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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나의 문학은 내가 발 디딘 곳이다 / 이문재
- 문학동네(1999년 여름)
박완서씨는 ‘난생 처음의 새봄’을 맞고 있다. 지난해 5월, 경기도 구리시 마천동 아치울 마을로 이사한 그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노후를 한아름 받아들고 있다. 마당 어귀에 핀 제비꽃 한 송이에서 그가 ‘마천동 금강산’이라고 명명한 아차산 기슭의 숲에 이르기까지 신생하는 생명들 속에서 순수한 기쁨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밤나무가 주종인 앞산, 아차산 기슭의 숲은 막 성년식을 치른 누이의 숱 많은 머릿단처럼 치렁거렸다. 한강에서 치고 올라오는 바람을 받아내는 품이 넉넉했다. 산 높이에 비해 매우 풍요로운 숲이었다. 주황색으로 외벽을 칠한 아담한 양옥의 거실에서 그 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커다란 유리창은 거대한 액자였다. 글을 쓰는 방에 나 있는 유리창으로도 앞산 숲이 그대로 들어왔다. 아침잠이 없는 그는, 서울에 살 때만 해도 신문을 뒤적이며 날이 밝기를 기다리곤 했는데, 아치울 계곡 깊숙이로 이사한 이래, 눈만 뜨면 마당으로 나간다. 생명 속으로 활짝 열려 있는 그 신새벽의 마당에서 작가는 신과 자연의 섭리를 새삼 확인하곤 한다. “노후에 이런 기쁨도 있구나 싶어요”라고 작가는 말했다.
'죽을 때까지 현역인 작가’가 거의 없는 우리 문단에서, 칠순을 눈앞에 두고도 왕성한 창작열을 선보이고 있는 그의 존재는 각별하고 독보적이다. 소설가의 정의는 단순 명쾌하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문명을 얻었다 싶으면 글쓰기를 멀리하고 ‘과거의 명성’에만 기대는 조로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70년, 마흔 살 늦깎이로 데뷔한 박완서씨는 지난 삼십 년 가까이 쉬지 않고 원고지 앞에 앉아 자기 자신과 시대, 역사와 정면했다. 그의 작품과 작가정신에 바쳐져온 상찬은, 지난봄에 나온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올 여름, 지금까지 발표한 단편들을 집대성한 ‘박완서 단편 전집’(전5권)을 펴낼 예정으로 있고, 앞으로 두 편의 장편소설을 더 쓸 계획이다.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소설을 쓰는 소설가로 남아 있겠다는 것이다.
이번 인터뷰는 4월 15일, 박완서씨의 자택에서 진행되었다.(금강산에 다녀온 소회를 묻는 대목은, 나중에 추가했다.) 소설가의 표정은 맑고 건강해 보였다. 그는, 이야기꾼인 어머니와 젊은 시절의 우상이었던 오빠의 죽음, 그리고 6·25 체험으로 압축되는 박완서 문학의 근원에서부터, 88년에 겪었던 극심한 고통,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대한 작가로서의 애틋함, 신에 대한 견해, 단편 전집을 펴내는 감회 등에 이르기까지를 특유의, 정감 어린 달변으로 털어놓았다. 간간이 웃음이 섞여 있는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의 이야기 속에는 “뒤끝이 없는 삶”을 견지해온 노작가의 작가정신과 체험적 문학론이 깃들여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데뷔 이후 현재까지 엄청난 양의 작품을 발표해오셨습니다. 젊은 작가, 평론가들도 선생님의 왕성한 필력 앞에서는 찬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70년 데뷔 이후, 중단편, 장편, 산문 등 거의 쉬지 않고 작품을 써오셨는데,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웃음) 자발적으로 쓴 것은 데뷔작밖에 없는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걸 어떻게 썼나 싶어요. 발표될 가능성도 없었고. 운이 좋았지요. 그때만 해도 작가 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 기회가 많았지요. 그 동안 청탁 안 받고 쓴 것은 없어요. 처음에야 『여성동아』로 나왔으니까 거기서 잡문 같은 걸 청탁하면 열심히 썼어요. 활자화에 대한 공포감이 있잖아요. 활자화하면 누군가의 눈에 띈다는 것 때문에 잡문 쓰는 것도 고통스러워요.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당시는 『월간문학』 『현대문학』밖에 없을 땐데, 소설은 더 열심히 썼지요. 그리고 그 동안 쓴 장편 같은 걸 뒤돌아보면 어떤 추억 같은 게 있어요. 지금이야 호락호락 청탁에 응하진 않지만, 그때만 해도 청탁이 고마워 약속을 했다가 거기에 물리게 되잖아요. 『미망』 같은 거 쓸 때만 해도 이어령 선생 부탁으로 쓰게 되었는데 오 년 동안이나 붙들고 있었어요. 우리 집안의 불행한 일은 그때 다 생기고. 너무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안 쓰겠다고 다짐했지요. 그래도 연재라는 게 처음에는 편집자와의 약속이지만 결국에는 독자와의 약속이잖아요. 그 약속을 지키려고 썼지요. 나 혼자 쓴 게 아니에요.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쓴 거예요. 뭐 하나 붙잡히면 언제 여기서 놓여나나, 그 놓여났을 때를 생각하면 기분좋고. 그것 때문에 쓰고 그렇죠, 뭐.
―선생님이 쓰신 글이나, 젊으셨을 때 사진을 보면 소위 기가 대단히 강하셨을 것 같은데요. 개성 사람 기질이랄까, 그 특유의 에너지 말이에요.
기라니요?(웃음) 그건 기하고는 다를 거예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나를 보고 기 부족이라고 하셨어요. 기운이 없었다는 거죠. 결혼 사진 같은 걸 보면 둥그렇고 푸하게 나오는데 어릴 적부터 살이 쪄본 적이 없어요. 여지껏 그렇게 가난하게 살지도 않았고 부자로 살지도 않았지만 육체노동 안 하고 살았어요. 60∼70년대 서울의 웬만한 집에서는 부리는 사람을 두고 살았어요. 애를 여럿 낳고 그래도 억센 일을 해보진 않았지요. 조금만 억센 일을 해도 몸살이 나서 기 부족이란 소릴 들었어요. 욕심이라고 해야 하나, 기 같은 거보다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자 없이 깔끔하게 처리해야 된다는 마음이 배어 있지요. 아까 말한 개성 사람 기질이 그런 거지요. 바느질 하나를 해도 실밥 하나 잘못되면 께름칙한 거를 못 견디는 거지요. 금전적인 것에서부터 감정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명확하지 못한 것, 뒤끝이 흐린 것에 대해서는 혐오감 같은 걸 가지고 있어요.
―이런 질문을 많이 들으셨을 텐데, 숙명여고 시절에 한말숙 선생 같은 분들하고 같은 반이었잖아요.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이 한창 작품활동을 전개할 때, 선생님께서는 생활인으로 지내셨습니다. 그때 동년배 작가들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제가 막내애를 가졌을 적에, 물론 나는 글도 안 쓸 때였죠. 말숙이는 그때에야 결혼을 했어요. 걔도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있어서 그 집 큰아들하고 제 막내하고 같은 나이인가 한 살 차이가 나나 그래요. 내가 한참 시집살이하고 애 낳고 할 적에 말숙이는 한창 문명을 날리는 교수 작가였죠. 하지만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 같은 건 없었어요. 나는 굉장히 느긋했습니다. 언젠가는 쓰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 있었어요. 공부를 계속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안에 안 쓰고는 못 배길 무언가를 갖고 있었죠.
―그런 믿음의 뿌리는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지금 문학과 떨어져 있지만 언젠가는 문학을 하게 되리라 하는 확신은 숙명여고 선생님이셨던 소설가 박노갑 선생님의 영향이세요, 아니면 어렸을 때부터 각인된 꿈이었는지요.
글쎄, 모르겠네요.(웃음) 어떤 예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무튼 자랄 때는 몰랐는데 결혼생활하면서 내가 너무 특별하게 길러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부자로 길러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들에 비해 재량권이 있었죠. 집안에서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자유롭잖아요. 그래서 그랬겠지만,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나는 왜 이렇게 특별하게 길러졌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30년대 우리 시골 마을에서는 여자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었습니다. 제 고향은 벽촌이었어요.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하셨죠. 오빠는 일제 때 고향에서 4년제 학교를 다녔는데 5, 6학년 때는 개성 시내에 있는 더 나은 학교로 갔고, 중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했어요. 그렇게만 해도 특별하게 공부를 시킨 것이었는데, 저는 아예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공부를 했거든요. 우리 어머니가 무심히 그런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교육을 시키신 거예요. 계집애라고 무시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기대를 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내가 잘나서 그러려니 했죠. 아버지도 안 계시고 그렇다고 해서 재산이 있는 것이 아닌데, 바느질품 팔면서 최고의 교육을 시키셨어요. 내가 그렇게 똑똑했던 것도 아닌데 차별을 두지 않았어요.
그렇게 자라나서 결혼을 했는데, 그때야 여성에 대한 의식화 같은 것도 별로 없을 때였잖아요. 시집와서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에 접하고 다른 사람 사는 것도 보면서 내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 혜택인 동시에 굉장한 짐 같았어요. 굉장한 기대를 갖고 자식을 기른 어머니한테 미안하더라구요.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도 어머니는 매우 싫어했어요. 오빠들이 6·25 때 죽은데다가, 어머니는 내가 학자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는 나를 놓치기가 아까운 것보다도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마쳐주려고 했어요. 휴전되면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못 시키겠냐 했는데, 물론 하려고 했으면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냥 결혼을 해버렸어요. 철이 없었죠.
자라나면서 어머니한테 너무 미안한 것 같고, 엄마한테 뭔가 보여주고도 싶은데 저는 다른 재주가 없었어요. 책읽기를 좋아했다는 것, 학교 다닐 적에 박노갑 선생이 귀여워해줬다는 것 외에는 내세울 게 없었지요. 우리 엄마가 늘 그러셨죠. 쟤는 책만 붙들면 세상에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그러니까 내가 뭔가 한다면, 글을 쓰는 일밖에 없겠더라구요. 저를 눈썰미에 의한 작가라느니, 작가로서 태어났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데, 제 생각에는, 많이 읽으면서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요새는 그런 요청이 거의 없습니다만, 문학학교라든지 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를 맡아달라고 그러는데 나는 그런 것을 안 해봤어요. 내가 계통적으로 배우지를 않았기 때문에 소설은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가르칠 자신이 없었어요. 그냥 내 느낌으로 남의 작품을 읽었던 것이죠. 처음에야 저도 일제 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쓴 얄팍한 연애소설부터 읽기 시작했죠. 내가 스스로 독서 경향을 깊이 가지면서 이런 것은 좋은 소설이다라고 평가했지요. 그런 것은 베끼기와는 다른 것 아니겠어요?
―박노갑 선생님께 배운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매우 엄격하게 배웠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 작품 중에는 좋은 것도 많지만 그때 우리가 경도됐던 소녀소설이라는 분야도 많아요. 아주 감성적이고 얇고, 감각을 건드리는 소설이었는데 우리들에게 적잖이 영향을 미쳤죠. 선생님은 자기의 경험이나 생활의 무게가 전혀 실리지 않은 미사여구를 혐오했어요. 그런 글을 쓰면 눈을 부라리고 야단을 쳤죠. 하지만 그 선생님 작품이 워낙에 재미가 없었어요. 선생님으로부터 리얼리즘이 뭔가를 배운 것 같아요.
―그때 글쓰기 시간이 많이 있었어요?
그렇죠. 그것도 분명히 복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우리 딸아이들 학교 다닐 때 보면 국어 시간만 있던데, 우리 때는 창작 시간도 있었고 문학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때 문학개론을 배웠어요. 당시 학제는 지금과 많이 달라서 지금의 고3을 우리는 중학교 6학년이라고 했죠. 그때 5학년부터 6학년, 그러니까 고2, 고3을 문과, 이과, 가사과로 나눴어요. 그때만 해도 대학교를 안 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우리가 중학교를 들어갈 때는 일제 말기였거든요. 그때는 여고가 4년제일 때였는데 해방이 되면서 6년까지 늘어났어요. 그래서 우리는 고등학교 과정을 옛날의 전문학교 예과 과정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고등학교에서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죠. 숙명에는 거의 한 사람 앞에 하나씩 미싱이 있었어요. 아주 철저하게 가르쳤죠. 그런 분들이 나중에 다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고 했어요. 박노갑 선생님은 그때 중견소설가였죠. 조선일보에 연재도 하고 그랬어요. 문학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아주 황홀했죠.
―창작 시간에 칭찬을 많이 들으셨겠네요.
한말숙이를 비롯해 칭찬 듣는 애가 많았지만 아무튼 우리는 ‘쟤는 문학 소녀다’ 하는 그룹에 끼지는 않았어요. 그런 애들이 꼭 반마다 있어요. 그런 애들이 시집을 끼고 다니며 감상적인 시를 쓰면 박노갑 선생이 야단을 치셨지요.
―올해가 99년이라 이런 질문을 안 드릴 수가 없는데요. 90년대를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정리를 하세요? 80년대 말에는 어려운 일이 있었고, 미국 여행을 다녀와서 90년대로 접어드셨을 텐데요.
저는 2000년까지는 20세기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더라구요. 백으로 나누면 2000년까지 20세기여야 할 것 같은데 내년부터 21세기라고들 하네요.(웃음) 제가 31년생 아닙니까? 우리 나이로 치면 내년에 칠십이 되는 거죠. 우리가 어렸을 때는 칠십까지 산다는 건 상상도 못 했죠. 젊었을 때는 소녀 취향으로 서른아홉까지만 살겠다고 했어요. 소녀 취향이 아니더라도 예전에는 사실 환갑까지밖에는 예상을 못 했잖아요. 그리고 두 세기에 걸쳐서 사는 것도 저로서는 생각을 안 해본 거죠. 그래서 언제 죽더라도 괜찮게끔 주변 정리를 해놔야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실제로도 이것저것 정리를 많이 합니다. 물론 자다가 죽는 것이 소망이죠. 그렇더라도 남아 있는 사람한테 미심쩍은 것 없이 깔끔하게 하고 싶어요.
하루하루 그냥 좋게, 즐겁게 지내요. 여기로 이사오기를 잘했다 싶어요. 서울에 살 때, 저는 아침잠이 별로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면 신문이 언제 오나 기다리곤 했어요. 물론 할 일이 있으면 하지만 할 일을 하기 싫을 때도 있잖아요. 신문이 서너 개 오니까 7, 8시 될 때까지 신문을 뒤적이곤 했는데, 그러면 골치가 아프고 어떤 때는 머릿속이 뒤죽박죽될 때도 있어요. 그런데 여기로 이사 온 다음부터는 아침에 깼다 하면 마당으로 나가요. 그런 것이 그렇게 큰 기쁨이 될 줄 몰랐어요. 작년의 구근이 다 나오고,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작년에 일년초 심었던 자리에서 다들 올망졸망하게 올라오는 거예요. 아파트 살 때만 없었지, 어려서부터 늘 조그만 꽃밭이 있었어요. 아주 어렵게 살 적에도 조그만 꽃밭이 있었어요. 어릴 적에 내가 자꾸 꽃을 들여다보고 만지니까 우리 엄마가 그러면 눈독과 손독이 들어서 안 된다고 하던 기억도 있구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들은 이뻐해야 꽃이 잘 핀다고 하는데, 우리 어머니는 무심히 놔둬라, 꽃은 어느 틈에 피는 것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나는 너무 들여다보는 거예요. 가꾸는 것이 아니라 가서 보는 것일 뿐인데 그게 그렇게 기뻐요. 그건 내가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기쁨인 것 같아요. 자식들도 기쁨을 주지만 거기에는 어떤 책임감이 있죠. 또 변하는 것을 잡아두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고민이 있잖아요. 그런데 새벽 마당에서 느끼는 기쁨은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순수한 기쁨인 것 같아요. 노후에는 이런 기쁨도 있구나 싶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걸 영원히 누리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그날그날 느끼는 거죠. 그래서 요새는 뭘 좀 하다가도 밖으로 나가고 싶고, 숲에도 들어가고 싶고 그래서 글을 못 써요.(웃음) 읽는 것도 덜 읽고요. 이제 봄이 지나면 좀 낫겠죠.
―전에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가을에 앞산 밤나무숲에 들어가는 사람을 보고 하신 말씀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산은 다 먹여 살린다는 말씀 말이에요.
제가 어렸을 때에도 산에 가서 버섯을 따고 내려올 때, 다른 사람이 따러 올라가면 내가 다 따서 딸 게 없다고 해도 따러 들어가요. 그런데 그 사람도 꼭 나만큼 따오는 거예요. 다 땄다고 생각하지만, 내 눈에 안 띄는 것들이 있는 거죠. 버섯 같은 것은 그 사이에 자라기도 하구요. 그러니까 그건 사람의 재주라기보다는 자연이 지닌 품성 같아요. 나물도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싹쓸이해온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이 가면 또 있어요. 그만큼 줄 것을 많이 가진 것이 자연인 것 같아요. 내가 여기에 앉아 있으면 다 보여요. 지금은 안 오지만 가을이 되면 이 근처 사람들한테는 저 아차산 밤숲이 아주 유명해요. 차를 타고 와서는 대개들 조그만 까만 비닐 봉지를 하나씩 들고 들어가요. 그저 한 됫박 정도를 주워서 나오죠. 저도 들어가면 그 정도 주워담으면 없어요. 온종일 들어가 있는 사람도 그만큼이에요. 빈손으로 나오는 사람도 없지만 한두 말씩 지고 나오는 사람도 없어요. 스스로 놔두는 마음이 있는지, 남이 다 쓸어간 자리에도 또 보여요. 구별하지 않고 나누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 마음 같은 것이겠죠.
성경에 나오잖아요. 천국을 포도원과 비교를 하는데, 아침에 일하러 온 이나 낮에 일하러 온 이나, 포도원 일이 끝났을 때 온 이나 똑같은 임금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침부터 온종일 일한 사람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고 하니까 예수님이 야단을 치는 대목이 있어요. 내가 보기에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전엔 이 대목을 제일 싫어했어요. 완전하게 공평하고 엄격하게 공정한 하나님이 왜 그러실까, 이해가 안 되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런 생각은 착한 일을 하면 천당 간다고 하는 생각과 연결되는 것 같아요. 나도 점점 날카로운 것이 없어지고 나니까 그걸 알 것 같아요. 포도원을 최저 한도의 노동 시장이라고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게을러서 저녁때 나간 것이 아니라 온종일 일을 찾아다니다가 저녁때에야 겨우 일을 구한 거예요. 지금은 잊어버렸는데 그때 포도원에서 준 임금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최저 수준 같아요.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설령 조금 일했더라도 최저 단위의 임금이 필요한 거죠. 나는 사회보장제도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저 숲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나님이라고 해도 괜찮고 대자연이 지닌 넉넉함이라고 해도 좋죠. 우리끼리 서로 빼앗고 그러는 것이지, 깊은 뜻은 자연스럽게 나누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번에 내신 소설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 서문에 “적당한 육체노동, 맛있는 식사,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미운 사람 욕하기, 그리고 편한 자세로 좋은 책 읽기는 내가 사는 것을 맛있어할 수 있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낙들이다”라고 적어놓으셨는데요.
저는 그냥 무심히 그렇게 썼는데, 우리 친구 몇 사람이 그러더라구요. 너는 욕도 잘 못하면서 무슨 욕하는 얘기를 썼냐는 거예요. 이건 변명이 아니라, 내가 친구하고 둘이서 누구를 욕한다고 할 적에 우리가 다같이 아는 사람 욕한 적은 없어요. 그야말로 공적인 인사들, 박정희라든가 전두환이라든가 하는 사람을 욕하는 것, 이런 것이 재미있다는 거죠. 공적으로 씹어도 되는 사람을 씹는다는 거죠.
―요즘 우리 사회 전체가 어린아이 아니면 20대에만 치우쳐 있잖아요. 선생님께서 최근 발표하시는 글에서도 드러나지만, 젊음에만 주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불만이신 것 같습니다. 사회는 급속도로 노령화하고 있는데 노인의 지혜가 담긴 목소리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아요. 어린아이와 20대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늙음과 죽음은 자기들과 무관하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아요.
그래도 정치판은 늙은이들 판인데요, 뭐.
―선생님께서 이번에 펴내신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보면 아직도 20대 같은 감수성이 살아 있던데요.
노인 얘기를 썼기 때문에 노인문학이라고 한다면, 나는 노인 얘기도 쓸 수 있고, 아무리 겪은 것밖에 못 쓴다고 하더라도 20세도 겪었고 30세도 겪었기 때문에 무엇에 대해서도 쓸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썼느냐로는 나는 노인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진부한 것, 낡은 것, 고정관념, 편견 등을 항상 거부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인들 얘기를 쓴다고 해서 진부한 문장을 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저는 육체와 함께 감각이 늙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러고 싶지도 않고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과 함께 감수성이 무뎌지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니에요?
체력과 감수성은 다르죠.
―글쓰는 친구분들은 어떤 분들을 자주 만나세요?
우리 또래라고 하지만 대개가 6, 70대예요. 60대도 동료작가라든가 하는 분들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말숙이는 가끔 만나기도 하지만 전화를 자주 해요. 그렇지만 걔와의 관계를 동료, 문우라고 하면 좀 이상하죠. 아무튼 오랜 관계죠. 중학교 육 년 동안 같은 학교였고, 저는 그만뒀지만 대학도 같이 서울대 들어갔고요. 말숙이는 작가가 된 뒤에도 미혼이니까 우리집을 많이 드나들었어요. 그전에 문리대가 동숭동에 있을 적에 우리 시집은 법대가 있는 낙산 바로 밑에 있었어요. 그러니까 얘가 학교 갔다가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갈 적도 있고, 리포트도 쓰고 그랬죠. 그리고 6·25 때도 서로 어려움을 많이 나누고 해서 어떻게 보면 동기간 비슷하게. 서로 흉허물이 없다는 것이 그런 것일 거예요.
―단편 전집을 준비하시면서 오래 전에 쓰셨던 작품들을 다시 읽고 계신데, 감회가 어떠신지요.
「꽃지고 잎지고」 같은 작품은 사실 어디에 발표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그걸 어디에서 구하셨어요? 내 생각으로는 아마 무슨 화장품 회사의 사보가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꼭두각시의 꿈」 같은 것은 뺄까 하다가 그걸 빼면 전집의 의미가 떨어질까 싶기도 하구요. 그냥 정직하게 걸어온 길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품 말미에 발표 연도를 반드시 밝혀야 할 것 같아요. 요새 안 쓰는 말도 있는데, 그걸 바꾸기 시작하면 한이 없을 것 같고, 그냥 두는 것이 그 시대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제가 해온 작업이 어떻게 보면 그 시대의 삶의 모습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게 내 장기라면 장기구요. 어느 시대나 내가 살아온 것, 어떻게 보면 평균치의 한국 사람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요. 평균치보다 조금 나은지는 모르지만, 항상 거기에 내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작가의식이 아니었나 싶어요.
70년대 중반쯤이었나요? 80년대와는 다르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나오고 할 때예요. 그때 내가 아는 분이 구로공단의 여공 기숙사 사감을 하는 분이 있었어요. 그분이 ‘박 선생도 노동 현장 소설을 해. 당신이 쓰면 잘 쓸 거야’ 하면서 자기가 정보를 주겠다는 거예요. 그게 마땅치 않으면 기숙사에 와서 있어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한 번 가서 돌아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나는 그때 그렇게 잠입을 한다고 해서 절대로 소설이 될 것 같지를 않았어요. 취재하는 것과 소설 쓰는 것은 다를 것 같아요. 취재해서 신문 기사를 쓰는 것과 소설 쓰는 것 사이에는 미묘하면서도 깊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내가 정말 단돈 한푼이 없어서 배고픔과 쓸쓸함을 겪는 것과, 예금통장에 백만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분이 어떤가 알고 싶어서 땡전 한푼 없이 거리로 나서는 것은 다를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들에 대한 모독 같기도 하고요. 나중에는 대학생들이 위장취업으로 현장에들 많이 들어갔지요. 물론 그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들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요, 자칫 잘못하면 그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 될 것 같아요. 나는 내가 딛고 서 있는 땅 주변 얘기밖에 못 했어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작가정신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예전에 쓰신 단편들을 읽다 보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드실 텐데요.
나는 초기 작품에도 신인다운 점이 너무 없었다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고 덤벼보는 자세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냥 나에게 알맞는 소재를 가지고, 타고난 감각이라고 할까요? 어떤 것이 떠올랐을 때 이것은 이런 그릇에 담으면 되겠다 하는 식으로 장편은 장편으로, 단편은 단편으로 썼어요. 단편을 가지고 지면을 위해서 늘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어요. 그리고 이건 나의 좋은 점이 아니라 나쁜 점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부득이한 경우를 빼고는 한번 쓴 것을 다시 고치질 않아요. 다시 읽기도 싫어요. 한번 발표한 작품을 다시 가다듬고 거두는 마음이 없어요. 어떤 작품은 그때 남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내 정신상태의 불균형이나 그때의 환경이 떠올라서 싫어요. 단편 전집에는 안 들어갔지만 『너무도 쓸쓸한 당신』을 보면서는 훨씬 여유롭고 즐겁게도 봤어요.
―그럼 다시 읽어보셨군요.
예. 그런데 이번 소설집은 또 읽어도…… 삶을 보는 눈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삶과 나 사이에 조금은 윤활유 같은 여유랄까, 그런 것이 생긴 탓인지 언어가 주는 압박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 같아요. 소설이 언어와의 싸움 아니에요? 언어가 그 동안은 내 말을 너무 안 들어주었는데, 이제 내가 언어를 부리는 데 조금 능해졌다고 할까, 자유스러워졌다고 할까, 그런 것을 느꼈어요. 이번에 쓸 때에는 조금 즐기면서 쓴 것 같아요. 나잇값이겠죠 뭐.
―김윤식 선생이 쓰신 글 가운데,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나서 소설 읽는 방식을 바꾸었다는 글이 있습니다. 소설은 감추고 내지르고 하는 건데 이렇게 진실해도 되는가 하는 내용의 글을 쓰셨던 것 같은데요.
김윤식 선생과는 지금도 사적인 친분을 갖고 있지만 내가 그분의 얘기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언젠가 그분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소설가 중에는 남의 얘기를 제 얘기처럼 쓰는 작가, 남의 얘기를 남의 얘기같이 쓰는 작가, 제 얘기를 제 얘기처럼 쓰는 작가가 있는데 저는 제 얘기를 제 얘기처럼 쓴다는 거죠. 그런데 모르겠어요. 물론 내가 잘 알지 못하고 겪지 않은 세계에 대해서는 못 써요. 아까도 취재를 해서 쓰는 것이 저에게는 버겁다고 말씀드렸는데, 거기에서 무슨 꼬투리라도 내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할 수 있어야 뭐가 되는 것이겠죠.
―어느 글에선가 선생님께서는 그 동안 종교와 문학의 변두리에 존재해왔지만, 그 둘의 참다운 정신에서는 벗어나지 않겠다라고 쓰신 기억이 나는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종교와 문학의 참정신은 무엇인가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웃음) 그런 것을 쓴 생각은 안 나는데 아마도 나는 신자로서 날라리라는 뜻도 되겠죠.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르겠는데 소위 문학판의 중심이라는 것을 싫어해서 항상 변두리에 있었죠. 물론 내 소설이 중요한 위치에 있기를 바라죠. 이런 것일 거예요. 문단도 권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하지만 소설쓰기가 아주 개인적인 일 아닙니까? 운동권이 있던 시절에도 나는 항상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했어요. 끼리끼리 모여서 권력을 만들려는 집단이 싫었어요. 아마 그로부터 소외되고 싶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그 개인주의의 배경이 6·25 체험이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나는 집단적인 정열이 너무 싫어요. 그로부터 끊임없이 깨어나려고 하는 것도 문학행위라고 생각해요.
―6·25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들에게 80년대 초반 상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때를 저희들과는 전혀 다르게 보셨을 것 같은데요.
나도 사실 어떻게 보면 보수주의자라고는 생각을 않거든요. 더군다나 극우 같은 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싫은 사람이지만, 80년대 운동권의 허위의식에 대해서 독한 혐오감을 나타내는 어떤 작품을 읽은 적이 있어요. 아마 페미니즘과도 관계가 있었던 것 같은데, 민중을 위한다는 운동권이 가장 가까이 있는 민중인 여자에 대해서 얼마나 군림하는가, 가장 광범위한 대다수 민중인 여성에 대해서 얼마나 우월감을 갖고 있는가, 뒤로 은근히 착취해서 기생서방처럼 먹고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가, 그런 것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나타낸 소설이 몇 편 있더라구요. 80년대 운동권이 한창일 때도, 나야말로 개인주의자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 저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더하겠다 하는 것을 느낀 적이 많아요. 나름대로 그 집단 안에서 독재적이었어요. 영웅주의, 나는 그런 것 다 싫어요.
―그 시절에 통일을 주장하던 일부 사람들도 이 범주 안에 들죠?
통일도 일종의 사업이죠. 이제 팔아먹을 수 없는 것이 뭐가 있겠어요? 통일도 사업이죠. 그것 가지고 단체 만들고 하는 게 다 그렇죠.
―어릴 적부터 시를 좋아하셨지요?
그것도 박노갑 선생 영향이에요. 한시를 읊고 외게 하고 시도 쓰게 했어요. 일제 시대 교육을 받은 우리들에게 좋은 우리 말을 가르치시려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정지용, 김기림, 노천명 등을 많이 읽었지요. 그때 선생님은 자꾸 읽어서 외워지는 시가 좋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지금도 뭔가 리듬감이 있어야 좋은 시라는 생각이에요. 다 외우지는 못하더라도 좋은 시를 외우게 하는 것이 조잡하고 나쁜 문장을 피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어요.
―선생님 작품에 대한 평론들이 나오면 보세요?
일부러 보지는 않아요. 누가 가르쳐주면 보고요. 우리 딸애가 엄마 죽은 후에라도 뭣 좀 하겠다고 요새는 뭘 좀 모으나 봐요. 딸이 국문과를 나왔어요. 그러나 저는 전혀 무관심입니다. 나는 잡지에 난 것을 읽고서는 그냥 뒀다가 이사할 때 다 버리고 그래요. 얼마 전에 서강대 이태동 교수가 저에 대한 평론을 모으면서 나더러 자료를 달라고 하는데 갖고 있는 게 없어서 못 줬어요. 선생님이 알아서 하시라고 했는데 별로 마땅치가 않더라구요. 요새 딸애가 오려둔 것을 보니까 내가 진작 이렇게 했더라면 싶었습니다.
―어떤 평론이 선생님 작품을 제대로 읽어낸 것 같으세요? 무서운 집념의 이기주의라는 평가도 있었고, 80년대에는 일부 젊은 평론가들이 선생님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홍정선의 평론이 『샘이 깊은 물』엔가 나왔었는데, 그게 가장 심한 혹평이었나요? 이제는 다 잊어버렸죠. 언젠가 삼인행 출판사에서 제 작품에 대한 평론을 모아 책으로 묶은 적이 있는데 그때 엮은이가 그 평론을 넣을까 말까 하길래 넣고 싶으면 넣으라고 했죠. 이번에 이태동 교수가 묶으면서도 넣을까 말까 하길래 넣고 싶으면 넣으라고 했죠. 혹평까지 합해져야 입체감을 내는 것 아니겠어요?
―30년 가까이 써오시는 동안 작품세계가 변화되는 지점이 있었을 텐데요. 문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문학적 자의식이 생겼다든지, 6·25 분단 문제, 중간층의 허위의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여성 문제에 대한 천착과 같은 주제의식의 변화랄지 말입니다.
그것이야 평론가들이 나누는 것이지 내가 의식적으로 이 단계를 거쳤으니까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지 하는 그런 것이야 있었겠어요? 그것보다는, 처음 『나목』을 쓸 적에 무궁무진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은, 6·25때 오빠를 잃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오빠는 나의 우상이었죠. 나중에 작가가 되었지만, 전에는 공부를 워낙 좋아했어요. 그때도 서울대학을 간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죠. 그 일로 우리 어머니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기도 했구요. 물론 나는 학자가 된 것보다 작가가 된 것이 더 행복해요. 그렇지만 그때에는 대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꿈이 있었죠. 내가 짜고 싶은 인생의 무늬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집안에서 나한테 거는 기대도 컸죠.
결혼도 별로 생각을 안 했고 그냥 책이나 실컷 읽으며 공부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일찍 결혼해서 애를 많이 낳으리라곤 생각도 안 했죠. 그때까지 나는 상아탑이라는, 외풍이 없는 세계 속에서 하고 싶은 공부만 실컷 하면서 살 줄 알았죠. 웬만했으면 그렇게 됐을 것 같아요. 가난하고 아버지도 안 계셨지만 서울로 와서 좋은 학교에서 공부를 했잖아요. 그런데 6·25가 나니까 엄청난 사회적 변화 속에서 내가 그냥 내 인생이 왜곡됐다고 생각하고 내가 짜고 싶은 무늬를 못 짠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할말이 너무 많은 거죠. 전쟁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됐죠. 그때 우리 오빠는 좌익운동을 했기 때문에 내가 직접 무엇을 하지는 않았어도 그런 것에 대한 동경도 참 많았죠. 우리 오빠가 이상형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왔을 때의 느낌, 지식인들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면서 정신적으로 몰락해가는 과정, 이런 것들이 다 쓰고 싶었던 거죠. 그때는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도 우리 집안이 어떻고 우리 오빠와 삼촌이 어떻게 해서 죽었다 하는 것을 말할 수 없었어요. 다 감추었죠. 그런 것까지 다 드러내놓고 싶었습니다. 드러내놓아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나 자신의 치유 방법 같은 것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면 꿈을 꿨다기보다도 그냥 백주에도 악몽에 시달렸던 것 같아요. 이걸 다 풀어내지 않으면 병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죠. 그래서 그걸 조심스럽게 풀어내기 시작했죠. 그러면서도 나는 어느 지점에서 내가 6·25에 관해서는 대작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지금도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6·25가 벌써 50년 전의 일인데 기억으로는 참 가까워요. 여러 세부적인 일들이 생생해요. 우리 오빠를 기억하는 것이 죽은 아들에 대해 느끼는 것과 거의 비슷해요. 팡팡하던 청년의 여러 가지 모습이란 것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근원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전쟁 통에 돌아가신 오빠 때문이었군요. 그런데 왜 6·25에 대한 대작을 못 쓸 것 같으세요?
너무 세부적인 것에 집착을 하니까 나무 한 그루만 보고 숲은 볼 수 없는 느낌 같은 것이죠. 그리고 항상 원한 같은 것도 많아요. 빨갱이 사냥꾼들, 반공으로 먹고사는 인간들, 이승만, 다 미워요. 대작을 쓰려면 한국전쟁을 총체적으로 봐야 할 텐데 말이죠. 겪지 않고 한국전쟁을 쓴 작품도 꽤 있잖아요. 이제 그 사람들에게는 역사 아닙니까? 역사라는 것이 어디 세부적인 것을 그리겠어요? 역사적인 맥락 같은 것은 자료를 찾아서 쓸 수밖에 없는데도 조그만 것 때문에 그 작품을 불신하게 돼요. 자료를 찾아서 역사적인 맥락으로 역사소설을 쓰려는 사람에게는 우리같이 망각하지 못하는 경험자들이 걸림돌이 될 것 같아요. 내가 겪은 것 외에는 믿지 못하는 것, 그러면서도 그때 나만이 겪은 것은 어떻게 해서든 내가 다 풀어먹었어요. 이를테면 그때 나만 서울에 남아 있었다는 것 말이에요. 6·25 때는 많이들 남아 있었지만 1·4후퇴 때는 대개가 갔는데, 나는 우리 오빠 때문에 서울에 남아 있었거든요.
그때 남아 있는 나를 견디게 한 힘 같은 것이 있었어요. 언젠가는 이걸 써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 예감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해요. 이건 나만이 겪은 거고, 나만이 겪은 것을 안 쓰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때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게 당했습니까? 여기에서 차이고, 저기에서 차이고, 한참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당하지 못할 고통을 당했을 때, 그때 꿈꿀 수 있는 복수가 뭐가 있겠어요? 저런 인간들을 한번 써서 글 속에서 복수해야지 하는 것밖에 없죠. 내가 만약 법대를 다녔다면 고등고시에 합격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다든가, 내가 부자를 꿈꾸었다면 큰 부자가 되어서 저런 것들을 어떻게 하겠다든가, 권력을 잡아서 저런 것들보다 잘 살아야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에 대해서 꿈꿀 수 있는 것은 내가 저 인간들에 대해서 써야겠다는 것밖에 없었어요.
―6·25를 겪은 작가들에게 시대와 역사에 대한 ‘복수’는 공통분모인 것 같습 니다.
사실 그런 인간들의 허상을 까발릴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는 수단밖에 더 있겠어요?
―농담 같은 질문인데요. 선생님께서 무서워하는 작가가 있으세요?
무섭다뇨?
―선생님께서 보시기에 정말 대단해 보이는 작가 말입니다.
요새는 별로 안 느끼는데 처음에 등단하고 나서 이청준의 「소문의 벽」 「조율사」 같은 작품을 보면서 죽기 전에 나도 이런 것 하나 썼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요새는 내가 그분의 작품을 많이 못 읽어서 그런지 그렇지도 않아요. 『당신들의 천국』도 좋아했지요. 우리나라 작가를 얘기하는 겁니다. 등단하기 전에는 최인호 것도 좋아했어요. 해방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이상을 접했는데, 그전에는 우리나라 글이라는 것을 접할 수가 없었잖아요. 그때 「권태」라는 것을 읽고는 너무너무 좋았어요. 위대한 작가라고 불리는 사람 것을 다시 읽으면, 지금은 다 진부하잖아요. 그런데 이상은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이 참 이상해요. 시인이니까 얘기해보세요. 당대에 그게 이해가 됐을까요?
―안 됐겠죠. 평론가들이 선생님의 작품세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놓았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떤 주제를 쓰실 때 글이 잘 써지세요?
저는 아직도 내 수준이 그림으로 치면 데생이라고 할까요?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구체적인 상황 묘사를 할 때가 가장 좋아요. 조금이라도 관념적으로나 추상적으로 나가려고 하면 잘 안 되고 힘들죠.
―선생님들을 만나뵈면 늘 드리는 질문인데 좋은 소설, 좋은 글을 판단하는 선생님 나름대로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나는 그게 가장 힘들어요. 그래서 평론가들이 좋은 까닭을 나열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어요. 나도 가끔 신춘문예라든가 심사할 때가 있잖아요. 심사는 내가 비교적 공정하고 엄격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쓰는 것은 못 쓰겠어요. 심사평을 길게 쓰는 사람을 보면 그것도 타고난 능력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심사를 하실 때 어떤 부분을 눈여겨보세요? 90년대 이후에 작품활동을 시작한 젊은 소설가들을 보면 일단 소설 안에 이야기가 너무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소설이라고 하면 탄탄한 줄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없어요. 누구인지는 잊어버렸지만, 옛날에 외국 소설 중에도 줄거리가 없어도 문장의 힘만으로도 읽는 즐거움을 주는 그런 작품들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니면서 문장을 굉장히 꼬아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어요. 그래도 끝까지 읽으면 뭔가 있지 않을까 하다가 다 읽고 나서 허탕을 밟은 것 같은,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들도 있죠. 그래도 그냥 나름으로 어떤 독자군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 경우도 있어요.
―요즘 젊은 작가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독자들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이제하 선생 같은 분은 평생을 이만 명의 고정독자와 함께 지금까지 오셨잖아요.
이제하씨가 어려운 것과는 좀 다르죠. 이제하씨는 내가 참 좋아하는 작가인데 내가 정말 여러 번 읽은 작품이 있다면 이제하씨 것도 빼놓을 수 없어요. 『초식』이 새롭게 나왔지만 나는 예전에 민음사에서 나온 『초식』을 여러 번 읽었어요. 그 사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예요. 짧은 글들도 참 좋아요. 그런데 내가 왜 좋다고, 어떻게 좋다고는 말을 못 하겠어요. 타고난 예술가 같아요. 미술, 음악, 이런 데도 일가견이 있고요. 내가 이제하씨 판도 가지고 있어요. 옛날 『초식』을 보면 젊었을 때 빈 들판에 서 있는 것 같은 사진이 아주 좋아요. 참 멋있었죠.
―선생님께서는 요즘 어떤 글을 쓰고 계십니까?
자잘한 것을 쓰고 있고, 장편을 하나 쓸까 말까 하고 있어요. 이것을 붙들면 또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그래서 장편을 두 개는 더 써야겠다 하고 있는데 붙들릴까 말까 하는 거죠. 붙들리기는 할 것이지만 유예할 때까지 유예하는 것이 하나 있고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이후를 써도 될 것 같구요. 체력이 닿는 대로 써야죠.
―예전에 쓰신 글을 보니까 『나목』에 가장 큰 애착이 간다고 하셨는데요. 지금도 같은 생각이세요?
첫자식에 대한 것과 비슷하죠. 아까도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한 번도 전작으로 써본 적이 없어요. 장편도 다 연재 형식이에요. 마감이 되면 몰리고. 그런데 그야말로 순수하게, 문학 소녀적인 정열로, 또 집안 식구들도 모르게 쓰느라고 애를 쓴 작품이 『나목』입니다. 그래서 그립게 느껴져요.
―80년대 후반 『미망』을 쓰실 때 집안에 어려운 일들이 겹치셨는데, 어떻게 그 힘든 상황을 극복해내셨는지요? 88년 5월에 남편을 잃으시고, 그해 8월 말에 아드님을 잃으셨는데요.
예전부터 종교를 갖고 있었죠. 꼭 고뇌 끝에 종교를 고뇌하고 가져야 할 필요는 없겠죠. 6·25 때야 어쩔 수 없었지만 시어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종교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를 갖지 않았을 적에는 보통 스님이 와서 독경을 해주기도 하는데 장의사에서 도맡아 하는 것을 볼 적에는 너무 싫더라구요. 모든 걸 상제가 흥정해야 하고, 염을 하는 데도 노잣돈을 주어야 한다고 가닥가닥이 돈을 넣으라고 하는데 나는 그걸 다 매장할 때 넣는 줄 알았어요. 무슨 사기를 당하는 건지,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이 힘든 거죠. 시어머니는 그렇게 가셨지만 내가 죽어서까지 그런 대접을 받기는 싫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어떻게 죽나 하는 것 때문에 교회도 가보고 했는데, 교회는 너무 극성맞은 것 같았어요. 어떤 교회에 가보니까 새로운 사람만 오면 붙들고 어디 사냐고 하고 그런 것도 싫더라구요. 그래서 가톨릭으로 갔는데, 가톨릭이 덜 극성맞다 하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더군다나 그런 일을 당하니까 제일 먼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생각밖에 더 들어요? 제가 이해인 수녀 소개로 부산 수녀원에 들어가 있었던 것도 하나님에 가까이 간다기보다는 세상을 피하기 위한 거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뼈가 저려요. 커다란 건물에 언덕방이라고 불리는 손님방에 혼자 있었습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긴 복도를 지날 때 무서움증을 느꼈어요. 무서울 게 뭐가 있냐 싶어도 무섭더라구요. 그래도 거기에서 견딘 것이 나중에 생각하면 참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혼자서 대결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다는 게 다행스러웠습니다. 신이라는 개념이 왜 있겠어요? 부정한다는 것은 우선 있으니까 부정하는 것이지 무에 대한 부정은 없잖아요. 정말이지 내가 그렇게까지 해답을 구한 적이 없어요.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이냐? 오직 나 혼자였고, 위로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수녀원에서 참 적절하게 해줬다고 생각을 해요. 먹으라고 막 갖다 주지도 않구요. 자식들은 그렇잖아요. 먹으라고 미음 쑤고 그러는데, 그러면 자꾸 어리광만 늘게 돼요.
그때 술을 많이 배웠어요. 내가 아무것도 안 먹고 살았다고 하지만 술은 참 많이 마셨어요. 술이라는 것도 일종의 에너지더라구요. 딸네서도 사위하고 둘이서 맥주를 박스로 비우기도 했어요. 나는 속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왜 죽지 않는 걸까, 생각했는데 술에도 굉장한 열량이 있더라구요. 곡기를 완전히 끊었는데도 기운이 줄지를 않아요. 그런데 수녀원에 들어가니까 누가 먹으라고 권하지도 않고, 그때 벌써 가을이 되어가는데 거기에서는 술을 먹을 수도 없잖아요. 이렇게 안 먹으면 편안하게 죽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했어요. 거기에서 내가 볼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 대개 영성적인 책이 많잖아요. 문자에서 뭔가를 구하려고 했던 거 같아요. 영성적인 경험들이 많고 초자연적인 경험이 많은데 나는 꿈에도 안 나타나요. 꿈에라도 보고 싶었지요. 그리고 아침이 되면 미사 보고 식당으로 가요. 이해인 수녀와 또 한 수녀님이 있어서 둘 중의 한 분이 꼭 나하고 같이 식사를 하죠. 거기는 손님만 먹는 식당이고 원래 수녀님들은 다른 데서 먹는데, 아침 식사 나오면 나는 식사는 거의 안 하고 커피를 마셨죠. 수녀님이 어떻게 할 거냐고 하지만 집안 식구처럼 누가 나를 떠먹이고 그래요? 그게 오히려 편하기도 했어요.
그때 변비 때문에 괴로워했어요. 살겠다고 약 사러 나가기도 그렇고. 그러다가 딸애가 뭐 좀 해와서 억지로 먹으면 토하고, 토하지 않으면 변비예요. 나는 이러다가 죽겠지 하고, 평화스럽게 죽으면 아프지도 않고 얼마나 좋을까 싶었어요. 그렇게 쇠약해지면 황홀감 같은 것도 와요. 그런데 어느 날인지 아침 미사를 보는데 된장국 냄새가 휙 나는 거예요. 뱃속에서 꾸루룩 소리가 나면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리고는 식당에 갔는데 진짜로 된장국과 비빔밥이 나왔어요. 강한 식욕을 느낀 거죠.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큰일날 것 같아서 비빔밥 반 그릇과 국을 다 먹었어요.
―보름 만에 드신 거예요?
그 중간에는 내가 술도 많이 먹고 그랬다니까요. 커피도 마시고 샐러드 같은 것도 집어먹고 그랬을 거예요. 내가 일부러 안 먹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인사치레로 먹으라고 하면 좀 먹고 다시 토해요. 그렇지 않으면 변비가 토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웠고요.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건데도 치료하기가 그렇더라구요. 그런데 그날은 그렇게 먹었는데도 토하지 않더라고요. 그때부터 조금씩 밥을 먹었죠. 그리고 나서 서울로 왔죠. 아들 장례 때 수고해주신 신부님께 인사차 갔더니 거기 도자기가 하나 있었어요. 아마 무슨 전시회에 내놓았던 것 같은데 도자기에 김수환 추기경이 쓰신 글씨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그 글 내용이 ‘밥이 되어라’ 하는 거예요. 성직자에게 한 소리 같기도 하고요. 내가 그때 그렇게 매달렸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는데, 그 도자기 앞에서 생각이 난 거예요. 주님이 밥으로 오셨다. 내가 밥을 먹고 살아났으니까요. 나는 그때 밥을 그렇게 맛있게 먹고 나서 너무 슬펐어요. 가족을 따라서 내가 죽는다는 것이 기운이 쇠해서 금방 죽지 않는 한, 자살 같은 것은 내가 가장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난 남도 해치지 못하지만 더군다나 나를 어떻게 해치겠어요? 죽으려면 죽을 길이 얼마나 많겠어요? 누가 나를 죽여주면 모르지만 나는 못 해요. 그런데 내가 아주 평화스럽게 죽을 수 있을 것 같고 자신감이 있었어요. 몸도 쇠약해지고 체중도 굉장히 줄고 말이죠. 부산에 내려가는 강단 같은 것이 있어도, 한계가 있겠지 했는데, 삶의 의욕이 없으면 죽겠거니 했는데, 사람이란 것이 식욕만 갖고도 살 수 있더라구요.
먹고 살아라, 그것 이상 가는 해답은 없는 것 같아요. 그때 내가 끊임없이 부정할 대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그때로서는 구원이 아니었던가 싶구요. 내가 수녀원에 안 들어가고 밖에 있었다면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히고 추하게 굴었을까 싶어요. 나는 그전까지도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감추지는 않았어도 내가 날라리라는 것을 언제든지 자랑스럽게 말하고,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른다는 말도 잘 하고 했는데 지금은, 물론 지금도 교회에 잘 나가지는 않아요, 그래도 죽고 사는 것은 어떤 큰 뜻에 달렸다는 것을 믿어요. 내가 아무리 뛰어봤자 하나님 손바닥 안에, 어떤 큰 섭리 안에 있다는 것 하나는 믿습니다.
―6·25 와중에 돌아가신 오빠와 88년에 있었던 부군과 아드님의 죽음이 선생님 개인사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었겠습니다.
네. 그래서 지금도 그래요. 기도할 적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남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지만, 물론 주위에 괴로움 받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기도하지요. 그래도 나를 위해서 기도할 때가 가장 절실해요. 내 생애에 나보다 나이 적은 사람을 앞세우는 일은 겪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가장 절실하구요. 또 나보다 앞서간 사람 만나는 날을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도 하는데, 그건 정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서 절실합니다. 기도라는 게 그래요. 화살기도를 자주 하라고 하는데, 내가 화살기도는 자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화살기도란 짧게, 갑자기 하는 기도예요. 나는 그게 가장 진실한 것 같아요. 판을 차리고 앉아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짧게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는 기도 말입니다.
―앞으로 쓰시고 싶은 장편은 어떤 것입니까?
나는 그런 것은 말하지 않아요.(웃음) 나한테 대하소설은 안 맞아요. 『미망』 쓸 때 5,6천 장 정도 됐는데 그것이 내가 쓴 소설 가운데 가장 길 거예요. 연재 중간에 겪은 어려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계획한 것보다는 덜 쓴 거예요. 중간에 싫증이 나요. 그래서 박경리 선생이나 조정래씨 같은 사람을 보면 부럽죠.
―선생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세요?
정직한 사람이 좋아요.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좋아요. 저 사람은 저렇게 말했지만 실은 이럴 것이라고 돌려서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요.
―금강산에 다녀오셨는데 어떠셨습니까?
금강산 다녀온 사람들한테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아무튼 묘한 기분이었어요. 내가 고향이 북쪽이어서 그런지 북한 땅을 밟아본다는 설렘도 있고. 그러면서도 금단의 땅을 밟는다는 것과 관광이라는 말이 잘 맞지 않았어요. 서로 모순되죠. 그래서 나는 거부 반응도 많았어요. 귀향, 고향 방문 같은 말의 어감이 참 싫더라구요. 그리고 어머니, 하고 외치며 우는 몸짓도 싫구요. 내가 꿈꾸던 귀향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금강산은 지금이 한창 좋을 때라고 하는데 실제로 보니까, 물론 장엄했죠. 구룡폭포 코스는 물이 참 풍부하고 정결했어요. 너무 깨끗해서 물고기조차 안 살 것 같은, 생명체가 생겨나기 이전의 물 같았어요. 호텔 같은 배를 타고 공해상으로 나갈 적에는 금강산에 간다는 기분이 전혀 안 들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니까 창 밖으로 육지가 보이는데, 거기가 장전항이라는 거예요. 그때 슬프기도 하고 감동스럽기도 했어요. 그런 느낌이 들 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않았죠. 안 그러려고 애썼는데 눈시울이 뜨거웠습니다. 다녀오고 보니까, 관광을 했다는 느낌보다는 금강산의 극히 일부 지역을 통과했다는 느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