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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의 치유
삼상 22:3-5,2022,05.22.늘찬양교회
미국의 해리스라는 여론 조사 기관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56%가 ‘관계’, 21%가 종교적 믿음, 5%가 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돈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답한 사람이 열 배가 넘습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 사회에서 나온 통계라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관계가 중요하였으면 산상수훈에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고 하다가 형제와의 관계에 맺힌 것이 있으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난 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하셨을까요? 수평적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면 영적관계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가 막히고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신앙은 결국 인격의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키인 상품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므로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행복하고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Ⅰ. 비전의 성품
비전의 성품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선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특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늘 두 가지 방법으로 세상을 봅니다.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환경을 바라보는 시각과 환경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비전을 가진 자의 성품’이야말로 새로워진 피조물들의 특권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특권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비좁은 감방에 죄수 두 명이 갇혀있었습니다.
감방에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고 단지 자그마한 창문이 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두 죄수는 그 창문을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죄수가 본 것은 엄연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차가운 쇠창살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점점 풀이 죽고 비탄에 젖어 분통을 터뜨리는가 하면 절망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또 다른 죄수가 본 것은 그 창문 너머에 있는 별이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어 새 생활을 시작할 것을 생각하면서 날마다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사실 별보다 창살을 보기가 훨씬 쉽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암담함을 넣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을 비전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현실 가운데 비전을 보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현실 저 너머에 있는 미래의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위기와 절망을 타개하고 비전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비전을 소유한 사람들의 성품 중의 하나는 늘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이러한 성품의 사람은 늘 긍정적이며,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나의 능력이 다한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는 사람의 능력입니다. 혹시 여러분 스스로 너무 작게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우리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원리를 빼고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는 참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시도조차 두렵습니다. 막상 시작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포기하고 실패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실패와 좌절들이 쌓여서 절망감이 되고 대인기피증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관계를 제대로 가질 수가 없습니다.
반면 비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문제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늘 깨닫는 것이지만, 인생이란 늘 문제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수 없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다시 일어나서 푯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들이 바로 비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Ⅱ. 다윗의 3가지 복된 성품
1.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성품
다윗은 17세에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영웅이 됩니다. 그때 백성들은 사울 왕은 ‘천천’이라고 칭송했고 다윗을 ‘만만’이라고 칭송하며 다윗을 높여 세웠습니다. 그때부터 사울 왕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간에 쫓기고 쫓는 상황이 전개되는데 오늘 본문도 그 과정 중에 있는 상황의 한 장면입니다. 다윗이 놉, 가드, 그리고 아둘람 굴 등으로 피신하여 다녔습니다.
특별히 삼상 24장에 보면 다윗이 엔게디 굴로 피신하여 있을 때 사울 왕이 거기에 발을 가리우러 들어왔을 때 죽이지 아니하고 사울의 옷자락만을 베었습니다. 또한 삼상 26장 1절 이하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다시 광야 앞 하길라 산지로 나아가 그 광야에서 진을 치고 잠을 잘 때에 다윗이 사울의 장막에 들어가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었으나 죽이지 않고 옷자락만 벤 다윗의 마음을 알고서 울면서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정녕 너의 목소리더냐 하면서 나는 너를 학대하고 핍박을 하는데 너는 나를 선대하였구나 네가 나보다 의롭고 분명하니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원한다.”(삼상 24:16-20)하였으며 심지어 삼상 26장 15절에는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복수심과 성급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성품을 갖기까지 얼마나 많은 훈련과 시험을 통과했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개인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귀하게 여기고 순종하는 성품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약 다윗이 성급하게 직접 사울을 죽였다면 그는 전 이스라엘이 한마음으로 존경하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울 왕이 죽은 후 아마 내전이 일어나 민족적인 혼란이 일어나든지, 적어도 사울의 출신 지파인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부터는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지역감정, 지파감정으로 나라가 편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처리하니까 베냐민 지파인 사울 왕조가 끝나고 유다 지파인 다윗 왕조가 시작될 때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다윗 왕조에 가장 협조적인 지파가 바로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왕위를 강제로 빼앗지 않고 하나님이 순리대로 사울가에서 다윗가로 촛대를 옮기셨다고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렸기에 그런 멋진 리더십의 전환이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에 앞서서 너무 성급하게 일 처리하지 마십시오. 누군가에게 한이 맺혀서 직접 원수를 갚고 싶어도 잠시 참으십시오. 그러면 가장 적절할 때에 하나님이 직접 그를 처리하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윤석열 정부가 검수완박에 불만을 품고 문재인 전대통령과 이재명 전후보를 가두면 큰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불법과 죄목은 낱낱이 밝히데. 용서와 타협을 통해 보수와 진보가 함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2. 가족의 책임을 다하는 성품
지금 우리는 나홀로 가구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가족공동체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젠더갈등은 심각한 사회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목회를 하면서 부모님은 물론 자녀들에게까지 희생을 강요하면서 오직 교회성장을 위해서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하지만 뒤늦게 가정사역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정을 살리기 위해 지금도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다윗은 도피생활의 급박한 순간에도 부모님을 모압 왕에 부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이 위험한 순간에도 인륜관계의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가끔 보면 “할 일 많은 세상에서 가족 일까지 책임져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륜관계의 책임을 다하면서도 충분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인륜관계의 책임도 잘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 작은 교회인 가정을 소홀히 하지 말고, 반대로 가정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큰 가정인 교회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가정일과 교회 일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 일 때문에 다른 일이 손상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정만큼 소중한 공동체는 없습니다. 가정은 가장 약한 사람이 가장 귀히 여김을 받는 곳이며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거룩한 장소이기에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 일과 더불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큰아들에게 아내를 택할 때 믿음 다음으로 성품이 좋은 사람을 택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고래는 물에서 살지만, 허파로 숨쉬기 때문에 다쳐서 물 위로 올라오지 못하면 숨을 쉬지 못해 결국 죽습니다. 그래서 상처 입은 고래가 생기면 동료 고래가 그 상처 입은 고래를 등에 업고 기력을 찾을 때까지 숨을 쉬도록 떠받쳐준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가족의 모습입니다. 그처럼 서로 살려주고 지지해주기에 가정 일을 ‘살림살이’라고 합니다.
가정에서 아내만 알뜰한 살림꾼이 되지 말고 남편과 자녀, 그리고 부모와 형제 모두가 알뜰한 살림꾼이 되어야 합니다. 알뜰한 살림꾼이 되도록 하는 제일 요소가 바로 사랑입니다. 특히 사랑하되 상대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가정의 달 5월에
다윗이 보여준 부모공경에 대한 모습은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과 교훈이 됩니다.
3. 시련의 현장을 직면하는 성품
다윗이 모압에서 오랜만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편안히 지낼 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5절). 지겨운 고난과 시련과 상처의 땅으로 도로 들어가라니 얼마나 듣기 싫은 소리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시련과 상처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 땅에서 새로운 창조를 엮어내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비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고난을 즐길 줄 안다는 것입니다.
시련과 상처를 무서워하면 삶은 제한적으로 되고 성공 가능성도 현저히 축소됩니다. 반면에 시련과 상처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면 성공 가능성도 훨씬 커지고 삶의 보폭도 훨씬 커질 것입니다.
이번 주 21일 토요일에 소방시설관리사 필기시험을 보는 날입니다. 벌써 5번째 도전입니다. 일하는 목회자가 되어서 일과 목회를 병행하며 또 주말에는 전주에 있는 우석대학교에까지 가서 공부까지 하면서 2년의 기간을 별러왔습니다. 그동안 위험물기능장, 소방설비기사, 산업안전기사, 위험물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유원인더스트리 회사에서 유해화학기술인력으로 소방과 위험물 안전관리자로 선임되어 1주일에 2일 근무하며 연봉 3천만 원을 받고 있습니다. 더불어 국민연금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65세의 나이임에도 소방시설관리사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내 모습이 딱한지 회사 과장이 질문합니다. “위원님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세요! 이곳에서 같이 일하면서 편히 계시지요?”라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메타버스에 늘찬양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에게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사지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사울 왕이 눈에 불을 켜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망자와 같은 피난의 세월을 살아온 것인데 하나님은 그런 다윗의 형편을 무시한채 갓 선지자를 통해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역시 30여 년의 목회생활을 하고 지방회와 교회로부터 퇴직금조차 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채 나오면서 땅 위에 보이는 건물의 교회는 매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30여 년의 목회생활을 통해 수없이 많은 설교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책도 40여 권을 출간하였습니다. 특별히 찬송큐티와 찬송설교는 저 만의 블루오션입니다. 이런 귀한 작품들을 성도들과 다시금 나누고 싶어서 메타버스 즉 가상의 세계에 교회를 세워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가려고 하기에 이렇게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며 일하며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살다 보면 사고도 만나고 상처도 입습니다. 그러면 사고 난 곳을 쳐다보기도 싫고 상처를 준 사람을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렇다고 그 현장과 그 사람을 계속 피해 다니면 인생은 점점 후퇴합니다. 가까운 축복의 길을 놔두고 멀리 있는 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간과 정력이 얼마나 낭비가 됩니까? 그러므로 사고와 상처의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보기 싫은 사고의 현장과 상처의 현장으로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모두 상처가 있습니다. 그 상처에 연연하면 문제가 커집니다. 왜 사람들이 상처에 연연합니까? 첫째, 열등감이 문제입니다. 자신을 별 볼 일 없게 생각하면 상처가 커집니다. 둘째, 완벽주의도 문제입니다. 완벽주의자는 “좀 더 잘할 수는 없었을까?” 하면서 상처를 키웁니다. 셋째, 과민증도 문제입니다. 과민증에 빠지면 지나치게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그 욕구가 쉽게 충족되기 힘듭니다. 그 현실을 직시하지 않아서 상처도 잘 받습니다.
그 상처를 어떻게 처리합니까?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말고 상처받은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동시에 그 상처의 일차적인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비전, 사명에 초점을 힘들고 어려워도 돌파해 나가야 합니다. 바라기는 소방시설관리사 시험에 합격하여 이런 귀한 사명들을 아름답게 이루어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더불어 교회와 가정을 살리는 귀한 역사가 계속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