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슬픈 역사 단종애사(端宗哀史)<2>
낙화암(落花巖)
단종이 승하(昇遐)하자 그를 모시던 시녀(侍女)와 시종(侍從)들이 한달음에 달려가 동강 절벽에서 뛰어내려 꽃잎처럼 목숨을 바쳤는데 이들이 투신할 때의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하여 그곳을 낙화암(落花岩)이라 불렀다.
관풍헌(觀風軒)은 영월의 관아로 동헌(東軒)이었던 곳인데 홍수가 나자 강변인 청령포에 기거하던 단종은 이곳에 와서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관풍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강변의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현재 동강 옆에 조성된 금강공원에는 낙화암이란 비문을 새긴 작은 비석과 낙화암에서 단종의 뒤를 따라 목숨을 바친 시녀의 위패를 모신 사당 민충사(愍忠祠)가 당시의 슬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충신(忠臣) 엄흥도(嚴興道)
동강(東江) 하천변에 방치돼 있던 단종의 시신(屍身)은 손을 대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공포(公布)로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의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수습해 영월 북쪽 5리 지경에 있는 동을지(冬乙旨)에 암장(暗葬)하고 일가족 모두 자취를 감춰버린다.
엄흥도는 집안의 안위(安危)보다도 단종의 애달픈 죽음이 가슴 아파 집안의 몰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충신(忠臣)으로서의 도리를 지킨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호장-나라에서 수령(首領)을 파견하지 않은 고장의 행정을 총괄하던 사람
단종 왕릉 장릉(莊陵:사적 196호)
이후 조선 19대 숙종(肅宗)때인 1698년에 이르러서야 단종을 왕으로 복위(復位)하고 왕릉(王陵)으로 정비하면서 묘호(廟號)를 단종(端宗), 능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장릉 주위의 소나무들은 모두 능을 향하여 절을 하듯 굽어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자아내게 한다.
매년 4월 마지막 주말에 단종문화제가 성대하게 거행되며, 특히 조선시대 국장(國葬) 재현행사는 1천명이 넘는 인원들이 참가하여 장엄하게 재현되는데 2009년에는 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世界遺産)으로 등재되었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청령포 광천리(廣川里) 수림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는 노송이 있는데 유배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 본 소나무라고 한다. 단종의 슬픈 종말을 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 때때로 구슬피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소리 음’(音)을 붙여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하송리(下松里)에 있는 수령(樹齡) 1.000년이 넘는 은행나무도 있는데 천연기념물(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릉 앞에 있는 영천(靈泉)은 우물로 장릉에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제정(祭井)인데 평소에는 물이 잘 나오지 않다가 제례를 올리는 한식(寒食)이 되면 샘이 풍부하게 솟아 나온다고 하는 영험한 샘이다.
근처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비롯한 영령들에게 매년 제사를 올리는 제단인 배식단(配食壇),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丁字閣)도 있는데 한자의 고무래 정(丁)자처럼 지어진 건물이라 하여 정자각(丁字閣)이라 불리는데 흡사 영어의 티(T)자를 닮은 정자각의 모양이 이채롭다.
그리고 단종의 비석을 모신 단종비각(端宗碑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도 모두 장릉 경내에 함께 있고 능(陵) 입구에는 홍살문(紅門)이 서 있다.
또, 엄흥도 정려각(嚴興道 旌閭閣)과 박충원(朴忠元)의 낙촌비각(駱村碑閣)도 함께 있는데 엄흥도 정려각은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둔 충신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문(旌閭閣)이고 낙촌비각(駱村碑閣)은 산속에 암장(暗葬)되었던 단종의 시신(屍身)을 찾아 장릉(莊陵)에 모신 영월의 군수 박충원 비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