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자 모임-요한복음]
7. 성육신과 연합 19. 6. 21. 이현래 목사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
오늘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를 중심으로 보겠다. 그 앞에도 한 구절 안했던 것이 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9~10)하는 말씀이 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라는 말씀은 상당히 난해한 말씀이다. 다음에 연결되어서 이야기가 될 것이다.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는 유명한 구절이다. ‘성육신’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신약과 구약을 가르는 분깃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은 율법을 주신 것이고 성막을 주신 것으로 진행되는데, 거기에서 완성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과정이다. 모두 곁길로 가니까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들 역시 사람은 같으니까 하나님의 목적에 바로 쓸 수 있는 사람들이 못된 것이다. 그렇게 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고 성막을 주었는데, 그 역시 완성되지 못했다. 율법도 완성되지 못하고, 성막도 완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두 번째 대책으로 예레미야 31장에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라는 말씀이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돌비에 새겨졌던 것과는 아주 차원이 다른 것이다. 돌비에 새겨진 것은 밖에 있는 것이니까 객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실행하려고해도 자기 속에 그런 것이 없다. 나는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겉발림하는 것뿐이고 흉내 내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10계명뿐인데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써 지켰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만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있는 법이 아니고 내 밖에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잘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만든 법도 다 지키기 어려운데, 하나님의 법을 사람이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물고기의 법을 새가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새의 생명에는 물고기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물고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물고기는 아주 쉽게 이야기한 것이지만 새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당연한 말씀을 하셨지만 사람들에게는 남의 말이기 때문에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힘쓰고 애써서 해보려고 하는 것이 종교생활이다. 그렇지만 해보면 안 된다. 해보면 내가 내 생명으로 하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은 아주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자기와 마음이 맞는 그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형식만 갖춘 사람을 데려다가 뭘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법, 새로운 약속을 준 것이다.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만일 날짐승에게도 물고기의 아가미가 있다면 물에 들어가도 자유롭게 살 것이다. 그런데 아가미가 없으니까 물속에 들어가면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짐승에게 아가미를 주겠다는 말과 같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겠다는 것이다. 내 속에 법이 있다면 저절로 될 것이다. 물고기를 보니까 아기미가 신기하게 생겼다. 그것으로 물속에서 산소를 구별해서 흡수하니까 사는 것이다. 우리가 허파로 공기를 들이마시면 거기에서 산소를 골라내듯이 물고기들은 아가미에서 그 일을 한다. 신기하다. 우리도 아가미가 있다면 물속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싶다. 예레미야 31장에 있는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라는 말씀은 그런 차원의 말씀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말 땅 짚고 헤엄치기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전환이다.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지키기 쉽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전환이다.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 니고데모는 의논도 하고 도움도 받고 싶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거듭나지 않으면, 다시 나지 않으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절벽이다. 다시 난다는 것이 뭔지 도무지 개념이 없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런 질문을 당연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서 그것도 모르냐고 했다. 이것은 완전히 동문서답이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의 말이다. 조금 다른 것이 아니고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의 말이다. 세계가 다르면 말이 달라진다. 결국 니고데모는 의문만 가지고 돌아갔다. 완전히 전환하는 것이 신약이다. 그런데 이 성육신을 예수님 개인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도로 구약과 마찬가지이다. 구약에도 율법을 전혀 못 지킨 것이 아니고, 잘 지킨 사람도 있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이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생명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도 모세는 실수를 해서 못 들어갔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갔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있었는데, 그것이 보편화가 되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될 수 없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예수님은 성육신했다고 믿는데, 만일 그것이 보편화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구약과 마찬가지이다. 예레미야 31장을 보면 ‘그들(저희)’이라고 했으니까 한 개인을 말한 것이 아니고 백성이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라고 했다. 어떤 한 사람을 지정해서 두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예레미야 31장이 성취되려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 보편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되지 예수님 한 사람만 성육신이 되고, 다른 사람은 성육신이 되지 않으면 나라가 되지 않는다. 신약시대에 왔는데 나라가 안 된다. 지금 성육신의 보편화를 말하면 옛날 같으면 사형이다. 지금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 우리가 성육신의 보편화를 말한다고, 그리스도의 보편화를 말한다고 비난한다. 독특하고 유일한 것인데 자기들은 우리가 보편화시킨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보편화가 되지 않으면 도로 구약이다. 구약과 신약이 뭐가 다른 것인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구약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신약에서 성경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똑 같다. 다른 것이 없다. 법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서 그것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그 법이 내 안에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지 법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신약시대의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래야 신약이 된다. 그래서 이것을 근원부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것이 완전하지만 미완성으로 되어있다. 집을 지으려면 대구 같으면 북성로에 가면 집을 지을 수 있는 온갖 부품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부품이 집은 아니다. 그 부품을 전부 사서 마당에 두어도 집이 아니다. 그 부품이 전부 연합이 되어야 집이 된다. 목수는 그 재료들을 만든 사람이 아니고 만든 재료들을 가져다가 조합을 하는 사람이다. 벽돌 찍는 공장은 따로 있지 목수가 벽돌까지 찍는 사람은 아니다. 건축자가 그것을 가지고 와서 사용하는 것이다. 창조도 마찬가지이다. 창조도 연합을 통해서 완성되도록 되어있다. 빛도 그렇고, 땅도 그렇고, 식물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모두가 다 재료이다. 새로운 세계의 창조에 대한 재료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연합으로 완성된다고 봐야 한다. 사람을 지은 것이 창조의 정점이다. 그 사람은 어떻게 지었는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라고 했다. 사람을 형상으로 지었다는 말은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다. 형상으로서 완전하다는 말이다. 형상이니까 안에 무엇이 있어야 완전해진다. 불을 켜기 위해서 전구를 만들었으면 전구는 불의 형상이다. 그래서 전구만 있으면 완전하지 못하고, 불만 있어도 완전하지 못하다. 전구가 불과 합해지면 완전하다. 그때서야 전구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라는 말은 그분 자신이 내용이 되고 실재가 되고 사람은 그 실재에 대한 표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예 창조 때부터 연합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만으로는 안 된다. 창조는 연합으로 완성된다. 창세기 2장 마지막에 “그의 아내와 합하여(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라고 했다. 창조 전체를 말하고 마지막에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될지니라고 했다. 이 말씀이 성경에 있어서가 아니고, 이 말씀이 없더라도 만유를 보면 다 그렇다. 어떤 것도 혼자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다. 아무리 강한 짐승이라도 혼자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없다. 식물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다 그렇다. 대구에 오면 청도반시라는 것이 아주 유명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유명한가? 씨가 없고 맛이 좋아서 유명하다. 왜 씨 없는 감이 있을까? 알아봤더니 감꽃이 필 때 두 종류로 핀다. 감을 달고 나오는 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꽃이 있다. 하나는 수꽃이고, 하나는 암꽃이다. 청도는 기후 조건이 두 가지 꽃, 수꽃이 피는 시기와 암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 만나지 못해서 수정이 안 되어서 씨가 없다고 한다. 청도반시를 접붙여서 다른 지방에서 심으면 도로 씨가 나온다. 기후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갔으니 자식을 낳겠는가? 견우와 직녀가 다른 길로 가버렸으니 어떻게 만나겠는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했다. 나라가 되려면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는데, 둘이 연합하지 않으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다. “그의 아내와 합하여(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라고 해서 이 연합이라는 말은 둘이 화학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둘이는 그냥 있다. 그냥 있는데 둘이 합한다는 그것이 연합이다. 미국은 주마다 각기 정부가 있다. 주정부는 각기 독립되어 있다. 그것들이 합해서 USA가 되니까 언제든지 갈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군대도 주 방위군이라 하여 주마다 따로 있다. 예를 들면 뉴욕 주는 뉴욕 주 방위군이 따로 있고, 워싱턴 주는 워싱턴 주대로 방위군이 있다. 이것이 연합이다. 한 육체가 된다고 해서 어떤 제3의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둘이는 그대로 있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어지고 다른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있고 사람은 사람대로 있는데, 둘이 하나가 된다. 이것 때문에 동양사상 같은 곳에서는 연합이라는 개념이 잘 안되어서 한 덩어리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비주의에 사람들이 빠지게 된다. 신화 된다 아니면 신이 인간이 된다는 것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연합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인데 둘이 연합했다. 만유의 대표자로의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었다고 했고, 창세기 2장에서는 사람을 흙으로 지어서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했다. 흙에 씨를 뿌려놓으면 씨가 흙이 되는 것도 아니고, 흙이 씨가 되는 것도 아니다. 가을에 가면 씨는 씨대로 나오고 흙은 흙대로 도로 흙이 된다. 이것이 연합이다. 2장 마지막에 가면 아담의 갈비뼈를 빼서 하와를 만들었고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했다. 그리고 뒤에 가면 “그의 아내와 합하여(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을 마귀가 분열시키려고 한다. 선악과를 먹어라. 하나님같이 된다고 한 것은 결국 분열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 분열을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 세상에서는 선악과가 없으면 분열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선악과를 얼른 잘못 들으면 절대로 없으면 안 될 것을 가지고 그런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기독교 안에서도 그렇다. 설교를 자세히 들어보면 선악과가 빠진 설교가 몇%가 되는지 보면 5%도 안 되지 싶다. 그러니까 분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합이 안 된다. 교회가 제일 어려운 것이 연합이다. 똑똑한 사람끼리 모이면 더 연합이 안 되고, 목사들끼리 모이면 더더욱 연합이 안 된다. 올라갈수록 연합이 안 된다. 바벨탑을 쌓을 때는 처음에는 그럴듯하지만 올라가다가 허물어졌다. 중간쯤 쌓다가 말았으면 되었을 텐데 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하다가 허물어졌다. 희한한 일이다. 마귀의 일은 작전이다. 하나님의 일은 연합해서 완성하려고 하고 마귀의 일은 분열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세상은 분열로 가고 있다. 모두 최선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데, 결국은 모두 분열이다. 요즘 젊은 아이들을 상대해보면 절대로 연합이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사상 자체가 그렇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 곳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꼭 그것이 그렇다고만 할 수 있나요?’라고 말한다. 참 김빠지는 대답이다. 다 듣고 나서는 희랍사람들처럼 ‘좋은 말 많이 하네.’하고 가버린다. 왜냐하면 꼭 그것만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찾아봐야 한다고 한다. 자기 주도적으로 찾아봐야지 꼭 그것만이 전부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절대군주나 그런 사람들에게 속은 결과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를 추구하다가 마지막에는 완전히 개인주의가 되어서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각자가 다 절대가 되어있다.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각자가 다 하나님 같이 되어있다. 그래서 절대로 연합이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들끼리 모이면 ‘말해봅시다. 생각해봅시다.’고 하지만 결론은 없다. 너무 절대화했던 시대가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중세를 벗어나기 위해서 문예부흥이 일어났는데, 르네상스는 결국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자는 것이다. 중세의 종교적 억압과 획일화로부터 해방되자는 것이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의 정신이 지금도 계속 흐르고 있다. 이것을 교회에서 어떤 근본주의적으로 잡아보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어렵다. 세상의 흐름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잡혀지지 않는다. 교회가 지금 잡지 못해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한다. 떠나는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라고 해버리면 차라리 안한 것만 못하다. 왜냐하면 세상이 벌써 그렇게 가고 있다.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하면 뭐하러 말하는 것인가? 할 필요가 없다. 각자 생각해보자고 하지만 언제까지 생각해 볼 것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생각해도 결론이 없다. 우리가 분명한 답이 있는 한 세계를 제시해야지 생각해보자는 세계를 제시하려면 차라리 안하는 것이 낫다. 그렇다고 중세처럼 돌아가자는 말도 아니다. 이 시대는 확실한 답이 있어야 한다. 옛날처럼 법으로 우긴다든지 이렇게 할 수 없게 되어있다. 정말 더 확실한 답이 있어야 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답이 있어야 한다. “소망(구원)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구원의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생각해보자면 어찌 되겠냐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하지 말아야 한다. 답이 없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답이 없는 세상에 우리가 또 하나의 문제를 던져놓고 ‘생각해봅시다.’라고 하려면 뭣하러 하겠는가? 그런 교회에 가보면 처음에는 조금 모이지만 뒤로 가면 모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뭣하러 교회에 가겠는가? 교회를 가지 않아도 다 그렇게 살고 있다. 다른 프로그램을 보고 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오나 마나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온다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것만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생각해봅시다.’라고 한다. 이런 것은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를 주었지만 사람이 먹지 않았다. 율법을 주었지만 지키지 못했다. 하나님이 성막에 임하셨지만 의식적으로만 상대했다. 자기가 있으니까 의식적으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의식을 베풀면 하나님과 내가 교통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천주교에서 거룩한 의식들을 행하는데, 그런 의식을 행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교감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개신교도 그렇게 한다. 요즘에 그럴듯한 분위기를 만들어서 마치 우리가 거룩한 세계에 있는 것처럼 하고 있다. 이것은 안 되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우리 장인어른은 이방인이었는데, 뒤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장모님 쪽은 4대째 기독교 집안이었다. 기독교가 전파된 초기부터 믿었던 집안이다. 다른 곳에 살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말년에 대구로 이사를 오시게 되었다. 다른 사정도 있었지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주선을 해서 대구로 오시게 되었는데, 사위가 교회 목사인데 사위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 안 나올 수 없었다. 가기는 가야 하겠는데, 문제는 사위가 하는 교회는 예배를 안 드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다른 교회는 1부 예배, 2부 예배가 있다. 1부 예배는 다른 곳에서 보고, 2부 예배 때 우리 교회를 오셨다. 말씀은 우리 교회에서 듣고, 예배는 다른 교회에서 보았다. 한참 동안 그랬었다. 그렇게 하다가 뒤로는 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셔서 여기도 저기도 못 가게 되었다. 그것을 보니까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도 예배라는 것을 만들어서 하면 되는 것인가? 얼른 외형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형태가 되지만 낯이 간지러워서 할 수가 없었다. 하려고 하니까 도저히 안 되겠어서 하지 않았다. 우리도 처음부터 안 한 것이 아니다. 하려고 해봤는데 어쩐지 어색하고 안 되어서 차차 없어진 것이다. 일부러 형식을 버려야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도 좋다면 할 수 있는 것인데, 내가 그러니까 그렇겠지만 다른 형제들도 다 웃음거리가 되어버린다. 우리교회에서는 어떤 의식을 행하면 다 웃음거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못하고 말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교회에 이방인들이 많이 들어왔다. 새로운 것을 하니까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성찬식도 해보고 침례도 해보고 했었는데 하다가 못하고 말았다. 억지로 그런 세계로 끌고 들어갈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침례 한다고 물이 많고 좋은 곳에 가서 했다. 성경에 우리가 물이 있으니 침례를 받기에 무엇이 부족한가해서 했다. 한 쪽에서는 침례를 하고 있는데, 한 쪽에서는 물놀이 한다고 놀고 있고, 다이빙해서 머리가 다치고 해서 두세 번 하다가 못했다. 성찬식도 했다. 카스텔라를 가지고 했는데, 이방인 형제들이 많다 보니까 앞에서부터 돌리니까 반도 못가서 빵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포도주도 돌리면 앞에 사람이 다 먹고 뒤에 사람은 먹지도 못했다. 결국 못하고 말았다. 일부러 없앤 것이 아니다. 깊이 생각해보니까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고 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안하고 말았다. 진정으로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아주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면 그렇게 되는데, 그렇게 안 해본 사람들은 안 되었다. 성찬식을 하면 머리도 빗고 목욕재개하고 교회에 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요즘 교회에서 하는 것을 보니까 근사하게 차려놓고 한다. 옷도 새로 입고 장로 권사님들이 나와서 섬기는데 아주 그럴듯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교회에서 그렇게 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되어버린다. 누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현상이 생겼다. 성막을 만들어놓고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려거든 이리 오너라 너희가 산 높은 곳까지 올라올 수도 없고 더군다나 하늘에는 더욱 올라 올 수 없으니 내가 땅에 내려갈 테니 거기에서 우리가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만나러 온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결국 의식이 되고 말았다. 양이 죽으면 그 대가로 우리 죄가 사해진다고 이렇게 생각하니까 형식적으로 안수를 하지만 그것이 양과 자기가 같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니 자꾸 형식주의만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형식주의를 만나게 되면 사람은 그런대로 봐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정말 봐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우리 고향에 귀신 눈 속인다는 말이 있다. 정월이 돌아오면 바닷가니까 짚에 밥을 싸서 바닷가에 쭉 널어놓는다. 바다니까 항상 불안해서 그렇게 한다. 거기에 꼭 들어가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파래다. 우리가 먹는 파래가 아니고 가파래다. 이것은 바다에 가면 어디에든지 있다. 우리가 먹는 파래는 부드러운데 가파래는 뻣뻣해서 먹지 못하는 것이다. 꼭 그것이 들어간다. 가파래로 귀신 눈 속인다고 한다. 사람이 못 먹는 것을 내놓는다. 그러면 귀신이 보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그렇게 한다. 사람이 생각이 이상한 게 자기생각대로 하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예배도 잘못하면 그렇게 된다. 잘하면 물론 좋겠지만 잘하기가 어렵다. 이런 세계에서 아무리 하나님과 우리가 교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교제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요즘도 제사상에 보면 먹지 못할 것을 놓는다. 여러 가지 색으로 염색한 유과 같은 것을 상에 올려놓는데 그것은 사람도 못 먹는다. 단지 상을 보기 좋게 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조상을 대접하면 진짜로 조상이 온다고 하면 그 조상이 받아먹겠느냐는 것이다. 살아계실 때 용돈을 한 푼이라도 더 드리는 것이 낫지 돌아가신 다음에 정성을 다해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 그 조상과 교감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것이 종교이다. 이런 세계에서 새 언약을 주신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취된 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이다. 다른 이방종교에서는 신이 사람이 된다는 개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증산도만 하더라도 강증산이라는 사람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람이라고 한다. 상제인데 중국 사람들은 신이 없기 때문에 상제라고 하는데, 상제가 육신을 입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법을 하고 마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독교를 본 딴 것인지 원래 동양에 있는 사상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것이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신화되는구나. 인간이 신이 되는구나.’ 아니면 ‘신이 인간이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고 하면 육체가 되신 예수는 육체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면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것을 보면 연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연합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이 된다면 예수님 같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우리고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기의 인간성을 고백하고 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원하는데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7:24) 젊었을 때 이 말씀이 내게는 너무 위로가 되었다. 바울도 이렇구나. 나도 그런 것은 당연하구나. 이렇게 생각되어서 아주 당연하게 생각했다. 위로를 크게 받았다. 한 8년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이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야외소풍을 나갔는데 어느 중학생이 와서 ‘별명이 뭔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모르겠다.’고 하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그 말을 했으면 중학생이 그렇게 말했겠는가. 꼭 이대로였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7:21)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원하는데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7:24) 하는 이 사람이 꼭 나였다. 바울도 이렇구나. 그래서 위로가 되었다. 언젠가 육체를 탈피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이런 문제가 다 없어지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었다. 육신을 탈피한다는 것이 결국 죽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 가면 갑자기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한다. 이 말씀도 참 좋았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하는 사람에게 이 말이 들리니까 얼마나 좋은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 뭔지 몰랐었다. 그때 나는 예수를 믿으니까 그냥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크게 위로가 되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정죄를 하지 않는구나 해서 크게 위로가 되었다. 그런데 항상 그것이 남아 있었다. 성경에 이렇게 되어있어서 기분은 좋은데, 내 속에서 해결이 되지 않았다. 바울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는 말을 했다. 다른 말을 하면서 말했는데,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9) 이렇게 이것을 설명하면서 빌립보 3장9절에서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뭔지를 잘 몰랐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아들) 안에서... 속량(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고 한다. ‘그 아들 안에서’를 나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생각했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 아들이고 자녀라고 하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구속을 제대로 몰랐었다. 구속은 원위치로 되돌리는 것이다. 나는 원위치로 되돌린 경험이 없는데도 그냥 이 말만 좋아했었다. 단지 내가 예수를 믿으면 그렇게 된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내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의롭다고 여겨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적인 관계이다. 주고받는 관계이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해준다는 법적인 관계였다. 믿음으로 믿음을 갖게 한다고만 늘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이것은 좀 부족하다, 믿음으로 의롭다고 받는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로마서 3장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고 한다.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지 내가 믿었기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차이가 있다. 에베소서 2장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은혜를 인하여.”는 빼버리고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받아들여졌다. 하도 믿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인하여.”이다. 신념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교회 안에서도 신념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은데,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능치)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해서 막 믿는다. 그래서 병 고쳐지는 이런 역사가 나타난다. LA에 가면 로버트 슐러가 세운 유명한 수정교회가 있다. 한 번씩 관광하는 교회이다. 그 교회를 보고 나니까 너무 멋있게 지어놓아서 다른 교회는 교회 같지가 않게 생각된다. 나도 한국에 와서 교회를 지으면 크게는 짓지 못해도 조그마하게 짓더라도 저렇게 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하고 생각했다. 전문가에게 저렇게 지으려면 돈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어봤더니 엄청나게 들어간다고 했다. 아무 것도 없이 간단하게 보이는데, 유리 한 장 한 장이 엄청나게 비싸고, 유리를 붙들고 있는 부속이 있는데 그것이 무지하게 비싸다고 한다. 너무 비싸서 포기했다. 로버트 슐러도 건설하다가 결국 800만불이 없어서 파산하게 되었다. 그것을 믿음을 가지고 밀어붙이니까 건설이 되었다. 어떤 부자를 만나서 투자하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엄청난 돈이 드니까 얼른 하지 않고 집에 가서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집에 돌아가서 얼마 있지 않아서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돈을 내겠다고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 교회가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다. 사람이 어떤 신념에 잡혀있으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나도 생전 처음 그런 경험을 해봤다. 내가 충주에 갔을 때인데 충주 제일 감리교회가 있다. 그 교회는 내가 맡은 지역은 4개군 1개시인데 그곳의 중심교회로 모교회나 마찬가지였다. 한 150년 정도 되는 교회였다. 그런데 그 시전체가 감리교회였고 장로교회는 이따금 하나씩 정도 있었다. 그런 지역인데 그런 곳에 간판을 걸고 C.C.C.활동을 했었다. 벌써 교회에서 나가라고 한다고 소문이 났다. 그 교회가 C.C.C.만 있는 것이 아니고 RCY니 YMCA니 하는 단체들이 붙어있었다. 왜냐하면 중심교회이고 시내 한 복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감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C.C.C.의 민족복음화에 대한 확신이 꽉 차있을 때였다. 생전 처음으로 그런 확신에 차있을 때였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충주에 갔었다. 그래서 어쨌든지 간에 결판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만나러 갔다. 한 5분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냥 ‘나는 이러 이러한 일을 하다가 왔습니다.’고 말했다. 목사님이 젊었는데, 마음을 바꿔서 ‘우리 같이 다시 한 번 일 해봅시다.’하고 말했다. 내게는 사람에게 말을 해서 즉석에서 마음을 바꾸는 것은 처음이었다. 감리교 목사는 장로교 목사와는 아주 차이가 많다. 감리교 목사는 그냥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 장로교 목사는 그렇게 못한다. 장로들의 합의를 봐야하지 자기 혼자 결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감리교 목사들은 자기가 하겠다고 결정하면 그렇게 한다. 이것이 큰 차이이다. 장로교 목사님들이 목에 힘을 많이 주는데 실제로는 권위가 별로 없다. 그런데 감리교 목사는 다닐 때 보면 보통 허술한데 일할 때 보면 자기가 결정해버린다. 충주에 있는 중심교회로 충주시내의 기독교 유지가 거의 다 모여 있고, 장로들도 쟁쟁한 교회였는데도 그렇게 결정했었다. 그때 나는 깜짝 놀랐었다. 그 다음날 만나자고 해서 집으로 찾아왔다. 어제 李목사님을 만나고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다는 것이다. 뭐냐고 하니까 캐나다 토론토에 어떤 교육프로그램이 있어서 참여하러 6개월을 가는데, 수속도 다 해놓았다고 했는데 교회를 맡길 사람이 없어서 발설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 나를 만나보니까 李목사에게 맡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교파를 아는 것도 아니고,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단지 처갓집이 충주에 있다는 것뿐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내게 맡기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놓고도 나는 설마 이것이 되겠나 했다. 그 후 서울에 한 두 달간 있다가 정식으로 충주에 내려왔다. 다른 날짜는 기억을 못하는데 이 날짜 3월26일이라고 기억한다. 이 날에 충주에 내려와서 인사차 가니까 다 준비해 놓았다. 그 목사님은 4월6일 출발한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설교하고, 시간이 되면 하루만 심방을 해달라고 했다. 나머지는 전도사가 다 할 것이라는 것이다. 내게는 호박이 넝쿨째 떨어지는 경우였다. 왜냐하면 C.C.C. 말로 하면 그런 교회는 전략적인 교회였다. 그래서 내가 그 큰 교회에서 6개월 동안 설교를 했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나에 대해서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감리교니까 됐지 장로교 같으면 그렇게 못했지 싶다. 그때 젊은 목사님이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결정했었다. 교회에 다 이야기해 놓았다고 했다. 6개월 동안 설교를 하고 나니까 교인들과 친근하게 되었다. 그때 엑스플로 74에 제일 어려운 것이 사람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30만 명을 서울로 동원하는 일이었다. 각 지구 간사들은 사람을 동원하느라 죽어나는 것이다. 나는 두세 군데 교회를 방문해 보니까 도저히 불가능했다. 지역은 넓고 여름에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순회하는 것을 그만두고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만 모아다 순장 훈련을 시켜서 갔는데, 서울에 가니까 청주에 있는 간사가 나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지구에서는 3천명이 왔습니다.’라는 것이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3천명이 왔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믿음의 힘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뭔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신념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가득차면 사람이 설득이 된다. 그래서 나는 정*영씨를 이해한다. 허허 벌판에 중공업을 세우겠다고 돈 빌리러 갔다는 것이 아닌가. 결국 돈을 빌려서 왔다. 신념의 마력이라는 것이 엄청난 것이다. 한국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노골적으로 ‘믿음은 신념입니다.’라고 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인 교회가 되었다. 여러분들도 믿음만 있으면 여기에 오실 필요가 없다. 잘될 텐데 여기까지 뭘 하러 오겠는가? 믿음만 있으면 별 일이 다 일어난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런 경험을 했다. 전혀 그런 것을 못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때는 내가 믿음이 충만했다. 민족 복음화에 대한 신념이 충만했다. 그렇게 해서 종교가 되겠다. 나 같은 사람도 그런데 조금 더 발전시키면 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것을 기반으로 해서 ‘이렇게 하니까 되더라.’고 해서 다음에도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설득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 은혜로 인하여.”는 빼버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읽었다. “그 은혜로 인하여.”를 읽었지만 그것은 어떻게 이상하게 빠져 버린다. 여러분은 그 구절을 아실 것이다.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했으니까 믿음이 있으면 선물을 받는다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우리가 선물을 받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그냥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구속 안에서, 예수님의 구속 안에서이다. 세계가 다른 세계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데나 임하는 것이 아니다. 임할 때 임하는 것이지 아무데나 임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방에 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 것 같으면 진즉 다 일이 일어나지 이러고 있겠는가? 은혜가 있을 데는 따로 있다. 물이 고일 데가 따로 있다. 아무데나 물이 고이지 않는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물이 고이지 않는 곳에는 물이 고이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 구속이 첫째가 되고, 다음에 뭐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이로 말미암아(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9:15)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전부 구속 안에 있다. 하나님은 왜 이러고 있는가? 세상이 지금 한쪽에서는 배 터져 죽고, 한쪽에서는 배가 곯아 죽는데,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런 말을 많이 듣는다. 그에 대해서 대답할 말이 없다. 예수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분 안에서는 딱 정해졌다.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서 상당히 돈을 많이 쓰고 있다. 그것을 우리 국민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 주는가? 일단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해야 혜택을 받는다. 내가 하나님 백성이 되고 한 후에 그 다음 문제이다. 모든 문제가 다 그 다음의 문제이다. 구속이 없이는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이다. 어쩌다가 신념이 좋아서 성공할 수도 있고 하지만 구속이 기본이 안 되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왜 십자가가 중요한가? 구속 때문에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이니 봉사니 하지만 그것들이 없더라도 하나님 사랑은 있다. 구약시대라고 하나님 사랑이 없는가? 다 있다. 예수님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가? 하나님이 스스로 못하시는 것은 구속이다. 구속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속이 먼저 있어야 된다. 아들이 먼저 되고 봐야 후사가 되고, 다음에 왕권을 물려받지 아들도 안 되는데 어떻게 왕권을 받겠는가? 잘한다고 왕권을 주겠는가? 왕권을 받는 것은 아들이다. 못났어도 아들이 왕권을 받는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일단 자녀가 된 다음에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가 구속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속이 희미해져 간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문화에 휩쓸리게 되고, 철학에 휩쓸리게 된다. 초대 교회가 사도들이 끝나고 난 후에 희랍의 세계니까 희랍의 문화, 철학, 그 속에 동화되어 버린다. 그렇지 되지 않기가 어렵다. 중국을 침략했던 오랑캐들이 중원에 들어가면 다 중국 사람이 되어 버린다. 중국 문화에 흡수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 조선도 조금만 더 오래 있었으면 일본 문화에 다 흡수되고 말았을 것이다. 모든 일이 다 우리보다 잘했다. 어떤 사람은 일본 사람들을 흉내 내려고 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일도 많이 했다. 시간이 지금까지 갔으면 애국자가 따로 없다. 큰 문화에 사람들은 흡수된다. 기독교가 희랍문화에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것은 정신적으로는 희랍 문화에 흡수되었다. 희랍 문화는 희랍 철학이다. 로마에 들어가서는 로마의 정치에 휘몰아쳐서 가톨릭이 된 것이 아닌가? 그것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혁명이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일부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거나 성경을 개방한다는 몇 가지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뒤바꾸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근본 뿌리를 잃어버린 것 같다. 우리가 구속 없이 예수를 믿고 구속 없이 하나님 백성이 되니까 세상을 못 따라가서 한이다. 이제는 원체 빨리 가니까 따라가지도 못한다. 교회가 따라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젊은 사람들의 비위에 맞추어서 교회를 해도 안 된다. 해도 안 되는 것이 세상이 더 앞서가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세대일수록 참 복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참 복음만 살아남게 될 것이다. 보시면 알겠지만 참 복음은 살아남고, 문화화된 종교는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제는 불교 시대가 왔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기독교처럼 저런 획일화된 저런 세계는 이제는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없다. 다양화 되고, 다양성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지도할 수 있는 것은 불교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기 말이 지금의 말과 비슷하다.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다. 현대 사람들에게 딱 맞는 말이 아닌가?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딱 맞는 말이다. ‘꼭 그것만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까? 또 다른 것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 전부라고 내 인생을 올 인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주먹으로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그것도 안 된다. 정신 차리라고 한 대씩 먹여 주면 좋겠지만 그것도 안 될 일이다. 참 얄밉다. 이야기 해보라. 기껏 이야기를 해 놓으면 ‘꼭 그것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고 만다. 그 말을 안 한 놈도 마찬가지이다. 속으로는 ‘좋은 말인데 꼭 그것만이 전부인가? 그것이 내 인생 전부인가?’ 이제는 개인이 완전히 하나님이 다 되었다. 자기가 다 하나님이 되었다. 창세기 6장으로 되돌아 왔다. 다 자기 생각에 옳을 대로 하였더라. 지금 그런 세계가 아닌가? 다 자기 생각에 옳을 대로 하였더라. 어떻게 하면 네피림이 될까? 어떻게 하면 장부요, 용사가 될까? 그것만 꿈꾸고 있는 세계이고 그것만 바라보고 있는 세계인데 거기에 교리를 내세운다고 되겠는가? 옛날 어두운 때는 통했지만 지금 교리주의 해서 되겠는가? 한국에서는 아직도 그것을 하고 있지만 얼마 못 간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안 믿는다.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전통을 가지고 한다고 되겠는가? 전통을 가지고도 안 된다. 대학생들을 만나보라. 사고방식이 영 다르다. 우리와는 너무 다르다. 금방금방 다르다. 몇 십 년 차이가 아닌데도 그렇게 사고방식에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대화가 잘 안 된다. 그 대화를 따라 맞추려고 하면 아무 것도 안 된다. 같이 노닥거리다가 마는 것이지 뭐가 되겠는가? 우리는 더욱 더 진실한 것이 필요하고 더욱 더 복음이 필요하다. 이럴수록 더 필요하다. 서구의 교회당들이 텅텅 비어갈 때 우리가 가서 그것을 인수해야 되지 않겠는가? 돈을 안 들이고 인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참 복음을 가지고 가서 예배당과 성당을 인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성육신의 보편화! 이것은 구속으로 말미암는다. 내가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지 내가 그분이 될 수도 없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는 노래를 얼마나 많이 불렀는가? 닮아지는가? 안 닮아진다. 오히려 닮으려고 애를 쓰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안 닮아진다. 연합해야 되지 닮아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분은 그분이고, 우리는 우리다. 만날 지점에 가서 만나 연합해야 되는 것이지 따로 있으면서는 안 된다. 나도 하는 데까지는 해보았다. 안 되었다. 나는 안 돼서 빨리빨리 포기했다. 내가 버틸 힘도 없으니까 빨리빨리 포기한 것이 다른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되었더라면 계속 밀었을 것이다. 나는 안 되었다. 내가 뭘 좀 해 보려면 딱 막아 버렸다. 하나님이 일부러 막으신 것 같다. 길을 다 막아주신 것 같다. 그것이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다. 나대로 잘 되었더라면 영 빗나가서 다른 데 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러지 못하도록 막아주셨다. 그때는 섭섭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참 감사한 일이다. 꼭 한 길로만 오도록,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길로 오도록, 도적도 오지 못하고 벌레도 슬지 못하는 곳으로 다른 길을 주셔서 그 길로 오게 하셨다. 우리가 주 예수 안으로 가는 길, 그분과 연합으로 가는 길은 아무도 손대지 못한다. 마귀도 그 길은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자리이다. 길이 전혀 다르다. 사탄의 길과 예수의 길은 길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침노할 수가 없다. 에덴동산이 회복되었지만 에덴동산보다 훨씬 더 업그레이드 된 동산이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이다. 새 예루살렘은 문이 있지만 닫을 필요가 없는 곳이다. 누구나 다 들어와도 되는 곳이다. 아무라도 들어와도 된다. 그런 세계이다. 에덴동산은 지금 문을 닫아 놓았다. 저 인간이 들어오면 안 되겠다고 해서 문을 닫아 놓은 곳인데, 새 예루살렘은 열 두 문이 다 열려 있다.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지금 가는 길은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새로운 길로 가야된다. 새롭고도 산길로 가야된다. 문화와 접촉해서 문화에 뒤지지 않으려고 해도 엉뚱한 길로 가게 되고, 본받으려고 해도 엉뚱한 길로 가게 되고, 타협하려고 해도 다른 길로 가게 되고, 새롭고도 산길이 따로 있다. 주님께로 가는 길이 따로 있다. 세상과 타협해서, 종교와 타협해서 갈 수 있는 그 길이 아니다. 서로 의논하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전혀 다른 길이다.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길, 이삭이 가는 길, 야곱이 가는 길, 이 길은 전혀 다른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개척해 놓으신 우리의 선열들을 통해서 우리는 주께로 가는 것이다. 알고 개척해 놓은 길이니까 그 길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그 안에서는 복음을 전파할 수 없다. 별 것을 가져가도 안 된다. 왜냐하면 밖으로 나와야 하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 두고 어떻게 좋게 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거기서 나와서 따로 있고, 아브라함을 부를 때 “너는 너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지시 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했다. 이것은 영원한 원칙이다. 사람을 불러내는 것이지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개선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라도 불러내야 한다. 숫자에 구해됨이 없이 불러내야 된다. 불러내서 다른 세계에 넣어야 되지 그 세계 안에서는 고칠 수 없다. 전도하는 것은 우리가 불러내러 가는 것이다. “너는 너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지시 할) 땅으로 가라.”(창12:1)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거기로 불러내러 가는 것이다. 거기에 있어서 좋게 하려면 무엇 때문에 복음을 전하겠는가? 초창기에 어떤 사람이 와서 주말마다 무슨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한다고 했다. 무슨 일로 기도하느냐고 물었더니 결혼 때문에 기도한다고 했다. 이 처녀는 그때 대학교 4학년이었다. 결혼 때문에 무슨 기도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꼭 의사와 결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틀렸다고 생각하고, 잘 해보라고 했다. 또 한 사람은 다른 선교단체에 있는 사람인데 상담하러 왔다. 동생이 그때 우리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고민이 뭔가 하면 자기는 네비게이토 선교에 있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과 교제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는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데 그 단체에서는 반대한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들어보니까 나오기는 틀렸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둘이 좋으면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결혼해서 지금 살고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자기는 처녀 때 주일이면 신랑과 같이 교회를 가서 성가대에서 성가를 하는 것이 자기 꿈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만나는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해서 좋은 사람끼리 결혼하면 된다고 했더니 얼마 안 있어서 미국에서 편지가 왔다. 그때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결혼해서 지금 미국에 와서 잘살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로 갈 사람인데 내가 붙잡는다고 되겠는가? 거기로 갈 사람은 거기로 가고, 나올 사람은 나와야 한다. 다 나올 수 없다. 먼저 나올 사람이 있고, 다음에 나올 사람이 있는 것이지 한꺼번에 다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들어가서 뒤집는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세력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 내가 C.C.C.에 있을 말기에 뭔가 조짐이 보였다. 나는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나타났는지 여기저기서 전화도 오고 그랬다. 이러면 C.C.C. 안에서 복음이 전해지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딱 커트를 했다. 얄미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하다. 그때 만일 내가 거기에 있었으면 제대로 복음이 전해지겠는가? 나는 그것을 통해서 어떤 단체는 전복하기가 불가능하구나. 개인을 불러내러 가는 것이지 어떤 단체를 불러내기는 불가능하다. 우리 생각 같으면 한 단체를 불러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이 안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전부 개인적으로 부름 받았다. “너는 너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지시 할) 땅으로 가라.”(창12:1) 그럴 사람들만 하고 그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도 하고 해서 차차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너무 큰 욕심을 내면 안 되고 하나씩 불러내야 된다. 분리해야 된다. 분리해야 오지 안 하면 못 온다. 어떤 이유로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성경에 보면 전부 그런 사람들이다. 어떤 이유로 바벨로 가는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안 그러면 안 온다. 나도 아마 전에 살던 곳에서 잘 됐으면 안 왔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거기에서 이탈된 사람이다. 열외이다. 있어봤자 소용이 없다.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렸다. 그러니까 오라는 소리가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한꺼번에 모든 짐을 다 벗어버렸다. 그런 사람들이 따로 있다. 그렇다. 아무나 다 좋은 말씀이니까 오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런 말씀을 못 알아듣고 안 올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때가 안 됐구나. 때가 차야 되는구나. 기다리면 다음에 때가 있다. 그 사람이 올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고 좋다. 누구에게도 복음은 전해야 되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되는데, 그렇다고 다 오지는 않는다. 더구나 단체적으로 오지는 않는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거기도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가 한꺼번에 오겠는가? 성육신의 세계!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큰 은혜이다. 설사 예수님이 혼자 성육신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와 연합해서 결혼하면 되지 않는가? 예를 들면 성육신은 다른 사람이 못한다고 한다면 내가 그분에게 시집을 가면 된다. 내가 상놈 집안에 태어났어도 양반집에 시집을 가면 된다. 그런데 그분이 죽으신 것은 자기 혼자 성육신하려고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다 표현해 버렸다. 그것은 요한이 일생을 살고 나서 쓴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읽고 있는 1장이 사실은 제일 마지막에 쓸 말이어야 한다. 그 안에서 구속을 경험한 사람, 마지막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요한복음 1장에 있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거꾸로 다 갔다 온 것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