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골이 된 선비골
어느 골짜기에 선비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조상님들의 높은 교육열 덕택에 그 마을에서는 올 곧은 선비가 대를 이어 배출되었다. 나라를 구한 독립투사와 학문이 높은 학자들도 많았다. 전래해오는 그런 마을 분위기로 인해 근동의 사람들이 자연스레 '선비골'이라 불렀던 것이 지명이 된 것이다.
언제부턴가 선비골이란 이름이 한심골이 되었다. 선비골은 양반촌이라 아이들 이름을 모두 항렬을 따라 지었다. 항렬을 따라 이름을 짓는 이유는 이름만 듣고도 같은 일가라는 형제애를 느끼게 하고, 아재비인지 조카인지를 바로 알아보고 서로 예를 갖추게 하려던 조상들의 지혜였다.
입향조 이래 14대 후손인 심자 항렬 대에 이르자 아이들의 이름을 한심이, 두심이, 삼심이……, 라고 짖기 시작 하였다. 심자 이름을 가진 이들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선비골을 한심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 심자는 깊을 심(深)자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란 뜻이었는데 선비골에 질투를 느껴온 사람들이 심자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산다고 농 삼아 한심골이라 부른 것이었다. 주위에서 한심하다는 의미가 연상되는 한심골로 자꾸 부르기 시작하자 선비골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한심한 사람이 되어 갔다. 그런데 더욱 더 큰 문제는 선비골이 한심골이 되어 가고 있는 줄도 모르는 한심이, 두심이 같은 심자 돌림의 형제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대가 변화하여 공맹의 가르침이 퇴색되고, 읍장. 군 의원. 시의원. 조합장 같은 신종 감투가 선거로 생기기 시작했다. 선거철만 되면 달구골, 서방골, 옻골에서 감투가 탐이 난 사람들이 다투어 출마를 하였다. 학덕이나 교양으로 치자면 당연히 선비골 사람 중에서 지방 대표가 되어야 했지만 '선비가 진흙탕에 몸을 담글 수는 없다’며 잘 나서질 않았다. 근동 사람들은 새로 생긴 감투마저 선비골 사람들에게 다 빼앗길까봐 선비골 사람들을 분열시켰다.
조합장 선거철이 되었다. 달구골의 달구씨가 아무도 몰래 선비골에 찾아들어 한심이를 불러내었다. 선비골 동책을 맡긴다며 잘 부탁한다고 꼬드겼다. 한심이는 착한 사람이라서 남의 일을 부탁 받으면 ‘죽을 둥 살 둥’모르고 해주는 사람이었다. 마을의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고 심자항렬의 시대가 되자 일가간의 구심력도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심이는 자기도 조합장 선거 같은데 나가고 싶기도 하였지만 원체 신학문을 아는 게 없으니 유식해 보이는 달구를 따르기로 했다. 어깨띠를 두르고 찦차를 타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선거운동원이 참 멋있어 보이기도 하였다. 자기는 농사꾼이 될 팔자가 아닌데 어찌 운명이 꼬여 농사를 짓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달도 없는 깜깜한 밤에 회나무 아래서 달구와 한심이는 손을 잡고 흔들다가 해어졌다.
며칠 후 서방골의 준구씨가 두심이를 불러내었다. 상엿집 옆으로 두심이의 손을 잡아끌더니 손에 하얀 봉투를 하나 쥐어주며, "두심 동지" 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고 갔다. 두심이는 그 "두심 동지"라는 말이 참 듣기 좋았다. 무슨 인민위원장 감투처럼 저절로 어깨가 으쓱거려지며 준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준구가 당선되면 크게 한자리 줄 것 같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옻골의 대발씨까지 선비골에 나타나 삼심이를 만나고 갔다. 지난번 읍민 체육대회 때, 아는 채 하며 악수까지 해주던 대발이를 생각하면, 삼심이는 지금도 감격스러워 꼭 잡은 두 손을 놓지를 못하고 있었다.
마을이 술렁거리고 있었다. 한심이, 두심이, 삼심이가 일가친척들을 찾아다니며 달구편, 준구편, 대발이편을 가르기 시작한 것이다. 선비골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한심이, 두심이, 삼심이를 중심으로 촌수가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이기 시작했다. 일가친척들 중심으로 살아온 오랜 마을의 전통이 당연히 그리 된 것이다.
경로당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패가 나눠지고 있었다. 달구란 사람은 어떻고 준구라는 사람은 어떻고 대발이는 어떻다고 평을 하면서 화목하게 지내던 일가친척들끼리 거품을 물고 싸우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욕설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회에 그 동안 미운 사람에게 품고 있던 앙갚음을 하고자 "누구는 누구편"이라고 소문을 내면서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게 했다. 준구, 달구, 대발이의 조합장 선거 싸움이 선비골 마을 일가들의 패싸움으로 번져 같다. 보다 못한 선비골의 진심이가 나서서 마을 회의를 소집하여 호소를 했다.
“우리 마을은 옛날부터 이웃마을에서도 부러워하던 선비골 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툭하면 일가들 끼리 싸움질이나 하니 이웃마을에서 얕보고 선거철만 되면 편 가르기를 하여 일가 간에 원수가 되게 합니다. 일가들끼리 이렇게 나눠져 싸울 것이 아니라 세 후보를 불러 놓고 정견발표를 들어 봅시다. 그 후보들 중 누가 고향을 위해서 진심으로 일할 사람인가를 들어 본 후에 마을 전체가 단결해서 그 사람을 밀어 줍시다. 그러면 타동네에서도 우리 마을을 두려워 여길 것이고 당선된 후보도 자기가 공약한 약속을 틀림없이 지킬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심이가 옳은 말을 했지만 이미 갈라진 민심을 한곳으로 모으기는 어려웠다. 회의를 하면 욕부터 앞세우는 두심이가 물 컵을 방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깽판을 치며 나섰다.
“ 야 임마! 니가 뭔데 나서서 동민들을 가르치려 드느냐! 니만 잘났냐! 이 세끼야!"
말리는 사람, 거드는 사람, 회의는 한바탕 멱살잡이로 끝나고 말았다.
선거결과 준구가 당선 되었다. 준구의 당선을 위해 꿩을 쫓는 사냥개처럼 뛰어다닌 두심이에게는 조합청소원 자리 하나 주어지지 않았지만, 두심이는 꼭 제가 당선 된 것 마냥 거들먹거리며 다녔다. 그 후로 마을주민들은 경로당에 모여서도 서로 말을 하지 않고 돌아 앉아 원수처럼 지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입힌 마음의 상처가 언제 아물지 알 수가 없었다. 근동 사람들 모두 선비골을 진짜 한심한 "한심골"이라 부르며 혀를 차고 있었지만 선비골 사람들만 모르고 있었다.
병심이 집 마당 한 쪽에서 또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개밥그릇을 가운데 놓고 강아지 세 마리가 물고 뜯으며 으르릉거리고 있었다. 같은 어미 배속에서 난 강아지들이 밥 때만 되면 서로 먼저 먹으려고 싸우는 것이었다. 보다 못해 밥그릇을 세 개로 나눠서 주었지만 힘이 조금 센 놈이 제 밥그릇은 내버려 두고 다른 강아지의 밥그릇을 빼앗으러 달려가서는 둘이 또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다른 한 놈이 눈치를 보며 재빨리 개밥을 퍼먹는데, 싸우던 두 놈이 이를 보더니 함께 우르르 달려들어 서로 물고 뜯고 난리였다.
" 진짜 개판이네-"
작대기로 개싸움을 뜯어말린 병심이가 집안 꼴도, 나라꼴도 하나 다르지 않다며 혼잣말을 내 뱉고 있었다.(2008. 8. 2)
# 수필 식으로 쓴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