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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옛 숨결이 살아 있는 대구문화골목
1.
새로 온 분, 오랜만에 온 분들이 있어 더 반가웠다. 그 분들에게서 봄내음이 느껴졌다. 멀미 기운 속에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총무인 단목님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역시 총무는 잘 뽑은 듯했다.
서창을 거치고 부산을 둘러서 고속도로에 올랐다. 차창으로 보이는 낙동강이 여행자의 마음을 더 깊게 해주었다. 강 건너 낙동강 따라 흐르는 길은 이즈음이면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인데 싶었다. 내게는 원동 매화축제 때문에 번잡해져서 이제는 봄이면 가기 싫어진 길이 되었지만.....
대구는 역사의 고장이다. 조선시대에 오랫동안 감영이 있었던 곳, 옛 숨결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래서 한번쯤은 헤매고 다녀도 좋을 곳이다.
2.
청라언덕, 청라는 푸른 담쟁이를 뜻한다. 따라서 청라언덕은 푸른 담쟁이가 우거진 언덕을 말한다. ‘동무생각’을 작곡한 박태준은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이은상과 함께 마산 창신학교에 근무했다. 이때 박태준은 자신의 사연을 이은상에게 전해주었고 이은상은 그것을 가사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사는 박태준에 의해서 다시 노래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思友(벗을 생각한다)’라는 제목이었으나 이내 순우리말인 ‘동무생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950년 이후, 동무라는 말이 북한에서 쓰는 말이라고 하여 ‘동무생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하니, 그놈의 이데올로기가 뭔지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따름이다. 이후 박태준은 이은상의 소개로 이은상의 고종사촌 여동생과 결혼했고, 박태준이 사모했던 여학생은 일본에서 살다가 귀국 후 법조인과 결혼했으나 경주에서 대구로 오는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청라언덕에는 선교사들의 주택이 세 곳 남아 있다. 챔니스 주택, 블레어 주택, 스위츠 주택이 그것이다. 모두 선교사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선교사 주택들은 모두 박물관이나 교육관 등으로 사용되어 개방된다고 하였으나 이 날은 볼 수 없었다. 미국에서 싣고 와 낙동강에서 나룻배로 옮겨온,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도 있다고 했는데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청라언덕 아래에는 ‘은혜의 정원’이라고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었다. 모두 14구의 무덤이 있는데 큰 것들은 선교사와 부인들의 무덤이고 작은 것들은 아이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스위츠의 무덤이다. 스위츠는 처녀 선교사였다. 선교회로부터 일체의 비용을 지불받지 않고 모두 자비로 했다고 한다. 그녀는 대구와 경북 북부 지역에서 선교했는데, 안동에서 선교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동산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죽었다고 한다. 마펫 신부는 한국에서 45년간 선교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갔음에도 한국에 묻히고 싶다고 하여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과연 그들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인간에게 있어 종교란 어떤 것인가?
청라언덕을 넘으면 3.1만세운동길이 나온다. 3.1만세운동길은 90계단이다. 1919년에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학생들이 이 계단을 따라 만세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지금은 도로인 계단의 끝이 옛날에는 달서천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빨래하러 가는 척하면서 빨래대야에 태극기를 숨겨서 갔다고 한다. 만세를 부르던 학생들은 아마도 십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일본 경찰의 악행이 두려워 치마를 조끼처럼 해서 입었다고 하니 그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겠나 싶다. 하지만 그들은 담대히 나아갔으며 저들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모두 잡혀 가서 고초를 겪었다고 하니 문득 그들에게 부끄러워지는 나를 발견했다. 아직도 일제의 잔재를 청소하지 못하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니, 저들은 그때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당당하게 나오고 있으니.....
3.
계산성당과 대구제일교회를 지나 이상화시인의 고택을 찾았다. 이상화가 1939년부터 타계한 1943까지 살았던 곳이다. 집은 생각보다 아담했으면 방들은 정갈했다. 이상화의 집안은 대구의 큰 명문가로 부잣집이었다. 그는 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큰아버지 이일우의 훈도를 받으며 우현학교(현재 대구 대륜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박종화의 소개로 홍사용, 나도향, 나혜석, 박영희, 이광수, 최남선 등 문인들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1922년 이상화는 《백조》1~2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상화의 고택에는 더 머무르고 싶었다. 하지만 일정에 쫓겨 더 머무를 수가 없었다. 마루에 앉아 잠시라도 생각에 잠겼으면.....
이상화 고택을 나온 우리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서상돈 고택을 지나 뽕나무골목에 이르렀다. 뽕나무골목은 두사충과 관련된 설화가 있으며, 벽화로 잘 새겨져 있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서 명장 이여송 및 그 사위 진인과 함께 왜병을 격퇴하여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장차 명나라가 망할 것을 알아차리고 조선에 귀화하여 대구에 정착해 영주하였다. 두사충은 조선의 열악한 의복 문제를 해결하고 생활의 안정도 꾀하고자 인근에 뽕나무를 많이 심게 하고 식솔들에게 길쌈을 권장하여 계산동 일대를 두릉 두 씨 세거지로 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사충이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다가 이웃집에서 절구를 찧던 미모의 아낙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날로 두사충은 뽕나무에 올라가 뽕잎을 따는 일이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늘그막에 상사병이 들다시피 해 날마다 뽕나무에 올라 애태우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아들은 마침내 큰 결심을 하고 이웃집을 방문하여 미모의 아낙네를 만나보았다. 그 아낙네는 청상에 홑몸이 되어 수절하고 있던 과부로 두사충을 몰래 흠모하고 있던 터라 쉽게 중매가 되어 두사충의 사랑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라는 속언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4.
진골목은 거대한 마천루 사이를 시냇물처럼 흐른다. 골목 초입은 젊은이들로 꽉 찬 동성로의 화려한 분위기와는 딴판이다. 마치 언양의 장터골목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바닥에는 보도블록이 깔려 있고 담장은 칠이 벗겨져 있었다. 도심의 소음도 진골목에서는 한 풀 꺾인다. 진골목은 ‘긴 골목’이라는 뜻. 경상도에서는 ‘길다’를 ‘질다’로 발음하는데 이 때문에 ‘긴 골목’이 ‘진 골목’으로 불리게 됐다.
진골목은 짧다. 100미터 남짓이다. 하지만 골목이 지닌 내력은 깊다. 100년을 훌쩍 넘어선다. 1905년 대구읍성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다. 진골목은 근대 초기 달성서씨 부자들이 사는 동네로 유명했다. 대구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해 그의 형제들이 모여 살았다.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 정치인 신도환,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도 진골목에 살았다. 지금 그들이 살던 대저택에는 식당이 들어섰다. 진골목의 종로숯불갈비, 진골목식당, 보리밥식당 건물의 주인은 서병국이었고, 정소아과 건물의 주인은 서병국의 방계 형제인 서병기의 저택이었다. 그런 까닭일까. 골목 양 옆으로 세워진 붉은 벽돌담이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진골목식당에서 육개장을 먹었다. 맛이 여느 육개장하고는 좀 달랐다. 육개장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텁텁한 맛이 없고 약간 신 듯 단맛이 났다. 불로막걸리를 마셨다. 태화루나 생탁을 마시던 내 입에 조금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우리가 앉아서 먹는곳이 한때 대구 최고 부자의 집이라니...... 하긴 가만히 살펴보면 집의 모양새가 일반적인 식당의 모양새는 아니었다.
구불구불한 진골목을 따라 걷다가 ‘정소아과의원’이라는 간판을 단 2층집을 만났다. 현존하는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양옥건물이다. 담벼락 위로 우뚝 솟아오른 소나무가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했다. 정소아과의원 외에도 진골목 곳곳에 들어선 식당과 다방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으뜸은 단연 ‘미도다방’이다. 미도다방은 1982년 문을 연 뒤로 대구∙경북 지역의 정치인과 유림, 문인 사이에서 명소가 됐다고 한다. 문화해설사님의 추천으로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미도다방을 찾았다. 미도다방과 관련하여 미도다방의 단골이었던 전상열 시인이 타계 직전 발표한 ‘미도다방’이라는 시가 유명하다.
‘종로2가 미도다방에 가면/ 정인숙 여사가 햇살을 쓸어 모은다/ 햇살은 햇살끼리 모여앉아/ 도란도란 무슨 얘기를 나눈다/ 꽃시절 나비 이야기도 하고/ 장마철에 꺾인 상처 이야기도 하고/ 익어가는 가을 열매 이야기도 하고/ 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아도/ 추억은 가슴에 훈장을/ 달아준다/ 종로2가 진골목 미도다방에 가면/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 잔 값의 추억을 판다/ 가끔 정여사도 끼어들지만/ 그들은 그들끼리/ 주고받으면서/ 한 시대의 시간벌이를 하고 있다.’
허름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 우리를 맞이했다. 갈색 소파와 나무탁자가 놓여 있고 입구 쪽에는 한적들이 꼽혀 있었다. 책들이 모두 영인본이고 새로운 것이 주인이 의도적으로 배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방 안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사이를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 한 분이 오며가며 하고 있었다. 미도다방의 주인인 정인숙 여사다. “여기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앉았던 자리고 여기가 박준규 전 국회의장이 앉아 차를 마시던 자리죠. 미도다방은 유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어 ‘양반다방’이라고 불리기도 했죠.” 넓은 다방은 스무 명이 넘는 일행들을 수용하기에 넉넉했다. 커피를 주문한 몇 사람을 빼고는 대부분 쌍화차를 시켰다.
진골목 반대편에 염매시장 골목이 있었다. 옛날 재래시장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 두 명이 겨우 지날 만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떡집과 수육집, 건어물집, 잡화점, 이유식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염매시장의 ‘염매’는 ‘염가 판매’를 줄인 말이라고 한다. 그만큼 저렴하다는 뜻일 것이다. 가수 현미도 한국전쟁 때 피란 왔을 당시 이곳에서 떡장사를 했다고 한다.
김광석거리와 방천시장은 몇 번 왔던 곳이다. 사람들이 붐벼서 이전보다는 감흥이 덜했다.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났다. 해질 무렵이었고 부슬부슬 비가 내렸었다.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음악은 쓸쓸했다. 하지만 그때는 김광석의 흔적이 많았고, 김광석의 냄새가 진했다.
4.
한참을 달렸다. 구불구불한 길들은 멀미를 일으켜 나를 힘들게 했다. 지천명의 나이가 되도록 멀미 하나 극복 못했으니 나란 사람도 참.....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숭앙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처음에는 1568년(선조 1)에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건립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05년(선조 38)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건되었고,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는데, '도동(道東)'으로 사액한 것도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東來]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건물 배치도를 보니, 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이 반듯하게 설정된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 사당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심축에는 이를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한 통로와 계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건축 구성과 배치 형식은 우리나라 서원건축 중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 구성도 우수하다고 한다. 특히 1600년대에 건립된 강당과 사당 등 건물들은 당시 서원과 사묘건축을 대표할 만큼 매우 훌륭한 짜임새와 수법을 보이고 있다.
중정당은 강당 건물로, '중정(中正)'은 음과 양이 조금도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중용의 상태를 말한다. 중정당 기단은 크기와 색깔이 다른 돌들이 빈틈없이 서로 맞물려서 일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로 용두석을 배치하고, 기단 윗부분에는 크기가 다른 꽃송이가 좌우에 나란히 조각되어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강당 앞마당 좌우에는 동재와 서재인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가 대칭을 이루며 마주보고 있다. 강당 왼쪽인 북쪽으로는 생단이 있는데, 향사 전날 제관들이 제수로 쓸 생(牲)을 올려놓고 품평을 하는 장소이다.
도동서원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원 사액봉행 재현이 이루어진 곳이다. 사액현판도 그때 지금 자리에 위치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서원을 아무리 높이 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면 뭣 하겠나, 서원에 담긴 선인들의 정신이 오늘에 계승되지 않는 것을.....
5.
현풍 도깨비시장에서 수구레국밥 한 그릇을 먹고 귀갓길에 오르니 그새 밤이 되어 있었다. 일행들은 하나둘씩 피곤에 지쳐 잠을 자기 시작했고.....
길상화님은 언제나 어리버리산악회를 적극적으로 챙기신다. 산행에서도 문화답사에서도 늘 반찬을 챙겨 오시고, 떡을 해오시고 그러신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단목님은 친구 잘못 만나 아무도 하지 않겠다는 총무를 맡아 힘든 일 마다않고 사서 고생을 한다. 내가 일에는 냉정하고 무심하여 마음은 있으나 표현을 잘하지 않아 섭섭할는지 모르겠지만 고마운 마음은 늘 여전하다. 총무로서 오래도록 함께 했으면 싶다. 운무님은 중학교 때부터 단짝 친구이다. 친구를 위하는 마음이 커서 늘 내게 잘해준다. 그래서 고맙고 미안하다. 귀향님은 고문이랍시고 한 자리 부탁드렸더니 사양치 않고 받아주셨다. 이런저런 복잡한 일들이 많음에도 늘 참석해주신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글빛님은 가장 오랫동안 나와 함께 카페 활동을 해오신 분이다. 그 긴 시간만큼이나 부운영자로서 소모임의 총무로서 나를 도왔다. 지금은 운영진이 아님에도 나서서 돕는 분이고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분이다. 역시 고마운 사람이다. 고구려님 역시 나의 중학교 친구이다. 늦게 어리버리산악회에 들어왔지만 제일 열심인 회원 중의 한 분이다. 간밤에 문상 갔다가 취기에 내게 위로와 격려의 전화를 주었다. 아마도 어리버리산악회를 유지 발전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분이다.
연어님의 어리버리산악회의 마스코트이고 엔돌핀이다. 늘 밝은 모습으로 웃음을 주는 분이다. 시인답게 잘 쓰는 글 좀 자주 보여주시면 좋겠다. 산벚꽃님은 젋은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한다. 동화구연자답게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준비해와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신다. 참가자 중 제일 막내 초원님, 그리고 윤서님, 해당화님, 보름달님, 스마일님, 유숙자님 모두모두 반가운 분들이다. 윤서님은 다음에 자작시 낭송도 한 번 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늘해랑님은 울산 사시다가 고향인 대구로 이사를 가신 분이다. 국문학을 전공한 분답게 해박하고 말솜씨도 정겹다. 만나서 반가웠다. 가끔 어리버리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 키나님은 울산의 문화해설사이다. 작년 여름 황령산에서 뵙고 처음이다. 앞으로 산행이든 문화답사든 자주 뵈었으면 좋겠다. 다음에 문화해설사로 한 번 모셨으면 싶다. 김창근님은 이미지가 참 좋다. 산을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다. 외유내강인 듯해서 어리버리에서 자주 뵈었으면 좋겠다. 처음 본 김성문님은 처음임에도 회원들과 잘 어울리셨고, 뒤처진 회원들을 끝까지 챙기셨다. 어리버리 회장의 입장에서 탐나는 분이다. 스마일님의 게스트님은..... 가입해서 함께 했으면 좋겠다.
사는 게 별겐가. 그저 어우러져 인간사 흔적과 山水를 즐기면 그뿐인 것을.....
첫댓글 그날 함께 동행 못한 아쉬움이 커게 와닿는 이유는 미도다방의 쌍화차탓인가. 이번에도 못가본 이상화고택인가.....
꼼꼼하게 답사후기글 올려주셔서 현장에 같이 있는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