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Der Blechtrommel 1979) : 성장 멈춘 아이 통해 들춰낸 독일 역사
풀커 슐뢴도르프(Volker Schlo`ndorff) 감독
<양철북>을 본 사람은 누구나 떠올릴 만한 것들이 있다. 어린아이의 장난스런 목소리이지만 반음조쯤 높아 신경질적으로 들리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유리를 깰 수 있는 주인공 아이의 높은 기성, 바다에서 건져 올린 말의 머리에서 꾸역꾸역 나오는 뱀장어들, 연민을 느끼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로테스크한 난쟁이 연기자들.
자극적인 기억으로 남는 이 영화의 시작은 동화 같다. 황량하고 드넓은 감자밭에서 촌부가 구운 감자를 호호 불며 먹고 있다. 경찰을 피해 달려오던 한 남자가 여자의 네 겹 치마 속에서 바지 앞 춤을 여미며 나온다. 그렇게 잉태된 이가 주인공 오스카의 엄마다. 오스카는 자신이 태어나게 된 유래를 아주 자랑스럽고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영화는 동화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자궁 속에서부터 엄마를 동시에 사랑하는 두 남자 가운데 어떤 이가 자신의 아버지인지 혼동하면서, 또한 그때부터 너무나 섬뜩한 어른의 눈빛을 한 아이로 오스카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기이해져 간다. 아이의 목소리도 이제는 히스테리컬하게 들려온다. 그 아이는 세 살이 되던 날,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 특히 아버지의 눈을 교묘히 피해 성관계를 끈질기게 이어가는 얀 아저씨와 엄마,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방조하는 아버지의 행태에 실망하고는 더 이상 자라지 않기로 맹세하고 계단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그는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 세 살의 크기로 남아 있게 된다. 얀 아저씨가 준 양철북을 분신처럼 메고 다니며.
그가 성장을 멈춘 동안, 마을에서는 나치가 등극하고 위세를 떨치다가 패배한다. 엄마는 얀의 아이를 잉태한 채 자살하고, 아버지는 나치당원이 되며, 얀 아저씨는 폴란드인이란 이유로 나치에게 죽음을 당한다. 오스카가 사랑한 동갑의 마리아는 아버지의 정부가 된다. 또 독일군 위문공연에 나서는 서커스단에서 만난 난쟁이 여자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리고 패전 뒤에는 나치 배지를 다시 삼키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죽음으로 밀어넣는다.
오스카는 양철북을 두드리고 기성을 질러 유리를 깨는 것을 통해 세상에 개입한다. 엄마의 간통행위가 절정에 이르자 온 동네의 유리를 깨뜨림으로써 망치고, 나치 전당대회를 왈츠를 추는 무도장으로 바꾼다. 성적 열정과 정치적 엄숙함은 파괴되고 희화화된다.
귄터 그라스의 1959년도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독일 역사에 대한 일종의 학습이다. 영화는 오스카라는 비정상적인 아이의 시각이라는 우회도로를 통해 이 학습에 이르게 한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인류에 대해 최대의 죄악을 범한 이 역사에 대한 접근을 아주 기이하고 변태적인 것으로 만든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과거 독일을 죽이고, 아버지가 남긴 정부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르는 동생, 즉 아버지의 짐을 지고 어딘지 모를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오스카는 어쩌면 독일 전후 세대의 자화상이자 새로운 독일 영화의 자기 선언일지도 모른다.
폴커 슐뢴도르프가 새로운 독일 영화의 대표적 감독들과 공유하는 감성은 바로 이러한 역사에 대한 해석에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벤더스나 파스빈더, 헤르초크가 보여주는 개성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독일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추구하되 그 원천을 문학작품에서 찾는다. 사회비판적이고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서 이야기는 자극적이되 스타일은 그에 흡족한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양철북>은 칸에서도 수상하고, 아카데미에서도 외국영화상을 받았으며, 새로운 독일 영화 가운데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드문 작품이다.
ㅡ주진숙
소설 줄거리
귄터 그라스는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를 통해 병든 독일 사회의 내적 성찰을 이루고자 했다. 간호사 살해 혐의로 정신 병원에 갇혀 있는 오스카는 서른 살의 난쟁이 꼽추다. 그곳에서 그는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린다. 독일인 아버지와 카슈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스카는 세 살 생일 때 어른들과 세상에 대한 혐오로 스스로 성장을 멈추기로 한다. 그 후 오스카는 양철북에 집착하며 누군가 북을 뺏으려 하면 소리를 질러 주변의 유리를 깨트린다. 그는 어머니와 삼촌의 불륜을 목격하고, 어머니의 죽음 후 폴란드 우체국 폭격 사건으로 연루된 삼촌의 사형을 방관한다. 또 아버지의 가게 일을 돕기 위해 온 마리아를 좋아하게 되지만 그녀가 아버지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자 전선 위문 극단 단원 신분으로 집을 떠난다. 집으로 돌아온 오스카는 아버지가 소련군에게 사살당하자 성장을 결심하며 아버지와 함께 양철북을 묻는다. 서독으로 간 오스카는 누드모델과 드럼 연주자가 되어 독일 사회의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소설 독후감
자아도취에 빠진 지독한 잔소리꾼 ‘오스카 마체라트’
김선희(rosak@hanmail.net)
귄터 그라스의 작품들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많이 번역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이 『양철북』은 80년대 말에 익히 독자들에게 소개된 바가 있다. 아마 영화가 나오면서 뒤늦게 그의 1959년 작품이 출판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 그라스가 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면서 한 출판사가 ‘시대가 변하면 번역도 달라져야 한다’는 모토 아래 발 빠르게 그의 책을 새롭게 내놓았고 곧 그의 『양철북』은 소설부문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소설은 폴란드의 단치히가 주무대이다. 역사 속에서 숱하게 짓밟혔던 그곳에서 오스카 마체라트는 태어났다. 그는 그의 출생을 생생히 기억한다. 태어나면서 정신연령도 성인의 그것과 똑같이 지니고 있었다. 그가 술회하는 그의 지난날들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이 어머니의 정부(情夫)인 얀 브론스키의 아들이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것도, 계모의 아들인 이복동생 쿠르트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도대체 그의 말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끝까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쫓기는 할아버지를 숨기기 위해 할머니가 그녀의 네 겹의 치마 속으로 숨겼다가 그곳에서 오스카의 어머니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 그 자신이 노래로써 유리를 깨뜨리는 것. 스스로가 세 살 때 성장을 멈추게 했다는 것. 어쨌든 기발한 작가의 상상력들이 재미있다.
이 『양철북』 역시 그라스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근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따라가기 힘들다. 초반부의 생소한 유럽의 지명 때문에 주춤했지만 특이한 가족사를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그리 지루할 것도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작품의 생명은 오스카의 캐릭터가 살아 있다는 점이다. 그의 특이한 이력은 그의 지독하게 뒤틀린 인간성과 악취미에 기인한다. 오스카는 모가 나도 한참 모가 난 인간이다. 어쩌면 그는 일부러 상황을 악화시켜 아버지 마체라트를 죽였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모든 사실을 비꼬아대는 그의 수다는 지겨울 정도이다. 그러나 그의 캐릭터는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다행히 상황 전개에 리얼리티를 더한다.
오스카의 성장(?)은 단치히의 역사와 더불어 이루어졌다. 어쩌면 오스카를 통해서 단치히의 역사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그러면서 그라스는 오스카를 정상적 인물이 아닌 성장이 멈추어버린 난쟁이로 설정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궁금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책 말미에 붙은 서평에서는 뒤틀린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뒤틀린 시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라스는 이 『양철북』이 한낱 성장소설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양철북』이 전쟁을 거치며 어린 시절을 보낸 여타 많은 성장소설 중에 하나가 되기를 거부하고, 전쟁을 더 강조하여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라스는 실로 입담 좋은 작가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도 단점은 있다. 간결하지 못하고, 너저분하게 늘어지는 오스카의 부연설명적인 수다는 이 소설을 필요 없이 길게 만드는데 공헌했다. 그의 장점인 익살과 해학을 좀 더 깔끔하게 처리했다면 독자의 느낌은 더 생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하는 점이 있다. 『양철북』은 그들의 소설이다. 그들의 글이고 그들의 문학이다. 우리가 그들과 같이 열광할 필요까지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