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사(栗谷寺) / 경남 산청군 신등면 율현리
신라 진덕여왕 5년(651) 원효대사가 창건, 경순왕 4년(930) 감악조사(感岳祖師)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고려, 조선 시대 때 사찰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법당을 중창할 때 어떤 목공이 찾아와 절을 짓는 일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석 달 동안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목침만을 만들었으므로 답답하게 여긴 이 절의 승려는, 목공을 시험하기 위하여 목침 하나를 몰래 숨겼다. 그런데 목침 만들기를 다한 목공이 수를 세어 보더니 갑자기 안색이 변하면서 “내 정성이 부족하여 목침이 하나 모자라니 이와 같은 귀중한 법당을 건립할 수 없다.”고 하면서 연장을 챙겨 떠나려 하였다. 그때 승려가 숨겨 놓은 목침을 내놓으면서 사죄하므로, 명공(名工)은 마음을 돌려 이번에는 목침을 조립해 나가는데, 힘들이지 않고 건물의 틀을 짜서 올렸다고 한다. 이 법당은 못을 전혀 쓰지 않고 조립한 것이므로 일명 목침절이라고 불린다.
대웅전 밑의 땅에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찬 영천(靈泉)이 샘솟고 있으며, 이 절 오른쪽의 암봉(巖峯) 셋 중 가운데 있는 봉우리를 새신바위(鳥神巖)라고 한다. 원효가 이 바위에 올라가서 지금의 절터를 잡았다고 한다. 또 대웅전을 지은 명공 법당을 단청할 때 7일 동안은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는데, 그가 안으로 들어간 뒤에 아무런 기척이 없으므로 궁금증을 못 이긴 승려가 7일째 되는 날, 문틈으로 안을 엿보았더니 새 한 마리가 붓을 물고 날아다니면서 벽화를 그리다가 일을 끝내지 못한 채 날아가 버렸는데, 그 새가 자취를 감춘 곳이 바로 이 바위였으므로 새신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백과 -한국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위키백과>는 감악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나온다.
거창에 감악산이 있고 감악사지가 있다. 율곡사와 감악사지(紺岳寺址)는 그리 먼 곳이 아니다.
감악조사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 같다. 이름만 존재하는 모양이다.
어느 산에 감악조사가 절을 짓고 살다가 떠나고, 사람들은 그가 머무른 절을 감악사로 불렀고,
그 절이 있는 산을 감악산이라 하지 않았을까 내 나름 생각해 본다.
사찰의 사격을 높이려 원효대사의 창건을 넣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 율곡사의 감악(感岳)과 감악사지의 감악(紺岳)의 한자가 다르다. 역사 연구가가 아니면 모를 일이다.
율곡사는 처음은 아니다.
해 질 녘에 들렸다. 경비를 하시는 분이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사찰에 승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물어보았다.
비구니 사찰이라 해 지면 비구니는 마을로 내려간다고 한다.
주야 2교대로 경비를 서는 까닭은 이곳 사찰에 국가지정 유형문화재인 보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웅전 / 보물 제374호, 조선 시대 건립, 단정하고 우아한 멋.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73호
율곡사 괘불탱 / 보물 제1316호
대웅전은 크지않고 단청도 화려하지 않다.
절제된 느낌, 단아한 느낌을 받았다.
*다음 기회에 다시 들려서 사진 촬영, 게재할 예정.
2020년 10월 28일(수) 들려서 촬영한 사진은 실수로 지워버림.
2016년 6월, 황석산 가는 길에 들렸던 율곡사와 정취암 사진이 있어 올린다.
주차장에 주차, 대웅전으로 가는 계단.
부도, 석종형으로 조선시대 승려들의 부도로 추정하여 본다.
대성산 정취암(大聖山淨趣庵) / 경남 산청군 신등면 양전리, 전통 사찰 제83호
신라 신문왕 6년(686) 의상대사가 창건.
동국여지승람엔 정취사(正趣寺)로 나오지만 어느 불화에 정취암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정취암은 전망이 참 좋다. 황매산과 한우산 등이 조망된다.
시인들이 이곳에 와서 그 흥을 시로 많이 남긴 곳이기도 하다.
나도 서너번 들렸던 것 같다.
황매산이 조망된다.
한우산이 조망된다.
원통보전, 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다.
불교에서 정취(正趣)의 의미를 모르겠다. 이곳은 정취관음보살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목조 관음보살좌상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43호
산신탱화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14호
정취암 가는 길
산 중턱, 암벽 아래에 정취암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