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스승 | 문인(門人) |
김굉필(金宏弼, 1454~1504), 호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시호 문경(文敬), 김종직(金宗直) 문하, 1504년 갑자사화 처형 | 7세 정응종(鄭應鍾) - 선생에게서 기재가 명민하여 어질고 도량있는 인재가 될것이라 칭찬받음 - 예조판서(禮曹判書), 진향사(進香使),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
박상(朴祥, 1474~1530) 호 눌재(訥齋), 시호는 문간(文簡), 나주목사, 강직청렴(淸白卓異), 1,100수 詩作 | 7세 정만종(鄭萬鍾) - 눌재 선생에게 시를 배움(눌재 인명록에서), 공의 기재을 몹시 아낌 |
이이(李珥, 1536~1584) 호 율곡(栗谷), 시호 문성(文成), 이조·병조판서 1583년 시무6조(時務六條)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 11세 정은수(鄭訔秀) - 임진왜란에 부친 언우(彦祐) 공을 따라 창의, 부친 순절(殉節)후 병을 통솔, 군자감정(軍資監正) 제수에 불취(不就)하고 부친 반장(反葬)후 나주에서 여묘(廬墓) |
김장생(金長生, 1548~1631) 호 사계(沙溪). 서인의 영수 예학(禮學)의 태두 | 10세 정준(鄭浚), 호 추원당(追遠堂) -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수은(睡隱) 강항(姜沆), 둔암(遯菴) 양산해(梁山海)와 교유 |
장현광(張顯光, 1554∼1637) 호 여헌(旅軒), 시호 문강(文康), 증 영의정 | 10세 정두원(鄭斗源), 호 호정(壺亭) - 공이 쓴 여헌공 제문(祭文)이 남아 있음 |
김집(金集, 1574~1656) 호 신독재(愼獨齋), 시호 문경(文敬) 이조판서, 예학(禮學)의 기본체계 완비 | 10세 정광원(鄭廣源) * 장인(丈人)이 됨 |
이명한(李明漢, 1595∼1645) 호 백주(白洲), 이조·예조판서. 부친 월사 정구, 자 일상(一相)과 3대 대제학 | 13세 정시원(鄭時元, 1613~1666), 자 백춘(伯春) - 사복시정에 증직(贈司僕寺正) |
정두경(鄭斗卿, 1597∼1673) 호 동명(東溟). 모친은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사헌부장령 이주(以周)의 딸 | 10세 정현원(鄭玄源, 1609~1673), 호 초경당(苕蘔堂) - 8세 때 맷돌(磨石) 시로 유명, 10세에 외가 집 형 동명 정두경으로부터 두시를 배웠다. 유고가 있다 |
송시열(宋時烈, 1607~1689) 호 우암(尤庵) 우재(尤齋), 시호 문정(文正), 좌의정, 노론의 영수 | 10세 정현원(鄭玄源, 1609~1673), 호 초경당(苕蘔堂) |
박세채(朴世采, 1631~1695) 호 현석(玄石),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 문인.우의정·좌의정. 소론영도자 | 13세 정계광(鄭啓光, 1654~1721), 호 관점당(觀漸堂) |
권상하((權尙夏,1641∼1721) 호 수암(遂菴),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 문인 우의정·좌의정 | 12세 정설상(鄭卨相), 자 중설(仲設) 14세 정희주(鄭嬉柱, 1700~1750), 호 자암(紫岩) - 학문에 뜻을 두어 견식이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실천함이 독실하니 마치 공부자의 제자 자하와 같았다(若孔門子夏). 사후 유림을 시작으로 판관 송가상, 참봉 변희하 등 4백여 명이 학문의 탁월함을 조정에 아뢰니 1759년에 사헌부지평의 증직 14세 정희보(鄭姬輔, 1712~1741), 자 문좌(文佐) - 경행으로 사헌부지평에 추증 15세 정오규鄭五奎, 1678~1744) 호 三悔齋 및 노학재(老學齋) - 경사와 백가서에 정진, 천인성정의 근원을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저서로 「독서질의」「의례영언」 및 유고가 있다. 병진초보를 편찬하고 발문을 썼다 |
김창협(金昌協,1651∼1708), 호 농암(農巖) ·삼주(三洲). 시호 문간(文簡). 대사간, 대사성. 문학과 유학(儒學)의 대가. 문장가, 서예가
김창흡(金昌翕, 1653∼1722) 호 삼연(三淵). 김창집, 김창협 아우. 증 이조판서 | 14세 정선(鄭敾, 1676 ~ 1759), 호 겸재(謙齋) -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자제로서, 이웃에 살며 율곡 학맥을 이은 농암 김창협과 제자백가와 시문서화에 박통한 삼연 김창흡(當世 文苑의 宗匠: 당시 문원의 최고봉)에게 배웠다. - 사천 이병연과 시화(詩畵)의 평생지기로 지냈다. - 중용, 대학과 주역의 내용을 꿰뚫을 정도로 심취하였고, 중국에서 많은 서적을 수집하는 등 독서를 즐겼다. -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책과 유고(遺稿) 수십 권이 전하지 않으며, 자작시나 화론(畫論)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을 주고 있다. |
윤동수(尹東洙, 1674~1739) 호 경암(敬庵), 호조참의 공조참의 | 12세 정만하(鄭萬夏, 1692 ~ ?), 호 풍헌(風軒) |
이재(李縡, 1680~1746) 호 도암(陶菴)·한천(寒泉). 김창협(金昌協) 문인. 대제학, 공조판서 | 13세 정시학(鄭時學, 1729~1799), 호 죽포(竹圃) - 원근학자가 어려운 경학의 문제를 들고 방문. 유고가 전함(遠近學者執經問難庠舍不容有遺稿) 도내의 많은 선비가 계속 천거하고 임금께 아뢰니 순조 계유년(1813년)에 학행으로 이조참의에 증직 |
채지홍(李縡, 1680~1746) 호 봉암(鳳巖), 삼환재(三患齋),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수양 학문)에 전념 | 14세 정희주(鄭嬉柱, 1700~1750), 호 자암(紫岩) 14세 정희보(鄭姬輔, 1712~1741), 자 문좌(文佐) 16세 정창흡(鄭昌洽, 1675~1699), 호 치재(癡齋) |
김원행(金元行, 1702~1772) 호 미호(渼湖) 조부 창집(昌集). 공조참의 불취 | 14세 정익주(鄭翼柱, 1726~1805), 호 휴암(休岩) |
김종후(金鍾厚, 1721~1780) 호 본암(本庵) 진재(眞齋). 학행(學行) 장령, 경연관을 거쳐 자의(諮議) | 15세 정규휘(鄭奎輝, 1744 ~ 1774) |
채제공(蔡濟恭, 1720~1799), 호 번암(樊巖) ·번옹(樊翁). 영의정 | 19세 정충국(鄭忠國, 1759~1839), 호 만오당(晩悟堂) |
임헌회(任憲晦, 1811~1876) 호 고산(鼓山), 대사헌. 낙론(洛論)의 대가. 제자 전우(田愚)에게 전수 | 16세 정운련(鄭運蓮, 1819~1889), 호 신헌(愼軒) - 1892년에 유림의 상소, 사헌부(臺)의 천거로 호조참판에 추증 17세 정석영(鄭錫永, 1840~1911), 호 석릉(石陵) - 내부주사, 통훈대부(內部主事 陞通訓) 17세 정석준(鄭錫駿, 1829~1885), 호 소릉(巢陵) |
김평묵(金平默, 1819∼1891) 호는 중암(重菴) 이항로(李恒老) 문인 | 17세 정이호(鄭履浩, 1858~1946), 호 일재(逸齋) 19세 정인직(鄭寅直, 1862~1941), 호 췌동(贅東) 20세 정제만(鄭濟萬, 1872~1931), 호 일와(一窩) |
최익현(崔益鉉, 1833~1906), 호 면암(勉庵). 김기현(金琦鉉)과 이항로(李恒老) 문인. 을사조약 반대 창의. 대마도에서 아사(對馬島 餓死) | 20세 정제만(鄭濟萬, 1872~1931), 호 일와(一窩) |
류중교(柳重敎, 1832~1893), 호 성재(省齋), 이항로 문인, 1886년 이항로의 심설(心說)로 김평묵과 대논쟁 | 19세 정인직(鄭寅直, 1862~1941), 호 췌동(贅東) |
김수조(金壽祖) 호 맥호(麥湖). 완계 외삼촌.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에 대한 겸재(謙齋) 기학경(奇學敬)과 문답 | 17세 정석린(鄭錫麟, 1778~1864) 호 상산(商山) 17세 정석원(鄭錫元, 1762~1834), 호 완계(浣溪)·은선자(隱仙子) |
정운형(鄭運亨, 1735~1792) 호 매헌(梅軒), 참봉공파 16세, 시강원자의(侍講院 諮議) 제수 불취(不就) | 17세 정석원(鄭錫元, 1762~1834), 호 완계(浣溪)·은선자(隱仙子) |
정구석(鄭龜錫, 1790~1865), 호 석당(石塘) 19세 응교공파, 전라도사,⌜석당집⌟ | 19세 정원석(鄭源錫, 1847~1906), 호 만회(晩悔) - 월파 정시림 공을 따라 교류하고,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과 학문에 연구 정진 |
기정진(奇正鎭, 1798~1879), 호 노사(蘆沙). 300년간 주리(主理) 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 수립 | 21세 정의림(鄭義林, 1845~1910), 호 일신재(日新齋). - 대곡 김석구, 애산 정재규와 함께 노사(蘆沙)의 3대 제자로서 학문을 전수. 금곡사, 영귀사, 동산단, 평일사에서 배향 21세 정창림(鄭昌林, 1847~1916), 호 구계(九溪) 21세 정시림(鄭時林, 1839~1912), 호 월파(月波) - 기정진의 고족제자. 면암 최익현, 송사 기우만, 후윤 정예산, 일신 정의림 등 경기, 영·호남의 수많은 문인, 학자들과 교유. 후학 문인 황철원 등이 보성에 사당 경모재를 지어 제사 |
송병선(宋秉璿, 1836~1905) 호 연재(淵齋), 학자, 순국지사(1910년)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 | 18세 정재휴(鄭載烋, 1882~1951), 호 옥재(玉齋) 24세 정충모(鄭忠謨, 1881~1951), 호 소암(素庵) |
나병식(羅秉植), 호 학고(鶴臯) | 18세 정굉필(鄭宏珌, 1851~1872), 호 현재(弦齋) |
송병순(宋秉珣, 1839~1912), 호 심석(心石), 학자, 순국지사(1912년),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 | 17세 정영필(鄭英珌, 1879~1965), 호 회산(晦山) 又 인암(忍庵) |
김용선(金容璿, 1865~?), 호 성암(省庵).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제자 | 18세 정원필(鄭元珌, 1888~1946), 호 죽파(竹坡) |
서봉관(徐鳳寬, 1839 ~ ?), 호 동강(東岡), 존성재(存誠齋) 최익현(崔益鉉) 문인. 이조참판 | 18세 정문필(鄭文珌, 1880~1925), 호 성헌(誠軒) |
정의림(鄭義林, 1845~1910), 호 일신재(日新齋). 송사 기정진의 3대 제자 | 19세 정준석(鄭晙錫, 1883 ~ ?), 호 청선(聽仙) 19세 정위석(鄭暐錫, 1879~1937), 호 병남재(屛南齋) |
전우(田愚, 1841~1922), 호 간재(艮齋) 고산 임헌회의 고제(高弟) | 20세 정동환(鄭東煥, 1871~1966), 자 성문(聖文) |
기우만(奇宇萬, 1846~1916), 호 송사(松沙).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 | 22세 정상덕(鄭尙德, 1870~1928), 호 식당(植堂) 22세 정규종(鄭圭綜, 1889~1972), 호 송남(松南) 21세 정규채(鄭圭彩, 1887~1949), 호 탁청재(濯淸齋) |
성기운(成璣運,1877~1956), 호 덕천(德泉). 전우(田愚) 문인. 호적령(戶籍令) 반대 | 25세 정효일(鄭孝壹, 1906 ~ ?), 호 회봉(悔峰) |
□ 문집(文集) 현황
8세 정이주(성재집:醒齋集), 9세 정사호(화곡집:禾谷集), 10세 정성원(자연정유고:自然亭遺稿), 10세 정두원(호정집:壺亭集), 10세 정현원(조영당집:苕蘔堂集), 10세 정만근(소남유고:小南遺稿), 11세 정전창(율탄집:栗灘集), 12세 정치상(허주시화:虛舟詩畵), 13세 정시형(반주유고:盤洲遺稿), 14세 정부(종애문집:鍾崖文集), 14세 정수준(강계공유고:江界公遺稿), 14세 정복천(강재집:剛齋集), 14세 정희주(자엄집:紫嚴集), 15세 정만적(관란재집:觀瀾齋集), 15세 정오규(삼회재집:三悔齋集), 15세 정창후(청취옹집:淸翠翁集), 15세 정홍규(운와유고:雲窩遺稿), 16세 정운형(매헌유고:梅軒遺稿), 16세 정희원(선여유고:善汝遺稿), 17세 정이황(묵재유고:默齋遺稿), 17세 정석린(상산집:商山集), 17세 정석홍(질사유고:臷士遺稿), 18세 정위(1826년 서래만영:西來謾詠,1831년 한시집 음풍영월:吟風呤月), 18세 정영필(회산문고:悔山文庫), 19세 정화익(국포유고:國圃遺稿), 19세 정구석(석당집:石塘集), 19세 정종석(석산유고:石山遺稿), 20세 정제만(일와유고:一窩遺稿), 21세 정의림(일신집:日新集), 21세 정시림(월파집:月波集), 21세 정규종(송남유고:松南遺稿) |
□ 저서(著書) 현황
14세 정선(鄭歚) : 도설경해(圖說經解)와 유고(遺稿) 수십 권, 부전(不傳) 14세 정부(鄭敷) : 사준십책(士儁十冊) 15세 정오규(鄭五奎) : 독서질의(讀書質疑), 질의영언(疑禮零言) 15세 정홍규(鄭弘規) : 운와경필삼십육편(雲窩警筆三十六編) 19세 정수현(鄭秀鉉) : 경자일기(庚子日記), 계해북유일록(癸亥北遊日錄) |
□ 서옥선축(書屋選築)
- 9세 정인영(鄭仁榮) : 기산(箕山) 남쪽에 ⌜부벽정(浮碧亭)⌟을 지음 - 10세 정성원(鄭星源) : 화곡촌(禾谷村)에 복축(卜築) - 10세 정설(鄭渫) : 광양 옥곡(光陽玉谷)에 수월정(水月亭) 선축(選築). 송강 정철이 정자에 글을 남김(松江鄭先生序其亭). 수은 강항(姜沆)의 수월정 삼십영(水月亭三十詠)이 있음 - 13세 정후기(鄭垕基) : 무송정(撫松亭), 丈岩(장암) 정호(鄭澔) 현판(題額). 후손 일수가 유허비(遺墟碑) 세움 - 16세 정운형(鄭運亨) : 장성 황룡 분매동에 ‘매산서실’ 선축(長城黃龍面分梅洞選築梅山書室) - 17세 정이황(鄭履璜) : 만년에 ‘유천정사(柳川精舍)’를 지음 - 19세 정수현(鄭秀鉉) : 1865년 평해군 원서면 백암산(白巖山)의 광흥사(光興寺) 계조암(繼祖庵) 유허에 심신휴양을 위하여 초암을 짓고(結構數間草庵), 1876년 봄 초암 서쪽에 산령각을 중건(創建山神靈閣於菴西)하여 영구 수호(永年守護之計)코자 하였다.(영해부사 이정필(李正弼)이 중건기를 섰다) - 21세 정시림(鄭時林) : 전남 보성군 미력면 강수동에 정자 강수정(薑樹亭)을 지었으며, 보성군 문덕면 동산리 법화마을 동산구릉에 1893년 강습재(講習齋)를 짓고 후학을 길렀다. 지금은 강습재가 있던 자리가 농경지 전답으로 되어 있으며 그곳에 바위 면에 음각문으로 유허지를 각인해 놓았다. 후학 문인 황철원 등이 보성 미력면에 사당(景慕齋)을 지어 제사지냈다 < 섬진강변 수월정과 유허비 > |
□ 계회(契會)
- 8세 정호(鄭虎) : 나주금강계회 11현인(羅州錦江契會 十一賢人), 나주태학관 유생출신 11명 - 9세 정사호(鄭賜湖) : 가정(嘉靖) 계축(1553년) 생. 예판 李好閔, 병판 金信元 등 18인. 1580(경진)~1581 (신사) 년간 10인으로 결성, 왜란으로 일시 중단. 년 2회 춘추 반주 모임. 경조사참석 - 9세 정인근(鄭仁謹), 정인심(鄭仁諶) : 나주 초동 보산각 십로회(羅州草洞寶山閣十老會) 게판에 실림 - 10세 정연(鄭演) : ‘팔선계’ ‘구로회’(八仙契九老會), 신벌, 김극효 등 - 13세 정수선(鄭壽先) : 을축생갑계첩(乙丑生甲契帖)이 있음. 여성제, 이단하 등 30여명 - 13세 정수만(鄭壽萬) : 판서 박장건(朴長健) 이하 ‘26인 수동경계’(二十六人修同庚契). 계첩 있음(有契帖), 무과(武科)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 17세 정확(鄭擴) : 김극효(金克孝) 후손 곤(昆) 등과 ‘구로회’(九老會) < 보산사 莎洞十皓先生遺蹟碑 : 정인근, 정인심 > |
세 | 파 | 인 명(자, 호) | 이력, 주요 직책 |
4 | Ⅱ동백 | 정지하(鄭之夏) | 태종14년(1414년) 생원, 학행(學行)으로 사헌부장령(掌令) 세조원년(년) 좌익공신(佐翼功臣) 증 이조참의(贈 吏曹參議) |
5 | Ⅱ동백 | 정조우(鄭祖禹) |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 문장으로 이름 높아 「동문선」에 실렸다 文章鳴世 載「東文選」 |
6 | Ⅰ완백 | 정질(鄭晊) 일지(日至) 동덕재(東德齋) (1426~1487) | 생원(生員), 1467년 참봉(參奉) 1471년 병조정랑(兵曹正郞) 아들 응종(應鍾)이 고관되어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贈 崇祿大夫 議政府左贊成). 문헌록에 실렸다
문장 행의가 뛰어나 사람들이 존경했다(文章行誼爲時推重) |
7 | Ⅰ완백 | 정응종(鄭應鍾) 자행(子行) 퇴은재(退隱齋) (1457~1523) 諡號 文敬 | 경연일강관(經筵日講官),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예조참판(禮曹參判), 예조판서(禮曹判書), 진향사(進香使)
한훤당 김굉필 선생 문하에서 ‘소학의의’, 성리학 등 서책를 익히고 밝혔다. 선생께서 매양 “재질이 명민하여 더불어 학문을 할만하다 하고 교화·훈육하면 어질고 도량 있는 인재가 될 것이다” 라고 칭찬하였다
樞衣于寒暄金先生之門 講明小學疑義性理等書 先生每稱許以才質明敏可與語學 沈漬薰陶成就德器
연산정란으로 나주 흥룡동 고향집으로 물러나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시를 짓기를 “속세 떠난 가난한 늙은이, 부귀란 뜬 구름이로구나” 「문헌록」과 「금성지」에 행적이 실렸다
燕山政亂退居于羅州興龍洞故庄 悠然自適 有詩曰 “江湖窮白首 富貴付浮雲” 見「文獻錄」及「錦城誌」
* 김굉필(金宏弼) : 1454 ~ 1504,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 시호는 문경(文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감찰·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학문경향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문인으로는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두산백과) |
7 | Ⅱ동백 | 정만종(鄭萬鍾) 인보(仁甫) 조계(棗溪) ( ? ~ 1549) * 조계 : 무등산에서 발원 한 광주천(光州 川)을 지칭한다함 | 눌재 박상(朴祥) 선생의 문인으로, 눌재 선생이 공이 큰 그릇이 될 것으로 보고 매우 아꼈다(受業訥齋朴先生門 訥齋甚器之) 1513년 진사, 1516년 문과 삼사아장(三司亞長), 4조 참판(四曹 刑·戶·禮·兵曹 參判), 지신사(知申事:도승지),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1539년 진위사(陳慰使), 한성좌윤(漢城左尹), 8도 관찰사(八道觀察使 : 경기·황해·충청·함경·경상)
* 정만종(鄭萬鍾)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인보(仁甫), 호는 조계(棗溪). 정지하(鄭之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계우(鄭繼禹)이고, 아버지는 정윤적(鄭允績)이며, 어머니는 신자강(申子杠)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520년 경연기사관(經筵記事官)으로 사관의 올바른 임무수행을 건의하였다. 이어 사서·정언을 거쳐 경상도도사가 되었는데, 이 때 6품에서 5품으로의 승진이 너무 빨랐다 하여 사헌부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1527년 지평·문학을 역임한 뒤 헌납이 되어 정병(正兵)의 입역(立役) 과다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이어 장령·집의 등 언관을 거치면서 행신(幸臣)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공격하기도 하고, 향촌교육의 내실화를 건의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폈다. 1536년부터 사간·응교·집의·전한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뒤, 승정원우부승지·형조참판을 거쳤다. 1539년 예조참판으로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성부좌윤·호조참판을 지낸 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선치하였고, 곧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평안도의 양전(量田)을 순찰하기도 하였다.
이어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에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보임되었다가 1550년에 부총관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함경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 등 외직을 역임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7 | Ⅱ동백 | 정경(鄭褧) 상지(尙之) (1489~1553) | 1513년 진사(進士),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소양강가에 은거하였으나 그 명성 높이 솟아 동료들의 표망이 되었다. 과거에 나가지 않고 벼슬살이에 뜻이 없었다. 외숙(모친이 진주류씨) 의정 류순정 공과 표형(외사촌, 형수가 파평윤씨) 의정 윤재가 서로 번갈아 금오랑(의금부도사)에 천거하였다. 공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고 한스럽게 여겨 집에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았다. 간이 최립(崔岦)이 지은 성재공 신도비 서에 실려 있다
隱居昭陽江上 嶷嶷有立爲儕流標望 早廢擧業仕進無意 內舅柳議政順汀 表兄尹議政漑交薦金吾郞 公沈以不相唯爲恨至於及門不覿語見崔簡易所撰醒齋公神道碑序
* 류순정(柳順汀) : 1459 ~ 1512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지옹(智翁), 호는 청천(菁川). 아버지는 목사 유양(柳壤)이며, 어머니는 정집(鄭楫)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활을 잘 쏘아서 무인 중에서도 비교할 자가 드물었다. 1487년(성종 18) 진사로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홍문관전적에 임명되었다. 연산군의 밤사냥이 불편함을 진언했다가 임사홍의 모략으로 추국당하였다. 1506년 이조판서로서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모의, 거사해 그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이어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0년 경오왜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가 되어 병사를 총괄했으며, 다시 도원수로서 현지에 출동해 삼포(三浦)의 난을 평정하고 군공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올랐다. 2개월 후 병사하자 문정(文定)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후 성렬(成烈)로 고쳐졌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윤개(尹漑) : 1494 ~ 1566, 호는 회재(晦齋)·서파(西坡)
1516년(중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519년 이조좌랑으로서 인사에 관여, 사림을 힘써 등용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趙光祖) 등이 몰려나자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한어(漢語)에 능통해 세자시강원의 문학·필선, 승문원부제조 등 한직을 역임하며 명나라와의 외교 활동에 이바지하였다. 1534년에는 명나라로부터 역청(瀝靑)·백철(白鐵)·이두석(泥豆錫)의 제조법을 배워왔고, 명나라의 조복(朝服)을 얻어와 의복 제도를 개정하게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올랐다. 명종의 즉위로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첨정하면서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大尹) 일파를 제거하자, 여기에 가담해 공신에 책록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예조판서로서 오래 근무하면서 의식과 법도를 대략 정돈했고, 1546년(명종 1)에는 외방 학교의 절목(節目)을 마련해 교육 제도를 바로잡았다. 1550년 호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8년 동안 우의정을 역임하고 1558년 좌의정에 올랐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8 | Ⅰ-1 절제사 | 정호(鄭虎) 퇴재(退齋) | 생원, 무과, 임치진첨사(臨淄鎭僉使)
「나주금강계회」 11현인으로서, 육봉 박우가 그 일을 기록하고 한림 나창계가 시로 지었다. 유적은 섬호 진경문이 시화로 남겼다 羅州錦江契會 十一賢人 朴六峰祐記其事 羅翰林昶繼以詩 遺蹟載 陳剡湖景文詩話中
* 나주금강계회 - 계원 : 나주 태학관 유생 출신 11명 정문손(鄭文孫), 임붕(林鵬), 김두(金豆), 김식(金軾), 나일손(羅逸孫), 진이손(陳二孫), 진삼손(陳三孫), 정호(鄭虎), 김구(金臼), 김안복(金安福), 진세공(陳世恭)
* 계회 결성 배경
중종14년(1519년) 남곤, 홍경주, 심정 등 훈구파의 모함으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세력 100여명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규명을 위해 나주출신 태학관 유생 11명은 이들의 구명을 위해 태학관 유생 200여명의 호응을 얻어 집단상소를 올렸다, 주동인물은 정문손과 임붕 2인이 대표이고 상소문은 정문손이 썼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귀향해 錦江(영산강) 가에 아옥*을 짓고 금강계를 조직하였다. 정치의 비정함을 한탄하고 후일을 기약하며 변치 않는 절개를 맹세하였다 |
8 | Ⅰ-4 자의 | 정해(鄭獬) (1491 ~ ?) |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학문이 깊었다(學文淵深) |
8 | Ⅰ-5 승지 | 정표(鄭彪) (1499~1551) | 1522년 진사(進士)
학문과 덕이 뛰어나 사헌부에 천거 받았으며 좌승지에 이르렀다(南臺累遷至左承旨) |
8 | Ⅰ-7 진사 | 정사(鄭獅) 군실(君實) 후은당(後隱堂) (1522 ~ 1551) | 종사랑(從仕郞) 1534년 성균진사(成均進士)
을사사화에 성균관 동료들을 이끌고 제현을 신원하는 상소를 올리고 원흉을 탄핵했다. 말이 곧고 간절하여 선비의 의론이 옳다 하였다 乙巳禍作率館伴同僚 上疏伸救諸賢彈劾元兇 言甚直切士論韙之 |
8 | Ⅱ-8 소강재 | 정이우(鄭以虞) 성순(聖舜) 소강재(昭江齋) | 선조(宣祖) 조에 수재(秀才)로서 진사(進士)
천성이 순수하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독실하여 문명을 크게 떨쳤다. 소양강상에 머물며 낙향하여 한양에 들어오지 않으며 말하기를 “부친께서 출사치 않았는데 어찌 자식이 벼슬길에 나가랴!” 하였다
天性純勤好學篤行文名大闡 因臥昭陽江上不復入洛曰 “親隱不仕子何出仕” |
| Ⅱ-9 성재 | 정이주(鄭以周) 방무(邦武) 성재(醒齋) (1530~1583) | 사간원헌납(司諫院 獻納), 한림(翰林), 사헌부장령(司憲掌令), 정주목사(定州牧使) 증예조판서 대제학(贈禮曹判書 大提學), 책훈광산부원군(策勳光山府院君), 후증순충보조공신 영의정(後贈純忠補祚功臣 領議政) - 율곡 이이와 막역 - 장유의 계곡만필에 족적 기재(事載張維谿谷漫筆) - 명신록의 동국호보 간쟁편 참조(見名臣錄東國號譜諫諍篇) |
9 | Ⅰ-1 절제사 | 정응성(鄭應星) 천장(天章) | 별천(別薦) 장사랑(將仕郞) 현릉참봉(顯陵參奉)
집에 머물며 예를 지키며 음악을 벗삼아 지냈다. 향년 4기(48세)를 넘기지 못하고 조세하니 사우들이 애석해 했다 居家處世以禮律身 享年未滿四紀士友嗟惜 |
9 | Ⅰ-3 지평 | 정인덕(鄭仁德) 사일(士一) (1519 ~ ?) | 1561년 생원(生員), 진사(進士) 생진구중(生進俱中)
학문으로 일찍부터 유림으로 촉망받았다(以文行早有儒望) 문행으로 천거, 장흥교수 봉렬대부(長興敎授 奉列大夫) |
9 | Ⅰ-4 자의 | 정인근(鄭仁謹) 둔헌(遯軒) (1532~1591) | 참봉(參奉), 덕천군수(德川郡守)
도의가 있고 문장도 뛰어나 사우들이 받들었다. 수은 강항이 만사에서 추모하기를 덕의를 크게 칭송하였다. 행적은 나주 초동의 「보산각 게판」과 「기성군지」「금성군지」에 실렸다 道義文章士友推重 睡隱姜沆 輓詞盛稱德義 行蹟載羅州草洞「寶山閣揭板」中 及「箕城錦城兩郡誌」 * ‘십로회(十老會)’의 계원으로 아우 정인심(鄭仁諶)과 같이 참여함 |
9 | Ⅰ-4 자의 | 정인심(鄭仁諶) 고옥(古玉) | 진사(進士)
행적이 나주 초동의 보산각 ‘십로회’ 게판에 실렸다 行蹟載 羅州草洞寶山閣十老會揭板中 |
9 | Ⅰ-5 능파정 | 정인량(鄭仁良) 원필(元弼) (1535 ~ ?) | 생원(生員)
수은 강항이 만사에서 추모하기를 덕의를 크게 칭송하였다 睡隱 姜沆 輓詞盛稱德義
* 강항(姜沆) : 1567(명종22)∼1618(광해군10)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수은(睡隱). 영광 출신.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으로,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가주서를 거쳐 1596년 공조좌랑과 이어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1597년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참판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고 말았다. 이곳에서 출석사(出石寺)의 중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598년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惺窩]·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지와라는 두뇌가 총명하고 고문(古文)을 다룰 줄 알아 우리나라의 과거 절차 및 춘추석전(春秋釋奠)·경연조저(經筵朝著)·공자묘(孔子廟) 등을 묻기도 하고, 또 상례·제례·복제 등을 배워 그대로 실행,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일본 억류 중 두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1600년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할 수 있었다. 1602년 대구교수(大邱敎授)와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해 몸소 발문을 썼고, 『곡례전경(曲禮全經)』·『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근사속록(近思續錄)』·『근사별록(近思別錄)』·『통서(通書)』·『정몽(正蒙)』 등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姜沆彙抄)』를 남겼으며, 이들은 모두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에 이조판서양관대제학(吏曹判書兩館大提學)이 추증되었다.
영광의 용계사(龍溪祠)·내산서원(內山書院)에 제향되고, 일본의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성주아카마쓰[赤松廣通]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문선찬주(文選纂註)』·『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9 | Ⅰ-5 능파정 | 정인공(鄭仁恭) 사성(士誠) 월곡(月谷) (1545~1602) | 1564년 생원 진사 동시급제(生進俱中)
시와 글을 벗 삼아 은거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琴書自娛隱居不仕 |
9 | Ⅰ-6 승지 | 정인홍(鄭仁洪) 정유(正裕) 도암(道菴) (1530~1589) | 1552년 진사(進士)
학행으로 강원감사(江原監司)를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아니함(不就) |
9 | Ⅰ-7 진사 | 정인영(鄭仁榮) 선수(善守) (1569~1627) | 정유(丁酉) 1597년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공을 세워 충의교위(忠毅校尉)를 제수 받고 선무훈의 공신록에 올랐다. 만년에 기산(箕山)남쪽에 ‘부벽정(浮碧亭)’을 짓고 경서 와 사서를 읽으며 지냈다
丁酉倡義旅累建奇功 除忠毅校尉錄宣務勳 晩築浮碧亭於箕山之陽 書史自娛
증손 선(繕)이 귀하게 되어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 선무공신(宣武功臣) : 임진왜란이 끝난 뒤, 왜군 정벌에 공을 세운 장수들과 명나라 군대에 군량 공급을 담당한 사신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순신, 권율, 원균 등 모두 18인이 선무공신으로 봉해졌는데, 곽재우, 정인홍, 고경명, 김천일, 조헌 등이 빠지고 전공과 관련 없는 사람이 선정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논란이 계속되자 1605년 음력 4월 16일에 선무공신 책봉에서 빠진 9,060명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봉했다. |
9 | Ⅱ-8 소강재 | 정동호(鄭東湖) | 글씨로 유명하였다(筆翰有名) |
9 | Ⅱ-9 성재 | 정사호(鄭賜湖) 몽여(夢與) 화곡(禾谷) (1553~1616) | 선조10년(1577년) 정축 문과 이조판서(吏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 임진왜란 중 금성현령으로 현민을 구제하고, 정유재란 중 안동부사로서 명나라 장수 양호와 토적에 성공하여 광성군에 책훈되고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청주 수락서원(壽樂書院)에 배향되었다 壬亂中 以錦城縣令救濟縣民 丁酉再亂中 安東府使 與明將楊鎬 討賊成功 策勳光城君 贈左贊成 配享于淸州壽樂書院
영조 임오년(1762년)에 시호 “충민(忠敏)”을 내렸다 < 유적 > - 1593년 6월 진주 창렬사 건립 : 2차 진주성전투 순국장수 배향 - 1604년 황해도 소현서원 복원 : 1586 건립 주자 등 배향 - 1608년 황해도 연안에 세운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글씨 |
10 | Ⅰ-2 응교 | 정연(鄭演) 거원(巨源) 영사당(永思堂) (1541~1621) | 음(蔭)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 승(陞)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수 81세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일찍 과거를 그만두고 노년에 한양성 서쪽에 은거하여 덕망 있는 선비들과 ‘팔선계’와 ‘구로회’를 조직하여 사계절 연회를 베풀고 놀았다. 사람들이 “장안의 성대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양 계첩이 집에 보관되었다 早廢擧業晩隱城西與耆英諸公修八仙契九老會 四時燕集風流徜徉人稱洛中盛事 兩契帖藏于家
* 팔선계 계원 ① 신 벌(申 橃:1523~1616, 94세 졸) 號 友松 官同知 ② 이의건(李義健:1533~1621, 89세 졸) 號 峒隱 官直長 ③ 신 암(申 黯:1537~1616, 80세 졸) 號 不如堂 官經歷 자直孺 ④ 김극효(金克孝:1542~1618, 77세 졸) 號 四味堂 官同知 ⑤ 정 연(鄭 演:1541~1621, 81세 졸) 號 永思堂 官同知 ⑥ 심 암(沈 嵒) 官正 ⑦ 권성이(權成已) 官僉正 ⑧ 유 탁(兪濯 : 1544~1618) 官正
* 구로회 계원(14회 모임, 1614.4.8. ~ 1617.8.18., 정연 댁 3회) 신벌, 이의건, 신암, 정연, 김극효, 정응탁(鄭應鐸, 1542~1617), 이조민(李肇敏, 1543~1615), 이원(李瑗, 1543~?), 유탁(兪濯, 1544~1618) |
10 | Ⅰ-3 지평 | 정만근(鄭萬謹) 중신(仲慎) 소남(小南) (1556~1614) | 초야에 응거하였다. 바르게 행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유고가 있다 隱居 行義學問純篤 有遺稿 |
10 | Ⅰ-4 자의 | 정준(鄭浚) 여호(汝浩) 추원당(追遠堂) (1564 ~ 1625) | 광해군 1617년 진사(進士)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門下)에서 배웠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수은(睡隱) 강항(姜沆), 둔암(遯菴) 양산해(梁山海)와 도의로서 교유하였다(爲道義交)
임진왜란에 목숨 걸고 묘를 지키므로 적병도 감탄하여 해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어지럽고 조정이 혼란한 때라 인륜이 끊어져 통렬한 상소를 올렸다. 효동사에 배향되었다. 사헌부 집의 이홍직이 봉안문과 제사축문을 지었으며 행적이 「기성지」와 「문헌록」에 4세 6효 2열이라 실렸다. 그 살던 곳을 “효동”이라 했다
丁艱廬墓當龍蛇之變誓死守墓敵感至孝不忍加兵 時値昏朝彛倫斁絶上疏通辯 醊享孝洞祠 執義李弘稷撰奉安文輿享祀祝文 事載「箕城誌」及「文獻錄」 四世六孝二烈 誌基居曰 孝洞
* 김장생(金長生) : 1548 ~ 1631, 본관 광산(光山). 호는 사계(沙溪).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를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1597년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 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한달 만에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0 | Ⅰ-6 승지 | 정설(鄭渫) 원결(元潔) (1547 ~ ?) | 1593년 나주목사(羅州牧使), 1597년 충청감사(忠淸監司) 광양 옥곡에 수월정 선축, 송강 정철이 섬진강상 수월정에 글을 남김 光陽玉谷選築水月亭於蟾江之上松江鄭先生序其亭 * 강항(姜沆)의 수월정 삼십영(水月亭三十詠)이 있음 |
10 | Ⅱ-4 정랑 | 정율(鄭嵂) 사앙(士仰) | 문장이 뛰어나고 덕행이 높아 사람들로부터 추앙받았다. 불행히 일찍 별세 하였다. 석천 안창이 공의 제문을 지었는데 뛰어났다
文章德行爲時推重 而不幸早卒 見 石泉安昶祭公文加徵
* 안창(安昶) : 1549 ~ ?,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竹山), 호는 석천(石泉), 자는 경용(景容)이다. 선조 때 관찰사를 지낸 안방경(安方慶)의 아들이며,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에 급제한 뒤 감역(監役)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 사건 때 부관으로 신문에 참여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올랐다. 1594년(선조 27)에는 별시(別試)에 병과 5등으로 급제하였다.
예조정랑으로 명나라의 유격(遊擊) 모국기(茅國器)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경상도 성주(星州)·합천(陜川)·고령(高靈) 등 고을에 주둔하면서 사자(士子)들이 모은 곡식을 취하여 마치 자신이 지휘하여 곡식을 모은 것처럼 모국기에게 속여 보고하였다. 이에 모국기가 조정에 자문(咨文)을 보내 군자부정(軍資副正)으로 승진되었으나 곧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1603년(선조 36) 그의 아들이 선조의 아들인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의 딸과 혼인하게 되어 회양부사·남양부사에 제수되었다.
1609년(광해군 1)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재임할 때 예전에 경상좌도의 경시관(京試官) 업무를 수행하면서 시험에 떨어진 답안지를 차지하여 목면(木綿)과 바꾸는 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유로 사헌부에서 파직을 건의하여 체직(遞職)되었고, 이듬해 낭청(郞廳)에 제수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는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한다는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금고형에 처하였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관직이 회복되었다.(두산백과) |
10 | Ⅱ-3 판서 | 정봉(鄭韸) 상고(尙古) 양정(養亭) (1577~1635) | 일찍 어버이를 여의어 해남에 이르러 종 이종형 귤옥 윤광계에 의지하였다. 문장과 성망이 높았다
1610년 생원(生員), 1626 영릉참봉(英陵參奉) 승훈랑(承訓郞) 승자 후 사퇴하고 다시 남쪽에 돌아와 시주를 즐기다
早失怙恃窮無所依 從姨兄尹橘玉光啓到南海仍家焉 文章盛望重於當世. 英陵參奉 陞資承訓郞肅謝後復歸南中詩酒自娛 洛中故舊張溪谷維 李白江敬輿諸公胎書責還終不歸還 |
10 | Ⅱ-9 성재 | 정현원(鄭玄源) 성윤(誠允) 초경당(苕蘔堂) (1609~1673) |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 정종환씨가 송시열 문인록에서 확인) 일찍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병자·정묘호란 이후 명청 교체기 애기만 나오면 통곡하였다. 8세에 맷돌에 대한 시를 읊기를 “대장장이 금방망이를 휘둘러, 구름 쪼개 높은 산을 바라보네! 한 쌍의 장수가 쓰러뜨리려 싸우네! 하늘과 땅이 서로 창을 부딪쳐 갈아버리네!” 하니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10세에 외가 집 형 동명 정두경으로부터 두시를 배웠다. 외형은 증시를 받고 “아우의 문장을 내가 쫓아 두시를 배워야겠다.” 했다, 유고가 남아 았다
早廢擧業 自丙丁亂後 語及崇禎間事 至於痛哭 八歲 詠磨石詩曰 “大匠揮金椎 披雲瞰嵂屼 二儀將欲坼 天地相磨戛” 皆驚異 十歲 學杜詩於外兄鄭東溟* 贈詩曰鄭弟文章氣從余學杜詩 有遺稿
* 정두경(鄭斗卿) : 1597∼1673) 조선 후기의 문인·학자.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회(晦)이며,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사헌부장령 이주(以周)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할아버지 지승(之升)과 증조부 담(imagefont), 종증조부 염(Ꜿ)·작(碏)은 모두 시인으로 이름이 났다.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1626년(인조 4) 문학으로 이름 있는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그는 벼슬 없는 선비로서 부름을 받아 김류(金瑬) 등과 함께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1629년 별시문과에 장원, 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북방의 호족(胡族)인 청나라가 강성하여지자 「완급론(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강화의 양론이 분분하자, 그는 10조(條)의 소를 올려 대책을 강조하고, 또 「어적10난(禦敵十難)」이라는 글을 지어 올렸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법편(法篇)」·「징편(懲篇)」 등 2편의 풍시(諷詩)를 지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임금이 하여야 할 절실한 도리를 27편의 풍시로 지어 올려 효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그 뒤 1656년(효종 7)에 「칠조소(七條疏)」와 「원이설(原理說)」을 지어 올렸다. 1669년(현종 10)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공조참판 겸 승문원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노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판서·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동명집』 26권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0 | Ⅱ-9 성재 | 정성원(鄭星源) 공지(供之) 자연정(自然亭) (1612 ~ 1675) | 병자·정묘호란 이후 대의를 쫓아 청주의 화곡촌에 집을 짓고 은둔하여 조용히 금서를 벗 삼아 살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 벼슬 한자리 얻으면 어찌 스스로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 유연자적하였다. 유고가 있다
丙丁亂後 秉執大義 就淸州山東禾谷村卜築 杜門靜居琴書自娛 嘗曰 “此時 得一官 寧不自愧於心” 悠然自適 有遺稿 |
10 | Ⅱ-9 성재 | 정광원(鄭廣源) |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 * 신독재공이 장인(丈人) 배 광산김씨(配 光山金氏) 父 신독재(愼獨齋)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祖父 사계(沙溪)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 * 김집(金集) : 1574∼1656, 호는 신독재(愼獨齋)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91년(선조 24)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사장학(詞章學: 시와 문장을 짓는 데 힘쓰는 학문)보다는 경전연구와 수양에 전념하였다. 1610년(광해군 2)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부여현감과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냈고, 그 뒤 전라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사직하였다. 이후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윤선거(尹宣擧) 등과는 상례에 대해 논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장생이 편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그 뒤 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사임하였다. 이에 태학의 유생들이 벼슬에 오래 머물도록 해달라는 소를 올리는 등 사람들에게 그의 덕망은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金尙憲)의 특청을 효종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653년(효종 4)좌참찬을 거쳐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경전연구와 수양에 힘썼다.
이이(李珥)의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禮學), 그리고 아버지 김장생(金長生)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그 학문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이 있고, 편저로는『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0 | Ⅱ-9 성재 | 정두원(鄭斗源) 하숙(下叔) 호정(壺亭) (1581~1642) 시호 敏忠 | 여헌 장현광의 제자(문인록에 실림)
생진구중(生進俱中), 광해군8년(1616년) 병진 문과 강원감사(江原監司), 개성유수(開城留守), 이조판서(吏曹判書), 호조판서(戶曹判書)
* 장현광(張顯光) : 1554∼1637, 호 여헌(旅軒), 시호 문강(文康)
본관 인동(仁同). 정부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한 산림(山林)에 꼽혔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이황(李滉)의 문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를 인정받았다. 류성룡(柳成龍) 등의 천거로 1602년(선조 35)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정부의 주역(周易) 교정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현령으로 부임한 것 외에는 모두 사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산림직으로 신설된 성균관 사업(司業)에 서인인 김장생(金長生) ·박지계(朴知誡)와 함께 선발되었다. 이후 장령으로 잠깐 상경하였을 뿐 이조참판 ·대사헌 ·우참찬 등에 모두 나아가지 않아서, 영남 남인 중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이 중앙에 진출하려 한 것에 대비된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의병과 군량의 조달에 나섰으며, 패전 후 동해안의 입암산에서 은거하였다.
사상적 특징은 유학의 입장에서 태극(太極)을 내세우되 일체유(一體儒)와 그 근원을 대대(對待)와 조화의 논리로 융화 종합하는 철학적 근거를 명시하였다는 데 있다. 문집으로 《여헌집》이 있고 《성리설(性理說)》 《역학도설(易學圖說)》 《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의 저서가 있다. 류성룡 ·정경세 등과 더불어 영남의 수많은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두산백과) < 호정공이 쓴 여헌공 제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