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일
도저히 믿을수도 잊을수도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환자실에서 6일간 의식을 찾지 못한 채로 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선망에 시달려야 했다.
나중에 수술 집도의이신 김진주 교수님을 통해 알게된 사실은 16군데 칼을 맞고, 쓰러져 있던 나를 아주대 헬기가 살려주었다며, 오히려 살아주어서 고맙다며 내게 환하게 웃어 주셨다.
사건의 진상을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 할까?
지금도 믿을 수 없는 이 사건은 내가 희망을 안고 살게되는 2018년부터 시작된다.
갖은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어린딸과 36평 임대아파트에 입주를 하게 되었다.
난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미가 되기위해 갖은 애를 쓰며,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 LH 에서 임대하는 목감의 가온 수풀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거의 고생이 끝나가는 듯 하였다.
그날을 생각하면 얼마나 기뻤던지...
하나하나 살림살이를 늘리고 가구를 사 들이는 기쁨은 또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렇게 나와 어린 딸 아이는 그간의 설움을 보상이라도 받는 듯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그러던중 S 라는 남자를 알게 되었고 매일 단골로 드나드는 그가 그리 싫지 않았기에 가까워졌다.
나와 딸 아이 둘만 살기에는 넓은 집이기도 했고, 달리 오갈데 없이 원룸에서 살고 있는 그가 안쓰럽기도 하여 딸 아이와 상의한 끝에 우리집에 들어오게 했던 것인데 그 결정이 우리에게 이토록 치명적인 상처와 아픔을 겪게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난 너무 어리석어서, 내가 위해주고 아껴주며, 내 가진것을 다 같이 누릴 수 있게 해 주는데 , 마음이 변할거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약 3년 정도는 S 역시 '내게 최선을 다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에게 맞춰주려 애 쓰는 듯 보였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어리석었던 나는 통장의 잔고까지도 숨김없이 다 알려줄 정도로 함께 걸어갈 사람이라 믿었다. 우리는 그렇게 동상이몽을 꿈꾸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서서히 본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유없이 내 딸 아이를 흠잡고, 내 친정식구들까지 들먹거리면서, 심지어는 찌개냄비까지 베란다에 쏟아버리는 횡포를 부려대면서,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코로나로 인해 하는 장사가 여의치 않으니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오히려 다독이며 참다보면, 지나가리라 여기면서, 최대한 다툼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어느날 급기야는 내 하나뿐인 오라비를 서슴치않고 성토하는 통에 난 더이상 견딜 인내를 잃고 말았다.
오라버니는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 우리 세자매에게는 친정 그 자체인 존재이다.
난 더이상 S 와는 살 수 없다 판단을 하고 이젠 내가 붙잡지 않을테니, 본인이 가고 싶은길로 가라며, 이별의 선을 그었다.
몇날 며칠을 다투던 끝에 그렇게 나가겠다고 큰 소리 치던 사람이 도리어 이젠 돈1억을 주면 나가겠다면서, 어이없는 요구를 해왔다.
그때부터 폭력적인 몸싸움이 벌어지고 욕지거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난 어린딸에게 더이상 못 볼꼴을 보이기 싫어서, 오피스텔을 얻어서 분가를 시켜 놓고, S 와 둘이서만 화성 조암이라는 낯선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도, 그는 내게 툭 하면 폭력을 행하였고, 흡사 맡겨논 사람처럼 돈을 내놔라 윽박지르며 나의 제 2의 지옥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싫으면, 안살면 그만인 상황이었건만 그는 내 목을 조이면서 나가지도 않고, 남편행세를 하면서, 괴롭히는데 난 몇번이고 다 버리고 도망을 가야하나 고민도 하고 지냈지만, 내 터전들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그만 결정을 미루고야 말았다.
2022년 그해는 내게 건강으로도 힘든 시기였는데, 계단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치는가 하면, A형 간염이 800까지 올라가서 대학병원에 입원까지 해야하는 악재가 이어졌다.
그때. 큰언니가 나를 퇴원 시키기 위해 오게 되었는데, 그 사건이 또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길이 될줄 누가 알았으랴?
병원신세를 진 적이 없이 건강했던 내가 연속적으로 입원을 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자, 걱정이 됐던 큰언니가 마침 백화점휴일과 ( 당시 큰언니는 백화점에 근무중이었다 ) 내 퇴원일이 겹치자 나를 퇴원 시켜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조암을 오게되었다.
마침 언니는 백화점일을 무척 버거워하고 있을 때여서 난 그동안 눈여겨 봐 두었었던 자그마한 가게를 보여주며 그곳에서 자리잡기를 권유했고 언니도 토스트 가게를 해 보겠다고 나서서, 우리가게 가까운 곳에 토스트 전문점을 오픈하게되었다.
언니는 천부적으로 사람이 따르는 편이라 오픈 첫날부터 가게는 문정성시를 이루고 언니 역시 힘든줄도 모른채 열심히 운영을 했다.
언니가 내곁에 가까이 있자 S 는 이제는 언니까지 괴롭히며, 급기야는 언니를 내 쫒기까지했다.
그날 이 후로 언니와 나는 장현동 작은언니네로 피신을 했고, 이틀 뒤인 2023년 2월 1일 택시를 타고 조암으로 출근을 하게됐다.
S 는 미리 계획을 한 것처럼 선물받은 독일산 칼을 가지고, 나를 찔러 기절하자 죽였다고 생각했는지, 언니네 가게로 가서 언니까지 칼로 찔러 해하려다 피를 흘리며 소리치며 뛰쳐나온 언니를 보고 주변에서 신고를 해 준 덕에 도망가는 S 를 검거할 수 있었다.
지금도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우리를 죽이려고까지 했는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거지처럼 살고 있던 자신을 건져내어 황제처럼 살게 해 준다면, 누구나 고마워 할 거란 나의 착각은 진정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이미 흘린 피가 선지가 될 정도로 죽어있던 언니와 나는 다행히 아주대 헬기 덕분에 간발의 차이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6일만에 깨어난 나는 언니까지 당해서 같은병원 같은 층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16군데를 칼을 맞은 나는 누운 채로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입원한 지 1달이 지나서야 간신히 언니 병실로 가서 얼굴을 마주 할 수 있었다.
그날의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을 하랴!
만신창이가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대소변까지 가려내는 언니를 보고 난 조암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내 말을 얼마나 후회햇던가?
어찌 보면, 언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 운명처럼 내 곁으로 왔던건지도 모른다.
그날 언니가 날 구해 달라고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난 이미 저승의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6개월의 병원생활을 보내고, 퇴원한 후 지금까지 10개월이 지나도록 아직까지도 치료를 계속하고 있으며, 언니는 8개월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왼손을 아예 못 쓰는 채로 아직까지 재활 치료를 계속하고 있는 중이다.
S 는 대법원까지 가서 12년의 형을 선고받고 교도소 생활을 했지만 그 해 11월 위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 운명인가에 이끌려 이런 큰일을 겪었는지, 아니면, 무엇을 잘못하여 당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생에 누구도 겪어서는 안되는 일들을 겪으면서, 언니와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내 딸과 조카들을 비롯하여, 온 가족들이 공포에 떨만큼, 끔찍했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어린딸과 내 조카들은 피퉁성이로 죽어가고 있는 우리를 온 힘을 다해 지켜 주었다. 그 당시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여독도 풀리지 않은 내 작은언니는, 이 사건의 모든 일처리들을 홀로 감당하고 우리를 돌보느라 넋을 잃고 다녔다고 한다.
부모님들도 그렇지만, 우리 형제들은 누구에게 민폐끼치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정직한 사람들이다.
비록 부유하진 않지만,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끔찍해서, 주변 지인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이니, 이런 폭력적인 살인미수 사건을 당하고, 그 이후의 삶이 어떨꺼라는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다.
S 와 가까와 질 무렵 우리 가족들은 그가 젊은날에 폭력조직에 몸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설득하고 말렸지만, 난 이미 나이가 60이 다 된 사람에게 젊은날의 잘못을 탓하지는 말자고 오히려 두둔하면서, 가까워 졌던 것이다.
내가 정성을 다 하면,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도,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오히려, 더 잘 살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험한 경험을 겪은 사람이기에 온전한 삶의 소중함이 절실함을 알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들을 겪으면서, 잃은 것만 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동전의 양면이 있고, 천지에 낮과 밤이 존재하 듯, 생명을 잃을뻔한 위기를 겪은 뒤 난 조금은 소원했던 딸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고작 23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은, 엄마가 곁을 떠날지도 모른 다는 불안감과 공포로 부쩍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다.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잃은 채 제 얼굴조차 알아보지도 못하는 어미를 6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면회를 하고 직장에 출근하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주대 병원에서 시흥 한방 병원으로 옮긴 후 조금씩 걷기 시작할 때 함께 카페를 가게 되었는 데 그때, 처음으로 얼마나 무서웠었는지를 이야기해 주며 나를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
어린 것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세상에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또 두려웠을까?
그뿐 만이 아니다, 난 내 조카들이 내 언니에게 그토록 효자일줄은 몰랐다.
병원에 있는 내내 출퇴근 보고는 물론이고, 엄마 안부에 그토록 자상할 수가 없었다.
내 형제간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우애가 더욱 더 두터워짐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와 언니는 여전히 통증과 싸우고, 재활 치료에 힘쓰면서, 불편하게 살고 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분명, 우리에겐 더 좋은 일들이 일어날 거라 예감한다.
또한, 우리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주신 두분 교수님들께 지면을 통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드리고 싶다.
새 생명으로 다시 살게된 우리 두 자매. 그리고 사랑하는 작은 언니, 작은 오빠, 어린 딸과 정성을 다 하는 조카들까지, 우리 가족 모두 이 상처들을 너끈히 이겨내고 훨씬 나은 삶을 살아 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