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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6> 서장 (書狀)
증시랑에 대한 답서(4) “눈먼 자가 사람들에게 잘못 지시하는 것은 모두 고기 눈알을 밝은 구슬로 잘못 알고서 명칭에 머물러 이해한 것이요, 사람들에게 맡아 유지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곧 눈앞의 지각(知覺)에 머물러 이해한 것이요, 사람들에게 쉬고 또 쉬라고 가르치는 것은 곧 생각을 잊은 텅 비고 고요함에 머물러 이해한 것이요, 쉬어서 감각도 지식도 없는 곳에 다다르면 흙이나 나무나 기와나 돌과 같은 것이나, 바로 이러한 때에 혼미한 상태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묶인 것을 풀어주는 방편의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요,
사람들에게 인연따라 비추고 돌아보되 악한 생각이 앞에 나타나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은 정식(情識)에 집착하여 이해한 것이요, 사람들에게 다만 놓고 비워버려서 자연에 맡겨두고 마음을 내거나 생각을 움직임에 관여치 말 것이니 생각은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본래 실체(實體)가 없는 것이므로 만약 이것을 진실하다고 여겨 집착한다면 생사심(生死心)이 생긴다 라고 가르치는 것은 자연체(自然體)에 머물러 그것을 구경법(究竟法)으로 여겨 이해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병은 도를 배우는 사람의 탓이 아니라, 모두 눈먼 스승이 잘못 가르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깨끗하다고 여겨도 안되고 더럽다고 여겨도 안되며, 흘러간다고 여겨도 안되고 머물러 있다고 여겨도 안되며, 이렇다고 해서도 안되고 이렇지 않다고 해서도 안되고 이렇기도 하고 이렇지 않기도 하다고 해서도 안된다. 즉 마음은 어떻게도 규정할 수가 없으니, 어떻다고 규정하면 그것은 이미 식(識)이 되어 허공과 같이 깨끗한 마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문에 들어가는 정해진 길이나 문은 없기 때문에 선문(禪門)은 문 없는 문이다. 즉 특정한 수련의 과정을 아무리 오래 거치고 특정한 수행방법에 아무리 익숙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선문에 들어가는 것을 보증해주지는 않는다.
선은 지금 자신의 마음이 이러한 본래의 마음임을 자각(自覺)하는 것이지, 특정한 이미지[相]의 상대적 마음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즉 선은 취사선택(取捨選擇)의 행위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진실을 깨닫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실을 깨닫기만 하면 어리석음은 본래 없는 것이다.
문 없는 관문[無門關]을 통과하는 길은 눈을 밖으로 향하여 이리저리 살피고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눈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원래 갖추고 태어난 내면의 눈만이 본래부터 그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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