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즙은 왜 ‘전면에 염을 확립하고’라는 원문을 옮기지 않았는가(1장): 마음챙김(sati)의 중요성
‘전면(前面)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의 원문은 pratimukhīm smr*tim upasthāpya이다. 여기서 pratimukhīm은 prati(대하여)+mukha(얼굴, 입)에서 파생된 부사로서 ‘얼굴을 마주하여’의 의미에서 ‘마주하여, 반대로’의 뜻으로 쓰인다.
smr*ti는 √smṛ(to remember)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기본의미는 ‘기억’이지만 불교 특히 초기불교에서는 전혀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여지지 않는다. 초기경에서 기억이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는 항상 접두어 anu(~를 따라서)를 붙여서 anussati 혹은 anusaran*a나 동사 anusarati가 쓰임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에서는 念으로 옮기고 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가장 오해하고 있는 술어가 되었으며 아예 대승불교에서는 그 중요한 의미가 잊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국내에서는 (사)고요한 소리에서 ‘마음챙김’으로 정착시키고 있는데 좋은 번역이라 하겠다.
upasthāpya는 upa(위로)+√sthā(to stand)의 사역 동명사로서 ‘무엇의 위로 굳게 서는’ 것을 의미하며 ‘확립하다, 제공하다, 시중들다, 준비하다’의 뜻으로 쓰인다.
전체를 현장은 住對面念으로 직역을 하고 있다.
이에 상응하는 빠알리어는 parimukham satim upat*t*hapetvā이다. 실수행에 관계된 빠알리어 정형구들 중에서도 아주 중요하고 의미가 깊은 문장으로 여겨지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구문이다.
그것은 첫째, pratimukhīm(Pāli: parimukham)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가를 정확히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듯이 먼저 산스끄리뜨와 빠알리어가 음은 비슷하지만 달리 표현되고 있다. 먼저 빠알리어의 뜻을 음미해본다면 pari 가 ‘~의 주위에’의 뜻을 가진 접두어이므로 ‘mukha 주위에’를 나타내는 부사로 이해한다.(satim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아님) 그러면 무카는 무엇을 뜻하는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얼굴이요, 다른 하나는 입이다. 그래서 ‘얼굴 주위에’가 아니면 ‘입 주위에’의 뜻으로 보면 되겠다. 그러면 전체적으로 ‘얼굴 주위에(혹은 입 주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서’의 의미인데 어떻게 얼굴이나 입 주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는지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어떤 자들은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입술 위의 부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얼굴 전체나 입 부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 부분의 빠알리어 주석서(At*t*hakathā)에 의하면 ‘명상주제를 향해 염을 두고’ 또는 ‘염(원뜻은 바른 기억)을 [그 반대, 즉 망각으로부터의] 출구를 삼음으로써 [망각을] 제어하고’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한편, 본문에서 보듯이 산스끄리뜨본에서는 모두 pratimukhīm으로 나타나는데 prati는 against의 의미이고 무카는 입이나 얼굴이다. 그래서 현장은 對面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과연 부처님은 parimukham을 말씀하셨을까 아니면pratimukhīm을 말씀하셨을까를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한 번 살펴보는 것도 불교 술어가 어떻게 정착이 되어왔는지를 아는 좋은 보기가 되겠다. 후대 빠알리어 문헌에서는 paṭimukham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빠알리어의 pat*i는 산스끄리뜨의 prati와 상응하며 쁘라끄리뜨에서는 pad*i나 pai로 나타난다.) 요즘 초기 불교학자들이 대부분 인정하듯이 빠알리어 삼장 이전에 어떤 모(母) 경전군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빠알리어와 유사한 쁘라끄리뜨로 암송되어져 왔을 것이다. 그 암송으로 전해져온 것의 발음이 pad*imukham이나 parimukham과 비슷했다면 그 음운을 빠알리 전통에서는 parimukham으로 전승했고 후대 산스끄리뜨를 사용한 대승불교나 교단에서는 pad*imukham으로 전승을 해서 그에 상응하는 산스끄리뜨인 pratimukhīm으로 정착되었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그 원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이다.
둘째, 북방불교, 즉 대승불교에서 초기불교 술어들을 이해할 때 가장 잘 못 이해하거나 소홀히 다룬 술어가 바로 이 sati(Sk. smr*ti)라 하겠다. 어원이 √smṛ(to remember)라서(혹은 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이 중요한 술어를 단순히 ‘기억’이나 ‘생각’ 정도로 이해한 것 같다. 그래서 초기 불교 수행에서 가장 중요하게 아니 불교 수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용어를 오해 내지는 쉽게, 아니면 간단하게 취급해버린 것 같다. 그래서 8정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 sammāsati)이 대승불교의 실천도인 6바라밀에서는 상실되어버리고 대승불교 수행의 어느 곳에서도 정념은 강조되지 않는다. 현대의 일본 불교학자를 중심한 분들도 정념을 ‘바른 기억’ 정도로 번역해 버리고 넘어가 버린다.
마음챙김(sati)이 왜 중요한지, 아니 부처님께서 그처럼 강조하셨고 불교 수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가를 설명하자면 말이 길어진다. 간략히 말하겠다. 먼저 부처님의 성도과정을 언급한 초기경들(M26, M36 등)을 보면 부처님께서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는 당대 인도 정통파 수행자들이 자부하는 최고의 경지까지 마스터하시고도 - 여기에 대해서는 산냐를 설명할 때 다루겠다 - 그것이 구경의 경지가 아님을 아시고 버리고 떠나셔서 고행자의 전통을 따라서 온갖 난행고행을 다하신다. 그러다가 목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이것으로도 구경의 해탈을 실현하지는 못한다고 아시고 이를 버리고 몸을 회복해서 니련선하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사유하신다. 거기서 유년시절의 농경제 때 좌선을 하시면서 경험하신 그 행복함을 깊이 사유하시고 그래서 초선에서 4선까지 체험하신다. 여기서 삼선과 사선의 키워드가 바로 사띠(sati)이다. 삼선에서는 ‘평온하게 마음 챙기며 행복에 머문다(upekhako satimā sukhavihāri)’로 사선에서는 평온에 기인한 마음챙김의 완전한 청정(upekhāsatipārisuddhi)으로 나타난다.
부처님이 외도의 선정수행과 고행을 바른 수행이 아니라고 파악하신 것은 그 수행법에는 선정이 있지만 정념(正念, sammā-sati)이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정념이 없는 선정(사마디)은 삼마사마디(sammā-samādhi) 즉 정정(正定)이 아니다. 정념이 있는 사마디야말로 바른 사마디라고 역설하시는 것이 불교 수행의 핵심이라고 발제자는 감히 파악한다. 그럼 정념이 있다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정념이 있기에 극도로 미세한 느낌[受, vedanā]과 산냐[想, saññā]에 속지 않고 걸리지 않고 구경의 심해탈을 성취하게 된다고 발제자는 결론짓는다. 이 문제는 이런 간단한 말로써는 논의할 개재가 아니므로 발제자는 여기서는 그냥 문제의 제기만 하고 본 경을 주해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거듭해서 이 문제를 음미해보려한다. 우리 불교계에 이런 문제의 제기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아무튼 이 사띠가 있기에 불교수행이 불교수행인 것이다.
그리고 발제자가 조사해본 바로는 베딕(Vedic)이나 클래식(Classic) 산스끄리뜨 문헌에서 사띠가 수행용어로 나타나는 적은 없다 해야 하겠다. 산스끄리뜨 스므르띠(smṛti)는 천계서(天啓書)로 번역되는 슈라우띠(śrauti) <<주: śrauti: √śru(to hear)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들은 것’이라는 의미이고 인간의 기억(smṛti)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신들의 계시를 직접 듣고서 편찬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로서 베다 본집(saṃhitā), 브라흐마나, 아란냐까, 우빠니샤드나 이를 수뜨라 형태로 간결하게 정리한 슈라우따 수뜨라 등을 의미한다.>> 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인간의 기억으로 편찬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며 마누법전을 마누스므르띠라 부르는 등 슈라우따 문헌의 다음 단계의 제 문헌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인다. 그리고 후대 6파철학 등의 문헌에서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자이나교에서도 초기 문헌으로 간주하는 아르다마가디 문헌에는 스므르띠라는 용어에 해당하는 아르다마가디가 수행용어로서 쓰인 적은 없다해야 하겠고 흥미롭게도 자이나 공의파(空衣派, Digambara)파와 백의파(白衣派, Śveta-ambara)에서 다 같이 경전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문헌이며 그만큼 중요하게 취급하는 Tattvārtha-adhigāma-sūtra에서 smr*ti-anupasthāna라는 용어가 수행을 설명하는 장에 나타나지만 불교에서처럼 심도 깊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발제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이 이외에는 수행용어로 나타나는 적이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런 점만 봐도 부처님이 구경의 해탈 열반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ekayāna, D22 대념처경에 나타나는 말임)로서 새롭게 제시하신 것임에 분명하다 하겠다.
사띠에 대한 중요한 점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아나빠나사띠숫따(Ānapān*asatisutta, 출입식념경, 出入息念經)를 2세기에 안세고는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으로 옮기고 있다. 여기서 안세고는 아나빠나(出入息)를 안반으로 음사하고 있으며 사띠는 念이 아닌 수의(守意) 즉 마음(意, mano)을 지키는 기능으로 의역하고 있는데 참으로 고결한 안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의는 의근(意根) 즉 마노인드리야(mano-indriya)를 뜻하며 우리가 법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향상일로로 나아가게 하는 기능이다. 바로 이 기능을 지키고 챙기는 것이 바로 사띠이다.(발제자는 본 경을 주해하면서 거듭해서 마노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둘째, 이것은 그냥 안세고가 자신의 생각으로만 선택한 번역어는 아니라고 본다. 너무도 중요한 경이 상응부에 나타나기 때문이다(S48.42). 여기서 세존께서는 Un*n*ābha(운나바)라는 바라문 수행자에게 안·이·비·설·신·의 5근은 마노(제6근)를 의지처로 하고(pat*isaran*a) 마노는 사띠를 의지처로, 사띠는 저 해탈을, 해탈은 열반을 의지처로 한다고 고구정녕하게 가르치고 계신다. 여기서만 봐도 사띠가 얼마나 중요한 불교 술어인가를 알 것이다. 세존께서도 이 운나바 바라문의 질문을 아주 칭송하여 “비구들이여 운나바 바라문의 믿음은 여래에 들어갔고 뿌리했으며 들어가서는 굳건하여(tathāgate saddhā nivit*t*hā mūlajātā patiṭṭhitā daḷhā) 사문 바라문 신 마라 범천이나 이 세상의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다(asamhāriyā). 비구들이여 설령 지금 운나바 바라문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 어떤 족쇄도 운나바 바라문을 이 세상으로 돌아오게 하지는 못한다.”라고 다른 경에서는 보기 드문 칭찬을 하고 계신다. 그러나 한역 아함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