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의 역사
지금까지 우리는 마야의 역사를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살펴보았다.
마야 지역은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로 알려진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권의 일부였다.
메소아메리카는 멕시코 중부에서 온두라스까지로,
유럽인들이 도래하기 전까지 신세계에서 두 중심지의 하나로 군림햇던 지역이다.
(다른 하나는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을 따라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마야는 메소아메리카의 다른사회들과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지닌다.
유럽 문명에 길들여진 유럽인들에게는 놀랍겠지만 메소아메리카 사회에는
금속 연장, 도르래를 비롯한 기계장치, 바퀴(지역적으로 장남감 바퀴는 눈에 띈다), 돛단배,
짐을 끌거나 밭을 가는데 필요한 큰 몸집의 가축들이 없었다.
마야의 웅장한신전들은 모두 돌연장과 나무 연장, 그리고 순전히 인력으로만 세워진 것이다.
마야 문명의 많은부분은 메소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예컨대 메소아메리카의 농업과 도시, 그리고 문자는 처음부터 마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부와 남서부의 해안 저지대와 골짜기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옥수수와 콩과 호박은 기원전 3000년경에 개량되어 중요한 먹을 거리가 되었고,
도기는 기원전 2500년경에 처음 만들어졌다.
마을은 기원전 1500년경에 형성되었고, 도시는올멕 문명에서 기눙전 1200년쯤에 세워졌다.
문자는 기원전 600년경, 혹은 그 이후에 오락사카의 사포텍족이 처음 사용한 듯하다.
최초의 국가는기원전 300년경에 나타났다.
또한 상호 보안적 관계에 있는 두 역법(曆法), 즉 365일의 태양력과 260일의 종교력도
마야 밖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물론 마야인들이 고안해서 수정하며 완벽하게 다듬어간 부분들도 적지 않았다.
마을과 도기가 마야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때는 기원전 1000년경이었고,
실질적인 건물들은 기원전 500년경에 세워졌으며, 문자는 기원전 400년경에처음 쓰였다
약 1만 5,000개의 비문에 남겨진 옛 마야의 문자는 모두 돌판이나 도기에 씌어져 있으며,
완과 귀족 그리고 그들의 업적만을 다루고 있다(사진 13)
평민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없다.
에스카냐인들이 도래했을 때 마야인들은 회를 입힌 '바크 페이퍼(bark paper)'에 글을 썼다.
란다 주교의 분서(焚書)를 면한 네 권은 천문학과 역법에 대한 논문이었다.
옛 마야인들은 이런 바크 페이퍼 책들을 소장했고 도기에 글을 남기기도 했지만
일부만이 썩은 채로 무덤에서 간혹 발견될 뿐이다.
마야의 유명한 장기계산역법(Long Count calendar)은 기원전 3114년 8월 11일에 시작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날이 기원후 1년 1월1일인 셈이다.
우리 역법에서도 첫날이 갖는의미는 크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마야인들도 첫날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 의미에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장기계산 역법은 마야 지역에서는 기원후 197년,
마야 지역 밖에서는 기원전 36년에 세원진 기념물에서 처음 언급되면서
첫날이 기원전 3114년 8월 11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당시 신세계에는 어디에도 문자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2,500년이 지나서야 문자가 처음 나타났다.
우리 역법은 일(日), 주, 달,년,10년,100년 단위로 나누어진다.
가령 내가 이 구절을 썼던 2003년 2월19일을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세 번째 천년 시대의 첫 세기에서 첫 10년의 세 번째 해 중
두 번째 달의 19번째 날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마야의 장기계산역법에서는
일('킨'), 20일('우이날'), 360일('툰'), 대략 20년에 해당하는 7,200일(카툰'),
그리고 대략 400년에 해당하눈 14만 4,000일('바크툰')의 단위로 날짜를 계산한다.
마야의 역사적 존재 시기는 바크툰 8,9,10에 해당된다
마야 문명의 고전기는 바크툰 8, 즉 기원 후 250년경에 시작되었다.
첫 왕들과 첫 왕조들이 나타난 때이다.
마야 기념물에 남겨진 그림문자들에서, 마야의 문자를 연구하던 학자들이 수십 개의 문자를 구분해냈다
각 문자가 지역별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각 문자는 왕조나 왕국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야에서 왕은 이름을 형상화한 그림문자와 궁전을 가졌다.
많은 귀족들도 자체의 비문과 궁전을 갖고 있었다.
마야 사회에서 왕은 천문과 역법에 따른 제식을 주관하는 대제사장 역할을 겸비했다.
따라서 비와 번영을 백성에게 안겨줄 책임이 있었다.
왕들은 신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서 비를 부르고
백성에게 번영을 안겨줄 수 있는 초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서로 암묵적으로 주고 받은 것이 있었다.
요컨대 농부가 왕과 궁전의 화려한 삶을 지원하며
옥수수와 사슴고기를 바치고 궁전을 짓는데 노역을 제공한 이유는
왕이 그들에게 큰 약속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뭄이 닥치면 왕이 약속을 깬 거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왕과 농부들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250년 이후. 마야의 인구(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집터의 수로 추정한 인구), 기념물과 건물의 수,
기념물과 도기에 기록된 장기계산역법으로 계산한 날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8세기경에 최고치에 이르렀다.
가장 웅장한 기념물들은 고전기 말에 세워졌다.
9세기에 들면서 사회의 지표라 할 수 있는 세 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장기계산역법으로 계산되어 기념물들에 남겨진 마지막 날은 바크툰 10, 즉 909년이었다.
인구, 건축, 장기계산역법의 하락은 곧 고전기 마야의 붕괴를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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