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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은사연구 - 해석적 고찰/조병수
로마서의 은사연구 - 해석적 고찰
1. 은사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
은사에 관하여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현실적인 면과 성경적인 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은사 연구의 현실적인 이유
우리는 은사에 대하여 정확하고 세밀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은사에 관한 현대교회의 현실적인 다양한 입장 때문이다. 현대교회는 은사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다.
(1) 은사에 관한 적극적인 입장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은사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은사에 대한 교회의 적극적인 태도를 가만히 살펴보면 큰 혼란을 발견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 몇 가지 대표적인 혼란을 살펴보자.
첫째로, 은사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혼란은 은사의 성격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은사를 생각하면 우선 특별한 현상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 예를 들면 병을 고친다거나 말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거나 앞날을 미리 알게 된다거나 하는 현상들이다. 이것은 소위 은사의 "기적적인" 현상들이다. 그러나 은사를 이렇게 기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큰 잘못이다. 은사에는 재능과 결부된 어떤 예술적인 일들도 포함된다. 음악이건 미술이건 예술적인 은사들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지는 선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편에서 많은 연습과 노력을 하는 것이 요청된다. 더 나아가서 은사가운데는 아주 일상적인 은사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은사들은 사람의 성품과 잘 조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은사를 주시되 때때로 사람의 성품을 고려하여 그에 맞는 은사를 주시며, 이렇게 함으로써 일상적인 모든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게 하신다.
둘째로, 은사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또 다른 혼란은 은사의 성격이 매우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은사만을 지나치게 선호하며 강조하는 경향에 근거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은사는 그 성격을 따라 분류해보면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기적적인 은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신유나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들이다. 이러한 추구는 기독교 교회를 은사의 문제에 있어서 편중화시키며 획일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오직 몇 가지 은사에만 집착하는 것은 기독교회를 건조하고 단조롭고 고집스런 집단으로 전락시키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회사를 통하여 생생하게 증명해 낼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주후 2세기에 활동했던 몬타누스나 그의 추종자들(몬타니스트), 중세시대를 어지럽혔던 종말론적인 환상가들, 개혁시대에 일어났던 재세례파의 예언운동을 말할 수 있다. 이런 운동들은 모두 기독교회를 왜곡시키는데 한 몫을 담당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은사의 문제에 있어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혼란은 은사들의 의미를 분명하고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기적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은사들은 물론이고 예술적이며 일상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은사들에 있어서도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대체적으로 모르고 있다. 따라서 은사를 현상적으로만 감지하며 체험할 뿐 은사가 본래 목적하는 내용에 대하여는 상당히 무지하다. 이 때문에 기독교 교회 안에는 은사와 관련하여 통일성을 잃어버린 채 걷잡을 수 없는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넷째로, 바로 여기에서 은사와 관련하여 가장 중대한 혼란이 야기된다. 그것은 은사를 개개인에게 독립적으로 주어지는 개인적인 체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일종의 표준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은사를 개인적인 체험으로 생각하는 이상 그것을 평가할 표준이 있을 수가 없다.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모든 객관적인 평가와 표준을 넘어서는 것을 생각한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점이 파생된다. 그 한 가지 문제점은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 앞에서 교회적인 평가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에 대하여 어떤 제재도 가할 수가 없다. 이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문제점은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에 대하여 성경적인 평가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은 개인적인 체험으로서의 은사에 대하여 무슨 발언을 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어떤 것에도 평가를 받지 않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 은사는 스스로 표준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은사는 오히려 교회를 평가하게 되고, 심지어는 성경을 평가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text)을 가지고 현상(context)를 이해하지 않고, 현상(context)을 가지고 성경(text)를 이해하는 무서운 오류가 발생한다. 성경진술이 은사체험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체험이 성경진술을 평가한다. 성경진술이 표준이 아니라, 은사체험이 표준이 되고 만다. 표준이 전도된 것이다. 이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현상(context)이 표준이 되면 진리는 항상 불안하다. 진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변함없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언제나 성경(text)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사와 관련하여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일어나는 큰 혼란을 정리하기 위하여 은사에 대하여 정확하고 세밀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은사에 관한 소극적인 입장
이에 비하여 오늘날 은사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교회들도 적지 않다. 은사에 대하여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은사에 대하여 적극적인 입장을 가지는 교회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은사를 체험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목회자를 무시하며 불순종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것도 은사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만든다. 게다가 은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끼리끼리 분당을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로 말미암아 많은 교회들이 은사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교회들은 은사하면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은사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려는 경향과 은사를 배척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은사와 관련하여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일어나는 큰 무시를 극복하기 위하여 은사에 대하여 정확하고 세밀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은사연구의 성경적인 이유
이제 은사연구의 현실적인 이유에 이어서 은사연구의 성경적인 이유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은사라는 단어와 은사행위의 기록
성경과 관련하여 볼 때 은사에 대하여 연구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에 은사라는 단어가 여러 번 사용되었다는데 있다. 물론 신약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은사라는 단어 외에도 이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선물"이라는 단어이다. 신약성경은 "선물"을 위하여 여러 가지 단어를 사용한다. 이에 대하여는 후에 다시 자세하게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은사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모두 17번 등장한다. 이 단어가 나오는 구절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롬 1:11; 5:15, 16; 6:23; 11:29; 12:6; 고전 1:7; 7:7; 12:4, 9, 28, 30, 31; 고후 1:11; 딤전 4:14; 딤후 1:6; 벧전 4:10.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사실은 은사라는 단어가 베드로서신에서 한번 사용된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바울서신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은사와 관련하여 사도 교부는 Did. 1,5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바울의 영향권 아래 있다. 1 Clem. 38.1; Ign.Sm inscr. [bis]; Ign.Eph. 17,2; Ign.Pol. 2,2.).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은사가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에서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고 추정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물론 위에 언급한 은사와 관련된 구절 외에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에서는 은사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책들이 은사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책들도 은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은사의 행위에 대하여는 언급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도 전도, 예언, 방언, 치병, 섬김 같은 은사행위들이 자주 나온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은사라는 단어와 은사행위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은사를 연구하게 하는 큰 동기가 된다.
(2) 은사 공동체로서의 신약교회
은사를 연구하게 만드는 성경적인 이유는 은사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가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와 관련하여 두 종류의 교회를 생각하게 된다. 그 하나는 사도들에게 사역의 대상이 되었던 초대교회이며, 다른 하나는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소속해 있던 속대(續代)교회이다.
우리는 먼저 사도들과 관련된 초대교회를 생각해 본다. 초대교회는 대체적으로 은사 공동체였다. 초대교회는 은사 공동체로서 은사를 대단히 중시하고 강하게 실현하였다. 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가 편지를 보냈던 교회들은 은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사도 바울과 관련된 교회들은 은사라는 단어를 언급하건 하지 않건 은사공동체였다. 이 교회들이 은사공동체였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가 있다.
우선 사도 바울과 관련된 교회들은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로마교회,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 데살로니가교회를 언급할 수 있다. 이 교회들은 다양한 은사들을 소유하고 있 었다. 이 교회들이 소유하고 있던 은사들 가운데는 때로는 기적적인 아주 놀랄만한 은사들도 있었고, 때로는 일상적인 아주 평범한 은사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은사라는 것이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은사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성도의 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은사소유의 현실성에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은사 공동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은사에 대한 자연스런 수용과 함께 은사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이 일어났다. 은사에 대한 논쟁은 은사의 성격과 목적 등에 관한 혼란 때문에 발생하였다. 은사의 성격에 관하여 말하자면, 예를 들어 예언이라는 은사는 도대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혼란이다. 예언이란 것이 언어적인 행위라는 것은 분명한데 앞날에 일어날 일들을 점치듯이 미리 알려주는 언어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용어인지 아니면 교회의 예배에서 행해지는 어떤 특수한 언어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인지 그 성격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또한 은사의 목적에 관하여 말하자면, 예를 들어 예언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며 방언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에 대한 혼란이다. 은사에 대한 논쟁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다. 간단하게는 성도들이 어떤 한 두 가지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여 더 이상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위험이 발생할 수 있었다. 심각하게는 성도들이 어떤 은사는 중시하고 어떤 은사는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분열이 생길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사도들은 은사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리를 해 줄 필요를 인식하였던 것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자신과 관련된 여러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중에 자주 은사 문제를 거론하였다. 때로는 은사의 종류에 대하여 언급하기도 하고, 때로는 은사의 성격에 대하여 진술하기도 하고, 때로는 은사의 목적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은사에 관한 이론을 정립시켰다. 사도들이 정립해 준 은사에 관한 이론은 결국 초대교회에게 뿐만 아니라 미래교회에게도 중요한 것이 되었다. 사도들의 은사에 관한 진술은 초대교회와 미래교회를 위한 성경적인 지침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사도들이 후계자들과 관련된 속대교회를 생각해 본다. 초대교회를 잇는 이후의 교회들도 은사 공동체였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초대교회 이후의 교회들도 은사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으며 지혜롭게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은 비록 은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은사행위를 자주 진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사도행전 기록자의 이전에 존재하는 초대교회에 은사가 있었다는 것을 밝히려는 역사적인 목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 기록자의 현재에 존재하는 당시 교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은사 문제를 정리하려는 신학적인 목적도 보여주는 것이다.
3) 정리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은사가 신약교회에서 대단히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은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사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소유하지 못하면 신약성경의 한 면을 크게 몰이해하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은사에 대하여 정확하고 세밀하게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은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처음부터 두 가지 사항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신약성경에 한 편으로는 은사라는 단어가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며, 한 편으로는 은사의 목록이 서너 군데 집중적으로 진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약성경에는 은사라는 단어가 단지 서신서에 모두 17번 산발적으로 사용되었다(롬 1:11; 5:15, 16; 6:23; 11:29; 12:6; 고전 1:7; 7:7; 12:4, 9, 28, 30, 31; 고후 1:11; 딤전 4:14; 딤후 1:6; 벧전 4:10). 이에 비하여 은사의 목록은 신약성경에 전부 네 군데 등장한다(롬 12:3∼8; 고전 12:4∼31; 엡 4:11∼16; 벧전 4:7∼11). '은사'라는 단어가 산발적으로 사용된 구절들을 조사하면 은사의 일반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은사에 대한 집중적인 언급을 관찰하면 은사의 특수한 의미를 이해하는데 아주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은사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이 두 사항을 어느 정도 구별하여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먼저 은사의 일반적인 용법(은사의 산발적인 사용)에 대하여 살펴보고, 이어서 은사의 특수한 용법(은사의 집중적인 목록)을 고찰하게 될 것이다.
2. 은사의 일반적인 용법
은사의 일반적인 용법을 살펴보기 위하여 은사라는 단어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또한 은사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1) 은사라는 단어의 유래
첫째로 은사라는 단어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은사 (카리스마)라는 말은 행위로서 이해된 은혜(카리스)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분명히 은사라는 단어는 어형론적으로 볼 때 은혜라는 단어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두 단어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여러 구절을 근거로 하여 내용적으로 볼 때도 큰 연관성이 있다. 왜냐하면 은사는 은혜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롬 5:15; 12:6; 엡 4:7).
2) 은사라는 단어의 용례
이제 은사라는 단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문헌적으로 볼 때 은사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사도 바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 바울 이전의 고대문헌들을 뒤져보면 이따금 은사라는 단어를 사용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이전에 은사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직한 문헌들을 자세히 조사해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문제점은 후대의 편집자가 이 문서들을 손질하여 은사라는 단어를 가필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헌상 사도 바울이 최초로 이 단어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바울 이전에는 은사라는 단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이 은사라는 단어를 그의 서신에 사용한 것은 그의 독자들이 이 단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서신의 독자들이 이 단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더라면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구태여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은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다른 단어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사실상 당시에는 이미 은사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단어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선물과 선사(膳賜)라는 단어들이다. 신약성경에 선물이란 단어는 모두 11번 등장하며(요 4:10; 행 2:38; 8:20; 10:45; 11:17; 롬 5:15, 17; 고후 9:15; 엡 3:7; 4:7; 히 6:4), 선사라는 단어는 모두 2번 언급된다(롬 5:16; 약 1:17).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 바울도 은사라는 단어를 선물이란 단어나 선사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예는 로마서 5:15∼17이다. 이 구절을 살펴 보자(아래의 내용은 나의 사역 [私譯]임).
"그러나 은사는 범죄와 같지 않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선물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풍성하게 되었다"(롬 5:15).
"그리고 선사는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것과 같지 않다. 한 범죄 때문에 온 심판은 정죄로 이끄나, 은사는 많은 범죄들로부터 칭의로 이끈다"(롬 5:16).
"만일 한 사람의 범죄로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다면, 오히려 은혜와 의의 선물의 풍성함을 받는 자들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것이다" (롬 5:17).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은사, 선물, 선사라는 단어들을 어울려 쓰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위에서 보듯이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5에서는 은사와 선물을 혼용하고, 로마서 5:16에서는 선사와 은사를 병행하며, 로마서 5:17에서는 선물을 첨가한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이 은사, 선물, 선사라는 단어들을 섞어 쓰고 있는 것은 이 세 단어가 크게 구별되지 않는 동의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은사라는 단어는 문헌상으로는 그렇지 않았을지라도 구어상으로는 선물이나 선사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언어생활에서 익히 알려진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어렵지 않게 은사라는 단어를 선물이나 선사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할 수가 있었다. 사도 바울이 선물이나 선사라는 단어 외에 은사라는 단어를 채택한 것은 결코 무리한 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은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때 사도와 성도 사이에 훌륭한 영적 교감이 이루어졌다. 사도는 이 단어를 통하여 은사에 대한 자신의 신학을 충분히 전달하였고, 성도는 이 단어를 통하여 은사에 대한 바울의 신학을 풍성히 수용하였다.
3. 로마서에서의 은사 의미
이제 로마서에 여섯 번 사용된 은사에 관한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사도 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은사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생각해보기로 하자. 로마서의 은사에 관계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롬 1:11; 5:15,16; 6:23; 11:29; 12:6.
1) 로마서 1:11
로마서에서 은사와 관계된 첫 구절은 로마서 1: 11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라"(개역). "내가 너희를 볼 것을 소원하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어떤 영적인 은사를 전달하여 너희가 견고하게 되도록 하려 함이라"(사역).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만나보기를 소원했다. 그 이유는 은사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은사에 관하여 몇 가지 중요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은사에 "영적인"이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특이한 용례이다. 이것은 은사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은사가 영적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유래와 관련하여 볼 때 은사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위로부터 오는 것이지 아래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은사는 연습을 통하여 획득될 수가 없다. 나아가서 주체와 관련하여 볼 때 은사는 인간적인 행위라고 볼 수가 없다. 은사는 성령의 활동에 근거하는 것이지 인간의 활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주도적인 역할을 무시한 채 인간의 행위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지막으로 가치와 관련하여 볼 때 은사는 물질적인 가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은사를 물질적인 가치로만 평가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은사에 있어서 물질적인 가치는 영적인 가치 아래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은사를 로마교회에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말에서 두 가지 점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우선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서 은사가 유래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오직 성령에게서 유래한다. 성령께서 은사의 유일한 출처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은사를 다른 사람에게 분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은사는 결코 쪼개어 나눌 수가 없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은사를 전달한다고 말했을 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한 편으로 볼 때 은사를 전달한다는 말은 은사를 소개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살전 2:8 참조).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여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교훈함으로써 은사를 소유하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위하여 은사를 가르치는 교육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 볼 때 은사를 전달한다는 말은 은사를 중개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자신의 뜨거운 은사를 제시함으로써 로마교회도 이런 은사를 사모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위하여 은사의 중매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은사는 소개되고 중개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영적인 은사의 특징은 은사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것이라는데 있다. 사실상 나눔의 행위 그 자체가 이미 은사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롬 12:8). 은사에는 앞선 자가 없이 뒤따르는 자가 있을 수 없다. 은사는 성도들 사이에서 전달하고 전달받는 성격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은사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은사전달의 목적을 설명한다. "너희가 견고하게 되도록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은사를 전달하게 되면 로마교회는 어떤 유익을 얻게 된다. 로마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한 은사전달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된다. 은사는 교회를 견고하게 한다. 교회는 은사로 견고하게 된다. 이것은 은사의 교회론적인 목적이다. 은사의 진정한 유익성은 교회를 견고하게 만든다는 바로 이 점에 있다(고전 14:12을 참조하라).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교회의 견고성은 교회가 은사를 소유하게 될 때 스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수동태로 기록했다. "너희가 견고하게 되도록 하려 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 바울은 교회가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도 교회의 견고성은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선사되는 것임을 밝힌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교회를 견고하게 만든다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교회를 견고하게 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문제로서 성도들이 서로간에 사랑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같은 로마서에서 여러 가지 은사들을 열거한 다음에 바로 이어서 사랑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롬 12:6∼10; 고전 12장∼13장을 참조하라). 바른 은사를 가지고 있을 때 성도들은 서로를 세워줄 수 있다. 이에 더하여 교회를 견고하게 한다는 것은 조직적인 문제로서 교회 안에 확실한 일꾼을 세우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은사를 열거하는 중에 교회의 지도자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을 언급함으로써 은사는 교회의 조직을 강화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롬 12:6∼8). 바른 은사를 사용하면 교회는 정당한 조직을 정립시킬 수가 있다. 이 뿐 아니라 교회를 견고하게 한다는 것은 교리적인 문제로서 이단들이 교회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로마교회는 사탄의 사주를 받는 대적자들에 의하여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롬 16:17∼20). 바른 은사를 가지고 있을 때 교회는 이단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 끝으로 교회를 견고하게 한다는 것은 선교적인 문제로서 교회가 복음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할 수 있다(롬 16:25∼27을 참조하라). 특히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은사를 전달하여 로마교회로 하여금 선교에 동참시키려는 생각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가 은사를 소유하여 견고한 선교교회가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2) 로마서 5:15∼17
로마서에서 두 번 째로 만나는 은사에 관계된 구절은 로마서 5:15∼17이다. 사도 바울은 앞 단락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설명하다가, 로마서 5:12∼21에 이르러 이신칭의를 위하여 어떤 구속사적인 흐름이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먼저 사도 바울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와 사망을 야기시키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롬 5:12∼14). 죄는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아담의 범죄가 만인의 범죄의 기원이다. 아담은 범죄에 있어서 만인을 대표한다. 아담은 범죄의 대표자이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아담의 범죄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말한다. 아담의 범죄는 예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아담과 예수를 모형론적으로 비교한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롬 5:14). 이것을 가리켜 아담-그리스도-모형론(Adam-Christ-Typology)이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은 아담-그리스도-모형론에서 은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내용을 검토하게 된다.
(1) 은사의 유사용어
첫째로, 우리가 이 단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은사의 유사용어들이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다른 단어들로 바꿔 부른다. 먼저 사도 바울은 은사를 예수의 선물이라고 부른다(롬 5:15). 또한 사도 바울은 은사를 선사라고 부른다(롬 5:16). 사도 바울이 은사를 이렇게 선물이나 선사라는 단어들로 바꿔 부르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한 마디로 말해서 은사가 결코 사람이 자력에 의하여 창작할 수 없는 것이며, 교육에 의하여 개발될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은사는 자력적인 창작물도 아니며 교육적인 개발품도 아니다. 은사는 선물이다. 은사는 순전히 주어지는 것이다. 은사는 소원한다고 해서, 갈망한다고 해서, 추구한다고 해서 무조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은사의 획득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은사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 밖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도 바울이 은사를 선물이나 선사라는 단어로 바꿔 부르는 이유는 은사가 결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며,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선물은 값으로 환산하거나 돈으로 계산해서는 안된다. 어떤 선물이든지 금전으로 환산된 선물은 이미 선물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은사는 선물과 선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떤 기준에 의해서든지 가치를 매기기 시작하면 큰 잘못이다. 은사는 선물이다. 은사는 모든 인간적인 평가를 초월한다. 은사는 인간의 계산과 평가에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은사의 가치는 인간의 계산과 평가를 초월하는 것이다. 은사는 인간의 계산과 평가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은사를 선물이나 선사라는 단어로 바꿔 부르는 이유는 은사가 결코 불만과 불평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선물은 주어지면 감사한 것이고, 안 주어도 불평할 수 없는 것이다. 선물을 주고 주지 않는 것은 순전히 선물의 주인의 마음에 달린 일이다. 마찬가지로 은사가 선물과 선사라면 그것을 받은 사람은 감사할 뿐이요, 받지 못한 사람은 불평할 수 없는 것이다. 은사는 인간의 불만과 불평을 넘어서는 것이다.
은사가 선물과 선사라는 점에서 은사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은사는 인류전체를 위한 효과에 관한 한 매우 제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운데 은사를 받는 사람이 있고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2) 은사의 반대용어
둘째로 우리가 이 단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은사의 반대용어들이다. 사도 바울은 이 단락에서 은사에 대한 몇 가지 반대용어들을 사용한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은사에 반대되는 용어는 범죄라고 부른다(롬 5:15). 또한 사도 바울은 은사에 반대되는 용어를 심판이라고 부른다(롬 5:16).
사도 바울이 은사에 대한 반대용어로서 사용한 범죄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말해서 아담의 원죄를 가리킨다. 아담은 한 사람으로서 범죄했지만 그 영향이 많은 사람에게 이르렀다(롬 5:15). 아담은 범죄라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도 범죄라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도 범죄라는 상태에 놓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아담 이후의 인간은 범죄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에 항상 범죄행위를 할 수 밖에 없다. 은사는 바로 이러한 범죄의 사슬(아담의 범죄행위 → 아담의 범죄상태 → 인간의 범죄상태 → 인간의 범죄행위)을 끊는 것이다. 은사는 근본적으로 아담의 원죄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은사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행위인 은사는 인간의 범죄상태를 극복한다. 은사는 인간의 범죄상태에 하나님의 은혜상태를 가져다준다. 그래서 은사는 인간을 위한(for)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을 위한(for) 인간에게 있어서 새로운 시작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은사는 아담의 범죄행위에 대한(against)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범죄상태에 대한(against) 인간에게 있어서도 새로운 시작이다. 은사는 새로운 시작이다.
사도 바울이 은사에 대한 반대용어로서 사용한 심판이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말해서 아담의 형벌을 가리킨다. 아담이 받은 심판의 결과는 정죄이다(롬 5:16). 정죄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절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에게 주어진 심판은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고, 만물과 인간을 분열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이간시키고, 하나님과 사람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아담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아담은 만물과의 관계를 상실하고 말았다. 아담은 하와와 반목하는 사이가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돌 하나 위에 돌 하나 놓이지 않듯이 아담의 범죄는 모든 관계를 단절로 이끌고 말았다. 은사는 바로 이러한 단절관계를 잇는 것이다. 은사는 근본적으로 아담의 심판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은사는 하나님의 행위이지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인 은사는 인간의 심판 상태를 극복한다. 은사는 모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은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간과의 관계를, 만물과의 관계를, 영육의 관계를 회복한다.
(3) 은사의 내용 서술
셋째로, 우리가 이 단락(롬 5:15∼17)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은사의 내용에 대한 서술이다.
① 로마서 5:15
먼저 로마서 5:15에서 사도 바울은 은사를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선물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풍성하게 되었다"는 말로 설명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은사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의 은혜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은사를 말하면 반드시 하나님과 예수의 은혜를 말해야 한다. 은혜 없이는 은사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악을 위한 한량없는 긍휼이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엡 2:4). 예수의 은혜는 인간의 죄악을 위한 중보적인 죽음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은사는 하나님의 한량없는 긍휼의 은혜와 예수의 중보적인 죽음의 은혜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은혜는 샘이며 은사는 강이다.
바로 여기에 은사의 풍요와 능력이 있다. 은사가 풍요롭고 능력적인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의 은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은혜가 풍요롭고 능력적이라면 은사도 풍요롭고 능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풍성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은사는 근본적으로 풍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은사는 많은 사람에게 효과를 미치기에 충분한 것이다. 아담의 범죄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 것 이상으로 하나님과 예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은사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구원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은사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란 생각해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은사는 신자 전체를 위한 효력에 관한 한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② 로마서 5:16
사도 바울은 은사를 또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은사는 많은 범죄들로부터 칭의로 이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은사의 궁극적인 목표를 알려준다. 은사는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은사는 사람들을 "많은 범죄들로부터" 떠나게 한다. 아담 이후로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범죄의 양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이 모든 범죄에서 사람은 스스로 떠날 수가 없다. 사람은 이 모든 범죄에서 스스로 자신을 건져 낼 수가 없다. 은사는 이 모든 범죄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은사는 사람을 범죄로부터 건져낸다. 은사는 범죄를 인식시키며, 범죄를 파괴시킨다. 은사는 우리의 범죄에 대한 비판을 의미한다. 은사는 전환요소이다. 은사는 범죄에 대한 포기이다.
둘째로, 은사는 사람들을 "칭의로" 나아가게 한다. 아담 이후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義)를 상실하였다. 인간은 스스로 의롭게 될 수가 없다. 인간의 의(義)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과 같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히브리어로는 "월경으로 인하여 피묻은") 옷 같나이다"(사 64:6). 진정한 의는 인간 밖에서 오는 의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이다. 은사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 앞에서 우리의 의는 벌거벗은 것처럼 초라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의 앞에서 버틸 수가 없다. 은사는 우리의 의가 맞은 위기를 의미한다. 은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의 앞에 세우고 우리의 비참과 죄악을 깨뜨린다. 은사는 인간을 파괴시킨다. 그리고 철저하게 파괴시킨 후에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이끌어간다. 은사는 전환요소이다. 은사는 하나님에 대한 수용이다. 은사는 신자 전체에게 예외 없이 하나님을 수용하게 하는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③ 로마서 5:17
사도 바울은 은사를 또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은사는 "은혜와 의의 선물의 풍성함을 받는 자들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사도 바울은 은사가 은혜에 기초한다는 것을 다시 언급한다. 나아가서 은사는 칭의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의의 선물"이다. 은사는 원인으로 말하자면 은혜에 바탕을 두고, 결과로 말하자면 칭의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은사는 풍성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은사와 관련하여 새롭게 제시하는 내용은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은사와 관련하여 생명과 통치라는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언급한다. 은사는 한편으로는 생명과 관련하며, 한편으로는 통치와 관련한다. 은사는 사람을 생동적으로 만든다. 은사는 사람을 주권적으로 만든다. 은사로 말미암아 사람은 생령이 되고 임금이 된다. 옛날 아담은 살아있는 존재와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범죄로 말미암아 생명도 주권도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신자는 은사로 말미암아 생명과 주권을 회복하게 된다. 신자는 살아있는 존재와 다스리는 존재로 회복된다. 신자는 살아있는 왕이며, 다스리는 생명이다. 이것이 은사의 효력이다. 이처럼 은사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에게 전체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3) 로마서 6:23
로마서에서 세 번 째로 만나는 은사에 관련된 구절은 로마서 6:23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것은 완벽한 대조구문이다. 사도 바울은 위에서 은사는 원죄를 해결하는 것이며, 칭의로 이끄는 것이며,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로마서 6:23은 이에 대한 총정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내용을 말한다.
첫째로, 은사는 사망에 대비된다. 사망은 죄의 삯이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 이끈다. 그런데 죄의 삯인 사망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은사 밖에 없다. 오직 은사만이 죄의 삯을 파기시킨다.
둘째로, 은사는 영생을 허락한다. 왜냐하면 은사는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며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나오는 은사는 영생을 허락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다. 영생의 울타리는 안전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영생은 은사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가장 근본적이며 기본적인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은사는 구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4) 로마서 11:29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29에서 은사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을 소개한다. "하나님의 은사들과 부르심은 후회함이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스라엘의 구속의 문제를 다룬다. 9장은 주로 이스라엘의 선택을 주제로 삼는다. 10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타락이 중요한 내용이 된다. 11장이 취급하는 문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방인의 구원과 깊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넘어지자 이방인에게 구원의 길을 여신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구원이 이른 것은 이스라엘에게 시기를 불러일으킨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얼마가 구원의 길에 참여하게 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일부는 이방인의 수가 하나님께서 작정한 만큼 충분히 구원에 들어올 때까지 완악한 상태에 있다. 결국 이 일이 다 진행되면 하나님의 오래 전에 세우신 구원의 약속을 따라서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의 총수가 구원을 얻는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방인의 구원의 상관관계를 한 마디로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은) 복음을 따라서는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이며, 선택을 따라서는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받은 자들이다"(롬 11:28 私譯).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은사에 대한 또 하나의 개념을 도입한다. 이스라엘의 구속문제를 배경으로 하여 "선택을 따라서는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받은 자들이다"(롬 11:28하)라는 말과 "하나님의 은사들과 부르심은 후회함이 없다"(롬 11:29)라는 말을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선택을 따라서는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받은 자들이라는 사실이 곧 후회함이 없는 하나님의 은사들과 부르심에 근거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들과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위한 선택은 결국 실현되고 조상들을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도 성취되며 이스라엘은 사랑받은 자들로 완성된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사들은 이스라엘의 구속성취를 위한 중대한 근거이다. 대체적으로 주석가들은 이 구절에 나오는 "은사들"이 로마서 9:4∼5에 열거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특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은사들을 이렇게 먼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가까운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로마서 11:29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사들은 틀림없이 로마서 11:28에 나오는 선택과 조상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을 포함하는 조상들의 약속 또는 조상들의 약속에 표현되는 하나님의 선택이 은사들이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은사들은 현실적으로 보면 교회의 유익을 위한 기능적인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전제적인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인 것이다. 여기에서 은사의 구속사적인 의미가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현실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구속사적인 면에서도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은사의 개념은 대단히 심오하고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은사의 현실적인 의미가 빙산의 드러난 부분이라면 은사의 구속사적인 의미는 빙산의 감추인 부분이다. 은사의 현실적인 의미와 은사의 구속사적인 의미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은사의 현실적인 의미를 말하는 사람은 은사의 구속사적인 의미도 말해야 한다. 은사의 현실적인 의미를 말하면서 은사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되며, 은사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말하면서 은사의 현실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은사의 현실적인 의미에만 머물러 은사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놓치면 안된다. 하나님의 은사는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한 경륜이며 계획이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한 경륜이며 계획인 하나님의 은사를 부르심과 나란히 놓는다. "하나님의 은사들과 부르심"(롬 11:29). 하나님의 은사들은 부르심과 동등한 자리를 점유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용법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또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들과 부르심을 동일한 것(Hendiadyoin)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떻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이 구절에서 말하는 은사들의 성격이 현실적인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부르심은 현실 이전의 사건이다. "부르심"이라는 명사는 로마서에서 단 한 번 사용되었지만 그에 준하는 여러 가지 품사들의 용법을 살펴보면 부르심이 현실 이전의 사건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경우에서건(롬 1:1), 성도로 부르심을 받는 경우에서건(롬 1:6∼7; 8:28) 부르심은 현실 이전의 사건을 지시한다. 부르심은 칭의와 영화 이전의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구속에 있어서도 부르심은 현실 이전의 사건이다. 부르심은 이스라엘의 행위 이전의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도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롬 9:11). 이렇게 볼 때 부르심은 그것이 실제화되기 이전에, 휠씬 이전에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들을 부르심과 나란히 위치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은사들도 부르심과 마찬가지로 현실 이전의 사건임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심이 그것이 실제화되기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이듯이, 은사들도 그것이 실제화되기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한 경륜과 계획으로서의 은사들은 이스라엘의 구속이 실현되는 것보다 더 오래 전에 성립되었다. 이것이 바로 은사의 구속사적인 장구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같은 구속사적인 은사는 또 하나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사가 하나님의 성품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들과 부르심은 후회함이 없다"(롬 11:29)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사들이 후회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후회함이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사는 후회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른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롬 3:3∼4). 하나님에게 후회함이 없듯이 하나님의 은사에도 후회함이 없다. 하나님의 은사는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세우신 구속사적인 은사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구속을 실현하신다. 하나님께서 결국 이스라엘의 구속을 실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게 된다는 윤리적인 적용을 얻는다.
5) 로마서 12:6
로마서는 1장에서 11장까지 한 단락을 이루며, 12장에서 16장까지 한 단락을 이룬다. 이것은 각 단락의 마지막이 동일한 송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쉽게 알 수가 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16:27).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롬 12:2)고 권면한다. 이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며 온전한" 뜻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사도 바울은 은사에 관하여 말한다(롬 12:6).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은사가 성도들이 분별해야 할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며 온전한 뜻 가운데 한 가지 사항인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각각 다른 은사들을 가진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따라 다양한 은사들을 가진다"(롬 12:6). 이 다양한 은사들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이다(롬 12:3). 우리는 본문을 중심으로 은사의 세 가지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은사의 다양한 종류, 둘째로 은사의 동일한 기초, 셋째로 은사의 다양성과 동일성의 조화이다.
(1) 은사의 다양한 종류(롬 12:6∼8)
사도 바울은 은사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6). 사도 바울은 은사의 종류를 위하여 처음부터 다양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바울은 이 단락에서 은사 목록을 제시한다(참조, 고전 12장). 이 은사목록에는 은사의 종류로 예언, 섬김, 가르침, 권면, 나눠줌, 관리, 불쌍히 여김이 열거된다. 그리고는 이 일곱 가지의 은사들을 실행하는 방법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예언은 믿음의 유례를 따라야 한다. 섬김은 봉사로 실행되어야 한다. 가르침은 교훈으로 나타나야 한다. 권면은 위로를 가져야 한다. 나눠줌은 순결함으로 되어져야 한다. 관리는 부지런함으로 행해져야 한다. 불쌍히 여김은 즐거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 가지 은사의 목록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은사가 대체적으로 평범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예언만이 어느 정도 기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언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가지 은사들은 얼마든지 일상생활 중에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일상적인 은사들이다(고전 12장의 은사목록과 비교할 때, 고린도교회에 특징적이던 영적 열광주의[Enthusiamus]가 로마교회에는 없는 듯이 보인다).
(2) 은사의 동일한 기초(롬 12:6)
사도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은사의 동질성을 강조한다. 다양한 은사들의 동질성은 은혜와 관계에서 잘 증명된다. 사도 바울은 은사와 은혜를 연결시킨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따라 다양한 은사들을 가진다"(롬 12:6). "은혜를 따라"라는 말은 여러 가지 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 이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가 은사의 표준이라는 사실이다. 은사가 종류에 있어서 아무리 다양해도 성격에 있어서는 언제나 동일하다. 은혜의 성격을 삭제한 은사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은혜로 측량해야 한다. 둘째로, 이 말은 은사가 은혜에 바탕을 둔다는 것을 알려준다. 은사는 은혜의 결과이다. 은혜 없이는 은사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철저한 은혜의 체험 없이 은사를 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은사의 활용으로 다시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는 은사의 획득 전에 은혜의 획득이 앞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초로 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자만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모든 은사는 은혜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은사는 은혜의 표현이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은혜는 단수로 사용되고, 은사는 복수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한 은혜에 여러 은사이다. 비유하건대, 은혜는 나무이며 은사는 열매이다. 한 나무에 여러 열매이다. 다시 비유하건대, 은혜는 몸이며 은사는 지체이다. 한 몸에 여러 지체이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은사를 설명하는데 몸과 지체의 비유를 사용한다(롬 12:4∼5).
(3) 은사의 다양성과 동일성의 조화(롬 12:4∼5)
그러면 성도들이 각각 상이한 은사들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 바울은 그 의미를 몸과 지체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한다. 이것을 위하여 바울은 " … 처럼(4절, 비유하는 부분) … 이와 같이(5절, 적용하는 부분)"라는 용법을 사용하고 있다. 먼저 사도 바울은 비유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지체가 같은 행위를 가지는 것은 아니듯이"(롬 12:4)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한 몸과 많은 지체의 관계는 여러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다. 몸을 한 지체로 만들어 버리려는 시도는 잘못이다. 몸에는 다양한 지체가 있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지체가 같은 행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지체들을 한 기능만을 하도록 만들어 버리려는 노력은 틀린 것이다. 지체들은 다양한 기능을 해야 한다. 셋째로, 몸과 지체의 긴밀한 관계이다. 몸 없는 지체를 생각할 수 없고, 지체 없는 몸을 생각할 수 없다. 몸은 지체를 가지고 있기에 다양하게 표현되며, 지체는 몸에 붙어있기에 통일되게 연결된다. 이제 바울은 적용하는 부분에서 "이처럼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지만, 각 사람이 서로의 지체들이다"(롬 12:5)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한 몸과 많은 지체의 관계는 여러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많은 지체가 있어도 한 몸이다. 지체가 많다는 것을 강조하다가 한 몸인 것을 잊어버리면 위험하다. 다양한 지체는 한 몸이어야 한다. 둘째로, 각 지체는 서로를 위한다. 각 지체가 자기를 위한 기능만을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각 지체는 서로를 위하여 기능해야 한다. 셋째로, 많은 지체는 한 몸에 있기에 조화를 이루며, 한 몸은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기에 풍성하다.
사도 바울은 몸과 지체의 비유를 통해서 은사의 성격을 밝히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도 바울이 이 비유를 가지고 말하려고 하는 내용은 은사는 다양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은사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인에게서 다양성과 동일성을 조화있게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4. 결론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몇 구절 밖에 안되는 은사 구절을 가지고도 은사에 관하여 많은 것을 교훈한다. 은사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은사가 하나님의 행위라는 것이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은사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롬 5:1512:6).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이다. 은사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른다(롬 11:29). 하나님이 그러하듯이 은사도 그러하다. 바로 이 때문에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출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을 가진다. 은사에는 몸에 지체들이 있는 것처럼 다양성이 있다. 평범한 은사가 있기도 하고 특이한 은사가 있기도 하다(롬 12:6∼8). 그러나 은사는 지체들이 몸에 있는 것처럼 통일성을 가진다. 은사 가운데 서로 연결되고 조화되지 않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셋째로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자연의 영역과 인간의 의지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자력적으로 개발되는 것도 아니다. 은사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적인 가치를 초월한다. 은사는 힘으로 획득할 수 없을 정도로 물리적인 노력을 배제한다. 따라서 은사는 영적인 것이라고 묘사되며(롬 1:11), 구속사적인 것이라고 설명된다(롬 11:29). 은사가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은사에 대하여 교만하게 자랑할 것이 없고, 겸손하게 감사해야 한다.
넷째로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를 유익하게 하는 목적을 가진다. 하나님의 은사는 교회를 견고하게 한다(롬 1:11). 모든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가장 중요한 은사는 영생이다. 은사는 죄의 삯을 파기하고 영생을 허락한다 (롬 6:23). 은사는 아담의 원죄와 심판을 해결하며, 범죄로부터 칭의로 나아가게 한다(롬 5:15∼17). 이런 의미에서 은사는 모든 성도에게 근본적이며 포괄적인 성격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