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갈변 살자
<네이버 1>
화자가 부르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이 시의 화자인 한 소년이 맑고 고운 목소리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그 자리에 그 대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보면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에서 없는 것은 ‘엄마’와 ‘누나’이고, 소년에게 이들이 없기 때문에 슬픈 느낌이 나는 것입니다.
<네이버 2>
이 시에서 우리는 어딘가 존재하고 있을 강변에 대한 아릿한 그리움을 먼저 느낀다. 시의 화자는, 마음의 평화와 안식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방황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마르지 않는 시심의 원천으로서의 강변, 그 마알갛고 고운 물가를 일깨워 준다.
그렇다면, 강변이란 어떤 곳인가? 그것은 아마도 평범하고 습관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는 일상의 세계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일상성이 소멸된 시공간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일상성이 소멸된, 일상성을 뛰어넘은 세계에의 동경을 표현해 내기에 어른들의 일상어는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소월은 굳이 해맑은 어린이의 말투를 빌어 쓴다. 대부분은 유성음으로 구성된 시구들에서는 강변 금모래에 반짝이는 햇살만큼이나 해맑은 음향이 울려나온다.
4행으로만 이루어진 소박하고 간결한 시형식 속에다, 엄마랑 누나랑 함께 사는 평화로운 삶에의 갈망을 소박하고 따뜻하게 엮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강변의 삶에 대한 갈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시는 일상성의 탈피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꿈일지도 모른다는 서러운 정감까지도 듬뿍 담고 있는 듯하다.
<네이버 3>
이 작품이 어려운 곳이 어디인지요?
해석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시는 그냥 그대로 언어로 나타난대로 보고 느끼면 그만입니다.
자꾸 이상한 해석을 할려고 하지 마셔요.
굳이 뭔가 산문으로 표현해야겠다고 한다면...
이 시의 화자(말하는 사람)는 남자 애겠지요?
'엄마야, 누나야' 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누나를 부르고 있으니 이는 남자라는 것이고 뒤에 '~~야'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어린애라는 것입니다.
그 작중 화자는 엄마와 누나에게 강변에서 살자고 합니다.
그 강변은 그야말로 때묻지 않은 깨끗한 곳이고 인간과 자연이 화합하고 있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가 빛을 내고 있고 뒷문 밖에는 갈잎이 바람에 흔들려 노래를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금모래가 반짝이는 것은 오염되지 않은 자연상태, 순수한 자연 그대로라는 뜻이고 갈잎이 노래를 한다는 것은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평온하고 즐겁다는 뜻이겠지요?
갈잎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즐거운) 노래소리로 들리니 말입니다.
그럼 작중화자가 이런 상태를 그리워한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 작중화자가 사는 곳이 이렇다면 이런 상태를 상정하고 그리워하며 거기서 살자고 할 필요가 없겠죠?
왜냐하면 우리는 결핍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상상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작중화자가 살고 있는 공간은 그와 반대되는 현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자연이 자연스럽지 못 하고 자연과 인간이 화합하고 있지 못 하며 바람에 날리는 갈잎소리가 노래로 들리지 않는 곳, 즉 삶이 힘들고 괴로운 곳...
이렇게 상실된 자연, 고단한 삶을 이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견준다면 일제 압박하의 삶이라고 유추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시를 꼭 그 시대와 결부시켜서 이 작은 작품에 일제시대가 어떻고 하는 건 무리가 따르겠지요.
즉 이 시에서 작품속의 화자는 어린남자애의 목소리로 엄마와 누나에게 강변에서 살자고 조르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그 강변은 바로 바람직한 삶이 가능한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이 자연스러운 곳,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곳, 인간의 삶이 자연과 화합상태를 이루어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곳, 그것이 금모래나 갈잎의 노래로 나타났다고 보면 되겠지요.
<저의 풀이>
시를 풀이하는 데는 시대상황과 작자의 삶을 연계시키는 '역사주의' 관점과 작자나 시대적 배경을 무시하는 '절대주의' 관점이 있습니다. 대개 전자의 방법이 일반적인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작품을 풀이하기에 앞서 김소월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이하 예삿말)
그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 반대했던 조부 김상주의 영향을 받고 자랐고, 부친 김성도가 경의철도 부설 때 일본인들에 의해 매를 맞고 폐인이 된 가운데, 홍난실과 혼인하였다.
부인 홍씨 집안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가문에 해당하였다. 부인 홍씨의 증조부는 참판을 지낸 홍승목이었고, 조부는 태인군수, 금산군수 등을 역임하고 경술국치 때 자결한 홍범식 의사이고, 아버지는 '임꺽정' 작가 벽초 홍명희인데, 홍명희는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와 부마 홍현주 가문의 뒤를 이은 신분이기도 했다.
비서감 승(祕書監丞) 홍승두(洪承斗)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숙선옹주(淑善翁主)의 사손(祀孫)인 전 참봉(前參奉) 신(臣) 홍규식(洪奎植)이 아들이 없으니 그의 일가 사람인 전 참서관(前參書官) 홍범식(洪範植)의 둘째 아들 홍명희(洪明熹)로 계후(繼後)하여 숙선옹주의 제사를 받들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예식원(禮式院)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고종 45권, 42년(1905 을사 / 대한 광무(光武) 9년) 5월 6일)
그는 어린 시절 일본인의 횡포를 절감했고, 도쿄대학 상대를 다니던 시절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인의 만행에 치를 떨고 귀국해서 스승 김억과 조만식의 추천으로 모교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잠시 잡은 후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다가 실패 후 사채업을 손을 대기도 했지만, 자신의 비운과 조국의 현실에 비관한 나머지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그의 작품을 풀이하는 데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이 작품을 쓴 시기는 1910년 나라를 잃은 후 수많은 배달겨레가 만주로 이주를 하거나 가족을 둔 채 조국광복을 위해 이른바 '독립군' 활동을 위해 사내(장정)는 만주로 가고, 여자들이 곤궁한 삶을 살아가는 가정이 많았는데,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특히 이런 경우가 많았다.
작품에서 화자는 채 10세가 안 되는 철부지 소년이다.
어린 소년이 어머니와 누나가 (주로 일본인이나 자산가들의 고리대금업에 논밭을 빼앗기고 만주 땅으로) 이사를 가려고 짐을 챙기는 상황에서, 소년은 동무와 헤어지기 싫어서,
'엄마야, 누나야 (이사가지 말고, 여기 살면 안 되나?)
(이제 논밭도 없고,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갔는데, 어디서 살꼬?)
'강변에 살면 되지'
(강에는 모래만 있고, 갈대뿐인데).....이를 시적으로 표현하여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그래도) '엄마야 누나야 (이사가지 말고) 강변에서라도 살자'
김소월 시는 이면에 말할 수 없는 가슴벅찬 장면이 숨겨져 있음을 보아야 하는데,
이 시를 '까부는' 가곡에 얹어 부른다는 것은 김소월 시를 모독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이 시는 3음보 율격인데, 일본 전통가락인 7.5조라고 하는 데는 할 말이 없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잘 읽고 지식충전하고 갑니다
어렸을때 부르던 노래인데요
귀한글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린소년의 가슴아픈 사연이 담은 노래이네요
소나무님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국어책에 "전통운율 7.5조"라는 구절이 있어서 선생님께 질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전통운율이 7.5조라면, 고려가요나 조선시대 시가에서 7.5조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 갑자기 나왔는데, 어째서 '전통운율'이라고 합니까?" 선생님께서 "글쎄, 교과서가 그러는데, 어찌 하겠노?"...그래서 조사를 해보니, 일본 문학사 책 속에 '조선문학사' 내용 중에 그런 말이 있어서...제가 교직에 있을 때 경남과학고 시험출제를 가서 틀린 답으로 "7.5조 전통운율"로 해서 시비가 붙었고, 결국 국어책이 수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일본 전통운율 7.5조를 우리의 전통운율로 말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