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햇볕이 작렬하는 상하이의 무더운 여름, 습도가 높아 하루 종일 끈덕진 기분이 가시질 않는 마(魔)의 날씨. 그나마 무더운 여름을 견딜 수 있는 건 한 여름 밤 시원하게 즐기는 맥주 한 잔, 하루의 피로와 더위를 잠시 저 멀리 날려버리는 그 청량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맥주 전문점에서만 마실 수 있었던 비싼 칭다오 맥주가 한 병에 1,000원도 안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중국을 방문하면 칭다오 맥주를 찾는다. 도대체 칭다오 맥주는 어떻게 이렇게 유명해졌을까?
19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세계 열강들의 각축이 한창이었다. 1894년 미국의 중재로 인해 청·일 전쟁이 중단되고 일본은 승전의 대가로 거액의 배상금과 함께 랴오둥 반도(辽东半岛)와 타이완섬(台湾)을 할양 받게 된다. 만주로의 진출과 함께 랴오둥 반도에 위치한 부동항을 노렸던 러시아는 이로 인해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3국이 이에 간섭하며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된다(3국간섭). 이를 계기로 유럽 열강은 청나라를 선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진출한 지역을 조차지로 요구하기에 이른다. 1897년 독일군이 쟈오져우만(胶州弯)에 군대를 파견해 상륙하기에 이르고, 칭다오(青岛)는 독일군의 조차지가 되고 만다. 점령군과 함께 뒤따라 들어오는 독일인들이 즐길 수 있는 맥주를 만들기 위해, 독일 상인과 영국 상인은 합작으로 ‘로망(日尔曼) 맥주 청도주식회사’를 설립한다.
공장을 설립한 1903년 당시 연 생산량은 2,000톤에 달했으며, 생산설비와 원료는 모두 독일에서 직접 가져온 제품을 사용했다. 5도에서 14도에 걸친 옅은 맥주와 흑맥주를 주로 생산했고, 여기에서 생산한 맥주는 칭다오를 비롯해 상하이와 톈진, 다롄 등지에서도 판매되었다. 공장이 정식 설립되고 몇 해가 지나지 않아 1906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맥주 세계 박람회에 참가해 금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칭다오 맥주는 처음으로 자신의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게 된다.
1914년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 이후, 칭다오의 주인은 다시 한 번 일본으로 바뀌게 된다. 1916년 9월 16일 일본의 ‘대일본 밀주 주식회사’가 당시 돈 50만 은화를 투자해 칭다오 맥주 공장을 인수하고, 같은 해 12월 다시 정식 맥주 생산을 시작했다. 일본은 칭다오 맥주 공장을 대규모 증축하는 한편, 1939년 밀 제조 작업장을 만들어 샨둥(山东)지역에서 수확한 보리로 양조한 맥주를 시범 제작하는 등 맥주 제조의 명맥을 이어나가게 된다.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 패망국이 되면서 칭다오 맥주는 국민당 정부군의 손에 넘어갔고, 이에 따라 비로소 ‘칭다오 맥주회사(青岛啤酒公司)’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된다. 1947년 치루기업주식유한회사(齐鲁企业股份有限公司)가 다시 공장을 인수해 ‘칭다오 맥주 공장(青岛啤酒厂)‘이라고 이름 짓게 된다.
마오쩌둥 통치 하의 문화 대혁명 시기, 칭다오 맥주 공장은 또다시 ‘국영 칭다오 맥주 공장(国营青岛啤酒厂)’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중국 정부의 지원 하에 칭다오 맥주는 중국 수출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며 전체 맥주 수출의 98%를 차지하며 꾸준히 그 명맥을 이어간다. 그리고 중국의 개혁개방을 알린 1979년 이후, 국가의 생산정책에 따라 칭다오 맥주 공장은 발전을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1981년 중앙 정부와 국무원 지도하에 국가 계획위원회, 수출입 위원회, 재정부가 4,551만 위안을 투자해 연간 10만톤 이상 생산이 가능한 시설로 증축을 결정한다.
1986년 증축 이후 연 맥주 생산량은 10만톤을 넘기게 된다. 국가 계획위원회는 추가로 4,998만 위안을 투입, 칭다오 맥주의 발전을 가속화하기에 이른다. 1991년에는 연 10만톤 생산 규모의 ‘칭다오 맥주 2공장’을 설립하고 3,4공장의 추가 시공도 이루어진다. 1992년 말 칭다오 맥주 전체 공장의 연 생산량은 24만톤을 기록하며 중국시장 넘버원 자리를 굳건히 한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칭다오 맥주 역시 다른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브랜드 홍보를 위한 다양한 마케팅 채널을 활용하기 시작한다. 2005년 베이징 올림픽 스폰서로 선정된 이후, NBA와의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며 본격적인 스포츠 마케팅을 펼친다. 중국 내 NBA를 비롯한 농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만큼 대단하다. 칭다오 맥주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2008년 정식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NBA 스타 초청과 치어리더 선발대회 등 이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모션을 선보이며, 세계 최고의 농구 스타의 경연장인 NBA처럼 칭다오 맥주 역시 최고의 맥주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주식 상장과 확장
1993년 7월 15일, 칭다오 맥주는 홍콩증시에 상장을 하게 된다. 이는 중국 내륙기업으로는 최초로 해외 상장에 성공한 케이스로, 한 달 뒤인 1993년 8월에는 상하이 증시에 상장을 하며 점차 규모를 확대해간다. 칭다오 맥주는 홍콩과 중국 대륙 증시에 처음으로 동시에 상장된 기업으로 기록된다.
주식시장 상장을 바탕으로 칭다오 맥주는 날개를 달고 중국 시장 점령을 위한 행보를 지속한다. 2009년 같은 기간과 비교했을 때 2010년 한해 누적 판매량은 635만㎘를 기록하며, 2009년에 비해 7.4% 증가한 수치를 나타낸다. 같은 해 총영업수익 196억 위안과 순이익 15억 위안을 기록하며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맥주 관련 보고서인 Barth Report는 칭다오 맥주를 세계 6대 맥주 브랜드로 선정하는 등 칭다오 맥주는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브랜드로 도약하고 있다.
칭다오 맥주, 이제는 세계로
2011년 10월 17일, 칭다오 맥주는 방콕에서 태국공장 설립 조인식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칭다오 맥주 진즈궈(金志国) 대표는 “지리적, 사회적으로 동남아시아 시장 진입을 위한 최고의 위치로, 개방적인 투자환경과 기후로 인해 1년 내내 맥주소비가 많은 점, 태국 신흥시장의 거대한 시장수요에 근거해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태국을 해외진출 전초기지 1호로 삼았다”고 전했다. 칭다오 맥주가 중국 내수를 넘어 이제는 세계로 그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1978년 미국의 모나크(MONARCH)사가 칭다오 맥주를 런칭하며 칭다오 맥주는 해외시장으로 향하는 첫 단추를 끼운다. 해외 진출 첫 해 2만 박스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수월한 세계시장 입성을 알린다. 1992년까지 칭다오 맥주는 미국에 수입된 아시아 맥주 판매량 가운데 25% 이상이라는 시장 점유율을 올리고,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맥주 브랜드 9위에 랭크되며 아시아 맥주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는 저력을 뽐내게 된다.
2014년 현재 세계 50개국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중국 맥주 수출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칭다오 맥주는 세계 3대 맥주기업 진입을 목표로 삼고 유럽, 북미, 동남아를 3대 주력시장으로 활발한 해외시장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