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2의 고향, 구로
- 장 동 석
우리는 누구나 고향이란 말을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왠지 설레 이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 옛날 조상대대로 이어져 태어나고 자란 그 곳에서 자손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곳이며, 또 앞으로도 내 자손들이 그곳을 터 삼아 살아가야 하는 곳, 고향은 어머니의 품안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곳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접어들어 산업화가 되면서 우리는 언제부턴가 하나 둘 그곳으로부터 떠나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고향이란 곳에는 나이가 많으신 노인들만 남아있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그것도 특별한 경우고 부모마저 돌아가신 경우는 자연스럽게 연고조차 없게 되어 정말 큰 맘 먹고 찾아가보는 곳으로 전락해 버렸다.
나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이제 내가 태어난 곳에 조상들의 산소만 외롭게 남아있을 뿐, 먼 당숙뻘 되는 한 분 빼고는 가까운 친척 한 분 없이 되어버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도시로 그것도 서울로 산업화의 변천에 따라 삶의 터전을 찾아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볼 때 요즘은 고향이라는 개념이 많이 변했다. 내가 나서 자라고 조상대대로 누려 살던 곳을 그냥 고향으로만 생각할 뿐, 정작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정들어 버리면 오히려 고향 같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제2의 고향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람이 정을 주고 정이 들게 되면 타향도 고향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인 일일까?
나는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구로(九老)를 매우 사랑한다.
이곳에서 오랜 기간동안 직장을 갖고 있는 연유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동안 너무도 많이 옮겨 다니느라 극도로 지쳐있던 내가 이제는 더 이상 옮겨 다니고 싶지 않은- 또 여기서 어느 정도 정이 들어 제2의 고향 같다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 내 친구들은 내가 구로에 산다면 무조건 생활수준이 형편없는 곳으로만 인식한다. 어디 그뿐인가! 그 옛날 굴뚝공장을 연상하여 매연이 가득 차 공기가 탁하고 문화의 불모지로 삭막한 도시쯤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다르다. 구로라는 지역적 소재만 그렇다 뿐이지 내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소외된 도시가 아니라, 다정다감한 소시민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다.
어떤 특별한 이유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생활의 근거인 직장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이곳에 사는 이웃 같은 사람들이 그저 좋아서 그럭저럭 살아온 것이 겨우 7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왠지 고향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인 일인가.
옛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 한다”고 했다. 하기야 요즘에는 10년이 아니라 1년만 지나가도 전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화가 심하지만, 내가 처음 이곳 구로에서 살기시작 했을 때 보다 현재의 구로의 모습은 정말 많이 발전하고 변모했다
내가 사는 구로는 옛날 나이 많은 노인 아홉명이 오래도록 장수하였다는 전설로부터 유래된다. 구로동, 신도림동, 가리봉동을 오른쪽 날개로 고척동, 개봉동, 오류동을 왼쪽 날개로 양 날개를 둘러업고 있는 호랑나비 형상을 하고 있다. 원래 구로는 1936년 조선총독부시절 경성부의 구역확장에 따라 서울로 편입돼 시흥군 동면 ‘구로리’로 부르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영등포구로 편입되어 80년 4월 신설구로 되면서 ‘구로리’라는 명칭에서 ‘구로구’로 되었다고 한다.
한강의 젖줄이라는 안양천 아래로는 질펀하게 갯벌이 펼쳐져 있고 구로의 남산이라고 불리는 개웅산 산부리에는 유일한 통신망이던 봉화터가 있다. 또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 서울과 인천을 왕래하려면 그 중간쯤 되는 곳에서 쉬어가거나 끼니를 때우기도 하고 바쁘지 않은 여행객은 숙박을 하던 주막거리 객사가 있다.
옛날에는 경인로에서 제일 큰 교량으로서 서울과 인천지역을 연결하는데 중요한 몫을 한 다리- 가린열 다리 또는 갈탄교라고 불리어지다가 고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그 옆으로 경기 강화, 시흥, 안양지역 사람들과 서울지역 사람들이 안양천을 경계로 생필품과 농산물을 교환하던 장텃골의 전설이 있어 좋다.
지금은 구로가 서울의 서남권 중심도시로 IT중심 최첨단 디지털 산업단지와 천혜의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친환경적인 도시, 예술의 정취가 물씬 풍겨 나오는 문화도시로 탈바꿈하여 세계 속으로 구로가 변화하여 가는 것을 볼 때 다시 한 번 격세지감을 느낀다.
내가 알기로는 살기 좋은 도시로 구로만큼 갖가지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곳도 드물 것 같다. 주거환경도 그렇고 대학병원에 백화점 등 편리한 생활시설에 사통팔달 뚫려 있는 교통은 또 얼마나 편리한가. 어디 그 뿐인가! 고척근린공원과 구로거리공원에는 목판으로 된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어 연인과 가족끼리 문학적인 낭만을 즐기고 건강과 휴식 공간으로 얼마나 정감 넘치게 만들어 놓았는가.
회색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삭막한 도심의 공간이 아닌 도시와 자연의 아름다운 어우러짐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풍요와 평온을 주는지 모른다. 시골 고향을 떠나 서울의 여러 곳을 흘러 다니며 살아온 내가 이곳 구로에 흠뻑 빠져 고향 같은 정이 들어버린 것도 그런 까닭이요, 연유일 것이다.
내가 구로에 이사 올 때 잘 정돈된 아파트단지는 푸른 숲이 울창했기에 도시특유의 삭막함은 느낄 수 없었다. 봄이면 길가에 핀 라일락 향기가 너무 좋아 나는 그 길을 걸었다. 조그만 정원에는 철따라 피는 작은 꽃들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있다. 가을이면 붉게 익어가는 감나무가 내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바로 눈앞에 잔잔히 흐르는 안양천도 있어 고향에 두고 온 개울을 보는 듯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안양천 뚝 길에 가면 왕 벗 꽃나무들이 길게 줄 서있다. 그 나무 주위를 맴도는 이름모를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어 내 고향정취를 조금은 맛볼 수 있어 좋다. 맑게 갠 오후 먼 관악산이 눈앞에 보이고 한 쌍의 비둘기가 놀고 있는 한가로운 도심의 풍경이 너무나 좋아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을 후회해 본적이 없다.
나는 구로에 터전을 잡기까지는 이사를 자주한 편이다. 주민등록등본이 한 장으로 부족한 것을 보면 내 젊은 날에 철새처럼 수시로 옮겨 살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 내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살았던 것은 정붙여 살아볼 만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내 이웃들도 저마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때 구로가 환경이 어떻다는 등은 한낮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구로에 대해 더욱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바로 옆을 흐르는 안양천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가고 천왕동에 시냇물이 흐르는 전원형 뉴 타운이 건설되었으며, 우리 서울서 유일한 항동수목원이 들어선지 오래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 특별히 다르겠냐만, 살아온 내 삶을 뒤돌아 볼 때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구로만큼 마음에 드는 동네도 없다.
현대의 삭막해져 가는 일상 속에서 비록 도로가 넓혀지고 도심지에 63빌딩 같은 거대한 건물이 속속 들어서는 것을 볼 때 한편으론 옛 모습을 잃어간다고 할지모르지만, 여기서 내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내게는 늘 푸른 강바람 같은 신선함으로 가슴을 젖게 하는 곳이다.
언제나 늘 사람들의 정이 솔솔 돋아나오고 조금은 정겹고 풍요로우면서 우리 가까이에서 적당히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곳! 이곳이야 말로 내가 가장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면서 지키고 가꾸어가야 하는 나의 제2의 고향 구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