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를 통해 살펴 본 백두대간
김병기(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전임연구원)
1. 우리나라의 고지도
1) 삼국시대
우리나라 고지도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난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전 고려조에 의하면 '정관2년 파돌궐 서리가한 건무견사봉하 병상봉역도(貞觀2年 破突厥 署利可汗 建武遣使奉賀 幷上封役圖)'라 하여 고구려가 당에 봉역도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고구려가 일찍부터 지도를 제작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에는 「백제지리지」가 있었으며 이는 『후한서』『북사』『통전』『신·구당서』『삼국사』『고전기(古典記)』등을 이용하여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주1 : 『삼국유사』기이 제2 남부여 전백제조(『三國遺事』 紀異第二 南扶餘 前百濟條))
신라에도 일찍부터 지도가 사용되었던 기록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1년(671) 7월조에 의하면 '김순흠이 당에서 돌아와 장차 경계선을 획정하려함에 지도를 상고하여…'라 하여 신라가 백제의 옛 땅을 포함한 경계를 획정하는데 지도를 사용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이래 싫증적인 지도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때 이미 지도를 작성한 것은 물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2) 고려시대
신라말 도선에 의해 일기 시작한 풍수지리설은 이후 고려시대 지리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풍수지리 사상은 조선시대에 이어져 지도상에 내맥(래맥)을 따져 사용한 것도 그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목종 5년(1002)에는 고려지도를 거란에 보낸 기록이 있으며(주2 : '내공본국지리도(來貢本國地理圖)'『요사』외기 고려전(『遼史』 外紀 高麗傳)참조), 여말선초에 살았던 이회(1345 ~ 1405)의 「삼국도후서」에 고려도를 소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즉 산줄기는 백두산 - 철령 - 풍악 - 태백산 - 소백산 - 죽령 - 계림 - 삼하령 - 추양산 - 운봉으로, 또한 강줄기는 살수·패강·벽란·임진·한강·웅진(이상 서해), 가야진(남해)으로 표기하여 오늘날 백두대간의 주요 산줄기와 그로부터 강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주3 : 방동인 『한국지도의 역사』신구문화사. 2001. 33 ~ 34쪽에서 재인용)
3) 조선시대
조선 초의 지도로는 이회의 <팔도도>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가 그렸다는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일명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주4 : 이 지도의 16세기 모사본이 현재 일본 쿄토 나라현의 류코쿠(龍谷)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라는 세계지도에서 그의 <팔도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오던 고려지도들이 저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도의 특징은 하천과 산맥의 표시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인데, 산악을 개별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하계망(하계망)과 관련시킨 산맥으로 표시한 것은 이회의 새로운 지도제작 기법이다. 이러한 산맥표시법은 후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세조 9년(1463)에는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에 의해 <동국지도>가 완성되었다. 이 지도는 현재 전하여지지 않으나 고려 이후 현존하던 지도를 종합하면서 세종대의 발달된 과학기기로 실측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당시로는 가장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였을 것이라고 한다.(주5 : 방동인, 『한국지도의 역사』, 85쪽)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리지로는 『동국여지승람』이 있다. 이것은 도(圖)와 지(誌)를 함께 편집하여 지리지로서의 새로운 체계를 완성하였다. 즉 팔도총도와 각 도의 첫 머리에 해당 도의 전도가 1장씩 들어 있어 모두 9장의 지도가 삽입된 것이다. 이러한 지리서의 개념은 조선 말까지 계속되어 조선지리지의 한 전형을 이루었다.
그 후 정상기에 의해 <동국대지도>가 새로운 제작법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그 특징은 1) 백리척을 사용한 축척의 비에 따라 그려졌으며, 2) 지도표 범례를 설정하는 등 세밀하고 정확한 실제 지도이다.
조선시대 고지도를 근대지도로 발전시킨 이는 고산자 김정호이다. 물론 그의 지도계통은 조선 초 이회의 <팔도도>에서 시작되어 정척과 양성지의 <동국지도>로 계승되고, 다시 조선 후기 정상기의 <동국대지도>로 발전하여 <대동여지도>에 이르러 그 완성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대동여지도>는 산줄기의 내맥을 명료하게 나타냄으로써 행정구역의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 면에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전통지도의 도법을 따라 우리의 역사·문화·풍속·언어 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지도라 할 수 있다.
2. 백두대간에 의한 지리인식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비롯하여 지리산까지 우리 땅의 골간(骨幹)을 이루며 이어온 산줄기이다.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조선시대이래 우리 민족의 자연지리 인식 체계를 이루는 주요한 사상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사실에 기초하여 지리서를 쓰고 지도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백두대간의 인식은 고려사에 보인다. 공민왕 때의 사천소감(司天少監)이던 우필흥(于必興)이 도선의 『옥룡기(玉龍記)』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지세)는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리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가 물의 근원 나무의 줄기와 같은 땅이다…"(주6 : '我國始于白頭山終于智異其勢水根木幹之地…'(『고려사』, 세가 공민왕 6년 9월조))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비록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백두대간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조선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1751)에서 '대간(大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익은 『성호사설』(1760년 경) 백두정간론에서 처음으로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1800년 경 신경준의 『동국문헌비고』여지고를 저본으로 한 『산경표』가 만들어지면서 '백두대간'을 비롯하여 '정간', '정맥'의 용어들이 족보식으로 체계화되고 도표화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1861)에서 산경표의 체계를 지도에 정확하게 나타내어 시각적으로 산줄기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 체계화하여 정리되었던 '백두대간'의 전통적인 산줄기 인식은 190 - 1904년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少藤文次郞)와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矢津昌永)에 의해 오늘날의 산맥 계통도와 유사한 산맥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교과서에 채용되어 일제침략시기 동안 사용된 것이다. 1913년 조선광문회가 『산경표』등 전통지리서를 간행하여 왜곡된 역사지리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일제에 의하여 산경표에 의한 전통적 지리인식은 이 당에 사라지고 산맥 개념만 남아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3. 산경표에 나타난 지리개념의 적용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지리환경의 중요성이 많이 퇴색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모여 사는 취락과 생활환경은 지표상의 자연환경적 유형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역사·문화·정치·경제·사회·풍속·언어 등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우리의 산경표와 대동여지도는 땅위에 실재하는 산줄기와 물줄기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디 때문에 우리의 역사 문화를 이해하는 합리적이고 유용한 지리개념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산경표에 기재된 산줄기의 주향(走向)과 대동여지도의 주향은 거의 일치한다. 반면 현재의 '산맥'주향은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의 지질 구조선에 의해 작성되었기 때문에 하천 중심으로 파악한 대동여지도의 산줄기 주향과는 서로 다른 것이다.
백두대간으로 대표되는 산경표에 나타난 전통적인 산줄기 분류체계는 이 땅에 살아 숨쉬었던 우리 민족의 역사·문화와 풍속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물줄기로 인하여 문화와 생활권이 연결되고 산줄기로 인하여 문화와 생활권이 단절되는 수많은 싫증들이 우리 역사 문화 풍속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게 된다. 이는 '산맥'개념과는 달리 정확하고 싫증적으로 우리 문화·풍속을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싫증은 이미 많은 역사학들자에 의하여 밝혀져 왔다. 예컨대 조선후기의 동학농민 전쟁이나 의병전쟁에 있어 전개되었던 각 부대의 이합집산과 연대(連帶)는 이러한 산경표 개념의 지리인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 제2차 동학농민전쟁 전개양상은 1차 때와 달리 전국적 봉기로 확산되었는데 몇 개의 권역으로 봉기지역을 나누어 열거하고 있다. 즉, 전라도의 광주·나주건, 장흥·강진권, 남원·운봉·담양·곡성·구례권, 순천·광양·하동권이 그것이며, 2차 봉기 때 치열하게 전개되는 경상도 지역으로는 상주·예천·고성·진주·곤양권, 충청도의 목천·천안권, 예산·홍성·서산·당진·태안권, 충주·단양·제천권, 부여·한산·서천권, 청주·옥천·보은·영동권, 회덕·진잠권, 금산·진산권 등이 그것이다.(주7 : 박맹수, 「동학농민전쟁」,『한국든대사강의』, 한울, 1997, 154 - 155쪽)
이러한 봉기권역은 대체로 산경표나 대동여지도의 전통적 산줄기에 나타나는 동일 문화권·생활권에 속하는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조선 초의 학자 성현(成俔)은 『허백당집(虛白堂集)』「기강릉원주풍속(記江陵原州風俗)」에서 강원도 강릉과 원주를 비교하여 강릉과 원주는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지리환경적 차이 때문에 풍습과 관습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관동지방은 강릉과 원주를 큰 고을로 꼽을 수 있는데, 이 두 고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풍속이 매우 다르다. …나는 아무리 그 원인을 찾아보았으나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지방을 직접 찾아본 뒤에야 비로소 산천의 기질이 사람의 정서를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백두대간이라는 험준한 준령을 사이에 둔 두 고을의 문화 풍속의 차이를 말하는 것으로 산경표나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산줄기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그밖에도 고대 삼국시대의 한반도 강역, 천리장성의 수축, 충청북도 청주와 충주의 생화권역, 보부상들의 상권역. 판소리나 농악의 지역분류, 두만강을 넘나들던 홍범도 의병의 행로 등 우리의 고지도에 나타난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펼쳐진 산줄기 물줄기를 파악하지 못하면 우리 역사 문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주8 : 여기에 관하여는 조석필의 『태백산맥은 없다』(사람과 산, 1997)를 참고할 것. 이러한 역사 문화에 대한 싫증적인 고찰은 학자들에 의하여 심도있게 연구되어야 할 과제이다.
4. 앞으로의 과제
1) 우리 역사지리 개념, 풍속 문화의 이해는 산경표와 대동여지도로 대표되는 고지도의 지리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우리 역사·문화 현장에서 이러한 지리 개념이 어떻게 수용되고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하는 사례들을 비교 분석하는 싫증적 노력들이 필요하다.
2) 산경표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수정하고 보완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3) 북한 지역의 산줄기에 대한 실제적 도상적(圖上的) 접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남북연대의 학술조사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4) 청조의 제 4대 황제인 강희제는 백두산을 청조의 발상지로 받들면서 백두산이 황해를 건너 중국의 명산 대산이 태산(泰山)을 이루었다는 이른바 태산의 장백산 지맥설을 주장한 바 있다. 이와 같이 백두산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여러 민족이 성산으로 받들어 왔다. 이제는 한방도 방향의 산줄기만이 아니라 만주방향의 산줄기와 물줄기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지역은 우리 고대사를 복원할 때 중요한 영역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백두대간에 대한 자연환경, 생태계의 복원 보존 문제는 개발과 보존이 균형있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학제간의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6) 백두대간의 교과서 수용문제는 시급한 일이기도 하지만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우선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지리개념을 적극 소개하고 우선은 병기(幷記)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 이 資料는 안강님의 백두대간 첫마당에서 옮겨온 資料이며 자료를 사용하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자료를 使用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안강님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