재 630m표지판은 높이가 틀린다.임도초입에 563.4m수준점이 있는데 확인은 못했다.
14 : 57. 표고 100m를 단번에 올라가는 된비얄 오름길에 잠시 숨 돌리고
15 : 04. 677m봉. 순한길을 잠시가서 정점엔 오래된 세멘 산불초소.조망은 없고 좌측으로 꺽어간다.
15 : 07.임도삼거리.윗쪽 임도로 들어서며 좌측 능선으로 오름.이 임도는 삼각점을 우측 사면으로 건너가서 다시 만남.
15 : 12/19. 682.7m 삼각점봉. 묘2기.삼각점은 식별불가. 좌측으로 30여m가서 우측으로 내려감.
15 : 21. 다시 만난 임도 삼거리. 임도따라 직진해 감.
15 : 23. 임도는 우측으로 가고 100여 m가선 능선 갈림길에서 좌측 능선으로.좌측에 사면길 있다.
15 : 28. 우측으로 꺽임봉.빤빤한 직진길은 598m봉 가는길.여기서 부터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15 : 30. 길은 수렛길 정도로 넓고 "안전통로"푯찰. → 묘지 → 좌측 골짜기에 빨간집
13 : 35. Y길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13 : 36. 전신주가 나오고 이어서 세멘길이 나와 세민길따라 우측으로 내려간다.
15 : 41. 세멘길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간다.전신주 넘버. 99904 722.우측은 감성골 가는길 <주의할곳이다>
15 : 44. 임도에서 우측 전봇대 (99904 611)뒤가 맥이나 도로따라가도 된다.
15 : 45. 봉분을 석측으로 두른 묘. 묘앞으로 내려가면 바로 살짝 돌아온 임도를 만난다 .
15 : 47. 우측 계곡에 가정집같지 않은 잘 지은 집이 내려다 보이고
15 : 48. 임도가 좌측으로 크게 휘어 내려가는지점에서 직진하는 산길로 들어서 전봇대 뒤로
15 : 51. 둔덕봉에서 삼각점봉과 멀리 화장산부터 지나온 능선을 뒤 돌아 보고,
15 : 54. 넘어가면 좌측으론 일월산과 장군봉이 멀리 보이고 가까이엔 월암산과 우뚝한 제비산(917m)이 보인다.
15 :59. 마지막봉에서 직진 같지만 우측 묘지쪽으로 내려서고
16 : 02. 忠義衛 완산이공묘.
16 : 08/14. 절개지를 우측으로 내려온 31번국도.소천면.법전면 경계판. 적설량 측정대.잠시 쉬고.현동10km.
16 : 26. 봉을 세 개 넘어 살짝 내려선 좌측으로 꺽어 내려가는데 춘양목이 울창하다.
16 : 30. 도상 임기터널위.산야초재배지 입산금지 표찰이 수시로 나온다.
16 : 37. 도상 513m봉. 길 좌측은 철조망으로 막아놨고 감시 카메라(?)가 있다.
16 : 40. 넓은 밭이 나와 밭 우측 가장자리로 내려가며 제비산이 우뚝하게 보인다.
16 : 43. 세멘고개. 앞 둔덕봉은 잘라먹고 세멘길따라 우측 방고개로.마을과 정자와 월암산,장군봉능선이 보이고
16 : 47. 방고개. 정자와 큰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위.좌측에 마을. 고도가 480m쯤되는 고랭지.일월산과 덕산지맥조망.
옛우물터에서 등목하고. 길은 남쪽은 낙동강이라 길이 막히고 북쪽만 트여있다.
17 : 10. 봉화군 법전면 눌산리 방고개출발.
18 : 05/50. 영주 흑마늘 삼계탕집에서 정송자님이 내신 흑마늘 삼계탕과 정환규씨가 가져온 더덕주로 저녁. 감사합니다.
20 : 45. 오갑산휴게소 한번 들리고 일죽 대송휴게소 도착.
21 : 45. 천안도착.
14 : 57. 표고 100m를 단번에 올라가는 된비얄 오름길에 잠시 숨 돌리고
15 : 04. 677m봉.오래된 세멘 산불초소.조망은 없고 좌측으로 꺽어간다.
15 : 12/19. 682.7m 삼각점봉.
묘2기.삼각점은 식별불가.
15 : 12/19. 682.7m 삼각점봉.
좌측으로 30여m가서 우측으로 내려감.
15 : 21. 다시 만난 임도 삼거리. 임도따라 직진해 가다 2분쯤후 좌측 수렛길로.
15 : 28. 우측으로 꺽임봉.
빤빤한 직진길은 598m봉 가는길.여기서 부터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15 : 30. 길은 수렛길 정도로 넓고 "안전통로"푯찰. → 묘지 → 좌측 골짜기에 빨간집 → Y길에서 우측으로
15 : 41. 세멘길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간다.
전신주 넘버. 99904 722.우측은 감성골 가는길 <주의할곳이다>
15 : 45. 봉분을 석측으로 두른 묘.
묘앞으로 내려가면 바로 살짝 돌아온 임도를 만난다 .임도따라 내려가면 이묘는 못 볼수 있다.
15 : 48. 임도가 좌측으로 크게 휘어 내려가는지점에서 직진하는 산길로 들어서 전봇대 뒤로
15 : 51. 둔덕봉에서 삼각점봉과 멀리 화장산부터 지나온 능선을 뒤 돌아 보고.1
좌측봉이 682.7m 삼각점봉.
15 : 51. 둔덕봉에서 삼각점봉과 멀리 화장산부터 지나온 능선을 뒤 돌아 보고.2
멘 좌측봉은 아홉사리봉,가운데봉이 화장산,우측봉이 682.7m 삼각점봉.
15 : 54. 둔덕봉을 넘어가면 좌측으론 일월산과 장군봉이 멀리 보이고 가까이엔 월암산과 우뚝한 제비산(917m)이 보인다.
16 : 08/14. 절개지를 우측으로 내려온 31번국도.
소천면.법전면 경계판. 적설량 측정대.잠시 쉬고.현동10km.
산야초재배지 입산금지 표찰이 수시로 나온다.
16 : 37. 도상 513m봉. 길 좌측은 철조망으로 막아놨고 감시 카메라(?)가 있다.
16 : 40. 넓은 밭이 나와 밭 우측 가장자리로 내려가며
저아래 안부에서 세멘길따라 우측으로 나가면 방고개다.
저봉은 527m봉으로 맥은 저봉까지 안가고 안부건너 둔덕에서 우측으로 이어진다.
16 : 40. 넓은 밭이 나와 밭 우측 가장자리로 내려가며 본 우뚝선 제비산과 그 뒤 우측으로 일월산.
16 : 43. 세멘고개.
앞 둔덕은 잘라먹고 세멘길따라 우측 방고개로. 정자와 고냉지무밭.
16 : 43. 세멘고개에서 좌측 넘어로 본 장군봉쪽 모습.
이길은 저밑 낙동강에서 끝나고 보이는 산들은 낙동강 건너편 산들이다.
16 : 47. 방고개.
정자와 큰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위.좌측에 마을. 고도가 480m쯤되는 고랭지.일월산과 덕산지맥조망.
옛우물터에서 등목하고. 길은 남쪽은 낙동강이라 길이 막히고 북쪽만 트여있다.
16 : 47. 방고개의 느티나무와 정자.
방고개에서 본 덕산지맥과 일월산(맨 좌측 송신탑 있는봉).
18 : 05/50. 영주 흑마늘 삼계탕집에서 정송자님이 내신 흑마늘 삼계탕과 정환규씨가 가져온 더덕주로 저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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