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프렌치"(George French) 구세군 사령관.
"조지 프렌치"(George French)는 영국 "브리스톨"(Bristol)출신으로 1882년에 임관되어
미국 서부 군국 서기 장관으로 봉직하다가 "허가두"(Hoggard)의 후임으로
1916년 6월 30일 제2대 "조선 구세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6년 10월 2일 밤 9시 부인과 두 자녀를 데리고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서울에서 추수감사 예배와 10월 8일 주일 예배에 설교하고 10월 13일부터 3회에 걸쳐 지방을 순회하였다.
첫 일정은 충남의 공주(유구)였다.
그는 서울과 지방 순회를 통하여 신실한 사관과 교우들이 힘써 일하고
희생한 결과로 이루어 놓은 훌륭한 선교 업적을 확인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수 백 만 조선인이 요망하는 바를 깨닫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간절한 뜻과 생각이 마음 가운데 가득하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을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능력이 생기리라고도 했다.
그의 임기 중 신설된 구세군 교회는 1916년에 교하, 옥천, 부토리를 비롯하여
1917년 건주리, 천흥, 안성, 김천, 광평, 연안 진남포, 낙평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1919년에는 서울 3영, 맹해리, 수원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특히 사회사업에 헌신하였으며 육아원 개설에 공로가 있다.
그는 성결(聖潔)을 주장하며 “성결의 길"(이사야 35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겼다.
여기에는
첫째, “정결(淨潔)의 대로(大路)”를 통하여 사상과 언어와 행동이 정결하면
언행이 변화되어 선행(善行)을 한다고 했다.
둘째, 분명한 탄탄대로(坦坦大路)를 걷게 되면 곤란이 없을 것이며,
성결한 사람이란 하나님 명령을 잘 복종하는 사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다고 했다.
셋째, 안전대로(安全大路)처럼 우리 마음의 중심이 정결하여야 안전하다고 했다.
이밖에 희락이 충만한 영광(榮光) 스러운 길을 통하여 기쁨을 누리자고 하였다.
그는 3년간 제2대 "조선 구세군 사령관"으로 봉직하다가 1919년 11월 5일,
"인도 서부 군국 사령관"으로 전보(轉補)되어 조선을 떠났다.
그가 떠날 때 1919년의 교회 수는 3,279개였고 교인 수는 355,114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조지 프렌치"(George French)구세군 사령관의 아들 "링콘 프렌치"(Lincoln, French)
"링콘 프렌치"(Lincoln French)의 삶은 특별했다.
1898년 3월 1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청년기가 시작되는 18세 때에 그의 아버지가 조선 사령관으로 전임(轉任)되었을 때,
여동생 등 4명의 가족이 1916년 10월 2일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하였다.
아버지 "조지 프렌치"가 1919년 11월 인도의 서 군국 사령관으로 전임하게 되어 조선을 떠난 후에도
그는 계속 조선에 머물러 독립생활을 하면서 조선인들을 위해 어학선생으로 봉사하였지만,
한국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7년 만에 25세의 나이로 1923년 4월 18일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정동교회에서 "스티븐스"(Stevens, William) 구세군 사령관 인도로 집례 되었으며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양화진에 건립된 그의 묘비에는 "평안히 잠드소서"(Rest in Peace)라고 씌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