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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1945러셀17서양철최III4
현대편(Mordern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 현대편(Mordern Philosophy) 하권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에 이르기까지 11-269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27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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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가들은 표면에서 상층으로 중세와는 반대방향의 사고를 하는 자들이다. 세상이 변해가는 가운데, 이들은 상층이 표면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표면이 상층을 선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알기 시작한다. 문서(글쓰기와 인쇄의 발달)은 전파내용의 풍부성과 전파 영역의 확장(탈영토화) 그리고 속도의 비약적인 발전이 중세와 다른 새로운 사회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그 전파의 너울(파도)에 실린 가랑잎 같은 티끌들이 동심원을 그린 물결위로 흘러나가는 것이 종교개혁이다. 이 파고를 높이고 내리는 것은 인민이다. 농민 봉기들이 그예이다. 그러나 탈영토가 재영토화되면 인민은 또다시 표면 밑으로 잠수하여 리좀의 뿌리처럼 거미줄망이 아니라 뿌리망으로 이리 저리 탈주한다. 탈주의 한계에서 새로운 과학이 등장하여 종교개혁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과학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설명의 시대를 이끌 것이다. 천문학의 변화, 물리학의 변화, 수학에서 기하학의 변화가 우선 눈에 띌 것이다. (50QMC)
[1444년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1468)는 금속인쇄 활판을 발명했다. 이는 이세기에 문화적 충격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각 나라말과 글이 확장되고,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물질적 토대가 된다. / 한글이 1444년에 창제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50QMC)]
제5장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58-61
종교개혁(Reformation)과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은 모두 미개한 국가들이 이탈리아의 지적(知的)인 지배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난 것이다. 종교개혁은 정치적이고 신학적인 반항이었다. .. 반종교개혁은 이탈리아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자유에 대한 반동에 지나지 않았다[카톨릭의 순수성을 보존하려고]. 따라서 교황의 권세는 약화되지 않고 반대로 강화되었다. .../ 종교개혁은 대체로 독일에서 일어났으며, 반종교개혁은 스페인에서 일어났다. (58) [종교개혁이 독일의 루터, 스위스의 칼방, 스페인의 로욜라로 한정하여 보면 이런 평가도 가능하다. / 이런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은 상층과 표면 사이에서 일들(les affaires)이다. 심층에서는 생산력의 변화로 농민 봉기들이 곳곳에 있었으나 여기에 대한 러셀의 언급은 미미하다.]
“이탈리아 화(化)한 영국인은 악마의 화신이다”라는 영국 속담... /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작품에서도 악한은 대부분 이탈리아 사람임을 볼 수 있다. 이아고(Iago)는 그 중의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그러나 보다 더 현저한 것은 심벨린(Cymbeline, King of Britain, 1611)에 나오는 이아키모(Iachimo/Giacomo)로서 순진한 촌사람들을 기만한다. 이와 같은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도덕적 의분(義憤)이 종교개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58)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에 큰 역할을 한 3대 인물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칼뱅(Jean Cavin, 본명 Cauvin, 1509-1564), 로욜라(San Ignacio de Loyola 1491-1556)이다. 이 세 사람은 지적인 면에서 볼 때 에라스무스나 모어 같은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중세기적인 철학에 속해 있었다. (58-59)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은 1517년이고, 칼뱅의 종교개혁은 1541년으로 보며, 로욜라의 예수회(Jésuites) 성립은 1534년이다. 스위스에서 종교개혁가로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도 있고, 덧붙이자면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1582, fr. Thérèse d'Avila)와 같은 중요한 신비가도 등장한다.]
루터와 칼뱅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혼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은 그대로 추종하고 교회와 관련된 가름침은 따르지 않았다. .. 죽은 사람이라도 미사를 올리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연옥의 사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59)
신교도들 사이에서도 종교에 대한 국가의 권력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의견이 엇갈려 있었다. 루터는 군주가 신교도일 경우에는 그 나라 교회의 우두머리로 인정하였다. 영국에서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와 같은 견지에서 그들의 견해를 강력히 주장했으며,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스페인에서 폭동이 있은 후), 네덜란드의 신교 군주들도 이것을 주장하였다. ... 군주 세력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경향을 촉진시키는 결과가 되었다.(59)
그러나 신교도들은 한편으로 종교개혁의 자유주의적인 면에 치중하여 교황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왕에 대하여도 복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독일 재침례교도들(Anabaptist)은 탄압을 받았지만 그들의 교리는 영국과 네덜란드로 전파되었다. 크롬웰(Cromwell, 1559-1658)과 국회 사이의 싸움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재개되었지만, 신학적인 면에서 보면, 그것은 종교에 관계된 일을 정부가 결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지지하는 사람들과의 싸움이라 하겠다. (59-60)
신교의 성공은 최초에는 놀라울 정도로 급속도로 진전되었지만 로욜라의 예수회(Jesuit)교단의 창설로[1534] 말미암아 제지를 당하게 되었다. 로욜라는 군인이었으므로 군대식으로 교단을 조직하였다. 장군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며, 예수회 교도들은 누구나 이단과 싸움에 참여할 각오를 해야 한다. 예수회교도는 일찍이 트렌트 회의(Council of Trent) 때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잘 훈련되었으며 유능하고 의분이 강하며 선전가로서 숙달되었다. (60) [우리나라에 조선시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시에 영향을 준 예수회는 로욜라의 예수회가 아니라 프랑스 외방 선교회 예수회이며, 지금 서강대의 예수회는 북아메리카의 독립된 예수회이다.]
그들의 신학은 신교와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중에서 신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두 반대하였다. 그들은 자유의지를 믿었으며, 예정론에 반대하였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과 행동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 (파스칼Pascal의 말을 믿는다면) 그들은 이단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성직자보다 친절하였기 때문이다. (60) [파스칼은 얀센파에 더 가깝다.]
그들은 교육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 데카르트도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많은 수학을 그들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 그들은 구교 군주들로 하여금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스페인 군대를 따라 이탈리아로 가서 거의 1세기 동안이나 자유사상에 물들어 있던 이탈리아에서 종교재판의 공포를 다시 조성하였다. (60)
30년 전쟁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신교나 가톨릭이나 어느 쪽도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교리의 통일에 대한 중세기의 희망은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 신조(信條)도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나라로 가면 핍박을 면할 수 있었다. (61) (3:23, 50QLH) (4:8, 50QMJ)
제6장 과학의 발달 62-81
[[서양에서 과학의 발달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과학의 동력은 놀람과 호기심의 발동 즉 욕망의 발동이 근원일 것이다. 놀람이란 하나의 원리 하나의 법칙에 대해 상대성이 있다는 것, 생성에는 하나의 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일 것이다. 형이상학(존재론)과 인간 본성론에 기반한 학문보다 물체의 변화와 그것들의 관계에서 성립한 사건들을 다루는 제반 과학들이 지위를 차지한다. 주로 현실의 앞면(표면)에서 가설을 제시하고 그에 맞는 법칙을 찾는다. 사건들과 사실들에서 조립적이고 연결적인 면의 중요성을 통해 종합을 구사하면서, 영혼의 (음악적) 구성과 혼융(공감)의 종합 양식을 뒷전으로 미루었다. 이는 중세 미몽이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 들여다보면 서양은 오랫동안 중세 크리스트교의 독단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동양보다 사회 발전상이 느렸다. 그들의 종교재판은 새로운 사유를 하는 많은 사람들을 단죄하여 제거했다. 과학은 미몽에서 깨어나게 하였으나, 상층의 기조인 유일 권력과 권위에 대한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이런 사고가 과학의 획일화 통일화의 길을 걷는 것은 20세기 초까지였다. 이런 사고가 사회체에서 국가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기술과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성과만큼이나 세계사에 폐해가 많았다. / 과학의 발달과 기술의 발전 같은 길을 가면서, 인간 활동의 확장과 편리를 제공하고 다른 한편 예측과 투기(투자)에 사로잡혀 절대국가 또는 제국주의를 성립하게 하였다. 푸꼬(Foucault)가 보았듯이 물체(몸체)의 재현이 몇 세기를 거치면서 여러 과학들의 변화를 이루었으나, 정작 영혼의 생성은 뒤로 밀리어 19세기 후반에서야 인간학 또는 인류학이 도래한다. / 과학은 확장은 잉여의 생산에 은연중에 기여하였고, 기술의 정확성의 발전은 상품 생산의 숫적 양화에 따른 과잉의 문제거리를 만들었다. 잉여와 축적이 자본주의라는 상품자유주의의 시대를 여는데 비해, 인성자유는 여전히 침잠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웠다. 단지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났을 뿐이다.]]
근대(modern)와 그 전 세대와의 차이점은 거의 대부분 과학에 돌릴 수 있는데, 과학은 17세기에 가장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 / 정신적인 면에서만 보면 근대는 17세기부터 시작된다. .. 그러나 ..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오캄은 뉴턴이 말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데카르트는 어느 의미에서 17세기 과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62)
4대 위인 –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 – 은 특히 과학 창조에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62)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 1473-1543)는 폴란드 사람으로서 어느 모로 보나 정통적인 이상을 지닌 성직자였다. ../ 그는 1500년 로마에서 수학 강사와 교수로 있다가 1503년에 귀국하여 프라우엔부르크의 종교협의회의 임원이 되었다. .. 당시의 시대사조(時代思潮)를 개혁하는데 보냈지만, 여가가 있으면 천문학 연구에 정력을 쏟았다. 그는 일찍이 태양이 우주의 한 가운데 있고, 지구는 이중 운동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나는 하루 한번의 자전(自轉, la rotation)이고 하나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1년에 한 번 도는 공전(公轉, la révolution)이다. (63) [멘델(Gregor Mendel, 1822-1884)도 성직지이면서 과학자였다.]
그는 교회의 비난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견해가 자연히 알려지는 것은 그대로 내버려뒀지만 출판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의 주요 저서인 천체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1530 Des révolutions des sphères célestes)는 그가 죽은 해(1543)에 출판되었다. (63) [같은 해, 해부학의 창시자이자 의사이며 해부병리학 전문가인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 1514-1564)의 인체 해부학 대계(De humani corpolis fabrica libri septem, 약칭 인체의 구조(Fabrica), 1543)가 있다. 철학이 의학을 주목했더라면 철학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알렉산드리아 의학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신체에 내재하는 영혼에 대하여서도. (50QLJ)
코페르니쿠스가 생존해 있을 때의 교회는 이후 트렌트 회의(1545-1563)가 열리고, 예수회 교도가 나오고(1534), 종교재판이 부활된 때보다 훨씬 더 자유스러웠다. (63)
코페르니쿠스의 연구는 근대적인 경향을 띠지 않았다. ... /그는 그리스 사람들처럼 심미적인 동기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주전원(周轉圓, 중심이 다른 큰 원의 원주상을 회전하는 작은 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이 주전원의 중심이 태양이나 혹은 그 근처에 있었다. .. 그는 피타고라스 이론은 들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태양[지구]중심설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63)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아리스타르코스(Aristarque de Samos, Ἀρίσταρχος, 전310경–전230)이다, 전자는 지구 중심이고 후자는 태양중심이기 때문이다.] [주전원을 인정하는 두 학설은 계산상 둘 다 오차를 갖는다. 지구중심설이 태양중심설보다 계산이 복잡하다. 근대인들은 자연[위대한 신]의 법칙이 복잡할 리 없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는 분명히 난점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는 별의 시차(視差)가 없었다. .. 19세기 와서야 겨우 측량기술이 발달하여 별의 시차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64) [시차(Parallax)는 고정된 먼 배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한 물체를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두 관측자가 관측했을 때 발생하는 겉보기 위치의 차이 또는 변위이다. 최초 시차 측정자는 독일의 베셀(Friedrich Wilhelm Bessel 1784-1846)이며, 그는 1838년에 백조자리 61번 별의 시차를 0.3136초로 측정하였고, 별까지의 거리가 10.6광년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또 다른 난점은 떨어지는 물체에 관한 문제였다. 만일 지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쉬지 않고 돌고 있다면, 높은 곳에서 떨어뜨린 물체는 .. 서쪽지점에 떨어져야 한다. ... 이 문제는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에서 해답을 얻게 되었지만 코페르니쿠스 당시에는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하였다. (64)
버트(Edwin Arthur Burtt, 1892–1989, 미국 철학자. 과학사가)가 쓴 근대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기초(The Metaphysical Foundations of Modern Physical Science. A Historical and Critical Essay, 1925)라는 재미있는 책이 있는데, .. 그에 의하면 코페르니쿠스 당시에는 그의 체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어떠한 사실도 알려진 것이 없었으며... “당시의 경험주의자들이 16세기에 생존하였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주에 관한 새로운 철학을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조소해 버렸을 것이다.” (64)
근대 과학을 창설한 사람들은, 전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두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관찰하는 데 대한 꾸준한 인내력과 가설을 구성하는 용감한 담대성이다. .. 그러나 이 두 장점을 다 지닌 사람은 고대에는 아리스타르코스 한 사람밖에 없었으며 중세기에는 그 중 어느 한쪽의 장점도 지닌 사람이 없었다. (65) [코스모스(1980)의 저자 칼 세이건(Carl Sagan, 1934-1996)이 한탄하였다. 고대의 학설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남아있었다면, 역사는 달리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그의 가설에서 ... 지구의 공전에 대하여 단순화는 되었지만, 자전의 경우처럼 현저한 것은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경우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처럼 많이 요구되지는 않았지만 주전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65)
우주적 상상력에 작용한 혁명적인 영향을 떠나서라도 천문학에 커다란 공로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옛날부터 믿어 오던 것이 옳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며, 둘째는 과학적인 사리의 판단은 꾸준히 사실을 수집하고, 그 사실을 서로 연결시키는 법칙을 대담하게 예측해 보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66)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들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하늘이나 해와 달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주제넘은 점성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누구나 자기가 가장 현명하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할 때 많은 체계들 중에서 제일 좋은 체계를 새로 만들어 보는 법이다. 이 어리석은 사람은 지구를 멈추게 한 것이 아니고 태양을 멈추게 하였다.” 칼뱅도 “이 땅은 움직이지 않도록 굳건히 세워졌다.”(시편 93:1)를 인용하여 “누가 감히 코페르니쿠스에게 성경보다 더 큰 권위를 주겠는가!”하고 외쳤다. (66)
[결론] 코페르니쿠스는 자기의 학설을 지지할 만한 어떤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하였으므로 오랫동안 천문학자들이 그의 주장을 반대했다. (67)
그 다음에 나타난 중요한 천문학자는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였다. 그는 중간노선을 취하여 해와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돌지만 그 밖의 유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 그 한 가지 이유는 1572년에 새로운 별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혜성(彗星)의 관찰에서 얻은 것으로 혜성들 역시 먼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 이 학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에 대한 다른 학설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67)
티코 브라헤는 이론가가 아니고 관찰자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처음에는 덴마크 왕의 보호를 받으며 다음에는 황제 루돌프 2세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별의 목록을 만들고 여러 해를 두고 유성의 위치를 기록하였다. 그의 만년에[1600년] 아직 청년이었던 케플러가 그의 조수가 되었다. (67)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천재적인 재능을 많이 갖고 있지 않더라도 인내력만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가장 좋은 본보기이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이후에 처음으로 태양중심설을 주장한 중요한 천문학자이다. .. 케플러는 피타고라스 학설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선량한 신교도이면서도 태양을 숭배하는 경향이 다소 있었다. .. 그의 피타고라스주의는 그로 하여금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식 상상으로 기울어지게 하였다. 즉 우주의 중요성은 다섯가지 정상적인 고체에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67) [삼각형으로된 정4면체, 정사각형으로된 정6면체, 정삼각형으로된 정8면체, 정오각형으로된 정12면체, 삼각형으로 된 정20면체 ]
케플러의 공적은, 유성[행성] 운동에 대한 새로운 세 가지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그 중의 둘은 1609년에 발표되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1619년에 발표되었다. 첫째 법칙은 유성들은 타원형 궤도를 그리며 태양은 그 궤도의 한 초점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법칙은 한 유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직선은 같은 시간 내에 같은 크기의 영역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셋째 법칙은 어떤 유성의 공전(公轉) 기간의 제곱은 그것의 대양으로부터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68)
처음의 두 법칙은 화성에 대해서는 증명할 수 있었다. 다른 유성[행성]에 관한 관측과 모순되지는 않았지만 명확하게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 행성이 타원형으로 운동한다는 첫째 법칙을 현대인들은 쉽사리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벗어나려면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였다. (68) [사실이지 지금도 타원을 설득하기는 쉬운 것이 아니다...]
원을 타원으로 대치(代置)했다는 것은 피타고라스 이후로 천문학을 지배하고 있던 심미적인 편견을 버리게 하는 것을 뜻한다. 원은 완전한 형체이며 천체도 완전한 물체이므로 본래는 신(神)을 뜻하였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69) [논리적으로 동일율의 기본은 원이다. 원의 중심점도 축소된 원이고 무한한 변(가장자리)이 없는 것도 원이다. 또한 미학적으로 원은 어떤 형태보다 아름답다. 도덕적으로 원은 가장 안정되어 있다. 관계상으로 원들은 크기 불문하고 모두 동심원으로 인간의 동질성을 확보해 준다. 동일율, 심미성, 안정성, 동질성 등이 인습적으로 자존심을 확보해준다. 이것을 아는 인류의 위대함도 덧붙여 준다. - 관성, 상대성, 속도, 강도, 질적변화 등이 등장하면 무너질 것이다. (50QMB)]
둘째 법칙은 궤도상의 위치에 따라서 행성의 속도가 변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행성은 태양과 제일 가까울 때 가장 빨리 운동하고 태양에서 제일 멀리 있을 때 가장 더디에 움직인다. (69) [타원의 초점은 둘이다. 왜 그중의 하나가 행성의 중심인가는 항상 의문으로 남는다. 그러나 초점과 ‘가까운’ 쪽을 지날 때 빨리 지나가고 ‘먼’쪽을 지날 때 천천히 간다는 말이다. 너무 멀면 가까고 먼 것의 기준 조차 상실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10째 행성을 찾기를 노력하다가, 거꾸로 아홉째인 명왕성이 행성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설로 거의 규정되어 가고 있다. (50QMB)]
이 셋째 법칙은 어떤 행성의 태양으로부터의 평균거리를 r이라고 하고 T를 그 유성[행성]의 주기라고 한다면, r3/ T2은 모든 다른 유성[행성]들에 있어서 값이 같다. 이 법칙은(태양계에 관해서만) 뉴턴의 인력(引力)에 관한 역제곱의 법칙(law of the inverse square)을 입증해 주었다. (69)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뉴턴을 제외하고는 근대 과학의 가장 위대한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죽은 해 태어났고 뉴턴이 태어난 해에 죽었다. 나는 이 사실을 영혼 윤회설을 믿는 사람에게 (있다면) 알린다. 그는 천문학자로서 중요하지만 아마도 역학(力學) [물리학]의 창시자로 더 중요할 것이다. .. 그때 까지는 천체에 대하여 원운동만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 지상의 물체는 그것을 가만히 두면 자연히 정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 갈릴레이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모든 물체는 그대로 놔두면, 일정한 속도로 직선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이 원리는 뉴턴의 “제1운동법칙”으로 선포되었다. (70) [갈릴레이의 위대함은 지구상에서 물체 운동의 “상대성”을 인정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에게서는 우주상에서 빛의 운동에서 “상대성”을 인정한 것이다. (50QMH)]
갈릴레오는 처음으로 낙하하는 물체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이 법칙은 “가속도”의 개념을 정립한 가장 간단한 법칙이다. .. 공기의 저항이 없는 한 일정하다고 한다. 한편 그 가속도는 그 물체의 무겁고 가벼움,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모든 물체에 대하여 동일하게 해당된다는 것이다. .. 깃털이나 납이나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70)
갈릴레이는 그의 고용주인 투스카니 공(公)의 중요한 문제인 탄환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 / 이 궤적은 하나의 포물선인 것 ... (71)
관성의 법칙으로 갈릴레이는 이전의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로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풀었다. .. 지구가 돌고 있다면 돌이 떨어지는 동안도 지구가 약간 돌아갔을 것이다.... (72)
갈릴레이는 태양중심설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 [게다가] 갈릴레이는 네덜란드 사람이 최근에 망원경을 발명하였다는 소식들을 듣고 망원경을 만들어서... / .. 금성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목성의 위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자기 주인에게 경의를 표하여 그 위성을 “시데라 메디치(sidera medicea)”라고 불렀다. / 이 위성[들도] 케풀러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2-73)
갈릴레이는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종교재판에 의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처음에 1616년에 남모르게 받고 다음에는 1633년에 공공연하게 받았다. 그 둘째 재판에서 자기 학설을 취소하고 다시는 지구가 자전한다거나 공전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73) [레셀은 갈릴레이보다 뉴턴을 높이 평가했지만, 갈릴리이의 강조는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식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재판이후 말년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뉴턴(lsaac Newton, 1642-1727)은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그리고 갈릴레이가 미리 마련해 놓은 방법을 완전히 이루어 놓았다. 운동에 관한 그의 세가지 법칙 – 그 중에서 두 가지는 갈릴레이의 것이지만 –에서 비롯하여 케플러의 세 법칙, 결국 모든 행성은 어떤 순간이나 태양으로부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태양으로 향하는 가속도를 지니고 있다는 명제와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 그는 “힘”을 운동의 변화의 원인인 즉 가속도의 원인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물체는 양자의 질량의 곱에 정비례하고 양자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서로 끌어당긴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선언할 수 있었다. (74)
[제반 과학의 발전] 17세기는 단지 천문학이나 역학(力學)[La mécanique]에서 뿐만 아니라, 과학과 관계되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 먼저 과학적인 기구[도구]에 대하여 ..(74)
복안 현미경은 17세기 직전 1590년에 발명되었다. (75)
망원경은 1608년에 네덜란드인 리페르세이(Hans Lippershey, 1570-1619)가...
한난계[온도계]도 갈릴레이가. ..
갈릴레이의 제자인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 1608-1647)가 기압계 발명..
게리케(Otto von Guericke, 1602–1686)가 공기펌프(la pompe à air, Air pressure) 발명..
길버트(Gilbert 1544–1603)는 자석에 관한 책을 출판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는 혈액순환을 발견하여 1628년에 이를 공표..
류벤획(Leeuwenhok, 1632-1723)은 정충(情蟲)을 발견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은 내가 어렸을 때 배운 것처럼 “화학의 아버지이고 또한 코르크 백작의 아들”이었다. .. 일정한 온도에서 일정한 양의 기체의 압력은 그 부피에 반비례한다는 “보일 법칙”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75) - [러셀은 애국자이지, 보일은 역학자이고, 화학의 시조(아버지)는 라브와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1743-1794)와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로 봐야 한다. ]
네이피어(John Napier, 1550–1617)는 1614년에 로그(Logarithm, 대수)의 발견을 공표.
해석기하학은 ..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공적이 크다.
미분과 적분은 뉴턴(Newton)과 라이프니츠(Leibniz)가 각각 따로 발견하여 ... (75)
17세기 초에 토마스 브라운(Thomas Brown)경은 마술의 시험에 관해했지만, 17세기 말에는 그러한 일은 없게 되었다. (76)
[뉴턴의 영향]
뉴턴이 1687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1687)를 발표한 후에는 그와 헬리(Edmond Halley, 1656–1742)는 몇몇 혜성들의 궤도를 계산하고 혜성들도 행성과 마찬가지로 “인력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6)
첫째로 이야기해야 할 것은 모든 물활론(物活論)의 흔적이 물리학의 법칙으로부터 거의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 인들이 그렇게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운동의 힘은 생명이 있는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76) [운동의 힘을 생명으로보는 것은 본성론자의 생기론이고, 운동이 존재이며 부동은 운동의 예외적 경우일 뿐이라는 것이 새로운 형이상학이다.이런 형이상학의 기초는 헤라클이토스에서 시작하며 벩송이 정립한다고 봐야 한다. (50RKG)]
아리스토텔레스는 47가지 또는 55가지 부동의 동력자들은 신령한 영혼들이며, 또한 우주의 모든 운동의 본원적인 원천이라고 하였다. .. / 이와 같은 견해가 운동의 제1법칙에 의해 변경되었다. ... 그러나 인력의 법칙이 정해진 후로는 만물은 더 이상 신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이 자연히 돌아가게 된다.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 1749-1827)가 현재 작용하고 있는 그 힘이 바로 행성을 태양으로부터 파생되게 하였는지도 모른다고 시사하였을 때 자연의 생성과정에 있어서의 신의 역할을 점점 더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76-77) [현재로는 지구의 생성은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기보다, 소행성들이 충돌과정에서 뭉쳐져서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신은 창조주로 남을 수 있지만 그것마저 의심스러웠다. (77)
과학이 가져다준 또 다른 결과는 우주에 있어서 인간의 위치[지위]에 대한 견해가 전혀 달라지게 된 것이다. 중세기에는 지구가 하늘의 중심이었으며, 만물은 인간과 관련하여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러나] 천문학적 거리는 너무도 엄청나 지구는 이에 비하면 바늘 끝 정도 밖에 되지 못한다. 이 한없이 넓은 장치가 오직 바늘 끝만 한 곳에 살고 있는 작은 짐승을 위해 설계되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77) [우주 속에 티끌같은 존재... 이 각성은 공간 다음으로 시간 개념이 들어와도 그렇게 쉽게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과의 연관 속에서 삶에 대해 우월와 열등에 더 열중한다. 이 승리와 쟁취의 욕망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할까? - 자아의 자치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답일 수 있냐? 종의 이중분절을 통한 확장일까? (50QMI)] [형이상학(제1철학) 다음으로 인간의 지위 즉 인간 본성론이고 그리고 지식론이며 그 확장이 사회 실천론이다. 생산력의 발달로 문화론은 20세기에 활발할 것이고 그래도 내재성으로 남은 본성론은 종교성에 관한 것일 것이다. (50RKG)]
고대 말기의 세계는 죄책감이 언제나 수반되어 있었으며 이것이 무거운 짐으로서 중세기에 전해졌다. 신 앞에는 겸손한 것이 의롭고 진실한 태도였다. 신은 교만한 자를 징계할 것이다. (78) [서양에서 죄책감은 크리스트교의 것이 아닐까? 그리스에서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회의일 것 같고(유한성에 대한 반성 또는 성찰), 동양(중국)에서 천하의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하는 데 대한 반성과 성찰이 있을 것 같다. 태평성대... 백성의 삶과 같이 가는 것이 아닌가? (50QMI)]
그리고 지옥의 형벌에 대해서는 그와 같이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께서 결코 조그마한 신학적 과실로 말미암아 인간을 지옥에 떨어뜨리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78) [죄책감의 형벌은 지옥인데 비해, 범죄의 형벌은 신체적 고통을 가하거나 제거하는 것이리라. 도덕적인 벌과 사회적 벌(罰)이 다른 것은 양심과 이익(손익)의 관계일 것이다. (50QMI)]
현대이론 물리학의 견해와 뉴턴의 체계와는 서로 다른 점이 약간 있다. 첫째 “힘”의 개념은 17세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지만 차츰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 이와 같은 이유로 먼 거리에서 작용한다는 것이 인력(引力)에 대한 난점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뉴턴 자신도 힘이 미치려면 어떤 매개 물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 양자역학(量子力學)이 나타날 때까지는 운동에 대한 처음의 두 법칙의 근본적인 의미에 전혀 수정을 가하지 않았다. .. 뉴턴은 이와같은 형식으로 나타낸 법칙은 절대도 근사치(近似値) 이상의 것은 될 수 없다고 잘라서 말하였다. (79-80) [물질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matiere? 2005)(프랑수아즈 발리바르, 장 마르크 레비 르블롱, 롤랑 르우크, 박수현, 알마), 2009, P.158)를 꼭 보시라]
뉴턴[갈릴레이]의 철학으로 한 가지 변화된 점은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의 포기이다. 독자들은 데모크리토스가 이 문제에 관하여 언급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80) [내가보기에 절대 시간의 포기일 수 있어도 절대공간의 포기가 아니다. 그는 그 자신도 모르게 유크리트 공간에 머물러 있었고, 칸트도 그 위상에 서 있어서 뉴턴 물리학의 정당성을 순수이성 비판에서 전개했다. (50RKG)]
뉴턴의 시대 이후로 지구의 자전을 실제로 입증하는 것으로 푸꼬(Léon Foucault, 1819-1868)의 흔들이(진자 振子)에 관한 실험이 고안되었다. 가장 최근의 견해에서도 이 절대 회전의 문제는 여러 가지 난점을 제시하고 있다. 만일 모든 운동이 상대적인 것이라면, 지구가 자전한다는 학설이나 하늘이 돈다는 학설은 단지 말의 차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80) [둘이 의미상으로 같다고 하는 것은 명제의 형식상 표현에서이며, 차이가 있다는 것은 명제의 내용상 표현일 것이다. 둘은 이중분절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50QMI)]
... 그러나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운동과 시간은 순전히 상대적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되었다. .. 그러나 나는 양자론에 대하여 여기서 이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81) [아인슈타인 이루로 ..]
(10;24, 50QMI) (11:19, 50R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