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
이연신, 충남가정위탁지원센터
초등학교 시절 남자 친구 두 명이 있었다. 둘 다 성적은 뒤에서 일이 등을 다투었고 그러다 보니 수업이 끝나고 나머지 공부는 일상이었다. 당시에는 내가 그 가운데 한 친구에게 방과 후에 공부를 알려주어야 했다. 아무리 알려줘도 모르는데 선생님은 계속 그 일을 맡기셨다. 그게 어찌나 싫었는지 모른다. 당시 우리는 그 친구들을 바보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배척하거나 싫어하진 않았다. 또래에 비해 어리게 행동하고 말썽도 많이 피웠지만 친구들과 잘 놀았고 잘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동네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 함께 놀고 함께 밥을 먹으며 자랐다. 우리 곁에 항상 그 친구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남녀 중학교로 나누어지던 시절 그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었고 지금까지 그 친구들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들은 소위 지적장애였다. 장애라는 용어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기에 부르는 이름은 달랐을 거다. 그러나 그들을 별난 존재로 구분 짓거나 격리하진 않았던 기억이다. 그저 곁에 있었고 함께 세상을 살았다. 그런데 지금 그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
중학교 이후 일상에서 신체적 장애든 정신적 장애든 장애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장애인을 인지하고 가까이 만난 것은 20대 후반 복지관에 근무하면서 같은 건물 내에 장애인보호작업장이 있어서였다. 그곳에서 일하던 수철 씨는 나보다 키도 몸도 목소리도 크다. 사람들의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았고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니 쉬는 시간 복도에서 만나면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익숙해진 내게도 때론 큰 목소리에 놀랄 때가 있었는데 낯선 복지관 이용객은 때론 불편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고, 아이를 데리고 오는 부모 중에는 일부 피하려는 모습까지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 초등학교 시절 내 친구도 어디에선가 이런 시선을 마주하고 있진 않을까.
「그 아이는 히르벨이었다」에 주인공 히르벨도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다. 본명은 카를로토지만 모두들 히르벨이라 부른다. 독일어로 히른은 ‘뇌’ 또는 ‘지능’을, 베르벨은 ‘소용돌이’ 또는 ‘혼란’을 뜻한다. 소용돌이치는 뇌를 가진 아이, 히르벨은 태어날 때부터 끔찍한 두통을 앓고 있었고 위탁가정에서 감당하지 못해 도시 변두리 시립 아동보호소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선생님에게 오줌 싼 팬티를 집어 던지는 엉뚱한 아이지만 사과나무 위에서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다. 자신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선생님에게 게임을 보여주는 생각보다 똑똑한 아이기도 하다. 이런 히르벨이 아동보호소 안에서 말썽을 많이 일으키지만 이곳을 떠나면 정신병원에 입원할 것을 알기에 함께 지내는 친구들과 선생님 누구도 그를 내쫓고 싶진 않았다. 그에게 친절하진 않지만 그래도 함께 살았다. 하지만 결국 히르벨은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함께 있던 곳을 떠나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히르벨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히르벨도, 초등학교 시절 내 친구도 지금은 우리 곁에 없다.
이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이 친구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히르벨과 같은 아이를 점점 만나기 힘들다. 그들은 장애학교에 머물기도 하고, 정신병원에 있기도 하고, 때론 집에서 나오지 않기도 한다. 초등학교 시절 같이 공부하고 놀던 친구들이 더 이상 우리 곁에 함께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에 따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정확히 경계를 나누어서 말이다. 서로가 만날 수 있는 곳이 점점 사라지니 우리는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게 된다. 존재를 모르니 함께 어울려 사는 법도 모른다.
그들이 함께 어울려 살 때는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당연했고 그들을 위해 내 것을 내어주는 것도 당연했던 거 같다. 어울려 살아야 하기에 그렇게 사는 법을 자연스레 배웠다. 함께하기에 그들의 모습이 낯설거나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이든 마음이든 정신이든 아프게 된다면 나 또한 누군가 함께해 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이곳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숨어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삶터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으리란 믿음, 친구들이 동네 사람들이 도와줄 거란 믿음 말이다.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 세상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우리와 그들이 사는 세상의 경계를 확실히 그어 버리고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막아 버리진 않았을까. 세상에 나왔을 때 감수해야 할 불편한 시선과 차별, 한 발자국 뗄 수도 없게 만드는 장애물이 그들의 삶을 앗아가진 않았을까. 숨어 살라고 하진 않았을까.
히르벨과 같은 아이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음 좋겠다. 더 많이 부대끼고 서로 더 알 수 있음 좋겠다. 그들이 우리 곁에 함께 살고 커갔으면 좋겠다. 나와 함께 여기 사는 한 사람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고 받아줄 수 있는, 있는 그대로 그 아이들을 존중할 수 있는, 그럴 수 있는 어른이 우선 되었으면 좋겠다.
일을 하면서 히르벨과 같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점점 더 많이 생긴다. 또래와 무언가 다르다고 하면 혹시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닌지, 지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살피며 여러 진단(지적장애, 품행장애, 자폐, 경계선 지능, 우울, ADHD 등)을 너무도 쉽게 받아온다. 실제로 조기에 발견하여 적절한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한 아이에게 이러한 진단명이 내려지는 순간 우리는 그 아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진단과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진단,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 아이들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밖에 위치하게 된다. 그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부터 우리 아이들은 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은 없어지고 그 이름이 갖는 특성으로 획일화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보기 시작한 아이들은 그런 점들이 더욱 눈에 두드러지고 그런 아이로 행동하게 되고 그렇게 점점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우리는 누구보다 이름이 가진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잘 안다. 그러니 이런 이름을 갖게 된 아이들은 그런 아이로 낙인찍히기 시작한다. 히르벨처럼 병의 이름이 그 아이가 무얼 잘하고 무얼 잘 할 수 없는지 말해주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나부터 그런 이름으로 아이 부르기를 조심하려 한다. 아이들마다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들을 정말로 이해하고자 한다.
히르벨은 병을 앓고 있었고 제대로 의사 표현을 하지 못했으며,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행동을 많이 했다. 의사 선생님은 히르벨의 병명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히르벨이 앓고 있는 병의 이름을 안다고 해도 그 애가 뭘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뭘 할 수 없는지 말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히르벨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모든 사람에게 커다란 기적이었다.
「그 아이는 히르벨이었다」(페터 헤르틀링, 비룡소, 2001)
대체 히르벨이라는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우리가 고민할 필요는 없다. 다만 히르벨이 거기에 있다는 것, 바로 그 사실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책은 ‘히르벨이라는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이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우리도 이제 히르벨이라는 아이를 우리 세계에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어린이 책을 읽는다」 가운데 ‘영혼의 나라에 살다’(가와이 하야오, 비룡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