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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베1859자유1905PUF034
자유문제의 진화(L'évolution du problème de la liberté)
-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4-1905)
- 프랑스와(Arnaud François, 1978-)편집, PUF 2017, P. 384.
소크라테스에서 ‘너 자신을 알라’와 ‘이 뭣꼬’ 사이에는 큰 틈이 있다. 지성론자는 후자에 방점을 둔다면, 벩송은 전자에 방점을 두었다. 전자에서 산파술(마이유티크)가 있다면, 후자에는 상징적 대상을 두게 될 것이다. 대상을 먼저 두지 않고서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게 되면, 불교와 닮은 점이 있는데, 그 과정의 활동이 영혼(생명)이라는 생각에 이를 것이다. (54OLI)
[갑자기 떠오른 것인데], 자유, 그것은 용어일 뿐 현존에서 없는 것이다. 자유는 공간의 개념의 상호호환 속에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또한 환원, 회귀, 호환이 없다는 것도 사람들이 잘 안다. 그럼에도 지속 속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예상하는 미래를 총체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행위 해야 하는가? 사실 그 어제-이제-아제를 알기는 할까? 그럼에도 생산 그리고 소통 그리고 재생산을 바라는 감화작용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생산에서 지성이 필요하고, 소통에서 공통 용어가 필요하다. 재생산은 각자의 몫인데, 그 몫을 행하기보다 소비하고 향유하면서 살도록 세뇌하는 것이 자본 제국일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제국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니까 “이 뭣꼬”를 모든 영역에서 물을 수 있다. 그 시대의 한계로 그는 독배를 마신다. 나의 표현으로, ‘죽는다’를 배우고 알아가려고, 소크라테스는 배우는 자세로 그 독배를 즐기면서 마시고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이 행위에 대해, 자신도 모르고, 그 다음을 이야기할 수 없기에 주지주의자들에게는 얼마나 파라독스일까. 아마도 ‘죽는다’도 소크라테스에게는 한 배움의 과정이었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딱 한번 있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회를 사용한 것이다. 한번 밖에 없는 기회, 고르기아스의 표현으로 ‘카이로스’를, 니체가 말하는 ‘반시대적 고찰(같잖은 시기에 산다는 것)’을 딱 한번 행해보는 것이리라. 자유! 딱 한 번의 돈오(頓悟)! 그 기회 즉 숙명(카이로스. 반시대)에는 회귀가 없는 것이다. - 살아있다는 것, 인민(큰수레)에, 토지에, 지구에 충실하자! (54OLJ)
*** 본문 중에서
§03. 1904년 12월 22일 회기 (49-64)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겉으로는 어떤 특징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특징들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자유의 철학들이라고 부르는 여러 철학들의 외적 특성들이다. .. 우리는 이런 특징들을 지난 강의에서 나열했다. 우선그것은 인간적인 것들을 자연의 나머지들로 따로 떼어내는 경향, 즉 인간을 제국 속의 제국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오만하지 말라]
둘째로 자연에 대한 과학들, 또는 오늘날의 실증과학이라 불리는 과학들을, 한정(경계)지우려는 경향이 있다. [과학을 한정짓지 말라, 과학과 철학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셋째는 내적 관찰에 호소, 즉 밖으로부터(du dehors) 내부로(vers le dedans) 방향을 돌리는 영혼의 주의가 있다. [이 두 개념은 1903년에 “형이상학 입문”에서 썼다.]
넷째특징은 본질적이 아니만 자유이론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 그것은 철학자가 갖는 관념 또는 감정(le sentiment)[감응(l’émotion)]인데, 그 철학자는 감정을 넘어서는 어떤 것과 통합(une union)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신비주의(un certain mysticisme)이다. (49)
신비주의와 자유의 내적 직관 사이에서 유사성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공감(une sympathie)이 있고, 이는 마치 자연적 친화성(une affinité) 같은 것이 있다. (50)
소크라테스가 행한 것, 그것은 인간적인 것들(ἀνθρώπεια, les anthropeia)을 고려하는 것이다. .. / 이 경향성은 [고대 그리스의] 실증과학들을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말하기를 자연의 인식은 우선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무용(inutil)하다. (50) [당대의 과학이 부정확하고, 그래서 소씨는 안다는 자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 답은 모른다고 돌아왔다. 게다가 소씨는 물질도 인간적으로(정령적으로, les esprits, pneumatique) 보았을 것이다. 이를 벩송은 ‘심리학적’으로 라는 표현을 쓴다.]
내부로 향한 인간의 주의를 끄는 것, 내부의 관찰에 호소하는 것인데: 정식으로 “너 자신을 알라(Connais-toi, toi-meme)”, 그노티 세아우톤(γνῶθι σεαυτόν)이다. 이는 확실히 다른 어떤 것이다. / 우리는 소크라테스 학설 속에서 신비주의의 관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것과 같은 목소리에 대해 말했다. .. 사람들은 파가니즘(le paganisme, 시원교)의 역사 속에서 유일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50-51)
철학사에서 일반적으로 일치하는 것인데, 소크라테스가 제기하지 않았다면, 게다가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크세노폰(Xénophon, 전430경-355경)의 책들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 그의 철학의 경향이 결정론의 경향이었다는 것이다. (51) [소씨의 경향은 다른 경향이었다. 거의 다양체와 같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분간해야 할 소크라테스 도덕론의 두, 세 가지 원리에 동의할 수 있다. 첫째로, 모든 사람들은 행복(le bonheur)을 추구하고 향하며, 행복은 긍정적(positif 실증적)상태이다. 이를 플라톤의 또한 소크라테스의 관념(생각)들에서 본다. 이런 진리는 시시한(banal) 것이 아니다. (51) [데카르트가 상식보다 양식을 말했듯이, 소씨는 심층양식을 이야기 할 것이고, 벩송은 진행방향으로 새로운 생성, 창발을 고등양식이라 말할 것이다. (54OLF)]
[다음으로] 행복은 모든 사람이 향하는 목표(le but), 정해진 긍극적 목표이다. 플라톤에서는 이데아와 같은 것이 있고, 그 이데아는 자체적으로 정의되고, 객관적이라 이해했다. (51) [과정과 목표는 객관적이며 실재적이라고.]
[그리고] 행복은 각각에게 인격적인 어떤 것일 것이고, 인격들과 더불어 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상태의 일체에게 류적[일반 또는 보편] 단어를 부여할 수 있다. (51-52)
만일 우리가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의 철학을 다룬다면, 쇼펜하우어 학설에서 의지들, 일반의지(Volontéen général)가 있다. 우리는 항상 원하고 얻고, 원하고 얻고, 따라서 행복은 정의상 줄어드는(reculer) 항목[경계]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진행한다고 믿는 것은 운동의 방향이며, 이는 상징(le symbole)이며, 운동의 지시적 화살일 뿐이다. (52) [벩송은 새로운 생산, 발명, 창조를 말하고 싶을 것이다.]
행복의 다른 개념작업도 있다. 그 행복 실재적이지도 실증적이지도 않은 어떤 것이 있다. 움직이기 위해서 움직인다. ... / 이런 개념작업은 허구적이다. 애호가의 개념작업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불교 철학에서 이러한 어떤 것이 있다. 그 행복은 부정적인 어떤 것이지 긍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52) [벩송이 생각한 것은 쇼펜하우어 식의 불교관이 아닐까 한다. 이에 비해, 니체는 긍정의 발현으로 보았고(들뢰즈가 니체를 스피노자의 제자로 만들었다), 실제로 불교는 자기실현(보살)의 긍정적 노력이다. (54OLF)]
그러므로 첫째: 소크라테스 철학에서 행복은 한정되고 긍정적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믿는다. 둘째, 그것은 행복은 덕목(la vertu)과 동일한 것이다.도덕성과 행복은 동일한 것이다. ... 사람들이 말했듯이 행복과 덕목은 소크라테스의 중요한 파라독스이다. (53) [과도한 행복 추구에 대해 덕목으로 중용(절제, 온건)이 필요하다.]
감성의 만족에 관한 점에서 완전히 절제된 만족들만이 남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때문에, 고대인들이 말했듯이, 중용(la modération)과 절제(tempérance)를 권하기에 이를 것이다. 이것은 덕목의 기초 자체이며 시초이다. 그리고 이 중용은 즐거움들의 절제된 이용을 뜻하며, 이 절제를 ‘자기 지배’ 즉 엔크라테이아(ἐγκράτεια)라고 명명한다. .. 사람들이 확신하는 것은 영혼의 완전한 고요이며, 예를 들어, 꽃밭을 가꾸는 것, 상위 질서의 즐거움, 정신의 즐거움, 예술의 즐거움 대화의 즐거움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은 자기 자신을 수양하는(cultiver soi-môme)것, 자기완성의 길(parachever soi-môme)로 가는 것, 즉 “스스로 완수하는/끝내는(se finir soi-môme, 열반에 들다)” 것이다. (54)
[당시] 도시국가는 아주 작은 수의 자유로운 인간으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이는 노예제 위에 서있는 사회이다. (54-55)
제한된 순환 속에서 타인에 대한 책무들은 그 힘 자체에 의해서 자기에 대한 책무들의 것들이 된다. 사람들이 명예[영광]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인데, 그것은 타인을 향한 책무가 자신을 향한 책무의 형식을 취하기에 이른다. (55-56) [아테네 민주제도에서 임무를 맡는 것은 타인에 대한 책무이지만, 순환적으로 다른 사람이 맡으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다. - 명예, 순환적으로 타인에 대한 것이 자기에 대한 것이다. ]
이와 마찬가지인 증거는 사회가 넓어져도, 그리고 덜 제한적이어도 마찬가지이다. 로마 사회에서 예를 들어 데쿠스(dĕcus, 명예)는 명예(l’honneur)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 그 사회에도 재산 불평등이 있었지만, 우리사회보다 덜 강조되었다. 특히 그 불평등은 문화의 불평등, 교양과 교육의 불평등을 이끌지는 않았다. .. 따라서 이런 종류의 사회에서 정의는 실행하기에 더욱 쉬운 것이었다. (56)
소크라테스는 그의 시대의 어떤 도덕적 관념들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도덕적 지평은 당대의 인간들의 지평보다 훨씬 더 광대했다는 것은 진리이다. .. 소크라테스는 전통에 기초한 협약적 도덕론 대신에 과학적 도덕론을 대체했다는 의미에서 한 도덕론의 창조자(le créateur)이다. 그 과학적 도덕론은 원리들에게 거슬러 올라가고, 내적 관찰에 근거하는 철학적 도덕론이다. .. 그에게 있어서 덕목과 도덕성은 동일한 것이다. (57)
행복을 정의할 수 있고, 긍정적인 상태들이 있고, 그리고 행복에 대한 개념작업을 할 수 있다. 그리스 사회는 도덕성, 덕목, 정의로 이루어질 수 있는 개념작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첫 명제는 둘째 명제에 자연스레 도달한다[행복에서 덕목으로]. / 셋째명제, 그것은 행복의 발견에서 덕목의 실천에서 작용하는 지성(l’intelligence)[지혜]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믿었다. 그래서 이런 기준(cet étalon)을 평가할 수 있고, 우리에게 행복을 마련해주고, 덕목을 실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다소 유용한(util) 즉 오펠리몬(τό ὠφέλιμον, 유용)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쉼페론(τό συμφέρον, 유익)이라 불렀는데, 축어적으로, 행복에 또는 덕목에 기여하는 것이다. (57-58)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1144b 47.에서 우리에게 말하기를, 소크라테스는 “덕목들은 사유들(des pensées)[로고스]이다”라 하고, 114b 28.에서 “덕목들은 추론들이다.”고 한다. (58) [소크라테스의 정확한 용어가 사라지고 로고스로 바뀐 것이 아닐까?]
에우데모스 윤리학에서 ‘학문(science, 지식)’이란 단어는 이렇게 발언되어 있다. “모든 덕목들은 학문들(des sciences)이다.”
크세노폰은 회상록, III, 9.에서 “소크라테스에서 정의와 모든 덕목들은 소피아(σοφία)이다”고 한다. 소피아는 지혜, 학문(la science)이다. (58)
따라서 덕목은 학문[지혜]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도덕원리이고, 이것을 내가 셋째 원리라고 부를 것이다. .. 만일 사람들이 잘 못을 행한다면, 그것은 지성이 속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지로부터 이며, 아무도 잘못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58) [첫째는 행복, 둘째는 덕목이다]
대 도덕론(Grande Morale)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책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나온 것이라 가정하는데, 우리에게 말하기를 “ 만일 사람들이 어떤 이에게, 그가 정의롭기를 원하는지 부정의하기를 원하는지를 묻는다면, 아무도 불의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 소크라테스에게 암시로서 “어느 누구도 의지적으로 악의적(méchant)이지 않다.” 착하다(bon) 또는 서툴다(mauvais)는 것은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사람들은 끌어낸다. (58-59)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론이다]
소크라테스의 결정론의 주제는 푸이에의 소크라테스 철학에 관한 철학 작품 속에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이 주제는 고대에서부터 수호자들이 있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철학사로 만든 첫째 철학자이다. (59) [문자로 표기한 것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구절: “정직한 것 또는 악한 것은 우리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 구절로부터 결론을 끌어낸 것과 같은데, “만일 사람들이 어떤 이에게 묻기를 ‘너는 정의롭고자 원하니 불의하고자 원하니?’ 어떤 이는 나는 불의하고자 원한다고 결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들이지 인용이 아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정식을, 즉 “어느 누구도 의지적으로 악의적(méchant)이지 않다.”을 자기 방식으로, 악의성(la méchanceté)이 무지라고 해석했다. 59) [검찰의 조작: 악의성은 무지가 아니다. 서툼(mauvais)이 무지이다. 서툼과 악의를 구별한 니체를 생각해 보라: 공자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즐거움이다라는 뜻은 서툼(치,癡)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59OLI)]
내(벩송)가 보기에, 소크라테스가 말하기는 “어느 누구도 기꺼이 무지이고자 하지 않는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소크라테스 철학에 관계있는 철학사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이런 정식을 차지 못한다. 크세노폰에게도, 플라톤에게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60)
소크라테스가 이 결함을 무엇으로 지적했는가? 무지(l‘ingorance)이다. 이 무지(결함)에 대해 반대로 이끌려고 했던 것이 어떤 것인가? 아이러니(Ironie)이다. (60) [소크라테스, 싯달다, 공구도 같은 길을 간다.]
우리는 지식 있는지 무지한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선과 악 사이에 선택할 자유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말한다. 왜냐하면 지식 있기 위해서, 알기 위해서 우호적인 상황들이 필요하고 외적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칸트는 선한 것이 있고, 그것이 선한 의지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정식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뇨, 선한 것이 있고, 그것은 지성이고, 인식하는 지성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60) [칸트는 선한 의지를 앞세웠고, 소크라테스는 알려는 노력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가 이해했던 학문[지식]은 모든 사람들의 범위(la portée)에 속하는 것이다. .. 그 학문은 내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며, 도덕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학문을 획득하기 위해 스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 학문을 획득하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있지만,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한다. (60-61) [모르는 데 무얼 획득하게 해주는가? 아는 것이 없다면서 각자에게 스스로 깨치게 해준다. - 아이러니이다.]
당신들은, 소크라테스가 이 방법의 절차를 출산에 비유했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그것은 조산술(maïeutique)이다. ..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안다’는 모든 사람들의 범위(la portée)에 속하는 것이며, 그가 말하는 학문[지식]은 사람들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학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 정식. .. 자연에 의해 특히 전통에 의해 어떤 것 앞에 위치한 장막(le voile)이 있는데, 이 장막을 벗겨내자 마자 자연히 모든 것이 드러난다. (61) [좀 더 지름길을 가고자 교육과정이 있다. 이 정식의 산파술은 알레테이아, 은폐를 벗겨내다에 가깝다. 천(장막)을 걷어내는 것(le voile est écarté) -[ 알레테이아 ἀ–λήθεια]]
알렉산드리아 학파, 플로티노스에게서, 특히 “너 자신을 알라(그노티 세아우톤, γνῶθι σεαυτόν, “너 자신을 알라 Connais-toi toi-même”)라는 논제에 전념했던 포르피리오스에게서 소크라테스의 단어에 대한 매우 흥미있는 주석들이 있다. ..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진실한 자아에 되돌아가기 위하여 실재로 우리 외부에 있다는 자아의 시선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다. 그 자아는 저 높은 곳[우리가 심층이라 부른다]에 남아 있는데. 거기에 다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보는(regarder)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선을 행하기 위하여, 선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61) [일자(인민)와 합일을 알고서 일자(인민) 속에서 실행한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이런 종류의 관점을 밀고 나갔고 발전시켰다. .. 소크라테스에게 이런 종류의 어떤 것이 있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 도덕론과 영혼의 추락에 대한 플라톤의 신화 사이에 매개적인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 강의에서 제시할 것이다. 영혼 추락에 관계있는 신화를사람들은, 가끔 일종의 기계적인 신(deus ex machina)처럼, 플라톤의 발명품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이 신화가 소크라테스의 도덕론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나왔다는 것을 제시할 것이다. 만일 인간을 일종의 이원론으로서 생각한다면 한편(소크라테스) 내부적으로 다른 한편(플라톤) 외부적이다. (62)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차이: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배워서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플라톤은 올라가서 찾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 두 사물[종류] 사이에 관계가 있다. 요약하면 소크라테스는 자유의 개념작업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선택(un choix)인데, 행하거나 행하지 않거나 사이가 아니라, 주시하거나 주시하지 않거나 사이에서 이다. 즉 선은 플라톤도 말하는 것처럼, 일종의 빛이다. [문제는 내부로 외부로?] .. 진실한 자유는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사이에 선택하는 것이다. (62-63) [내부로부터 빛에 대해 메를리퐁티가 고민했다고..]
당신들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상기해보라. 동굴에는 어둠에서 그림자만 보는 이들이 있고, 선출된 소수는 머리를 돌려 빛을 본다. .. 소크라테스에게 이런 전개는 없다. 그러나 계승자들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내재해 있던 것들을 이미지로 외재화 하였다. 그것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내재적인 상태로, 도덕적 직관으로 있다. 자, 내가 소크라테스를 자유의 직관을 가졌던 첫째 철학자라 말하는 이유이다. (64) (54NLB) [왜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싯달다와 공자도 마찬가지로 인성의 자유추구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서양은 플라톤을 통해 학문으로 갔는데, 중국은 제도 속으로, 인도는 종교로 갔는지는, 그 전달자들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플라톤이후 서양의 지식의 탐구자들은 하늘에서 땅으로 그리고 땅속으로 들어가는 발전적 과정을 겪었다. 한번은 망원경, 다른 한번은 현미경이다. 새로운 변역의 시기는 21세기의 규소의 시대일 것이다. (54OLI)]
§04. 1905년 1월 13일 회기 (65-82)
[앞 강의에서] 의지와 사고 사이에 틈(un écart)이 있다: 의지는 자유인 것으로 또는 적어도 자유인 것으로 나타난다. 사고, 즉 반성은 이런 자유 위에 고정되어 있어서,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자유는 우리 행동의 실재적이고 겉보기의 특성이다. .. 이런 행동은 우리에게 마치 내적인 특성을 갖는 것처럼 나타나는데, 이 내적 특성은 무매개적 의식에서는 매우 분명하지만. 반성적 사고에 한정된 용어로 발언하게 되자마자 매우 모호하게(obscur)된다. (65)
우리들 각자는, 자아가 자기가 행한 것의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한편으로 자기 자아, 다른 한편으로 자기 행동을 제기할 것이다. / 사람들은 물과 물이 솟아나는 원 (샘)을 구분하고 원했던 것 같다. (66) [원천과 빛의 예는 플로티노스 일자의 설명에서 예들이다. 벩송은 MR의 제목에서 원천(샘)을 사용했다. 벩송]
사고는 행동에 앞서 또는 행동 뒤에, 준비에서 또는 귀결들의 표상에서, 위치한다. 표상 그 자체는 준비 속에 들어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행동 자체는, 즉 완수하는 중[만들어지고 있는 중]인 행동은 반성의 대상도 반성적 사고도 아니다. (67) [행동과 사고의 구별]
사고(la pensée)가 철학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의 경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조건에서 있다. ... 우리의 사고는 – 동일한 사물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일 뿐이지만, 자유로운 것을 파악하고 표상하는 데는 수고(de la peine)[노력]를 필요로 한다. 이 사고는 본질적으로 분석적(analitique)이다. (67)
지성을 상상해보세요. 신체에서 분리된 순수 정신인 지성은 살아온 것이 결코 아니며,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67) [살아온 것이란 인격적 삶의 과정이 빠져있을 때, 분석이 성립한다.]
생명은 파라독스를 실현한다. 지성과 반성이 [생명의] 재구성의 길에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68) [DI에서 분할된 정지들을 모아도 운동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무매개적 우리의 자유를 갖는 의식과 반성에 의해 파악하는 인식사이에 틈이, 즉 환원할 수 없는 틈이 있다. 그럼에도 자유에 전념하는 철학은 문제를 제기하기를 거부할 수 없었고, 철학처럼 여기는 분석은 철학의 파악 바깥에서 모든 논리로 훈련해야만 했다. (68)
직관 속에 자리 잡아야만 하고, 완수하는 중인 행동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때에 직관은 작동(l’acte)과 공연적(coextensif)이며, 심층에서 작동과 구별되지 않으며, 그것을 [자유실현을 하려고] 확장시키기를 시도해야만 한다. 그러한 것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예외적인 본성의 노력이며, 자연을 넘어선 승리이다. (69) [인간은 자연을 더불어(그 속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을 대상으로 다루는 측면이 아니라, 자연의 방향과 의도와 더불어 인간이 실현하고 가능하다면 선도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의미이다(MR에서).]
기존의 학설 위에 형성된 딱딱한 각질은 새로운 폭발에 의해 부서진다. - ‘폭발’이란 예전에 사용되었다(§01 강의에서). 또는 반성 때문에 감춰져 있었던 심층들 속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새로운 직관(une nouvelle intuition)에 의해 부서진다. (69)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직관들이, 즉 화산폭발들이 드물었다고 말했다(§01, p.31). (69) [소크라테스,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루소, 벩송, 들뢰즈.]
그리스 철학은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로부터 어떤 도덕적 직관을 소개한다. (70)
확실히 소크라테스는 자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단어도 발설하지 않았으며, 이것을 토론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결정론의 학설들이 제시될 때만 자유를 토론할 수 있다. 자유는 그자체로 인식되지 않았다. ../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자유를 탐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다른 것에 전념했다. 그는 행동의 이론을 만들었다. .. /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 의해 남겨진 것, 개념작업(une conception)을 우리에게 남겼는데, 이 개념작업은 자유에 대한 암묵적이고 명시적인 개념작업이다. (70)
개념작업의 보다 정확한 것들이 ㅍ크세노폰과 플라톤의 원전 속에서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소개했다: 즉 소크라테스에게는 인간 활동성에서 가능한 결정론들의 두 가지가 어느 정도로 있다. 두 반대되는 가설인데,
1) 소크라테스가 “학문(la science)[σοφία]”이라고 부여한 완전한 학문을 지닌 인간을 가정하자. 이것은 자연학도 사물들에 대한 인식도 아니며, 인간에 관한 인식이다. .. 그 인간은 소크라테스가 온선(le Bien)이라 부르는 것을 완전히 인식한다. 온선은 도덕적 선이자 행복이다. 소크라테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에게 이 둘은 하나이다. .. 완전한 지식으로 절대적 결정론이 될 것이고, 그의 활동은 필연적으로 결정되었으리라. (70-71)
2) 완전히 무지한 인간을 가정하자. .. 온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떠한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특별한 경우에 온선에 따라서가 아니라 온선의 외관(l’apparence, 징후)에 따라서 결정 내린다. 왜냐하면 그가 행복 또 온선을 추구할 것인데, 그가 속고 있거나, 우연으로(par hasard)으로 만 만날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는 온선의 외관[현상]으로 갈 것이고 그의 행실은 또한 규정될 것이고, 실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관에 의해 필연적으로 규정될 것이다. .. 이것은 무지의 결정론이며, 조금 전의 지식의 결정론만큼이나 결정론이 될 것이다. (71) [무지도 결정론, 지식도 결정론.]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두 가설의 어느 가설도 실현되지 않았다. 학문[지식]은 가능하고, 우리가 그것을 추구한다. 우리가 그것을 자연적으로 가지지 못하지만, 우리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도 우리는 항상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은 외적인 것의 학문이 아니라 내적인 것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72) [폴리스 사회에 행실에 관한 한]
우리는 두 결정론 사이에 있고, 둘 사이의 가운데(milieu) 있게 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왕복하게 하는 것을 허락해 주고, 이 왕복작용은 우리가 오늘날 임의자유(un libre arbitre), 즉 자유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 임의 자유는 부득이한 수단(un pis-aller)이다. 이 수단은 우리를 무지로부터 지식으로, 악으로부터 선으로, 끌어 올리게 한다. 그러나 수단은 선과 지식 속에 더욱 잘 지내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이르지 못하여, 이 양자를 사고하는 안에서 임의자유는 오히려 열등의 표시가 된다. 이 표시는 우리를 동물보다 우월하게 신보다 열등하게 한다.(72)
우리가 고대인들에게서 자유에 관해 발견하고자 한 것은 자연적으로 암묵적 개념작업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작업은 소크라테스에게서 자유에 대해 명시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플라톤에서, 크세노폰에서, 특히 가장 흥미있는 플로티노스에서 찾게 될 것이다. (73)
소크라테스는 글로 쓰지 않았다. 그리고 행하면서 말하는 것, 이것은 직관의 철학들의 특성들 중의 하나이다. 직관 철학자들은 몇몇 특별한 성격들로 재인식한다. 즉 그 철학자들은 거의 글을 쓰지 않거나 아무 것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기를 더 좋아하고, 그 말(la parole)은 암시적 이다. 쓰여진 것은 덜 암시적이다. (73)
우선 플라톤은 자유 주제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는가? .. 철학사가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마르땡(Thomas-Henri Martin, 1813-1884)의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관한 연구(1841)에서, 타이히뮐러(Teichmüller, 1832-1888)의 개념사의 새로운 연구(1876–1879)(3권)에서, 푸이에(Fouillée, 1838-1912)의 플라톤의 철학(1869)등에서는 플라톤의 사고는 결정론 또는 숙명론에 속한다. 다른 한편 젤러(Zeller, 1814-1908)의 역사적 발전에서 그리스 철학(1844-1852)에서는 플라톤은 자유의 철학자이다. (74)
[플라톤에게서], 두 종류의 숙명성(les fatalités)사이에서, 그 가운데 자유가 자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자유 이론가 일 것이다. (75) [박홍규는 플라톤이 두 종류를 동시에 다루었다고 평한다.]
프로타고라스 속에서 우리는 암시보다 더 많은 것을 발견한다. 즉 온선에 대한 일종의 산술학적 전개를, 즉 쾌적함(l’agréable, 안락함)의 산술학을 발견한다. 이는 마치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것과 같다. 플라톤은 이 작품에서는 영혼의 3분할 학설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 (75) [산술학적 평형의 중간은 뷔리당(Jean Buridan, 1292-1363)의 당나귀 역설에 귀착할 것이다.]
티마이오스편에서도 있는 학설인데, 파이드로스편에서는 태어나기 이전에 영혼들은 지성과 마찬가지로 심장과 욕구를 이미 가지고 있다. (76) [파이드로스에서 영혼을 마부로 비유하면서, 마부는 흰말[용기]과 검은말[욕구]을 몬다고 비유한다.]
티마이오스에서, 지성[이성]은 두 다른 부분을 중첩하러 온다. 두 부분이란 화잘 내는튀모스(θυμός) 심장과 욕망하는 에피튀미아(ἐπιθυμία) 욕구(appétit)가 있다. (76) [폴리테이아에서 용기(정력)와 절제(욕구)는 지혜(이성)한다고 하면서도, 국가에서는 세 부분의 계급이 조화로울 때 정의(la justice)라 한다.]
일단 플라톤이 영혼의 3분할(tripartition)에 이르렀다. 우리는 플라톤이 첫째 종류의 결정론과는 아주 다른 둘째 종류의 결정론을 후기 작품들에서 지적한 것을 발견한다. 둘째 종류는 욕구(ἐπιθυμία, désir)에서 오는 것이다. 당신들은 티마이오스 96에서 생리학적 서술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시대에는 생리학이 거의 발달하지 못했으나 용어들에서는 매우 정확하며, 현재로서 신경병리학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76-77)
여러 원문들 속에서 플라톤은 도덕적오류(une erreur moarale)와 병적인오류를 구별한다. 전자는 무지(l’ignorance, ἄγνοια)에서 오며, 후자는 질병에서 오며, 광기에서 오는 병(νόσος: la maladie)이며, 플라톤은 모리아(μωρία: la folie, stupidité)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무지는 영혼의 하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이 하부 부분이 봉기(반란)를 일으키는데, 그것의 원인은 신체적이며, 요즘 표현으로 생리학적이다. (77) [무지는 상층의 것인 듯이 말하고, 질병(광기)는 하부인 것처럼 말하는데, 21세기 정신병의 두 갈래 편집증과 분열증은 달리 설명한다.]
이제 두 가지 결정론이 있다. 플라톤은 그것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티마이오스편의 여러 구절들에서 결정론의 두 형식들 사이에서 아주 분명한 방식으로 구별을 한다. 우리는 오늘 두 필연성의 두 형식을 말할 것이다. 첫째는 추론의 필연성이다. 온선에 의한 결정론이며 최상의 동기의 무게에 의한 결정론이다. 이를 라이프니츠는 도덕적 필연성이라 부를 것이다. .. 둘째 필연성은 기계적 필연성이다. 운동이 다른 운동에 의해 결정되는 필연성이다. (77) [벩송과 마찬가지로 박홍규는 두 개의 아이티아(페라스와 아페이론)를 인정해야 하고, 이 둘의 아이티아는 필연이라 보고 있다.]
티마이오스 47e-48a(주 114), 69a(주 115), 46d-e(주 116) (78)
두 종류의 필연성 – 플라톤은 두 필연성을 아낭케(ἀνάγκη)로 지명하지 않았다 – 두 결정론, 두 개의 가능한 결정론으로 선의 결정론과 역학적 결정론이 있고 후자는 우연의 결정론(le determinisme du hasard)이다. (78) [아페이론을 아낭케라고 했지만,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는 한번 쓴다고 한다.]
만일 영혼이 전적으로 지성이라면, 순수하게 지성은 첫째 결정론을 포기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영혼이 지성이 전적으로 에피튀미아(ἐπιθυμία, un appétit)이며 비형체[비형상]적이라고, 순수하게 물질화되어 있다면, 이 영혼은 둘째 결정론, 둘째 필연성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사유와 욕구 사이의 매개적 영역에서, 플라톤에 따르면 심장(le coeur, θυμός)의 영역이 있다. 이 영역에서 임의 자유(libre arbitre)라는 의미에서 자유는 가능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튀모스(θυμός)를 생각했다: 그것은 상층(le haut)과 밑층(le bas) 사이에 매개적 능력이다. .. 따라서 선택하다, 그것은 상층과 밑층 사이에 위치를 선택하는 것이리라, 그 선택(le choix)은 이 매개적 영역에서 가능하리라. (78) [여기서 밑층은 심층의 표면과 같은 의미이다.]
선택을 가정하게 하는 플라톤의 표현들이 있다. 노모이(법률)편 644e에서, 플라톤은 우리에게 상층과 밑층사이에 정당하게 팽팽히 당겨진 인간을 제시한다. 높이는 덕목(la vertu, ἀρετή)이며, 밑층은 악덕(le mal, le vice, κακία)이다. 그러면 그가 자문하기를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편으로 올라가는 다른 한편으로 내려오는데, 한편으로 사유의 노에시스(νόησῐς)의 지지를, 다른 한편으로 정념의 에피튀미아(ἐπιθυμία)의 지지를 받고 있다. (79) [이 양자를 형이상학적으로 페라스와 아페이론이라 할 수 있다.]
자기의 문헌 속에서,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두 극단 사이에 어느 정도로 자리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특성, 즉 태어나면 이미 가지고 나온 특성 덕분이라고 한다. 티마이오스 86e에서 “어느 누구도 의지적으로 사악하지 않다. 사악한자가 사악한 것은 신의 나쁜 장치 때문이고 또한 나쁜 교육 때문이다.” 그리고 87a에도 있다. (79) [미래로 확장하려하지 않고, 신체의 습관에 젖거나, 그런 과거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상층으로부터 추방되거나 밑층으로부터 추방되어, 임의 자유는 중간에 피신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정확하게 하고자 원하면, 그 임의자유는 사라지게 된다. .. 임의 자유의 영역, 사람들이 온선을 선택하는 장소, 그것은 신화의 장소이다. 그것은 시간 속에 있지도, 공간 속에 있지도 않다. 영혼이 신체 속에 들어오기 앞서서 거주했던 곳은 이러한 세계에서 였다. (80) [벩송은 영혼의 저세상은 시간도 공간도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벩송은 그런 세상을 상징의 세계라고 한다. - 들뢰즈도 주지주의가 신화로 갔다고 비판한다.]
여러분들은 영혼들이 완전한 상태로 있었다는 신화(le myth)를 상기할 수 있다. 영혼들은 제우스의 수레(le char)를 따르고, 날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 / 폴리테이아 10권에, 다른 신화도 있다. .. 폴리테이아편의 10권 611d에서 영혼들이 (운명의) 세 여신인 파르끄(Les Parques) 앞에, 특히 운명을 펼치고 늘이는 라케시스(Lachésis (« la Répartitrice »)앞에 도착한다고 한다. (80) [설화에서는 염라대왕이나 저승사자 같은 개념이 어느 곳에 있을 것 같다.]
여기에 플라톤의 자유에 대한 개념작업이 있는데, 선택은 그것이 상부 세계에서 내몰릴 때까지 점점 더 후퇴하는 것 같다. 따라서 임의 자유는 국부화[지역화]된다. (81)
우리는 플라톤주의의 낡은 토대[주지주의] 위에서 대부분 살고 있다. [플라톤주의에 젖은] 이런 관념들 중에는 우선물리적 결정론, 역학적 결정론, 효과적 원인[효과인] 대(對) 도덕적 결정론, 아리스토텔레스 이르기를 목적인 사이에 구별의 관념이 있다.
둘째로 영혼의 추락의 관념이 있다. ..
셋째로 시간 속에서 전개[발전]하는 것이 있다. 마치 교향곡이 주제를 발전시키듯이, 시간 속에서 유일한 행동을, 플라톤이 현존에 앞서 선언한 선택을, 발전시키는 것이 있다. 근대 철학자들은 이것을 시간 밖에 두고서 비시간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 이런 관념들은 철학사 속에서 중요한 핵심이다. (82-83) [시간 밖에 절대공간을 선전제로 한다.]
이런 관념들은 어떻게 태어났으며, 플라톤은 어떻게 거기로 인도되었는가? 처음에 그리고 나중에 이 관념들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연극에서 돌발적으로 개입하는 신)의 효과를 만든다. 그러나 실재로 사람들이 인간 행동의 소크라테스적 개념작업에서 출발한다면, 자연스레 이러한 것에 인도될 것이다: 플라톤의 학설을 아주 단순한 매카니즘에 의해 인간 행동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개념작업으로부터 아주 자연스레 나온다. (82) (54NLC) (54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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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0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전470/469-399) 그리스 철학자. 자유와 양심(의식)의 철학 창안자. 진리추구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한 철학자. Prométhée enchaîné (Προμηθεὺς δεσμώτης
430 크세노폰(Xénophon, Ξενοφῶν, 전430경-355경) 그리스 장군, 역사가, 철학자. 소크라테스 제자. 회상록(Mémorables: Ἀπομνημονευμάτων, 전390년경)(스승의 대변인 역할)
428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전428/427-348/347) 아테네 철학자. 소크라테스 제자.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전384-322) 고대 그리스철학자. 뤼케이온 창설자. 생물학, 물리학, 형이상학, 논리학, 시학, 정치학, 수사학, 윤리학 등 제반 학문의 선구자.
O
205 플로티노스(Plotin, Πλωτῖνος, 205-270)그리스-로마시대 철학자. 알렉산드리아 학파. Ennéades
234 포르피리오스(Porphyre de Tyr, 234–310경) 네오플라톤주의, 플로티노스의 제자. 논리학 저술인Isagogè(268경), 스승의 저술 Ennéades를 편집하고 301년에 Vie de Plotin(vers 301)를 썼다.
[뷔리당(Jean Buridan, 1292-1363), 프랑스 철학자, 스콜라철학. 당나귀 파라독스(paradoxe de l'âne de Buridan).]
1724 칸트(Emmanuel Kant, 1724-1804) 프러시아 철학자. 비판주의 창설자이며 선험적 관념론(« idéalisme transcendantal ») 주장.
1748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영국 철학자. 공리주의: 쾌락의 산술화.
1788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 철학자.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Le monde comme volonté et comme représentation, 1819,
1813 마르땅(Thomas-Henri Martin, 1813-1884) 헬레니스트, 과학사가, 유심론철학자. 렌대학 학장.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관한 연구(Études sur le Timée de Platon, 1841)
1814 젤러(Eduard Zeller, 1814-1908) 독일 철학사가. 역사적 발전에서 그리스 철학(Die Philosophie der Griechen in ihrer geschichtlichen Entwicklung (1844-1852).
1832 타이히뮐러(Gustav Teichmüller, 1832-1888) 독일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전문. 개념사의 새로운 연구(Neue Studien zur Geschichte der Begriffe. 1876–1879)(drei Bände),
1838 푸이예(Alfred Fouillée, 1838-1912) 프랑스 철학자. 플라톤의 철학(La Philosophie de Platon, 1869, 소크라테스의 철학(La philosophie de Socrate, 1874), Histoire de la philosophie, 1875(여기서 소크라테스를 공산주의로 서술하고 있다.) 프랑스 인민의 심리학(Psychologie du peuple français, 1898)
[우연의 개념]
συγκυρέω-ῶ - κύρμα: From κυρέω, κύρω :I. se trouver avec(함께 발견되다), se recontrer par hasard(우연히 서로 만나다), II, se rencontrer avec, atteindre à, toucher à(닿다), être contigu à(..의 곁에 있다) [프랑스 희랍 기초교재]
[συγκυρία, (par) hasard, 운, 아마(도). /동의어로 τύχη f. σύμπτωση f. / automaton unreasoning agents 이유 없는 자동 작용자. le hasard ]
συμβεβηκώς <- συμβεβάναι -βεβηκέναι pf. inf. of συμβαίνω [박홍규 설명]
συμ-βαίνω, f(미래) -βήσομαι 1. 함께 발로 서는 것, 참여로서 함께 서는 것, 2. 함께 오는 것, 동의하는 것, 3. 지나가는 것, 일어나는 것 lat. contingere, .
κατά συμθεθηκώς, 우발적 사고 우시아(οὐσία 실체, συμζεζηκώς)의 반대.
파르끄(Les Parques)는 로마 신화에서 운명의 세 여신을 말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세 모이라이(trois Moires Μοῖραι, Clotho, Lachésis, Atropos)이다. 모이라(Moires, Μοῖραι) 즉 운명의 세 여신(trois divinités du Destin) : 생명의 실을 짜는 클로 토(Clotho « la Fileuse »), 펼치며 늘이는 라케시스(Lachésis (« la Répartitrice ») 실을 자르는 아트로포스(Atropos (« l'Inflexible »)이다.
(13:23, 54O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