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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해협 ~ Miri 마리나 4편 : 꿈꾸던 세일링
2023년 6월 8일. 항해 131일째, 1월 28일, 이탈리아 행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난 직후부터는 모두 항해다. 오전 7시 10분. 싱가포르 해협을 벗어나며 메인세일을 100% 펼친다. 엔진 Rpm을 1,200으로 낮춘다. 곧이어 집세일도 130% 펼친다. 풍속 크로스홀드 6.7노트. 선속 8.1노트. 아직 조류의 도움을 받고 있다. 버섯스프와 빵으로 아침 식사를 한다. 거대한 상선들이 잠든 타이탄처럼 싱가포르 앞 해상에 떠있다. 바다는 잔잔하고 바람도 여유롭다. 크루들의 표정도 좋다. 어제 역풍 역조류 때의 X씹은 표정들이라니. 바다와 파도에 따라 변하는 크루들의 얼굴이다. 그래서 사람은 대자연의 일부고, 세일러는 바다의 일부다.
오전 8시 8분. 남중국해(South China Sea)로 접어 든다. 이제부터 Miri 마리나까지 4일. 남중국해는 잔잔한 파도로 우리를 반긴다. 바람은 노고존 스타보드 35도 6.0노트. 엔진 Rpm 1,200. 선속 8.1노트. 아직은 순조류 영향을 받는다. 싱가포르 야간 항해의 흥분을 가지 앉히고, 해가 뜨자 크루들은 다시 잠에 빠진다. 이래서 다음엔 나도 남의 배에 크루로 참여해 세일링 항해를 하고 싶다. 책임은 없고 권리는 누린다. 그래서 제일 좋은 배는, ‘남이 조정해 주는 배’다. 해가 뜨자, 해적 습격의 위험은 사라진 것 같다.
오전 9시. 세탁을 해서 크루들에게 주고 널라고 부탁한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맘 좋고 착한 선장이라서 세탁을 해주는 것이 절대 아니다. 수도물을 철저하게 관리하려는 목적이다. 방금도 크루들이 물 사용하고 급수 모터스위치를 켜 놓아서 잔소리 했다. 물은 생명에 관련 된 것이기 때문이다. 잔소리하는 나도 잔소리가 싫은데, 듣는 크루들은 오죽할까? ‘세일링서울’팀의 크루들은 세일링 경험도 많고, 크루로서 기본이 딱 잡힌 대단히 훌륭한 멤버들이다. 그래도 잔소리를 주고받아야 한다. 이런 게 단체 세일링의 어려움이다.
해수부에서 안전 확인 차 연락했다. 01.18N 104, 23E. 위치를 불러 준다. 통영 이준희 선장님께도 위성전화가 온다. 토요일 오전 바람이 세다고 한다. 금요일 저녁에 축범을 해야겠다.
오전 9시 50분. 엔진을 중립으로 둔다. 풍속 리치 11.5노트, 선속 7.5노트. 바람이 너무 좋다. 나비오닉스 화면이 자꾸 Miri 마리나까지 보여주게 되어 축소되어 있다. 크루 중 누군가 마음이 급한 거다. 나는 화면을 확대하여 주변 Wreck과 등대, obstacle을 찾는다. 안전항해를 해야 한다. 물론 나도 Miri에 빨리 가는 것이 좋다. 그래야 한국까지 가는 시간, 가족과 리나를 만나는 시간이 단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해역을 면밀히 살펴, 주변 Wreck과 등대, obstacle을 잘 피해가야 이룰 수 있는 거다. 그 안전한 해역들이 쌓이고 쌓여 다음 항구까지 가는 거다. 먼 곳에 가고 싶으면, 먼저 내 배의 주변을 면밀히 견시해야 한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안전이 먼저다.
그래서 장거리 항해에 참여 하는 분들은, 최소 일정의 두 배 이상을 예상하고 참여해야 한다. 원양 항해는 바다와 날씨, 하늘이 하는 일이다. 곁에서 속도와 일정 타령을 하면 서로 스트레스다. 그런 일은 애초에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넉넉히 일정을 잡아도 사이클론 한 번이면, 출항도 못해보고 귀국 비행기를 탈 수도 있다. 그런 게 항해다. ‘이번 주 내내 항해하고 다음 주 월요일 비행기 타야지.’ 이런 것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같은 계획이다.
주변에 거대 선박들이 지나가니 파도가 몰려온다. 한번 씩 프룸라이드를 탄 것 같다. 싱가포르에서 남중국해로 출입하는 상선들이 굉장히 많다.
오전 10시. 김석중 선장님께 카톡이 온다. ‘싱가포르 옆, 말레이시아 세바나코프 마리나로 들어갑니다.’ 안전하게 잘 도착하신 것 같다. 다행이다. 리치 파라다이스는 제네시스와 약 12시간 차이로 안전하게 운항 중이었다. 세일러들에게는, 안전하게 도착해서 어느 마리나로 들어간다는 소식만큼 반가운 소식은 없다. 다음 항구에서 연락드리기로 한다.
오전 11시. 24번 웨이 포인트를 지나면서 ‘해적 위험 지역’을 완전히 벗어난다. 스타보드 15 로 변침해서 miri 마리나 방면으로 침로를 잡는다. 보르네오, 사라왁, 부루나이가 하나의 섬에 있는 지역이다. 보르네오는 인도네시아, 사라왁은 말레이시아, 부루나이 까지 한 섬에 3개의 국가가 있다. 1일 12시간 더 가면 보르네오 앞바다에 도착이다. Miri 마리나는 부루나이 바로 직전의 말레이시아 영토다.
오전 11시 50분. 엔진 중립인데, 풍속 12노트에 선속이 쉽게 6.6~7.0 노트가 나온다.
에메랄드 빛 바다에 파도도 부드럽다. 다들 ‘아름답다!’ 를 연발한다. 한참 사진을 찍다, ‘이런 게 세일링이지!’ 다양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여행은 인간의 지경을 넓혀준다. 꿈이 크기와 방향이 달라진다. 나도 이번 항해를 통해 꿈이 바뀌었다. 세일링서울 크루들도 꿈이 바뀌었다. 젊은 시절에 여행을 많이 해야 하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장거리 원양 세일링을 경험하는 게 좋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으려면, 여행을 통해 미리 경험을 쌓아야 한다. 해라. 지금해라. 머뭇거리지 말고, 여기서 당장해라. 바다로 가서 요트에 올라라. 사고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세상의 끝>을 볼 것이다.
오후 1시. 오늘 점심은 파스타 면에 비빔국수 양념이다. 조상욱 크루의 작품이다. 새로운 독창적인 요리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몇 가지 안 되게 주어진 재료로 뭔가 맛나게 먹고 싶은 욕망이, 새 요리를 창안하게 하는 거다. 덕분에 행복한 세일링에 매번 식도락의 즐거움이 더해진다. 파스타 면 비빔국수는 기대보다 더 맛났다. 반찬으로 만든 감자부침도 기가 막혔다. 조크루 정말 감사합니다.
오후 1시 30분. 바람이 14노트를 넘어간다. 집세일을 110%로 축범 한다. 바람을 잔뜩 품은 집세일은 잘 감기지 않는다. 집세일 시트를 풀어 바람을 내보내고 펄럭이게 한 후, 간신히 집세일을 감는다. 이러니 세일러는 바람에 민감해야 한다. 돌풍이 불어오고 나서 세일을 접으려하면 이미 쉽지 않다. 미리 축범해서 돌풍에 대비해야 한다. 대양항해에서 안정되지 않은 날씨와 바람에, Full 세일로 범장하고 간다는 것은 사고를 부르는 일이다.
오후 2시. 풍속 크로스홀드 14노트, 엔진 중립, 선속 6.5노트. 586해리 남았다. 507해리 왔다. Miri 마리나까지 총 구간 46.3% 왔다. 우측에 Wreck (난파선) 이 있다고 해서 바라보았다. 약 2마일 우측, 33미터 수심에 거대한 상선이 침몰해 있다. 배의 빨간 페인트가 선명한 것을 보니, 침몰한지 얼마 안 되는 배다. 거대한 선수와 브리지 부분이 보이고 가운데는 완전히 침몰해 보이지 않는다. 나비오닉스는 상당히 정밀하다. 돈 내고 정식 판 나비오닉스를 사는 것을 정말 권장 드린다. 암초나 난파선등의 최신 정보를 모른 채 깜깜이 항해를 하다, 해난 사고를 당하는 것보다는 년 간 3~4만원을 내는 것이 싸지 않은가?
오후 3시. 좌현 2.4마일 지점에 움직이지 않는 배가 있다. 거대한 컨테이너선이다. 이상하게 전체적으로 잔뜩 녹이 슨 것처럼 보인다. 1.5마일까지 접근하며 보니 앵커가 내려져있다. 그리고 진짜 잔뜩 녹이 슬어 있다. 한동안 방치 됐었나 보다. 나비오닉스를 보니 Obsruction(장애물)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정말로 버려진 배다. 잔뜩 실린 컨테이너에는 뭐가 실려 있었을까? 컨테이너 속의 화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찌 됐을까? 무슨 사연으로 남중국해 한 가운데 저렇게 거대한 배가 버려지게 됐을까? 세상은 예상치 못할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발견하는 자가 신비한 이야기들의 주인이다.
오후 3시 30분. 풍속 빔리치 15노트, 선속 7.1노트, 완전 범주로 놀라운 속도다. 0.7미터 내외의 파도를 제네시스가 가볍게 넘고 있다. 크루들은 모두 오수에 빠져있다. 어제 저녁 싱가포르 해협을 빠져나오느라, 상당히들 긴장한 모양이다. 해적출몰 지역도 같이 탈출한 것이니 신경이 날카로워 질만도 하다. 지금은 마치 꿈과 같이 멋진 기억에 남을 세일링이다. 이런 순간이 세일러로서의 나를 보람되게 한다. 리나야, 아빠는 남중국해의 푸른 바다에서 행복한 세일링 중이란다. 언젠가 너와 함께 이 바다를 항해하고 싶구나.
오후 4시 10분. 동경 105도를 넘어 선다. 해적위험지구 해역이 동경 105까지라고 하니, 이젠 공식적으로 말라카해협의 해적위험지구를 넘어 섰다. 바람은 빔리치 12~14노트, 엔진 Rpm은 1,200. 선속 7.1~7.4노트다. 남은 거리 569해리. 524 해리 왔다. 그리고 이번 이탈리아에서 한국까지의 항해 중, 두 곳의 해적 위험 지역을 모두 무사히 건너왔다. 이젠 살았구나. 모두 하느님의 도움이다.
오후 6시 30분. 우렁 된장찌개와 깻잎, 볶음김치, 배추, 오이, 양배추와 된장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매일 너무 잘 먹어서 배가 조금 나온 것도 같다. 세일링 서울 팀의 동남아시아 장거리 항해 다이어트 계획은 물론 실패다. 실은 나도 배가 자꾸 나오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그래도 뭐 다시 혼자 세일링하면 뱃살이 빠지겠지 생각하고 편안하게 먹고 있다.
오후 8시 30분. 남중국해의 바다에는 아주 멀리 어선들의 집어등 불빛이 보인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다. 우리는 남십자성과 북두칠성 사이의 바다를 항해중이다. 잠시 별구경을 하는 사이, 별똥별을 3개나 보았다. 빼곡한 별자리 사이를 소리 없이 흘러가는 별똥별. 조상욱 크루는 한 번도 못 봤다고 투덜대다가, 내가 지적한 하늘에서 같이 별똥별을 보았다. 소원을 빌었다고 하니 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별똥별을 네 개나 보았으니, 네 가지 소원을 빌 자격이 있는 것일까?
하나, 부모님의 건강장수다. 둘, 내 딸 리나와 가족의 평화와 행복. 셋 미국에 있는 여동생의 가족들이 모두 행복하기를 빈다. 넷, 이번 항해가 무사히 잘 끝나고, 항해 중에 만난 모든 이들의 안녕을 바란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소망이 있어 별자리 사이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별똥별을 발견하지 못했다. 안다. 별이 어떻게 소원을 이루어주겠나? 그저 낭만적인 소망일 뿐이다. 소원성취는 오직 하느님의 소관. 기도로 나머지 소망을 빌어야겠다.
오후 9시 15분. 선속 5.9노트, 현재 541해리 남았다. 총거리 1,092해리 중 552해리 온 거다. 총구간의 50.4% 다. 오늘은 뜻 깊은 일이 많다. 해적 위험해역을 안전하게 벗어났고, 총 구간의 50%를 넘은 날이다. 어둠 속에서 서로 축하한다. 이제 28시간을 더 가면 싱가포르 보르네오 바다를 건넌다.
오후 10시 45분. 풍속 8.0노트. 엔진 Rpm 1,400 선속 6.1노트. 보르네오 앞바다까지 24시간 남았다.
6월 9일 (금요일) 오전 6시. 애타는 기도를 드리다 잠이 깨었다. 그러나 꿈속에서 주기도문이 생각나지 않아 자꾸 틀렸다. 몇 번이고 틀린 기도를 암송하다 잠이 깼다.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나. 나의 기저에 깔린 욕망은 무엇인가? 60세 넘은 나의 낡은 육신을, 전 세계로 끌고 헤매는 소망은 무엇인가? 스프레이 후드의 창으로 앞을 바라본다. 나는 왜 항해하는가? 마음속 질문은 답을 찾지 못한 채, 남중국해에 여명이 밝아온다.
풍속 빔리치 8.4 노트, 엔진 Rpm 1,250. 선속 6.9노트. 싱가포르에서 보르네오 구간은 14시간 더 가야한다. 목적지 miri 마리나 까지는 477해리 남았다. 615해리 왔다. 나비오닉스는 2일 20시간 더 가야 한다고 표시한다.
어제 크루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들은 굳이 필리핀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럼 Miri에서 3~4일 보급하고, 코나키나발루 가서 크루들을 모두 내려 주고, 나는 3일간 최종 정비를 한 뒤 바로 대만으로 출항하면 된다. 대만에서도 3일정도 머물며 보급과 문제점 수리를 하고 한국으로 간다. 물론 중간에 태풍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계획이다. 태풍이 있으면 당연히 마리나에서 대기해야 한다. 이제 정말 몇 구간 남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출발한 장거리 항해의 끝이 보인다. 내 인생에 가장 긴 터널을 통과한 셈이다. 귀국해서 지난 기록을 보면 나는 어떤 생각이들까?
오전 8시. 재미난 말을 들었다. 아침식사 전 다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조상욱 크루가 말한다.
“선장님은 진짜 신기하세요”
“뭐가?”
“어제 밤 제가 견시 당번일 때, 소변보러 일어나시더니, 나비오닉스보시고, 레이더와 풍향 확인하시고, 세일 조정 하시더니, 그대로 다시 잠 드시던데요?”
“내가 그랬어?”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을 못하니, 다들 더 신기해한다. 실은 나도 신기하다. 머리가 아닌 몸이 배를 조종했나보다. 장거리 단독항해를 하다 보니 항해는 몸에 밴 습관이 되어 버린 거다. 나는 제대로 세일러가 되어가나 보다. 나는 이런 내가 마음에 든다.
어제 동경 105도를 벗어나면서 해수부는 안전해역으로 진입했기 때문에 이제는 위치 확인 전화를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동안 감사했다. 덕분에 고독한 싱글핸드 항해를 하면서도 소중한 기상정보 등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드린다.
오전 9시 40분. 통영 이준희 선장님께 위성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부터 바람이 14노트까지 점점 더 강해지고, 내일부터는 보르네오 섬에 가려져 바람이 약해 질 거라는 말씀이다. 다행이 주변에 태풍 소식은 없다. 어쩌면 이번 남중국해 항해가 최고의 세일링이 될 수도 있겠다.
오전 10시 10분. 어제는 북위 1도 까지 내려갔다. 지금은 북위 2도 22분. 그러나 바람이 서늘하다. 저녁엔 담요를 덮어야 할 정도다. 적도 근방이라 엄청나게 더울 것으로 예상했는데, 전혀 아니다. 햇살이 엄청 뜨거운 날도 달아오르지 않는 배 위에는 머물만 하다. 문제는 마리나다. 마리나는 육지 근방이다. 달아오른 육지의 열기를 그대로 받는다. 낮에는 배에 머물기도 쉽지 않다. 일부 배(아일랜드 퍼킷)는 요트 전용 에어컨에 달려있고, 대부분 배는 이동용 에어컨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선풍기 하나로 버틴다. 마리나에 장기간 머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항해 중에는 또 애물단지다. 호주에서 온 데이비드는 카탈리나 44 화장실 하나를 아예 에어컨 룸으로 썼다. 에어컨에서 떨어지는 물을 화장실 바닥으로 흘려보낼 수 있어서 좋단다. 혹시 나도 여유로운 장거리 항해를 한다면 이동용 에어컨을 반드시 고려해 보겠다.
오전 10시 50분. 지금 남중국해 항해는 모든 세일러가 바라는 꿈의 세일링이다. 집세일 140%, 메인세일 100%. 파도 0.5미터. 빔리치 10노트, 선속 6.5~7.2노트. 제네시스는 힘차게 셀룰리안 블루(Cerulean Blue)의 물결을 가르며 나아간다. 옅은 구름이 끼어 따가운 햇살까지 막아준다. 사방 6해리 인근에는 배 한 척 없다. 이대로 10시간 30분을 더 가면 보르네오 섬의 북단에 도달한다. 이후로는 보르네오 섬이 남풍을 막아주고 우리는 섬 해안을 따라 Miri 마리나 까지 풍랑의 위험 없이 항해한다. 말 그대로 완벽한 세일링이다.
오전 11시 10분. 갑자기 작은 어선이 나타났다. 계속 다가온다. 어선은 제자리에 있고 우리가 다가가는 지도 모른다. 갑자기 긴장한다. 동경 106다. 해적 위험지역에서 1도(100Km) 벗어났다. 그래도 모른다. 어선이 200미터 지점까지 다가 왔을 때, 나는 선실로 들어가 무전기를 잡는다. 혹시 모를 메이데이를 준비하려는 거다. 잠시 후 어선이 100미터까지 근접했을 때, 임대균 선장이 손을 흔든다. 어선의 두 사람도 같이 손을 흔든다. 흑인으로 보일 정도로 검은 얼굴이다. 다행이다. 그들은 해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제자리에 머물며 낚시를 손질한다. 어선은 점차 멀어진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인근 50해리(93Km) 근방 섬에서 출어한 배 같다. 그러나 저들이 총을 들고 덤비면, 바로 해적이다. 해적 때문에 어선도 두렵다.
오후 12시 30분. 바람이 14.3 노트 클로즈 리치다. 선속은 7.2~7.5노트. 제네시스는 빠르게 전진한다. 세일링 서울 팀은 모두 깊이 잠들어 있다. 장거리 항해에 야간 견시 당번. 다들 쉽지 않은가 보다. 438해리 남았다. 655 해리 왔다. 전구간의 60%다.
이번 항해에 세일링 서울 팀은 Miri 마리나 까지만 같이 간다. 그들은 Miri 마리나에서 항공편으로 필리핀으로 간다. 나는 Miri에서 보급을 완료하고, 엔진오일과 각종 필터류, 임펠러, 화장실 변기를 교체한 후 싱글핸드로 코타키나발루로 갔다가, 재보급하고 문제 부위 수리를 하고 대만이나 오키나와로 갈 예정이다. 선속 7.7 노트. 제네시스는 놀라운 속도로 남중국해를 질주한다. 세일링서울 팀은 환상적인 범주 속에 오수를 즐기고 있다.
오후 6시. Karang Diana, Karang Jackson 섬이 보인다. 섬 이름이 묘하다. 인도네시아 섬인데 왜 이런 이름인지, 검색이 안 되니 더 궁금하다. 이제 2시간 30분을 더 가서 Karang Diana, Karang Jackson 섬 앞까지 가면, 보르네오 섬 북단에 도달이다. 거기서부터는 보르네오를 우현에 두고 연안항해다. 큰 문제없이 안전항해가 가능하다. 풍속 빔리치 9.3노트, 엔진 Rpm 1,200. 집세일 130%, 메인세일 100%. 선속 6.5 노트다. 남은 거리 400해리. 692해리 왔다.
저녁식사로 압력솥에 갓 지은 감자밥을 양파, 파, 마늘, 참기름을 넣은 간장과 계란 프라이를 넣고 비벼먹는다. 다들 그릇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는다. 보람되다.
오후 9시 45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Karang Diana, Karang Jackson 섬 앞을 지나자, 갑자기 선속이 5.0 노트로 떨어진다. 조류가 있나보다. 바람도 4~5 노트로 줄어든다. 남중국해에서 처음으로 맞는 역조류다. 엔진 Rpm을 1,400으로 올린다. 스턴의 러더 고정 축에서 끽끽 소리가 난다. 아무래도 그곳 뚜껑을 열고 바닷물 샤워를 하는 바람에, 해수가 들어가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일단 윤활제를 뿌린다. 내일 날이 밝으면 구리스를 발라 두어야겠다.
Karang Diana, Karang Jackson 섬 앞에서 갑자기 인터넷이 된다. 한국 로밍 데이터가 된다. 어머니가 보내 주신 리나의 영상을 보려 갖은 애를 쓴다. 문자와 사진은 되는데 동영상이 진짜 느리다. 거의 인터넷이 끊어질 무렵 영상을 받았다. 뽀로로에 빠진 리나를 돌아보게 하려는 어머니의 음성과 리나의 춤추는 모습. 목이 둥그렇게 멘다.
스턴 바로위엔 남십자성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이틀이 더 지나 Miri 마리나에 도착하면 세일링 서울 팀은 떠난다. 나는 Miri 마리나에서 코타키나발루로 간다. 거기서 대만 또는 오키나와까지 단독항해를 하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간다. 필리핀 Coron에 혼자 갈일은 없다. 필리핀에 들리지 않아 일주일이 더 절약 되는 셈이다. 여유롭게 여기저기 들를 처지가 되지 않아, 내 입장에서는 필리핀을 패스 하는 것이 시간과 금전 면에서 도움이 된다.
2020년 필리핀 수빅베이마리나로 입항했을 때, 입국에 150달러가 필요했었다. C.I.Q. 공무원들이 각각 50달러씩을 요구했었다. 이번 항해 중에 만난 외국 선장들도 관련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들도 뇌물 때문에라도 꼭 필요하지 않다면 필리핀을 잘 들르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이번에 피항 등의 급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필리핀을 굳이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여유로운 항해는 다음에 다시.
2023년 6월 10일 (토요일) 오전 10분. 우현 2시 방향에서 붉은 달이 떠오른다. 구름을 헤치고 아주 느리게 솟아오른다. 적도 지역에서는 원래 이렇게 늦은 밤에 달이 떠오르나? 어쩐지 생경하다. 엉뚱한 방향에서 엉뚱한 시간에 달이 뜨는 것 같다. 흔들리는 배에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니 커다란 빛 망울만 잡힌다. 눈으로 볼 수는 있으나 카메라로 잡을 수는 없다. 지금 하늘에 총총한 별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보고 가슴에 담는 수밖에 없다. 이 진귀한 경험을 현재 제네시스로 남중국해를 건너는 크루들만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긴다.
바람이 없어 세일은 모두 접었다. 엔진 Rpm 1,400. 선속 4.5노트, 역조류다. 오늘 아침부터는 다시 뒷바람이 강해지니 순풍에 순조류가 될 때까지 기다리자. 달빛 좋은 밤이니, 기다림도 꿈처럼 달콤하다.
오전 6시 45분. 풍속 빔 7~8노트, 집세일 140%, 메인세일 100%. 선속 6.0노트. 아직 역조류가 있다. 오늘 오전 바람이 강해진다고 하니 기다려 보자. 구름이 많이 낀 동쪽 하늘에서 일출이 시작되었다. 시계와 패드들은 오전 6시 45분 말레이시아 시간, 핸드폰은 인도네시아 시간으로 오전 5시 45분. 시간대가 바뀌니까 전자기기들의 시간이 엉망이 되었다.
오전 7시 14분. 평창 나물밥에 돼지고기 고추장, 햄 계란부침, 볶음김치, 생오이와 쌈장으로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임대균 선장이 아침부터 춘향가로 분위기를 띄운다. 그러더니 고수(북치는 이)가 되겠다고 한다. 아무래도 딸의 판소리 공부를 돕다 보니 영향을 많이 받았나 보다. 아빠가 북을 치고 딸이 판소리를 한다. 정말 멋진 장면이 될 것이다. 이런 소망들이 우리를 내일로 나아가게 한다. 돋아나는 파릇한 생활 속 소망들이 나를 세일링하게 한다. 제네시스는 역조류를 헤치며 나아간다.
오전 8시 35분. 선속은 5.6~5.9노트. 역조류 영향으로 속도가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다. 혼자 항해한다면 상당히 빠른 속도다. 그러나 빨리 서울로 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크루가 있어, 내 마음이 급하다. 그의 사정을 알고 있다. 그러니 자꾸 조급해 진다. 오늘 오전 중 빠른 바람이 있다니 기다려 보자. 이런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무리할 수는 없다. 무리하면 사고다.
오전 10시. 디젤유 190리터를 더 보충한다. 현재 총 350리터를 추가로 넣었다. 사용한 연료는 350 리터. 이대로 Miri 마리나 까지 간다. 크루들이 도움을 주니 작업이 금방 끝난다. 장거리 항해는 싱글 핸드가 가장 이상적이고, 만일 크루와 함께 간다면 선장 포함 총 2~3명이 가장 이상적일 것 같다. 개인적 의견이다.
오전 11시 20분. 좀처럼 바람이 오지 않는다. 빔리치 6.3 노트, 선속 5.3 노트, 여전히 이틀 이상 남았다. 남은 거리 306마일, 787마일 왔다. 총 구간 72%. 바다는 잉크처럼 푸르고 하늘은 수채화다. 바다만 보고 있어도 행복한 항해다.
오전 11시 32분. 통영 이준희 선장님의 위성 전화다. 윈디상으론 12~14노트 바람이 분다는 건데, 현실은 6.5노트. 실은 12~14노트 바람이 필요한 상황인데 윈디와 맞지 않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선속은 5.5~5.9 노트니 상당이 좋은 편이다. 이준희 선장님은 늘 밝은 음성으로 소중한 기상 정보를 알려 주신다. 감사합니다.
정오. 집세일 150%, 메인세일 100%. 모처럼 풀세일이다. 풍속 8.5노트 선속 6.5 노트. 임대균 선장이 멋진 말을 한다. “요트가 360도 아이맥스 영화관 같네요. 우리는 콕핏에 앉아 있는데, 주변 바다와 하늘이 천천히 움직이고, 가끔 돌고래에 날치 떼, 타이탄 같은 거대 선박들이 천천히 지나가는 자연 영화관이요.” 나는 감탄한다. 매우 적확한 표현이다. 이래서 임대균 선장이 등단 시인이로구나.
오후 1시. 모처럼 이탈리아에서 산 파스타와 토마토소스로 파스타를 만들었다. 마늘과 소금, 이탈리아 콩으로 가미 하니 제대로 스파게티 맛이 났다. 역시 바닥까지 다 긁어 먹는 크루들. “고생스러운 장거리 항해라더니 산해진미 여행이네요. 이런 건 진정한 세일러의 자세 아닌 듯 합니다.” 서로 농담을 해가며, 식후 디저트는 잘 익은 망고열매다.
짙푸른 바다, 서늘한 바람, 옅은 구이 드리운 하늘. 매일이 거의 완벽한 항해다. 게다가 오늘은 Full 세일. 이렇게 4~5일씩 별다른 조정 없이 직진하는 세일링이라니! 꿈은 이루어진다. 우린 그동안 모든 세일러들이 꿈꾸던 세일링 중이다.
오후 5시. 결국 14노트 바람은 오지 않았다. 바람은 아예 사라져 버리고 역조류가 시작됐다. 메인세일과 집세일을 접고, 엔진 Rpm 1,450으로 올린다. 선속 4.8~5.0 노트. 272 해리 남았다. 821 해리 왔다. 전 구간 75%다.
오후 6시 20분. 부대찌개로 저녁식사를 마친다. 라면까지 넣은 제대로 부대찌개다. 조상욱 크루 덕에 진짜 돼지가 되어가고 있다. 배가 좀 나오는 것 같다. 박경리의 ‘토지’를 시작해 본다. 사투리를 그대로 쓴 덕분에 뭔 소린지 잘 모르는 대목이 많다. 이건 좀 더 고독할 때 읽어야겠다.
오후 6시 40분. 좌후방으로 석양이다. 하루가 금새 지나갔다. 바람이 전혀 없고, 역조류라 선속 4.8노트. 거의 한나절을 왔는데도 이틀이 남았다고 한다, 선속이 계속 느려지는 탓이다. 아쉬운 대로 인터넷이라도 쓰게 육지 쪽으로 붙어가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바로 사고다. 석유 시추 시설과 각동 등대, 암초 표시등이 즐비하다. 항로를 잡을 때, 그냥 바다에 줄 긋는 게 아니다. 암초, 장애물, 시설물 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안전한 항로를 잡은 것이다. 안타깝지만 원래 항로로 간다. 윈드 인디게이터가 빙글빙글 돈다. 바람은 없는데 파도는 제법이라 롤링이 심한 항해다. 그래도 아까까지는 꿈의 세일링이었다. 아무튼 오늘 저녁은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맑은 하늘이다. 크루들의 인터넷 금단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오후 8시. 남중국해의 밤이 시작되었다. 콕핏에 누워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별똥별 같이 짧은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지난 백악기. 내가 옥스퍼드 재질의 하얀 와이셔츠와 커프스 버튼을 애용하던 꽤 그럴듯한 젊은 남자였을 때,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멋진 아가씨가 있었다. “만약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그때는 내가 잠깐 미친 거니까, 절대로 내말을 무시하고 그냥 나를 붙잡아 줘요.”, “그게 무슨 말이야?” 황당하게도 그녀는 그렇게 여러 번 내게 당부했었다. 얼마 뒤 그녀는 부르클린으로 떠났다. 한동안 그녀의 말이 현실의 이별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말이 돼? 사랑했다는 약속만큼 나쁜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딴 말이나 말지. 그러나 그녀의 싸늘한 결정은 얼마만큼의 눈물이 뒤에 가려져있었을까? 여전히 나는 모른다. 무슨 아픔과 어떤 소망이 그녀 스스로 나를 떠나게 했는지도. 우리가 서로 깊이 빠져들었을 때, 그녀는 이미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던 걸까? 그러나 그녀가 내 와이셔츠를 헐겁게 입고 새끼 고양이처럼 품을 파고 들던 그 순간을 돌아보면 나는 분명히 행운아였다. 적어도 잠시 동안이나마 나는 그녀라는 빛나는 은하를 소유할 수 있었던 거다. 그 기억으로 충분하다. 이번항해도 그렇다. 충분하다. 남중국해의 밤은 길다. 생각은 멈추고 남십자성이나 보자. 회상은 장거리 항해의 심각한 부작용중 하나다.
오후 9시 30분. 가까이 있는 고깃배가 레이더에 나타나지 않는다. Gain 메뉴로 들어가 감도 조절을 한다. 자동은 70%에 맞춰져 있다. 매뉴얼로 하고 82%에 맞추니 작은 어선이 표시된다. 매뉴얼 모드 82%, 잊지 말자. 매뉴얼 모드 82%!
오후 10시 55분. 롤링으로 흔들리며 제네시스가 앞으로 나아간다. 하늘엔 별이 가득하지만, 진행방향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다. 레이더를 본다. 좌후방에 점 하나. 어둠속을 본다. 같은 방향. 항해등 하나가 수평선 끝에 머문다. 항해등과 레이더가 아니라면 야간항해는 눈을 감고 걷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항해 초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언제까지고 바라보았다. 항해가 인생과 닮은 것은 진실이다. 보이지 않는 앞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은 묵직한 두려움이다. 다음 순간을 알 수 없는 삶도 두려움이다. 항해가 계속되자 이윽고 레이더와 항해등을 신뢰하게 되었다. 삶은 무엇으로 어둠을 뚫고 전진하는가? 내 인생의 레이더는 무엇인가? 제네시스의 마스트 등이 흔들흔들 별을 헤치고 전진한다. 기도했으니 감히 어둠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
2023년 6월 11일 (일요일) 어제 저녁과 똑 같은 항해다. 무풍. 선속 5.0~5.2노트. 남은 거리 207해리. 886해리 왔다. 총 구간 81%다. 하루 반 남았다. 바람이 잦아들자, 새벽부터 더위가 느껴진다. 위도 03도45분. 위도 01도 일 때 보다 무덥다. 다들 잠들 설쳤다. 일출이 시작된다.
오전 8시 20분. 나물감자밥과 된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다들 더위 때문에 난리다. 더위를 피하는 방법을 이야기 한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번 동남아시아 세일링과 장거리 항해의 선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김승진 선장은 무척 쓸쓸한 일을 한 거야. 세일 요트로 무기항 세계일주라는 엄청난 일을 해냈지만,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실은 세일러들 중에서도 불과 몇 몇 사람들만 그 의미를 짐작하지. 그것도 실제 장거리 항해를 해본 사람들만. 만약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서 그런 일을 했다면 굉장한 이슈가 됐을 거야. 요트가 뭔지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내가 ‘세계일주 무기항 항해’를 했다고 말 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흔히 ‘말달리는 선구자’라고 멋지게 노래 하지만, 조국도 없고, 싸워야할 적은 너무 강하고, 가족들의 소식도 모르고, 내일 전장에 나가면 살지 죽을지 모르는 그런 상황이 선구자야. 멋지게 노래하는 가수 중 누가 선구자 속사정을 제대로 알까? 막막한 바다에서 대한민국 세일링계의 선구자가 된 김승진 선장의 속사정도 바로 그런 거지.”
“맞아요. 제가 이번에 동남아 세일링을 해보니, 200일 이상 항해는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뭔가를 넘어선 사람들이나 가능하지.”
“몇몇 세일러들은 김승진 선장이나 윤태근 선장의 세계일주 세일링에 이런저런 흠집을 잡지. 그러나 만약 그들의 트집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나는 두 사람을 존경해. 200일 이상 바다에 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다른 차원인거야. 이번 우리 9일짜리 동남아시아 세일링만 해도 강풍, 무풍, 순조류, 역조류, 추위, 더위 다 겪고 있잖아. 남중국해의 푸른 바다를 항해하면서 ‘뜨거운 양철 지붕위의 고양이’가 되어 지글지글 데워지는 건, 해보기 전에 어느 정도인지 예상 못했지. 이렇게 직접 해봐야 뭔지 짐작을 하는 거야.”
“그래서 저는 누군가 장거리 항해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면 한마디 하고 싶어요”
“뭐라고?”
“이 새끼야, 니가 해봐! 일주일만 해봐!”
우리가 느끼는 이 세일링의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그러자면 우리에겐 세일 요트 대중화가 필수다. 국민들의 이해가 필요하다. 고로 우리에겐 앞 선 선구자와 영웅이 필요하다. 이미 몇 명 있다. 세계일주 세일링의 개척자 윤태근 선장, 무기항 세계일주의 김승진 선장, 70대 이후의 선진국형 세일링 라이프의 모델을 누리고 보여주시는 김석중 선장. 이런 분들의 업적이 제 가치를 평가 받고, 세일러 후진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분들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삐뚤어진 입이라도 바로 말하자. 우리의 영웅들은 우리 세일러들 스스로가 빛내도록 해야 한다.
오전 9시 10분. 남은 거리 194해리.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 앉은 채로 땀을 줄줄 흘리고 있다. 뒷바람 3.5노트, 선속 5.2 노트다.
오전 10시 30분. 남은 시간이 1일 15시간이다. 이러면 곤란하다. 또 한밤중 도착이다. 무풍, 엔진 Rpm을 1,580으로 올린다. ETA가 오후 4시 45분이다. 그럭저럭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것 같다. Rpm 이 올라가자 엔진 부조가 있다. 좋은 징조는 아니다. 도착하면 엔지니어를 불러 엔진 부조 문제를 확인해야겠다. 이래저래 돈 들어가는 소리다. 변기도 갈아야 하고, 마음이 또 납덩이다. 자유로운 장거리 항해도 결국 돈이 문제다. 세일 보트는 바람도 돈인데, 바람은 전혀 없다. 맞바람 아닌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젠장.
오후 1시 30분. 다들 너무 더워서 밥 생각이 없다. 이런 건 엉터리다. 생각이고 뭐고 때가 되면 먹어야 한다. 다들 점심을 거르는데 혼자 먹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장거리 항해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다. 맘에 들지 않는다. 문제는 세일링 서울 팀은 내일까지 항해지만, 나는 이후로도 긴 항해가 남아있다. 내 페이스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억지로 내 방식대로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싶지는 않다. 바로 이런 작은 부분들이 선장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요소다. 나는 이런 일을 고민하고 싶지 않다. 왜 그래야 하는가?
내일 오후 6시 30분 이후에는 일몰로 도착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덴만 탈출도 아닌데, 엔진을 1,600Rpm 가까이 무리하게 돌리고 있다. 틈만 나면 나비오닉스를 들여다보며 시간 거리를 체크하는 크루들의 급한 상황과 태도 때문에 평정심을 놓친 결과다. 장거리 항해에 ‘내일까지!’ 라는 건 없다. 오히려 속도를 늦추어 일출 후에 마리나로 들어가거나, 인근 앵커리지에서 일출을 대기해야 하는 게 상식이다. 모진 선장이 되기는 쉽다. 그렇지 않으려면 싱글핸드 항해를 하는 수밖에 없다. 선장 아닌 사람들은 선장의 입장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Miri 마리나에 들어가면 엔진 부조를 잘 정비하고, 코타키나발루로 가야 한다. 바람은 없지만 날씨 좋고, 파도 잔잔한 남중국해에서 괜한 애를 태우고 있다. 마감 없는 항해일정이라면 세일링은 세상 아름다운 경험이지만, 누구 한사람이라도 일정에 쫒긴다면 세일링은 세상 느린 답답한 여행이 되고 만다.
나는 있는 그대로 상황을 정리한다. 크루가 있는 항해라면, 누구라도 선장과 크루의 입장이 된다. 항해 전에 미리 서로 이런 상황들을 고려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이렇게 속마음을 그대로 기록해도 세일링 서울 팀과는 오해가 생길일이 없다. 우리는 이미 인연이 깊다. 아니라면 동남아 세일링은 내 페이스대로 10일~11일 쯤 되는 일정이 됐을 거다.
엄청나게 더운 바다를 다들 허덕거리며 항해중이다. 선속 6.1~6.3노트. 166 해리 남았다 ETA는 내일 12일 (월요일) 오후 4시다. 그러나 오늘 밤의 역조류가 어떻게 될지가 변수다. 이러다가 ETA 가 내일 오후 6시 30분 이후가 되면 어디서 앵커링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밤은 말레이시아 가스전과 등대, 부속 시설들을 피해서 야간항해를 해야 한다. 만만치 않다. 다행이 Miri 마리나 앞에 앵커리지가 하나 있다.
오후 4시 40분. 무풍. 6.7노트. 순조류 영향을 받고 있다 남은 거리 145해리. 22시간 남았다. 948 해리 왔다. 총거리 87%. 모두 부처처럼 앉은 자리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셔츠가 흠뻑 젖었다.
오후 11시 50분. 선속 6.4 노트. 남은 거리 100 해리. ETA 6월 12일 오후 3시 40분. 아슬아슬하게 일몰 전 Miri 마리나에 들어 갈 수 있을 것도 같다. 좌우로 석유 시추 시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늘 밤은 상당히 까다로운 항해가 될 거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 16시간만 잘 가면 남중국해 항해는 마무리다.
2023년 6월 12일(월) 오전 6시. 하늘 끝까지 솟아 오른 두터운 구름 사이로 아침이 오고 있다. 레이더에는 여기저기 비구름이 보인다. 바람은 5노트 역풍. 역조류 영향까지 있어, 선속은 5.9~6.0 노트다. 남은 거리 62해리. 이제 Miri 마리나 까지 10시간 30분 남았다. 약한 너울성 파도가 제네시스를 좌우로 흔든다. ETA는 오후 4시 35분. 이대로 가면 일몰 전 도착 가능성이 있지만 역조류가 더 세지면 곤란하다.
커피가 떨어졌다. 스리랑카에서 받은 립튼 티를 마신다. 맛이 훌륭하다. 온통 잿빛인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다. 우측 후방의 구름에서 바다로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있다. 전방 5마일 지점, 비구름이 다가온다. 어제 저녁 세일링 서울 팀이 미리 짐정리를 했다. 남은 식품과 쓰레기들을 구분하고 개인 짐을 정리했다. Miri에 도착하자마자 비행기 편을 알아보고 빠르게 출국하기 위해서다. 오늘 새벽 견시자였던 임대균 선장의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벌써 이십년이 넘은 인연. 이렇게 랑카위까지 불원천리 달려와 함께 세일링 해주니 친형제도 이렇게는 못한다. 세일링 서울 팀과는 이미 몇 번 동해안 일주, 서해안 일주 등을 했다. 기록을 위해 선장과 크루간의 문제점이나, 서로 미리 알아야할 부분을 적은 것은, 다른 분들의 항해에 참조가 되라는 것이다. 6월4일(일요일 오전 10시 43분에 출항) 출항한 항해가 별 다른 문제가 없다면 6월 12일 (월요일) 오후 5시 경 입항이다. 날짜로 9일간이다. 말라카해협에서 역조류에 시달리며 Miri까지 언제가나? 했지만 어느 덧 도착일이다. 기다릴 땐 느리고 돌아보면 빠르다. 세월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다. 임대균 선장과 세일링 서울의 안희원, 조상욱 크루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귀국 후 그들의 일이 잘 풀리기를 기도한다.
오전 6시 55분. 빗방울이 떨어진다. 우현 400미터 지점에 어선 한 척이 아침 조업 중이다. 육지에서 50 마일 가량 되니, 이제 어선들이 많이 보일 거다. 그리고 Miri 마리나에서 20마일 지점에 유전지대가 있다. 시추 설비들을 잘 피해야 한다.
누구든지 많은 걱정과 근심을 하고 싶은 사람은 배나 여자를 소유하라. - 로마의 극작가 프라우투스(251~184 B.C)
여자와 배는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 (A woman and a ship ever want mending.) - 서양속담.
더 큰 배가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 덴마크 선장 톨스
지금까지 세계일주 장거리 항해 중에 발생한 요트의 문제점 수리에 관해 정리해 본다. 장거리 항해 중의 요트 수리는 늘 시간에 쫒기고, 한번 수리하면 A/S가 불가하다. 수리 후 다음 항구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오트란토 (가격은 기억에 의존)
- 전동윈치 접점 교환 수리 36만원(완벽), AIS 리시버 구매 (실패: 도착 예정 날짜에 연락해 보니 일주일 후에 보낸다고 함, 환불), 205Ah 배터리 2개 구매 (80만원, 배터리 성능 검증 안 됨)
크레타 하니아
- C80 수리 36만원, 이틀 쓰고 도로 고장. 윈드 인디게이터 (윈덱스)교체 15만원 (완벽), 스턴 의자 30만원 (만족)
이집트
이스마일리아
- 엔진 점검, 오일, 필터류 교환, 임펠러 교환. 덴마크 선장 톨스, 무료
수에즈
- 윈치 체인 50미터 90만원(하급 품, 녹이 많이 생김, 중간에 박시시를 많이 요구함.), C80 수리(프랑스 선장, 무료) 일주일간 사용 후 다시 고장. 연료 필터 10개 10만원(디젤 자동차용)
수단 수아킨
- 앵커 교환, 미국선장 윌리엄 무료
- 선박 무전기 수리, 독일 선장 마르코 무료
지부티
- 배터리 연장 케이블 3만원, 에이전트 아산.
스리랑카
- 연료 펌프 수리, 스코틀랜드 터그보트 선장 존 수리, 무료.
- 엔진벨트, 유수분리기 필터, 엔진오일 석션기 등 스리랑카 업체에 구매 요청 한 것은 1~3일 만에 온다고 약속하고, 출항 날 까지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주의.
- C80 교체. 이베이 구매(56만원), 김기자님 전달
- 유수 분리기 필터, 임대균 선장 구매 김기자님 전달
- 엔진 벨트, 임대균 선장 구매 김기자님 전달
랑카위
- 원디 인디게이터 센서 고정, 마스트 항해등, Stream 등 교체. 김석중 선장님 완전 무료
항해용 나침반 볼트 고정. 김석중 선장님께 볼트 하나 얻어 수리완료.
- 붐 고정 스텐 볼트 교체, 임대균 선장이 가져 옴.
- 화장실 파이프 교체 17만원, 5일 사용 후 재고장, 원인 진단 오류. 완전 바가지에 엉터리 수리.
이렇게 살펴보니 항해 중간에 정박한 항구 기술자들에게 수리를 맡긴 것은 실패율이 높다. 다시 볼 일 없이 지나는 세일 요트에 대한 수리는, 후진국으로 갈수록 바가지 요금과 무책임한 수리 가 될 확률이 크다. 게다가 엉터리 수리에 대해 따지거나 A/S를 요구할 수도 없다. 그래서 부품만 구매한 후 선장들이 직접 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선장들끼리 서로 수리를 도운 것은 100% 확실하게 수리 된다. 바가지 수리비용의 극히 일부로 도와 준 선장들에게 저녁 식사라도 한 끼 대접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고 기분 좋은 일이다. 대략 1인 1.5~3만 원 선의 식사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이번 엔진 부조에 관한 것도 Miri 마리나나 코타키나발루에서 문제점 확인 후, 운항에 문제없으면 수리는 한국서 카센터 하는 벗에게 부탁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김석중 선장님이 요트 변기 부품 수리는 대만이 싸고 확실하다 하시는데, 확인해 보아야겠다.
오전 10시 10분. 메인세일 100%, 집세일 150% 편다. Full 세일이다. 풍속 클로스 리치 5.5~7.0노트, 선속 6.6~7.2 노트가 된다. ETA가 오후 4시 전후로 빨라진다. 엔진 Rpm 은 1,580이다. 남은 거리 38.2 해리. 1,055해리 왔다. 총 구간 96.5% 왔다. Miri 마리나까지 5시간 20분 남았다. 대강 30 해리부터는 인터넷이 됐던 것 같다. 곧 인터넷이 연결 될 거라는 즐거운 희망에 다들 즐거워한다. 출항도 기뻐하고 이렇게 입항도 행복해 하니, ‘세일링 서울’ 팀은 제대로 세일링을 즐기는 세일러 들이다. 결국 다 마음먹기 달린 거다.
오후 12시 40분. 남은 거리 22해리. 드디어 말레이시아 Miri 지역의 산들이 보인다. 이제 3시간 30분 남짓이면 Miri 마리나에 도착한다. 다행히 일몰 전 도착이다. 안전하게 계류 가능하다. 석유 시추 시설들이 보인다. 소형 어선이 제네시스 뒤로 지나간다. 곧 어장 또는 정치망 근처를 지난다. 정신 바짝 차리고 Miri로 진입해야 한다.
오후 2시 5분. Miri 마리나 와의 거리가 13 해리가 되자 인터넷 신호가 들락날락한다. 아직 제대로 잡히지는 않는다. 안테나만 뜨고 있다. 다들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다. 한국 전화기 로밍도 되지 않고 있다.
오후 4시 20분. 수심 2.1 미터 까지 나오는 입구를 따라 Miri 마리나에 입항했다. VHF16 번도 아무 답변이 없었는데, 도착하니 마리나 관리자 핀이 나타났다. 우리를 자기 차에 태우고 이미그레이션까지 왕복해 주었다, 무척 친절한 사람이다. 나보다 먼저 출발했던 러시아 커플도 코타키나발루로 가지 않고 여기 와 있었다. 내 곁에는 뉴질랜드에서 온 부부가 계류하고 있다. 다만 악어가 출몰한다고 하니 절대 수영은 금지다!
Miri 마리나 계류비용은 Miri 마리나는 3개월 미만은 피트1.3 링깃, 3개월 이상은 피트당 1링깃 이다. 50피트 3개월 미만은 기준 1일 65링깃(18,100원), 3개월 이상은 1일 50 링깃(13,924원) 이다. 상당히 저렴하다. 여기다 장기 계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 계류하고 Miri에서 비행기로 코타키나발루로 갔다가 거기서 한국으로 가면 된다.
https://www.marinamiri.com/
오후 6시. 전기와 물을 연결하고 세일링 서울 팀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런데 아쉽고 속상하다. Miri에 언제 또 와볼지 기약 없는데, 하루라도 둘러보고 가지. 집에 떡을 숨겨 두었나? 붙잡지는 못하고 혼자 섭섭하다. 나도 Grab으로 시내 Permaisuri Imperial City Mall로 나가서 장을 보고 저녁 식사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내일부터 요트 정비를 하고 곧장 코타키나발루로 간다.
오후 6시 30분. Permaisuri Imperial City Mall 의 스타벅스다. 에너컨 바람을 맞으며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신다. 무려 9일 만에 문명의 음료를 쪽쪽 빨고 있다. 온몸이 시원하게 얼어붙는 듯하다. 말레이시아 Miri 마리나에서 다시 싱글핸드 세일링 준비중이다. 택시비는 9링깃(2,508원)
놀랍게도 임페리얼 시티 몰 4층에 한식당 서울가든 핫팟이 있다. 오늘은 한식을 먹을 수 있다. 순두부찌개와 잡채를 주문했다. 신난다.
오후 8시. 순두부 찌게는 소금국이었고 반찬은 전혀 없다. 김치도 없다. 주문한 잡채는 밥을 다 먹도록 나오지 않는다. 잡채가 언제 나오나 물어보려니 한국인은 없다. 하는 수 없이 잡채는 취소했다. 그런데 가격은 35링깃 (9,756원) 완전 열 받는다. 9일간 고된 항해 끝에 순두부찌개를 먹어보나 했더니 완전 소금국이라니. 그러나 서양사람들과 현지 인들도 많이 찾는 인기식당 같다. 그러면 이 외국 손님들은 한국 음식이 다 이런 소금국인 줄로 알 것 아닌가? 참 여러가지로 민폐를 끼치는 한식당 서울가든 핫팟이다.
마트에서 장을 봤다. 이것저것 샀는데 22,000원. 장바구니 물가가 아주 좋다. 배로 돌아와 샤워하고, 9일만에 제네시스에서 커피 한 잔을 끓여 먹는다. 좋구나.
첫댓글 무거운 삶의 고비가 느껴져 댓글을 달지 못합니다.
인터넷요금 아끼시라고 대신 링크 올려드립니다. 즐 요트~
https://youtu.be/MwJcdgve0L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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