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분 장엄정토분입니다.
정토를 장엄한다는 이야기죠.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 아마 아실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부처님이 과거 인행의 시기에 과거 수행자로 계실 때, 깨달음을 얻기 전에,
인행 시에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다, 라고 아마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겁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선혜라는 수행자가 있었죠.
선혜라는 수행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께서
선혜라는 수행자가 있는 그 마을로 그 나라로 오신다, 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왕과 백성들이, 수많은 백성들과 왕이,
막 꽃을 바치러 나와서, 모든 사람들이 다 마을로 뛰쳐나와서,
부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선혜라는 수행자도 ‘야~ 이 부처님께, 부처님을 만나기가 힘든데,
부처님께 내가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선혜 수행자가 이제 막 꽃을 구하려고 부처님께 공양 올릴 꽃을 구하려고
막 돌아다녔어요, 찾아 헤맸어요. 그런데 이제 꽃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돈도 없고 가난한 수행자였다 보니까.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꽃을 좀 달라고 달라고 하니까
나도 부처님께 올려야 된다 그래서 아무도 안 주는 거예요.
다들 하나 두 개밖에 안 가지고 있고.
그런데 멀리서 보니까 어떤 여인이, 아주 아리따운 여인인데
마차를 타고 있는 걸 보니까 공주 같은 겁니다.
그런데 한 궁녀가 꽃을 일곱 송이나 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 저 여인에게 꽃을 달라고 하면, 일곱 송이 있으니까 몇 송이 주지 않겠나,
그런 마음이 들어서 이제 쫓아갔습니다. 쫓아가서,
일곱 송이가 있으니까 이 중에 나한테 몇 송이만 좀 달라,
내가 부처님께 꼭 공양을 올려야 되겠습니다.
그랬더니 이 공주가 나도 부처님께 올려야지, 내가 당신한테 이걸 줄 수가 있느냐?
그러나 이건 선혜 입장에서 본 거고,
공주 입장에서는 공주가 이제 궁에 있다가 부처님 오신다는 얘길 듣고
궁녀들과 같이 마을로 나간 겁니다. 나갔는데,
사람들이 다들 부처님을 배웅하기 위해서 들뜬 마음으로 이렇게 있는데,
공주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멀리서,
멀리서 아주 그냥 옷도 시원찮고 가난한 수행자인데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아주 너무나도 잘생긴, 장동건 같이 아주 멋있게 생긴 수행자가 멀리서 홀로
터벅터벅 아주 너무나도 아름다운 유희(?)를 하고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공주는 첫눈에 반한 거예요. 멀리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어쩌면 저렇게 참 평화롭고
아름답고 저럴 수가 있을까. 막 감동을 하고 있는데, 마침 그 수행자가 나에게로
걸어오는 겁니다. 설마 난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고 있는데 나한테 와서
말을 거는 거예요. 그래서 막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콩닥콩닥 하는데 꽃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공주가, 내가 좋다고 온 줄 알았더니만 꽃을 달라고 하니
기운 빠지지만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러면 제가 꽃을 주긴 주겠지만 나도
공짜로 줄 순 없다.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 소원 다 들어주겠다, 이랬더니
내가 이 꽃을 드릴 테니까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이렇게 얘길 했어요.
그랬더니 내가 지금 수행잔데, 당신과 결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안 된다 그랬더니,
그럼 저도 꽃을 줄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이 수행자가,
선혜라는 수행자가 타협을 했어요. 그래, 좋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을 해주겠는데, 단 이번 생에는 안 됩니다.
이번 생은 내가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으니 다음 생에 언젠가 내가
당신을 만나서 결혼해 주겠다, 그랬더니 공주가 워낙 단호한 수행자의 말을 듣고
아, 도저히 안 되겠다 포기를 하고서 그러면
다음 생에라도 나와 꼭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해주십시오,
그래, 좋습니다. 하고 약속을,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을 했는데,
약속을 딱 하고서 이 선혜 수행자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또 뭐가 있습니까? 이랬더니 결혼은 하지만 그 다음은 나도 어떨지 모르겠다.
그게 뭔 얘긴가 싶지만 어쨌든 결혼하는 걸로 이 사람은 만족하는 겁니다.
그러겠습니다, 해서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섯 송이를 선혜 수행자에게 주고 자기가
두 송이를 가졌어요. 그래서 선혜가 부처님께, 연등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 연등은 다 꺼지고 하는데 이 선혜의 연꽃만 떠올라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는 거죠. 연등 부처님께서 그 때 다음 생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겠다, 하고
수기를 주신 겁니다. 결혼식장에 가면 촛불이 몇 개 켜있죠? 일곱 개씩 켜있습니다.
좌측 우측 일곱 개가 켜있어요. 그런데 그 촛불이 다섯 개가 신랑 측에서 켜는 것이고,
두 개가 신부 쪽에서 켜는 거랍니다. 그것이 선혜 이 이야기로부터 나온 거라는 얘기가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처님으로 태어나신 때, 부처님으로 태어나셔서,
아쇼다라와 결혼했죠, 그죠? 아쇼다라가 바로 그 전생의 공주입니다. 꽃을 줬던.
그랬더니 결혼을 해줬는데, 애도 낳는데, 그 다음은 모르겠다. 그 다음에, 결혼을 하고 나서
출가한 거죠. 그런 어떤, 수행자가 말을 한 것은 그대로 된다.
여러분이 우스개로 누군가와 약조한 것은요, 그렇게 됩니다.
우스개로, “야, 이거 빚 다음 생에 너희 집 소가 돼서 갚을게.” 이러고 뭐 꾸면 안 돼요. 농담으로라도.
진짜 소가 되어 갚을 수 있다는, 그게 내 스스로 말로써, 구업으로써, 결정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업이라는 게, 업이라는 게 위험한 겁니다.
일체유심조라는 게, 일체 모든 걸 마음으로 짓는다. 마음이라는 건 의업,
또 입이라는 것 구업, 몸이라는 행동, 신업. 이 신구의 삼업이 삼업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말한 것, 현실이 됩니다. 생각한 거 현실이 되고, 행동한 거 더없이 현실이 됩니다.
이번 생에 당장 안 된다고 해서 그냥 무시하면 안 돼요.
그래서 사람들이, 중생이, 어리석은 중생들은 어떠냐면 죄를 한 번 저지르기,
한 번 훔치기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훔치거나 그 다음부턴 용기가 나서 사실은 잘 훔치고
나쁜 짓도 처음 하기가 힘들어 그러지 그 다음부턴 잘하잖아요. 한 번 하고 났는데
바로 과보는 안 받거든요. 왜냐하면 업이 지중한 사람은 과보를 늦게 받습니다.
수행자나 업이 가벼운 사람은, 큰 스님들 같은 분들은 업을 짓자마자 바로 과보를
받는다 그래요. 나쁜 짓을 하면 바로 과보가 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일수록
늦게 오거든요. 그러니까 한 번 나쁜 짓을 저질렀는데, 나쁜 일이 안 생긴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야~ 또 나쁜 짓 해도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사람은 계속해서 어리석음의 쳇바퀴를 도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 나쁜 짓 했다고 아무 문제없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엄청난 문제가 사실은 있는 거다. 그래서 그때를 얘기합니다.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는 바가 있느냐, 이 말은 즉 부처님께 수기를 얻은 적이 있다는 말이에요.
너가 다음 생에 법을 깨달아 부처가 되리라 수기를 내렸지 않습니까.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법을 얻은 거죠, 부처님께서. 그죠? 전생에 법을 얻어서 수기를 받은 거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라고 얘기했단 말입니다.
원래는 맞습니다. 여래께서는 연등 부처님께 법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얘길 해야 되잖아요.
근데, 그와 반대로 얘길 하고 있단 말이죠. 그 말은 뭐냐면, 부처님께서 수기를 받았지만
본질법에서 본다면, 본질법에서 본다면 수기를 주고 말고 할 것도 없단 말입니다.
부처가, 부처와 중생이 따로 없는 마당에 누구 수기를 주고 수기를 안 주고 할 것이
없단 말이죠. 법이란 것은 얻고 받고 할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미 일체 모든 중생이 그 자리에서 부처라는 법보이고, 이게 자성삼보라는 얘기 들어보셨습니까?
자성삼보라고 해서 불법승삼보는 내 바깥에 있는 삼보만이 아니에요.
자성삼보라고 해서 내 안의 삼보, 내 안에 부처님이 있고 내 안에 불법이 내 안에 구족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청청한 수행자의 성품이 구족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삼계율할 때는 내 안에 있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그 부처, 그것을 생각했을 때 어떻게 내 안에 본래 부처가 있고
본래 법이 있는데, 그걸 주고 받고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진리의 차원에서 본다면.
그래서 수기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 수기를 받은 게 나만 받고 그랬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부처님이 수기를 받았다는 하나의 상징인데, 그것은 뭘 의미하겠습니까?
일체 모든 중생이 다 수기를 받았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얘기죠.
일체 모든 중생이 사실은, 사실은 부처인데 스스로 부처인 줄 모르는 것.
그것은 뭐하고 같습니까? 법화경에서 비유로 말한 것은, 아함경에도 똑같은 비유가 있어요.
주머니에 거지가, 거지 친구가 그 주머니에다가 어마어마한 값이 나가는
엄청난 보물을 주머니에 넣어줬단 말이에요, 살짝.
그런데 거지는 자기 주머니에 이 보물이 있는지도 몰라요.
수천억하는 보물인데, 엄청난 보물이 주머니에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 구걸하면서 거지로 산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거지가, 거지로 살지만 부잡니까? 가난한 사람입니까?
거지로 살지만 보물이 있으니까 부자죠, 사실은. 근데 스스로 부자인줄 모르는 거죠.
근데 무심코 슬쩍 봤더니, 주머니를 슬쩍 봤어요. 어? 보물이 있는 걸 슬쩍 봤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걸 어떻게 꺼내가지고 어떻게 써야하는지 방법은 모르지만
슬쩍 본 사람은 어떻겠어요? 아, 나한테 보물이 있긴 있구나. 이걸 아는 거죠, 그죠?
이걸 슬쩍 본 사람을 뭐라 합니까? 견성했다고 그럽니다. 성품을 보았다 이런 거죠. 성품을 본 겁니다.
성품을 보지 못하니까 내 안에 금덩이가 있다는 걸 모르고 가난하게 산단 말이에요.
우리도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보질 못했으니까,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어리석게 사는 겁니다. 어리석다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그래서 모두가, 일체 모두가 그 순간 수기를 받은 것과 다르지 않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뭐랄까, 깨달음의 사회화의 과정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겁니다.
즉 수행자가 깨닫고 나서 불국토를 장엄하는,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게 무슨 말이냐면,
이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불국토로 장엄시킨다. 불국토로 바꾼다, 이 소리죠.
그러니까 다시 말해 여러분이 불법을 전파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이럼으로써,
이 세상을 불국토로 바꾸는 거예요.
모든 사람의 깨달음의 사회화, 깨달음을 이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사회로 더욱더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 베푸는 것, 이게 깨달음의 사회화고, 이게 바로
불국토를 장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불국토를 스스로 장엄한다.’ 라고 이 상에 빠진다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그렇죠, 이젠.
저 같이 완전히 깨닫지 못한 사람일수록 이제, ‘야~ 내가 이렇게 설법도 많이 하고
야~ 이렇게 글도 쓰고 이렇게 신도님들에게 부처님 가르침도 많이 전하니까 야~ 나는
불국토를 장엄하고 있구나.’ 이런 상에 딱 빠지기 쉽단 말입니다. 그러나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상에 빠져 있는 사람은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생각이 없었을 때 그거야말로 진정으로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이다.
불국토를 장엄한다, 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상에 빠져 있다면
그 자체가 전혀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과는 어긋나는 것이죠.
그래서 불국토를 장엄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을 장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다, 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포교하고 교화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이러더라도 거기 상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스님들 중에도 처음 출가한지 얼마 안 되는 스님들일수록
아상이 제일 높아요. 내가 스님인데 하는 그 상이. 그래서 구족도 더 받고 싶어 하고
내가 불교에 대해 안다는 상도 더 많고. 신도님들 중에도 어떻습니까?
불교 대학을 이제 막 졸업하신 분들, 또 포교사 고시를 이제 막 합격하신 분들,
이런 분들일수록 이제, 내가 말이지~ 내가 법사고 말이야, 내가 불교 공부를 이렇게 많이
한 사람이라, 불교 공부를 이렇게 많이 했는데 너희들은, 어리석은 이 중생들 말이야,
부처님 가르침을, 이 어마어마한 가르침도 모르는, <이 어리석은 중생들>이라는
나도 모르는 마음속에 얕보고 내가 뭔가 가르침에 있어 우월하다는 이런 상이 있단 말입니다.
내가 남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해줄 때는 내가 우월하다는 상에 빠지고,
내가 이 사람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한다는 어떤 뿌듯함, 그 어떤 상에 빠져 가지고
불국토를 장엄한다, 라는 상에 빠지기 쉽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금강경을 지금 계속 말씀 드리는 것처럼 모든 상을 타파하는 방편의 가르침을 계속 주고 있는 겁니다.
뭐, 수기를 받았다는 것도 상이니까 타파해야 된다. 법을 주고 받은 것도 없다.
불국토 장엄한다는, 내가 불국토를 장엄했어도 불국토를 장엄했다는 상도 놔야 한다.
아까 말했던, 수기를 받은 것도 없다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거는 뭡니까?
우리가 큰 스님들을 찾아가서 재가자건 스님이건 큰 스님을 찾아가서
법을 인가받고 이러잖아요. 인가받으러 찾아다닌단 말이에요.
진짜 인가받은 분들은 어떻겠어요? 내가 인가 받았단 상이 없단 말이에요.
스스로 깨달았다는 상도 없고 다만 점검하기 위해 찾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인가를 받았다하더라도 거기서 딱 끝나는 거예요.
놔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어설프게 인가받은 사람이 내가 인가받았단 말이야,
어떤 스님한테도 인가받고, 어떤 스님을 찾아갔더니 그 스님이 나를 인정해줬다.
뭐 그냥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상을 내고 다닌다면~
인가 받고 말고가 어디 있느냔 말이죠. 거기 상에 빠져 있다면 진정한 수행자가 아니다, 이 소리고,
불국토 장엄한다는 상에 빠진다면 그건 진정한 장엄이 아니니까
수행자들도 신도님들도 내가 누구를 포교하니 교화하니 하는 상에 빠지지 말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이렇게 마땅히 어떤 상에도 머물지 않고 청정하게 마음을 내야 될지니,
어떻게 하는 것이 청정하게 마음을 내는 겁니까? 형상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
눈에 보이는 거에 머물러서 잘난 사람은 더 좋아해주고 편애하고, 못난 사람은 미워하고,
돈 좀 있어 보이는 사람은 좋아하고, 없어 보이는 사람은 무시하고
외제차 끌고 온 사람은 아주 대우해주고, 안 좋은 차 끌고 온 사람은 대우 안하고,
이런 상을, 형상에 끄달려가지고 눈에 보이는 데 끄달려서 상을 내서는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면 안 된다는 거죠. 또 들리는, 나한테 칭찬해주고 나한테 그냥 막 아부하고,
이런 말 잘하는 사람한테는 집착해 좋아해주고 나를 미워하고 나를 욕하는 사람은 미워하면서
그 미운 마음에 집착하고 이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거기 머물러 집착하는 거죠.
그리고 좋은 냄새 나쁜 냄새에 집착하고
좋은 맛 나쁜 맛에 집착해서 좋은 거는 더 먹으려고 집착하고 하는 것,
또 몸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여름엔 덥다. 더우면 땀난다. 땀나는 느낌, 이 느낌 싫다.
이 땀나고 더운. 느낌이잖아요. 접촉이지 않습니까. 몸의 접촉. 이 느낌이 싫다.
그래가지고 여기에 그냥 막 싫다, 라는 느낌에 집착을 막 내고.
제가 인도에 가서 너무 더운 곳에서 아주 고생을 하면서 인도에 에어컨도 없고
너무 힘든 곳에서 더군다나 걸망을 큰 걸 인도에서 배낭여행을 가니까
혼자 이걸 짊어지고 갔단 말입니다. 얼마나 무거웠겠어요. 저는 공부도 안하고 가다보니까
그냥 가서 마구잡이로 다니다보니까 그 무거운 걸 다 짊어지고 다닌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그 짐 무거운 거는 숙소에 딱 놔두고 가볍게 다 다니더만요.
그것도 모르고 그냥 이걸 막 끌고 걸어 다니니까 죽을 지경인겁니다.
그렇게 덥고 힘든 곳에서 인도에 있다가 한국에 딱 왔는데 아이고 여름을 보냈는데요,
여름이 여름이 아닌 겁니다, 한국의 여름은. 하나도 안 덥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인도 갔다 온 다음에 여름은 덥다라는 집착이 많이 없어졌어요.
에어컨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굳이 안 틀어도 상관없고
어지간히 더운 거 별 상관이 없어요. 한 이틀 삼일 사일 샤워도 못하고 더워 죽겠어도
온갖 먼지 다 써가면서도 그냥 있고. 네팔에 어디 그냥 흙탕길을 한 두 시간을 가는데,
차가 유리창이 고장이 나가지고 그냥 가는데 오르막길에서 가다 내려오는 차가 있으면
가다서다가다서다 하면 고운 흙모래가 얼마나 고운지 차가 한번 가면요, 먼지도 먼지도
그렇게 많은 먼지도 태어나서 처음 봤는데요, 먼지가 아니라 앞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한동안.
그 먼지가 싹 보여요. 창문 너머로 확 들어와서 앞사람도 안 보일 정도로 확 뒤덮어버려요.
근데 그걸 다 쓰고 그러다 숨을 안 쉴 수도 없는데 그니까 그 모래가 얼굴에 따닥따닥 다 붙고
얼굴에 땀은 나고 더워 죽겠고 에어컨도 없고 막 그러다 보니까
한국에 와서 보니까 더운 거 뭐 별거 아닙니다. 더운 것도 별거 아니고 또 힘든 거 괴로운 거
이거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우리가, 우리가 아무리 괴롭다고 해도 괴로운 게 아니에요.
연세 드신 분들, 지금 40대, 50대, 60대, 70대이신 분들이 요즘에 신 트렌드입니다.
혼자나 아내하고 단 둘이 배낭여행을 가셔요. 이게 옛날같이 무슨 여행사 끼고
이렇게 막 그냥 가면, 이건 노동입니다. 고행이에요. 그냥 막 시간대별로 막 끌고 다니면서
여기 갔다 저리 갔다 하고, 사라하고 안사면 막 눈치주고 하루 종일 막 그냥 고통 속에 다니다가
이건 보자마자 제대로 보지도 못합니다. 사진만 딱 찍고 그냥 오는 거예요.
이런 거 안 하고, 제가 인도에 가서 보니까 연세 60, 70 되신 분이요, 74세 되신 분도
제가 4천고지 히말라야에서 봤다니까요. 혼자 오셨어요, 혼자. 정년퇴임 하신 분이 혼자.
왜 혼자 오셨어요? 이러니까, 마누라가 아무리 가자해도 안 간답니다. 그 힘든 델 왜 가냐고.
그런데 당신은 들고 오셨어요. 돈이 많아야 가죠? 하지만 한국에서 삼 개월 쓰는 돈이나,
인도에 가서 삼 개월 쓰는 돈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 인도는 절약해서 쓰면 한 사십만원 돈이면,
먹고 자고 교통비까지 다 할 수 있어요. 절약하면.
럭셔리하게 해도 한 오십만원 육십만원이면 아주 럭셔리한 여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어떤 것도 좋다. 근데 이걸 요즘 젊은이들이 유럽 미국 이런 데로 배낭여행을 가는데
가봐야 한국, 서울하고 별 차이가 없어요. 똑같이 무슨 던킨 도너츠 있고 무슨 맥도날드 있고
지하철 있고 에어컨 있고 쇼핑센터 있고 똑같은데 가는 겁니다.
인도는 전혀 달라요. 전혀 다릅니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들이 막 벌어지는데,
그 속에서 엄청난 것들을 배우고 느끼고 깨닫게 되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말하듯이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눈, 귀, 코, 혀, 몸, 뜻이 색성향미촉법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겁니다.
집착하지 않고 그러나 마음을 내라. 이게 아주 금강경 핵심의 실천적인 구절이고,
불교의 실천적인 핵심이 뭐냐?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이 얘기입니다. 이 말은 뭐냐면 머무는 바 없다는 것은 집착하는 게 없다는 얘기에요.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무주묘행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겁니다.
무주, 머물지 마라 그러나 묘행, 묘하게 행해라. 행하지도 말라는 게 아닙니다. 행하는 거예요.
그러나 묘하게 행하는 겁니다. 어떻게? 집착하는 바 없이 행하는 거예요.
돈을 벌지만 돈에 큰 집착 없이 돈을 버는 겁니다.
집착하는 바 없이 열심히 사는 거예요. 집착하는 바 없이 다 할 수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했을 때 그것을 하는 것이 훨씬 순수해지고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집착 없는 행은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합니다. 쉽게 말해서, 집착 없이 했을 때 그것을 잃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아진다. 분명합니다. 무소유가 전부를 소유하는 거래잖습니까, 집착 없이 하면.
이게 아이러니에요. 이 우주 법계의 아이러니입니다.
집착 없이 그것을 행하면 그게 더 잘 이루어진단 말이에요.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더 안 이루어집니다.
돈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돈을 벌어야 된다, 벌어야 된다,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벌어야 된다는 집착하는 마음이 나는 없다, 라는 마음을 강화시켜 주거든요. 우리 안에.
그러니까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겁니다. ‘없다.’ 라는 마음이 강화되니까.
그런데 집착하지 않고 남들에게 보시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남들한테 보시하는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 내가 그래도 좀 있다 이런 마음을 강화시키는 거예요.
내가 그래도 좀 있어. 내가 이 정도는 베풀 수 있어, 라는 마음. 뭔가 넉넉한 마음을 연습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마음은 어마어마한 부유함을 연습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오히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지,
머물러 집착하고 마음을 내면 그건 오히려 안 이루어진다. 이게 우주의 아이러니에요.
그래서 집착하지 않고 해라. 그러나 집착하지 않고 했으니까 되겠지, 이게 집착하는 거죠, 사실.
부처님, 제가 집착 없이 돈 벌 테니까 돈 벌게 해주세요,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돈 안 버니까 확 부처님을 원망하고 스님 찾아와서 전혀 집착 없이 기도도 하고,
백 일 기도도 했는데 부처님이 나 돈을 못 벌게 해줬다. 이게 아이러니입니다.
집착 없이 했으면 돈을 못 번다 하더라도 거기서 괴로울 게 없는 거예요.
이미 집착이 없었는데 무슨 돈을 못 번다해서 괴로울 게 있겠어요?
그건 집착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미묘하게. 더 깊은 차원에서는.
그래서 이게 핵심입니다. 이것만 기억하시면 좋겠어요. 집착하는 바 없이, 그러나 그 마음을 낸다.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면 할 거 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자식한테 화를 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내지 말아야죠.
그런데 정말 화를 내야 될 때가 있긴 있죠, 그죠? 화를 안 내고 너무 좋게만 얘기하니까
얘가 전혀 알아듣질 않아. 그러니까 화를 내서 해야지만 얘가 심각성을 알겠구나 할 때가 있어요, 그죠?
그럴 때는 화를 낼 수가 있죠.
그런데 화를 낼 때요, 내가 화에 집착해서 화를 내는 것과 그러니까 화가 나 죽겠는 마음 때문에
화가 나서 울분을 못 참아서 내는 화와 얘를 진짜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쯤은 한 번 화를 내 줄 때가 됐구나, 얘를 위해서는 내가 한 번쯤은 강하게 화를 내줘야겠다, 해서
필요에 의해 내는 화. 욕구에 의해서, 화에 휘둘러서 내는 화가 아니고
필요에 의해서, 내가 냉정하게 화에 휘둘리지 않은 상태에서 내는 화.
이거는 상관없습니다. 이거는 상대방이 분명히 알아요. 아이들도 압니다. 누구도 알아요.
간부가 부하를 질책할 때도 이게 나를 사랑해서 하는 질책인지, 정말 미워서 하는 질책인지를
우리 근본은, 영혼은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에 집착하지 않고 내는 화는
이게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입니다. 화도 내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부처님도 화를 낼 때는 화를 내셨단 말이죠. 화를 낼 땐 낸단 말이에요. 그러나
내가 화내는데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상대방도 거기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이 오히려 상대방을 돕는 것이 되고
그것이 오히려 복을 짓는 것이 될 수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머물지 않고 화를 내고, 집착하지 않고 돈을 벌고, 집착하지 않고 자식 대학도 보내고
교육도 시키고 학원도 보내고 뭐 다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집착하지 않으면 된다. 집착하지 않는다는 건 결과가 어떻든 상관 않겠다.
그러나 최선은 다하겠다. 이겁니까. 여기까지가 끝이니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얘길 했었죠, 그죠?
이제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 법문을 했다는 말입니다. 집착하지 말고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러고 나서 부처님께서 수보리한테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낼 줄 아는가,
하고 물어보는 겁니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에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큽니까, 작습니까?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큰 거예요, 작은 거예요?
우리가 분별하지 말아라, 하는 차원에서 보면 어때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으니까
크다라고 할 수도 없고 작다라고 할 수도 없겠죠, 그죠? 본질에서 본다면.
그러나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차원에서 본다면 마음은 내야죠. 큰걸 보고 크다라고 할 수도 있어야 하고
작은 걸 보고 작다고도 할 수가 있어야 되죠. 자식 보고 잘하면 잘했다, 잘못하면 잘못했다,
얘기할 수가 있어야 되는 거죠. 그것처럼 수보리가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매우 큽니다.”
이생기심 한 거예요. 마음을 냈습니다. 그러나 크다라는 것에 집착해서 마음을 낸 게 아니에요.
즉,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몸이라는 것에 집착해서 이게 실체적으로 크냐, 이런 것을 물어본 게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러기 때문에 나도 답변을 크다고 답변했지만, 이 크다라는데 집착해서 크다라고 얘기한 건 아닙니다.
이게 좀 확 안 와 닿으실 텐데, 쉽게 말해서 부처님께서 이게 옳냐, 틀리냐 물어봤어요.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옳은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닙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요?
직장에서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습니다.
투자 할까, 말까? 투자해도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
아버지, 학원을 갈까요, 말까요? 학원을 가도 좋고 안 가도 좋다.
뭐 이 대학을 가도 좋고 저 대학을 가도 좋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가 삶을 살 수가 없죠.
그거는 집착하는 바 없다고 해서, 분별하지 말라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겠다는 얘기에요.
그게 아니고 불교는, 무소유라고 해서 소유하는 것을 전부 다 버리라는 게 아닙니다.
무소유가,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돼있는 무소유가 돼야 한단 말이에요.
다 갖다 버리란 얘기가 아니고 돈을 벌지도 말고 하란 얘기가 아니고 돈을 벌되,
집착하지 말란 얘기에요. 그래서 이렇게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줄 알아야 된다.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리다. 옳으면 옳다, 그르면 그르다. 크면 크다, 작으면 작다.
잘났으면 잘났다, 못났으면 못났다. 얘길 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러나 거기 집착도 안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얘길 했지만 저 사람이 다른 얘길,
“야, 이게 좋다, 이게 좋을 것 같아.” 저 사람은 그게 안 좋다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내 입장을 포기할 수도 있어야죠. 그런데 대부분은 내 입장이 이런데
저 사람이 다른 얘길 하면 나에게 공격하는 걸로 받아들여서 포기를 안 하고 끝까지 싸웁니다.
이건 이 문제만 놓고 봐야 되는데, 이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 걸로 확대해석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문제 자체를 가지고 서로 마음이 상해지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마음을 놓을 수가 있어요.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더라도 내가 그 생각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반드시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돼야 된다, 라는 생각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그리고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으면 어떤 것도 괴롭지 않습니다.
내 마음 잠시 놓으면 더 상상하지 못한 것들을 우리가 그 곳에서 보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크다, 작다라는 비유를 이렇게 드셨는데 크다 작다, 또 잘났다 못났다,
옳다 그르다하는 일체 모든 분별들. 분별할 게 있더라도 분별은 하되 거기에 집착해서
이것만이 정말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해가지고 거기 집착하는 마음으로 분별해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즉 옳다 그르다 말은 하되, 내가 옳다라는데 너무 집착해서 여기만 고집해서
남들과 싸우고 다툼을 일으켜 이러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렇지 않았을 때
우리가 앞에서 봤던 무쟁삼매, 적정처 아란나행을 우리도 즐기게 될 수 있는 겁니다.
분별은 다 하되 거기에 집착을 하지 않으니까.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눠도 어떤 곳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다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어디에도 집착을 하지 않으니까 자유로운 거예요.
삶이 너무나도 자유롭게 바뀌는 거죠.
그래서 금강경 가르침의 아주 핵심인 부분을 오늘 여기까지 말씀드리며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너무 늦게 올렸네요. ㅜㅜ 혹시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설법을 준비하시는 스님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짐작해봅니다. 너무나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기 하기가 쉽지 않은데 너무 수고 하시네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고 다시반복해야 하고 ~~
잘 정리가 되면 법우님 덕에 책으로도 만들어낼수 있겠네요 감사 합니다.벽송 두손모음.
수고많으셨읍니다. 법우님. 법우님의 열정 감사드립니다.
와우~~~ 녹취가 무척 어려운데 법우님의 정성에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_()_
좋은 말씀 잘 듣고 읽고 느끼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분별은 하되 집착없이 행하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