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 사적비명
진주강씨 자료방
2016. 7. 29.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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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 강씨 시조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
우리나라 진주 강씨는 고구려 때 수나라를 물리친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다.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姜以式) 장군은 고구려 도원수를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581년 수나라 문제 양견이 황제에 등극하고 589년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 수나라는 국력을 과시하고자 고구려에 신하의 예로써 분수를 지키라는 모욕적인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도발하였다. 이에 대노한 영양왕은 신하들과 답서를 보낼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강이식 장군은 “이같이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화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화답해야 할 것입니다”며 전쟁을 벌일 것을 주장하여 영양왕은 수나라와의 전쟁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하여 598년 강이식 장군을 병마 도원수를 삼아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을 선제공격하게 하였다. 강이식 장군은 임유관 공격에 앞서 먼저 말갈 군사 1만명으로 하여금 요서에 침입하여 수나라의 군사를 유인하였고, 또 거란 군사 수천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山東)을 공격하게 하여 수나라와 본격적인 전쟁을 벌였다.
이듬해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를 공격하여 영주총관 위충과 접전을 벌이다가 패한 척 하며 퇴각을 하자,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모아 넷째 아들 한왕 양량(楊諒)을 총사령관인 행군대총관에 임명하여 육군을 통솔하게 하고, 주라후(周羅睺)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바다로 진격하게 하였다. 주라후는 평양으로 진격한다는 헛소문을 퍼트렸지만, 실제 수군의 목표는 육군의 보급이 목적이었다.
강이식 장군은 주라후가 양선(糧船)을 이끌고 요해(遼海)에 이르러 임유관으로 진격하는 양량에게 군량미를 보급하기 위한 속임수임을 미리 탐지하고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즉각 요격하여 주라후의 양선을 격파하니 수병은 군량미 보급이 끊어지고, 또 6월의 장마를 만나 기근과 질병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 후 수나라 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하고 강화를 맺고 상품 교역을 재개하였다. 십수년이 지난 뒤 수 문제의 아들 양제(煬帝)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612년(영양왕 23년) 고구려를 재침공하자 강이식 장군이 수륙양군(水陸兩軍)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고, 왕제(王弟) 건무(建武)는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아 이에 대항하였다.
한편 수양제는 단숨에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별동대 30만 5천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키자 을지문덕은 거짓 패하여 적을 평양성 북쪽 30리 까지 유인하자 속은 것을 알고 회군하다가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대패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나라는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강이식 장군의 묘소는 만주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으며 봉길선(奉吉線) 원수림 역전(元帥林驛前)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 이란 큰 비가 있었다고 하나, 중국 문화혁명 당시 소멸되었고 현재 묘역(墓域)은 밭으로 개간되었고 묘지(墓趾)에는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남아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저서 조선상고사 제9편 고구려 대수전(高句麗對隋戰)에서는 강이식 장군이 고구려의 병마원수로 임유관에서 수나라 군대를 전멸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야승적(野乘的)인 사료이긴 하지만 ‘서곽잡록’ 과 ‘대동운해’ 등의 예를 들어서 강이식 장군의 전쟁 기록을 수록한 것이다.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의 전공과 유덕을 기리는 사당이 바로 진주 봉산사이다. 봉산사 경내에 사적비가 서있다. 사적비명은 1977년 3월 1일 노산 이은상 박사가 짓고 일중 김충현 서예가가 썼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 사적비명
진주는 삼한이래의 옛 고을이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영남의 명승지인데 고을의 진산인 비봉산 남쪽 기슭 만인이 우러러 보는 곳에 높이 지은 사당은 고구려 시대에 수병을 무찔렀던 민족의 영웅 강이식 장군을 모신 봉산사이다.
대대로 전한 옛터에 사당을 처음 세운 것은 선조 3년 서기 1570년이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무너졌던 계사년 서기 1593년에 불타 버렸다가 백여 년 후 숙종 40년 서기 1714년에 중건했으나 순조 때 또 타버리고 뒤에 다시 개축이건을 거듭한 나머지 이같이 장엄한 새 집을 이루어 놓았다.
진주강씨 시조님이신 강이식 장군은 고구려 병마도원수군을 지내며 많은 전공을 세우신 분이시다.
사당에 올라 옷깃을 여미고 참배한 다음 물어나 옛 역사를 멀리 상고하건대 우리 민족은 일찍이 백두산 흑룡강 1만리 평야위에 나라의 첫 터전을 열고 유구한 세월을 거쳐 오면서 민족으로서의 집단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대륙의 침략세력에 대항하여 피로서 싸우기에 편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한무제가 수륙으로 군사를 이끌고 와 침공했을 때 희생된 이가 얼마였던지 강토의 일부일망정 저들에게 빼앗겨 소위 한사군의 설치를 보았던 것이나 400년 동안 끈질긴 항쟁 끝에 고구려 사람의 손으로 수복하고야 말았었다.
대륙의 세력이 바뀔 적마다 그들의 새로운 야망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기에 일찍 공손씨 또 혹은 위구와도 싸우면서 장렬한 유혈을 아끼지 아니했으며 마침내 수, 당 양조 오제 70년 동안 인원 7백만 대군의 침략을 겪으면서 매양 그들을 물리친 민족의 의기는 우리들의 혈관 속에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 옛날, 우리 고구려는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을 무대로 하고 일어선 뒤 만주와 연해와 서로 요하 유역에까지 세력을 퍼갔던 대 강국이었고 다른 한편 중원 대륙에서는 수문제 양견이 일어나 남북조를 통일시킨 다음 그의 세력을 멀리 몽고와 서역에까지 뻗어나갔던 막강한 제국이었으므로 서로의 충돌을 피할 수 없어 드디어 민족항쟁이 벌어지고야 말았던 것이다.
평원왕 마지막 해 32년 서기 590년에 수문제가 남조진을 평정하자 일찍부터 진과 친선관계를 맺어왔던 고구려로서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어 평원왕 다음 영양왕이 즉위하여 두 나라 사이의 충돌을 미리 내다본 나머지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확충하며 군량을 비축하기에 모든 힘을 다하던 중 수문제로부터 고구려를 협박하는 내용의 무례한 국서를 보내왔던 것이니 그 국서의 내용은 진작 삼국사기 평원왕 마지막 해본기에 실려 있음을 본다.
영양왕은 모욕적인 국서를 받고 군신을 불러 모아 회답할 말을 논의했을 때 강이식 장군이 글로써 대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대답하자고 주장하므로 영양왕도 거기에 찬동하여 왕의 9년 수문제 개황 18년 서기 598년에 장군을 병마원수로 삼아 정병 5만을 이끌고 임유관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말갈병 1만 명으로 지금의 만리장성 서쪽 요서로 나아가 요서총관 위충의 군사와 접전하여 임유관, 곧 산해관으로 수병을 유인했다.
수문제는 한왕 양량과 왕세적을 행군원수로, 주라후를 수군총관으로 하고 수육군 아울러 30만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고저 요동을 향했으나 수의 육군은 요서의 유성까지 나왔으나 장마를 만나고 군량도 떨어졌으며 주라후의 수군은 산동성 동래에서 출병하여 바다를 건너 평양을 향하다가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 파선 혹은 표류로 요수를 건널 수도 없었거니와 실상은 강 장군이 벽루를 지켜 항전하고 수군을 풀어 거의 전군을 격침시켜 수병은 30만 명 중에서 열의 여덟, 아홉을 잃어버리고 9월에 헛되이 돌아가니 이것이 수와의 제 1차 전쟁이었던 임유관 전투로서 강 장군의 큰 공적이었다.
그러나 전쟁기록은 역사책에 적혀있으면서도 강장군의 성명은 적히지 않아 우리 모든 국민들은 천수백년이 지나도록 그의 사적을 아는 이가 없더니 국사학계의 태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에 처음 밝혀냄으로써 민족적 영웅의 이름과 업적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흔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단재는 그의 저서 속에 서곽잡록과 대동운해 등 두 가지 문헌을 인용했는데 잡록에는 임유관전투 때 병마원수로 운해에는 살수대전 때 병마도원수로 각각 달리 적혀 있는 중에서 단재는 서곽잡록의 기사를 좇는다고 말하면서 임유관 전투로부터 13년 뒤 수양제 때에 일어난 제 2차 살수대전 때에는 왕제 건무가 해군을 맡고 을지문덕이 육군을 맡아 있었기 때문이라 했었다.
물론 그같이 희귀한 문헌을 발굴해낸 단재의 견해를 따라야만 하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제 1차 임유관 전투 대 병마원수로 지휘했던 강 장군이라 제 2차 살수대전 때에는 병마도원수로 지휘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구태여 장군의 지위를 따져야 할 필요를 느끼기 보다는 그 때에 그 같은 민족적 대 영웅이 계셨던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리고 수문제 뒤 양제 양광이 대업 8년 영양왕 23년 서기 612년에 2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쳤다가 참패한 제 2차 살수대전 역사는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고 사기에 자세히 적힌 바라 재록하지 않거니와 강씨세보에 의하면 본시 장군의 묘소가 고구려 삼양현 원수림에 있다고 했고 지금도 만주 봉길선 원수림 역전에 병마원수강공지총이라는 큰 비가 있어 수십 년 전까지도 여러 후손들이 참배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세상에 역사란 오래 지나면 희미해지기도 쉽고 잃어버리기도 쉬운 것이다. 장군으로써 강씨 시조를 삼아 왔으면서도 자세한 사적을 전하지 못하고 뒷날 신라말엽에 태중대부판내의령을 지낸 휘진은 시호가 정순공이요 진양후로 봉한 어른이라 그로부터 진주로써 강씨의 본관을 삼게 되었거니와 장군으로부터 1300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여러 지파로 나뉘었으니 각파 역대를 통하여 문무장상으로 무수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므로 여기에 세운 봉산사는 다만 강씨 일문의 영광이 아니요 민족 전체의 자랑이라 우리 모두 민족의 영웅 앞에 예배하고 의기의 전통을 이어받아야 할 것이다. 해같이 영롱한 민족의 영웅이며 역사의 구름 뒤에 그 모습 가리웠다 나타나 환하시오니 더욱 눈부십니다.
임유관 싸움터에 요하의 파도 속에 수병 삼십만을 쓸 듯이 무찌르고 우리님 개선하실 제 그 영광이 어떠하던고 일천삼백년이 바람같이 지나갔어도 장하신 그 이름 겨레에 새기옵고 피 끓는 의기의 전통 자손만대에 이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