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의 무게
문효원
돈이란 인간에게 무엇일까. 태워 버리면 허무하게 재가 되는 그것이. 그토록 인간들이 애타게 갈망하고 가지려고 하는 것. 아마, 돈이 있으면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력, 소망, 자유, 그 모든 상징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일본 오사카 산골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딸이다. 농한기에는 아버지는 돌담을 쌓거나 정원의 돌을 놓고 꾸미는 일을 하셨다. 도카타(노동일)이다. 그렇게 수입이 안전하고 보장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머니는 키모노(일본 전통의상)를 만든 일을 부업으로 하시고 담배 가게도 하면서 생활을 꾸려가셨다. 일곱 명 가족이었으니 여유는 없었다.
오빠와 큰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했고 작은 언니는 학비가 적게 드는 간호사학교에 갔다. 사남매 중에 나만이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사립대학이어서 상당히 가계에 부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너 때문에 돈이 많이 든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단 어머니가 내게 하숙비와 생활비를 주실 때 “이것은 아버지가 피와 살을 잘라 팔아서 버신 돈이란다.” 꼭 주실 때마다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손에 옮겨진 만엔짜리 종이돈에 큰 무개가 실린 듯했다. 사고 싶은 책과 미술동아리에서 쓰는 돈은 스스로 아르바이트하고 벌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매년 운동회에서 추점을 하면 아빠가 늘 껌 한 박스를 받으셨다. 모두 ‘꽝’이었던 것이다.(일본초등학교에서 추점을 하는데 꽝이면 껌 하나를 주었다. 한 박스에 껌 20개가 들어있다.) 무슨 추점이라고 하면 어김없이 ‘꽝’ 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복권도 사본 적이 없고 빠칭코도 한번 만 어쩌다 가게에 들어갔지만 그 후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늘 돈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다. 그것은 돈은 절대로 빌리거나 빌려주지 말라는 것이다. 빌려져서 돌려받지 못한 경우 돈도 잃어버리고 인간관계도 잃어버리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려워질 때마다 그 돈이 생각나고 빌려가서 갚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고.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그냥 주라고. 어머니는 경험이 있으셔서 하신 말씀이었다. 아마 내가 초등하교에 가기 전 어느 해였다. 모처럼 놀러와 아이들과 우리 집에서 자고 간 먼 친척이 있었다. 그 때 십만 엔을 빌려줬더니 그 후 연락도 없고 한 번도 나타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그 가족의 모습과 함께 어머니의 말씀이 내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이렇게 자란 환경의 탓인지 나는 돈에 대해 좀 인색해진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절약하는 편인 것이고. 좀 안좋게 말하면 크게 한턱을 쓸 줄도 모르고 남을 위해 크게 돈을 쓴 적도 없다. 현실적으로 여유가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남편은 나와 전혀 다른 생각과 이상을 갖고 있다. 남편의 고향은 전라도 순창. 시골이다. 어릴 때부터 모두가 가난한 가운데서도 더욱더 가난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아프셨기 때문이다. 달력에는 늘 며칠에 얼마 며칠에 얼마라고 갚아야 되는 돈 금액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몇 천명 가운데 공부는 1등 했다는 남편은 중학교에 갈 때, 다른 아이들은 1만2천원 필요했지만 3천원만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없어서 밤에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해야하는지 상의하고 있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고 자기가 일하고 돈을 벌어 중학교에 가겠다고 2년 일하다가 중학교에 갔다. 고등학교는 서울에 올라와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했는데 야간 학교에서도 공부는 잘해서 일, 이등이었다고 한다.
처음은 남편은 언젠가 돈을 벌어서 대학에 가겠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돈은 모와지지 않고 참기름과 엿기름, 고춧가루 장사를 하다가 경쟁에 저서 사업은 실패. 그 후 2년 정도 행방불명이었다고 한다.
도련님의 이야기로는 술을 많이 먹고 아버지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툭 하면 소 팔고 뭐 팔고(부모님께서 남편을 위해) 했다고 한다. 다시 집에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많이 아프시고 수술을 네 번 하고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실명하시고 도련님도 동시에 아팠다고 한다. 남편은 건설재료회사에서 노동일을 하면서 그 병원비를 벌어야 했다. 참으로 고단한 생활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술을 같이 마시다가 화투도 하고 경마도 하고 복권도 사고. 현실의 어려움으로부터 잠시나마 마음의 위로를 느낄 수가 있었던 걸까. 그런 꿈이라도 꾸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 있을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은 나를 만나면서 술을 끊었고 나도 콩깍지가 세워져서 그런지 가난한 것 따위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생활은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남편이 노동일을 하다가 일터에서 싸움이 일어나 다시 술을 마시게 되었다. 신문지국을 하게 되고 생활은 더욱 더 어려워졌다. 아이가 하나 둘 태어났다. 아주 어려울 때 남편의 호주머니에서 가끔 나온 경마 티켓. 그 때쯤 옛 친구, 지인이라고 집에 찾아 온 분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화투를 치고. 뭔가 생활에 지치고 좌절하고 자포자기한 모습들이었다. 셋째를 임신할 때 돈이 없어서 반찬은 김치만 먹는 날도 많았다. 셋째 아이가 갑상성 저하증, 빈혈, 중이염 여러모로 약해서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넷째를 임신할 때는 돈이 없어도 잘 먹도록 애를 썼다. 넷째가 태어나 생활은 어려웠지만 남편의 성격이 밝아지고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 막내가 누워있는 아빠 얼굴을 핥으며 “맛있다” “맛있다” 할 때 “아~아~” 비명을 내던 남편의 모습. 흐뭇하고 행복하기도 했다. 외로운 남편의 마음자리가 조끔씩 채워주기들 간절히 바랬기에.
네 아이를 화재로 잃게 될 때까지 여러 사정이 있었다. 이이들을 보낸 뒤로 매달릴 듯 무리하게 신문지국 경영을 한 기간이 있었다. 한계가 오고 그만 두게 되었다. 나는 두 번 임신을 했지만 유산으로 끝났다. 부부관계도 상당히 어려웠고. 그 후 남편은 다단계사업을 한다고 열심히 뛰었다. 크게 돈을 벌겠다고 행복해했다. 하지만 돈을 벌기는커녕 있었던 돈도 없어지고 그 때 우리는 해어질 뻔했다. 2년 후 남편은 돈도 인간관계도 잃고서야 실망하고 그것에서 발을 뺐다. 난 가슴을 쓰려 내렸다. 2년으로 끝나서 다행이라고.
하지만 중독성이 있는 것은 마약이나 술만이 아니었다. 도박도 중독이고 다단계도 상당히 중독성이 있는 것을 알았다. 교회 새 식구 중에 예의 바르고 신사적인 분이 있었다. 다단계사업을 몇 가지 하고 계셨는데 집도 옆 동내이고 남편은 돌봐준다고 가깝게 지냈다. 처음은 성경이야기, 신앙이야기를 했는데 점점 그 분이 다단계 사업에 남편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권유로 코인투자를 하게 되었고 주변 사람을 연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죽기 살기로 해서 그런지 괘나 많은 분들이 남편의 권유로 투자하니까 지금 수익이 많은지 떼돈을 벌겠다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다. 돈을 벌면 교회건물도 사고 청소년수련원도 만들고 장학재단을 만들고 시동생에게 슈파 하나 마련해 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고,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다.
돈이 많은 사람이 모두 착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을 가득 갖고 있다면 이세상은 바로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에 언제 마귀가 들어갈지 모르는데. 코인투자에 완전히 빠진 남편 옆에서 나는 늘 걱정이다. 나라와 세계가 가상화폐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이제 점점 현금을 안 쓰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도 하루정일 카드 하나로 외출하고 쇼핑하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왔다. 찍찍 소리 하나로 나가버린 돈. 이제 더 이상 돈의 무게를 느낄 수가 없다. 학생 때 받은 그 1만엔 지폐의 무게. 오늘 따라 그 무게가 그리워진다. (2019.7.15.)
お金の重さ 文孝苑
お金というものは人間にとって何なのか。火に焼けば空しく灰になるもの。人間たちがそれほど死に物狂いになって持とうとするもの。たぶん、お金さえあれば持つことができると思われるすべての権力、希望、自由、その象徴であるからであろう。
私は日本の大阪北部の田舎に生まれた。農夫の娘だ。農閑期には父は石垣を積んだり、庭園に石を置いて木を植えたりする仕事をした。土方仕事だ。それほど収入が安定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ので母が着物(日本の伝統衣装)を作る内職をしたり、たばこ屋をしたりしてやりくりをしていた。七人家族だったので、余裕はなかった。
兄と上の姉は高校を卒業して就職し、下の姉は学費のあまりかからない看護婦学校に行った。四人兄弟のうち、私だけが四年制の大学に入った。私立だったので家計にかなりの負担だったはずだ。しかし両親はおまえのせいでお金がかかるという話は一度もしたことはない。ただ、母が私に下宿代と生活費をくれる時ごとに、「これはお父さんが血と肉を切り売りして稼いだお金やで。」 必ずそういってからお金をくれた。その言葉を聞いた瞬間、私の手に渡された一万円札の紙幣が急に重くなったように感じた。買いたい本や、絵画部で使うお金はアルバイトで自らまかなった。
小学校の時から、毎年運動会で抽選をすると、父がガムだけ一箱もらっていた。全部はずれだったのだ。どこにいっても、抽選といえばいつもはずれだった。そのせいか私は宝くじも買ったことがないし、パチンコも一回ぐらいは何かのことで店に入ったかもしれないが、そのあと二度と行かなかった。
母がお金について、いつも言っていたことがある。それはお金は絶対に、貸しても借りてもいけないということだ。貸してあげて返してもらえない場合、お金もなくなって、人間関係もなくしてしまうというのである。そして自分自身がお金がなくて困った時ごとに、そのお金が思い出されて、借りていって、返さないその人を憎むようになると。余裕があったら、いっそあげてしまったほうがいいと。母がそういうのは経験があってのことだった。私が小学校にもまだ行ってない頃、ある年のお正月だった。久しぶりに遊びに来て、子供たちといっしょに泊まっていった遠い親戚の人がいた。その時十万円を貸してあげたのだが、その後お金も返さず連絡もなく、再び現れなくなったのだ。その家族の姿とともに、母の言葉が私の胸に刻まれた。
このように育った環境のせいか、私はお金に対して少しけちになったのかもしれない。良く言うと節約するほうである。気前良くおごってあげたこともなく、大きく人のためにお金を使ったこともない。現実的にお金がそれほどないのも事実ではあるが。
主人はお金に対して、私とは全然違う考え方と理想をもっている。韓国の全北淳昌郡、子供の時からみんなが貧しい中でももっと貧しかったという。お母さんが病気だったからだ。カレンダーにはいつも、何日にいくら、何日にいくらと返さなければならないお金の金額が書かれていたという。小学校何千名の中で勉強は一番だったという彼は中学校に行くとき、他の子供たちは一万二千ウオン学費が必要だったが、主人は三千ウオンだけあればよかった。しかしそれさえもなく、夜そのお金をどうやって工面しようかと相談している両親の声を聞いて、自分が稼いで中学校に行くと光州で二年働いて中学に行った。高校はソウルに出てきて昼は働き、夜、夜間学校で勉強した。そこでも勉強は、一、二番だったそうだ。
はじめは主人はいつかお金を儲けて大学に行くのだという気持で仕事をした。しかし、なかなかお金はたまらず、胡麻油、とうがらしの粉、麦の芽などの商売をしていたとき、競争に負けて失敗し、その時二年ほど音信不通、行方不明になっていたそうだ。
主人の弟の話によれば、その頃の彼は、お酒をたくさん飲んでお父さんに対して悪態をついたりしたそうだ。そして、ことあるごとに(両親がお金を作るために)牛を売ったり何かを売ったりしたという。再び家に帰って来たときはお母さんの具合いがたいへん悪く、結局四回の手術の後亡くなり、お父さんは失明し、同時に弟も原因不明の病気で入院したり。主人は建設会社で働きながら、その病院費を稼いだという。どんなに孤独で苦しい生活だっただろうか。そのなかで酒をいっしょに飲んだり、花札をしたり競馬をしたり、宝くじを買ったりしたようだ。現実の苦痛からしばらくの間だけでもこころの慰めを感じることができたのだろうか。そんな夢でも見ていなければ、とうてい生きてい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
主人は私に会ってからお酒をやめた。私も愛は盲目といったらいいのだろうか、はじめてあった頃、貧しさなどはまったく気にならなかった。生活は最初から苦しかった。主人は仕事場でけんかがあって、ふたたび酒を飲むようになった。新聞支局をするようになって、さらに生活は厳しくなった。子供が一人、二人、生まれた。生活がとても厳しいとき主人のポケットからでてきた競馬の券。その頃、主人の友だちと言えば酒をのみ、たばこを吸い、花札を打ち、何か生活に打ちひしがれて自暴自棄な姿だった。三番目を妊娠したとき、お金がなくておかずはキムチだけをたべることも多かった。三番目の子は甲状腺ホルモン低下症、貧血、中耳炎、いろいろ弱くて、この子にはいつも済まなかった。四番目を妊娠した時には、お金がなくてもちゃんと食べようと努力をした。四番目が生まれて、生活は苦しかったけど、主人の性格が明るくなるのを感じた。その末っ子が寝転んでいる父親の顔をぺろぺろなめて、「おいしいな、おいしいな。」と言うとき、「あ~あ~」と悲鳴をあげていた主人の姿がほほえましく、私は幸せだった。寂しい主人の心が、少しでも慰められるように、いつも願っていたがゆえに。
四人の子供を火事で亡くすときまでいろいろな事情があった。子供たちが逝った後、必死にしがみつくかのように、無理に新聞支局の仕事をする期間があった。限界が来てやめることになった。私は二回妊娠したが流産に終わった。夫婦関係も非常に難しかった。主人は多段階事業をすると一生懸命走り回った。大金を儲けるんだと幸せそうだった。しかしお金を儲けるどころか、あったお金までなくなって、その時夫婦関係も最悪になり、別れる間際までいった。二年たってお金も人間関係も失い、失望してそこから足を洗った。二年で終わって本当に良かったと私は胸をなで下ろした。
しかし、中毒性があるのは麻薬や酒だけではない。賭博も中毒、多段階もたいへん中毒性を持っているようだ。教会の新しい信徒で、いろんな多段階事業をしているある紳士のように見える人がいた。聖書についても詳しく、最初は、聖書の話、信仰の話をしていたがいつからか主人に多段階の事業に誘うようになった。
その人の紹介でコイン投資をするようになり、周りの人を紹介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必死でやるからか、かなりの人が主人の誘いで投資をするようになって、今は収入がいいようで、大金を儲けると言って幸せそうにしているのをみる。お金をもうけたら、教会をたてて、奨学財団をつくって、弟に店を買ってあげて、貧しい人を助けてあげてと美しい夢を見ている。
お金がたくさんある人がいい人で、貧しい人を助けたいという気持にあふれていたら、この世はすぐに幸せな世界になるだろう。しかし人間の心にいつ悪魔が入るかもわからないのだ。私は主人のしている仕事に対して、一方では常に心配でならない。だんだん現金を使わなくなっていくという時代の流れは認めるのだが。仮想貨幣に対して、国と世界がどう対処するのか。またお金をめぐるストレスをどう処理していくのか。
今日も私は一日中、カード一枚で外出し、買い物をし、地下鉄に乗り、バスに乗って家に帰ってきた。チッチッという音一つで出ていくお金。そこではもうお金の重さを感じることがない。学生の時、母からもらった一万円札の重さ。今日に限ってその重さが、なぜか恋しい。(2019。7)
첫댓글 ご苦労されたんですね。
私たちの苦労は,必ず報われるって思うけど
時には切なくなりますよね。
息子も食べ物がなくて献血すると貰える
ハンバーガーのチケットが楽しみで
カレンダーに次の献血日をチエックしてるのを
見ると心が痛いです。
そうか。私は最近マーフィの眠りながら巨富を得るという本を読んで、私の心の持ち方や考えにも問題があるかなと今研究中です。
저도 남편이 수입이 없어서 제가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고있습니다 근데 요즘 유튜브를 통해 현실은 자기가(潜在意識が) 만든것이다 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참재의식을 바꾸는 좋은방법을 배워서 실청하고 있는데 뭔가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방법은 쉬운것이라 소개 하겠습니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생각날때 마다 계속 말하는것입니다
걸어다니면서 일하면서도 버스안에서도 많이많이 말하는것이 중용합니다
꼭 신청해보세요~
진심으로 행복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その話、ほんとだよね!
まさに、ありがとうは奇蹟のことば、ですね!すばらしいあかし、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ゆきんこオンニ 応援してまー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