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8. 난주에서 천수 맥적산 석굴로 ①
5C초 맥적산 석굴 불상,불화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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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적산 석굴 전경> |
사진설명: 서기 400년 초 개착된 맥적산 석굴엔 194개의 석굴과 7200여 위에 달하는 불상들이 있다. 가장 높은 석굴이 지상에서 70m 이상 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
2002년 10월3일. 천마호텔 815호에서 일어났다. 어제 본 병령사 부처님들을 생각했다. 계곡을 빠져나올 때 가슴에 품고 나왔는데, 또 다시 병령사 석굴에 가고 싶었다. 전체적인 구성과 조각술, 계곡 양편에 펼쳐진 석굴들의 위용 등 모든 것이 정말 드라마틱했다. 계곡을 성지(聖地)로 만들고자 최초로 발원하고, 실행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무엇을 생각하며 ‘환상적인 석굴’을 계곡에 조영했을까. 그가 참조한 경전은 무엇이었으며, 누구의 후원으로 모든 불사를 마무리했을까. 창문을 파고들어온 초가을 햇살에 놀라, 상념을 정리하고 호텔을 나섰다. 감숙성박물관과 황하철교를 보기 위해서였다. 감숙성박물관은 과연 대단했다. 하서주랑 일대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이 즐비했다. 하루 종일 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서주랑은 실크로드의 간선(幹線). 주랑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과 유물이 남았던 곳. 곳곳에 있는 흔적과 유물을 모아놓은 곳이 감숙성박물관. 과거의 역사를 생각하며, 역사의 정원을 걷는다는 심정으로 찬찬히 살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황하철교’로 갔다. 난주의 명소 백탑산과 시가지를 이어주는, 황하를 가로질러 놓인 다리가 황하철교다. 1907년 독일의 기술자들이 세운 230m의 황하철교는 빌헬름 2세가 중국에 선물한 것이라 한다. 최근 신철교가 1km 하류에 건설돼 중요성이 떨어지지만, 20세기 초만 해도 황하철교는 청해성과 신강지구를 잇는 유일한 교통로였고, 군사·경제·문화면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중국의 국공내전 당시, 회족 군벌 마씨 일족이 서북일대와 황하철교를 장악하고 있었다. 철교를 파괴하지 않고 손에 넣기 위해 인민해방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그만큼 중요한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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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주랑 일대 석굴분포도> |
다리 난간에 손을 얹고 누른 강물이 넘실거리는 황하를 바라보았다. 수천 년 동안 주기적으로 범람하며 막대한 홍수 피해를 입혔던 황하강. 중국인들에게 수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인간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식시켰던 강. 범람하는 황하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힘을 합쳐야 했고, 엄청난 양의 물을 다스릴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개발됐다. 이 과정에서 세계4대 문명에 꼽히는 황하문명이 탄생했으리라. “모든 문명은 역경(逆境)의 산물”이라는 말이 거짓이 아니란 것을 황하를 보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이태백이 “황하의 물은 천상에서 내려와 바다로 흘러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나니….”라고 읊었던 황하. 청해성 청해호에서 발원한 황하는 청해성, 사천성, 영하회족자치구, 감숙성, 내몽고자치구, 섬서성, 하남성, 산동성을 거쳐 황해로 흘러 들어간다. 총 길이 5664km, 유역 면적 75만2000㎢에 이르며, 50개 도시 1억4000만 명의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고 있다.
감숙성 박물관 관람후 황하철교로 이동
통계 자료에 의하면 1997년 1년 중 330일 동안이나 황하의 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 않았다. 산동성의 이진(里津)에서 하남성 유원(柳園)까지 총 704km에 이르는 구간이 가뭄으로 완전히 말라붙었던 것. 황하가 바다로 흘러가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황하강의 물은 매년 16억 톤의 모래를 바다로 함께 흘려보낸다. 만일 중간에서 황하가 말라붙게 되면, 모래는 고스란히 하상(河床)에 쌓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쌓인 모래는 겨울과 봄에 부는 강풍에 날려 논밭과 도시를 덮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하강 유역 지역들은 점차 사막으로 변해 갈 수 밖에 없다.
이것만이 아니다. 중상류 지역에서 물이 흐르지 않아도 하류지역에선 범람현상이 되풀이 된다. 황하강의 하상(河床)이 여러 지역에서 주변 지역보다 높아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상은 매년 10cm씩 높아진다고 한다. “중화제국의 명운이 걸린 강”으로 황하를 표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누른 물을 뒤로하고 차를 타고 천수(天水)로 출발했다. 난주에서 천수까지는 300km.
가는 길은 좋았다.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주변 풍경도 괜찮았다. 때때로 침식이 심한 황토협곡이 나타나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황토협곡이 만들어낸 풍광은 정말 아름다웠다. 먼지만 날아오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난주에서 천수에 이르는 지역엔 강우량이 적어 그런지, 푸른 산은 드물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한참 흥얼거리고 있는데, 저 멀리 천수 시내가 보였다. 시간을 보니 오후 3시. 오전 11시에 난주를 떠났으니 4시간 걸린 셈이다.
천수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秦)이 발상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무제 원정 3년(기원전 114년), 천수 북쪽에 위치한 호수에서 백룡(白龍)이 승천했다는 전설에 따라, 천수군으로 개칭됐다. 한이 서역과 교통한 이래, 천수는 장안에서 서방으로 가는 비단길의 중요거점이 됐다. 천수는 또한 위하(渭河) 강가에 위치한 탓으로 농산물이 집산됐고, 황하유역과 접속된 교통의 요지였다. 천수를 기반으로 성장한 진은 주(周)나라가 동천한 장안 부근의 역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후 서안 일대 관중평야의 경제적 부강에 힘입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이런 지리적 여건 때문인지 당나라 때 천수에 진주(秦州)가 설치됐다. 실크로드 상의 중요한 거점 도시였음은 물론이다.
시간이 남아 곧바로 맥적산(麥積山) 석굴로 가기로 했다. 아스팔트를 따라 맥적산으로 가는데, 주변 마을이 왠지 눈에 익다. 우리나라 시골 마을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자전거 타고 읍내로 나가는 사람, 소달구지 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등 모두가 우리나라와 흡사했다. 길을 잘못 들어왔나 싶을 정도였다. 갈수록 나무가 울창해지고 계곡엔 물이 많아졌다. 사람들도 많아졌다. 맥적산에 가까이 왔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맥적산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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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멀리서 본 맥적산과 석굴 전경. |
맥적산이 보이는 지점에 차를 세웠다. 주변의 나무가 울창한 산들과 달리 기묘한 암석 덩어리가 우뚝 솟은 모습이다. 다른 산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채 층층이 쌓아올린 돌 모양과 비슷했다. “보릿단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고 맥적산으로 부른다”는 말이 정말 실감 났다. 보릿단을 쌓아놓은 것과 똑 같았다. 천천히 차를 몰아 관리사무소 입구에 다 달았다. 먼저 대불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 표면에 새겨진 부처님인데, 병령사 대불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맥적산은 홍사암 절벽을 이루며 형성된 기묘한 산이다. 산정(山頂)이 원형인데, 하단 보다 넓어 보릿짚을 쌓아놓은 무더기처럼 보인다. 산 절벽에 석굴과 감실을 개착하고 불상과 불화를 조성한, 장관을 자랑하는 석굴사원이다. 돈황 막고굴, 난주 병령사 석굴에 버금가는 중요하고 유명한 석굴 사원이기도 하다. 석굴은 산의 서남·남·동남의 수직 절벽에 있는데, 가장 높이 개착된 석굴과 지면과의 거리는 70m이상이다. 산꼭대기엔 수나라 때 조성된 높이 9.4m의 탑 1기가 있다. 현존하는 굴감(窟龕)은 194개, 조상(彫像)은 대부분 채화니조(彩繪泥塑. 흙으로 만든 채색된 상)며, 돌로 만든 불상은 극히 적다. 조상(彫像) 수는 모두 7200여 위(位)인데 소상(塑像)이 3513위, 석상(石像)이 25위, 석조비상(石造碑像)이 18위, 천불까지 합해 석상이 모두 3662위로 조각의 보고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늦어도 400년대 초 석굴 조성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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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적산 석굴 대불> |
사진설명: 맥적산 바깥 바위 면에 새겨져 있는 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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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적산 석굴 부처님> |
사진설명: 맥적산 석굴에 안치된 사색에 잠긴 듯한 불상. |
불상과 함께 불화도 많이 조성됐다. 부처님 전생 이야기를 담은 본생도를 비롯해 서방정토변상도 등 수많은 종류가 있다. 벽의 탈락으로 현재는 약 1000㎡정도 만 남아있다. 문제는 맥적산 석굴이 언제부터 개착됐느냐다. 다른 석굴들처럼 정확한 자료는 남아있지는 않다. 다만〈고승전〉‘현고전’에 “은거맥적산(隱居麥積山), 산학백여인(山學百餘人), 숭기의훈(崇其義訓), 품기선도(稟其禪道)…”(현고대사는 맥적산에 은거하며 100명의 학인들에게 의로운 가르침을 숭상하게 하고, 참선하는 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고스님(402~444)은 맥적산에서 서진(西秦) 수도 임하(臨夏)에 도착한 후, 다시 북량의 수도인 고장(무위)에 갔다가 마지막으로 평성에 도착했다. 현고스님이 임하에 도착한 것이 서진 걸복치반(乞伏熾盤)시대(재위 412~428)며, 맥적산에 은거한 것이 20세 때인 422년. 현고스님이 맥적산을 떠난 것은 426~427년이므로 늦어도 420년대엔 맥적산 석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남송의 축목(祝穆)이 지은 지리서〈방여승람〉에도 맥적산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맥적산은 천수현의 동쪽 100여 리에 있는데, 요진(384~417) 때 건립한 사찰이 있다.”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맥적산 석굴은 늦어도 400년 초엔 개착된 것으로 보인다. 맥적산 개착의 역사를 회상한 다음 입장권을 구입해 석굴 안으로 올라갔다.
천수 맥적산 석굴 ②
78호굴에 새긴 ‘구지진’ 구지왕조가 개착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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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적산 석굴 대불> |
사진설명: 멕적산 동면에 새겨진 대불.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다. |
400년대 초부터 개착되기 시작한 맥적산 석굴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사다리 같은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갈수록 석굴의 위용(威容)에 압도됐다. 석굴에 새겨진 조상(彫像)들을 보며 지상에서 이렇게 높은 곳에 어떻게 석굴을 뚫었을까, 무엇 때문에 석굴을 조영했을까, 석굴을 개착한 그들은 어떤 신앙적 영감을 갖고 있었을까 등등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일어났다 사라졌다. “석굴이 개착되도록 누가 재정적 후원을 했을까” 하는 점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맥적산 서남 70km 지점에 산세가 험한 구지산(仇池山)이 있는데,〈중국석굴과 문화예술〉(온옥성 지음/배진달 옮김. 경인문화사 펴냄)에 의하면 후한 멸망(210년) 이후 이 땅에 저족 출신의 양등(楊騰)이 조그마한 구지국(仇池國)을 세웠다. 구지국은 이후 점점 강해져 오호십육국시대(304~436)를 지나 위진남북조시대(439~589)까지 성세(盛勢)를 유지했다.
구지국에 언제 불교가 전래됐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전진 부견왕(재위 357~385) 당시 구지국왕 양송노(楊宋奴)에게 아들 둘이 있었다. 한 명은 불노(佛奴), 다른 한 명은 불구(佛拘)라 했다. 부견왕은 양불노의 아들인 양정(楊定)에게 자기의 아내 한 명을 주었다 한다. 389년 양정은 진주(秦州. 천수)를 점령하고, 스스로 농서왕이라 자칭했다. 그러다 서진(西秦. 385~431)의 걸복건귀(乞伏乾歸)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두 아들들의 이름에서 구지국에 이미 불교가 전파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서진왕조를 살펴보자. 유중지방(楡中地方. 감숙성)에 있던 선비족(鮮卑族) 추장 걸복국인(乞伏國仁)은 당초 전진(前秦) 부견왕의 신하였다. 385년 벌어진 비수전투에서 전진이 동진에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자, 스스로 대도독대선우령진하이주목(大都督大單于領秦河二州牧)이라고 칭하여 반(半)독립 체제를 취했다.
걸복건귀(乞伏乾歸) 때 금성(감숙성)에 도읍을 정하고, 대선우하남왕(大單于河南王)이라 부르며, 저·강·선비족을 평정했다. 농서와 사천성 서부 지역을 점령하는 등 한 때 맹위를 떨쳤으나, 400년 후진(後秦)에게 패배, 후진의 신하가 돼 왕호(王號)를 버렸다. 후진이 쇠퇴하자 다시 독립하여 진왕(秦王)이라 칭했다. 걸복치반(乞伏熾磐) 재위 당시 토곡혼(吐谷渾)을 격파하여 남량(南凉)을 병합하는 등 국세가 왕성했으나, 걸복모말(乞伏慕末) 때 혁련발발이 건국한 하(夏)나라에 멸망되고 말았다. 걸복씨가 세운 서진왕조 때 유명한 병령사 석굴 개착이 왕성하게 이뤄졌었다.
한편 세월이 흘러 서진(西秦)의 힘이 약화되자, 양란(楊難)은 대진왕(大秦王)이라 자칭하고 ‘건의(建義)’를 연호로 삼았다. 그 때가 427년. 북위 태연(太延. 435~439) 초 양란은 남쪽으로 익주(사천성)를 공격하는 등 세력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바로 이 구지국이 있었던 구지산에서 가까운 맥적산 제78호굴에 ‘구지진(仇池鎭)’이라는 각명(刻銘)이 있다. 이를 통해 “맥적산 석굴과 구지국 양씨(楊氏)는 서로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중국 학자들은 맥적산 석굴의 중요한 공덕주(功德主)로 구지국 왕족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화북지방의 북위 왕조도 불사에 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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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정좌한 채 무언가 설법하는 부처님. |
물론 이들만이 맥적산 석굴이 후원자는 아니었다. 화북지방이 북위에 의해 통일(439년)되고, 북위가 동위(534~550)·서위(535~556)로 분열될 때 까지는 북위 왕실이 적극적으로 불사에 관여했다.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한 북위 왕조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북위는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 지역에 세운 왕조(386~534)다.
원위(元魏)·후위(後魏)로도 불리는 북위 건국의 연원은 3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비족 탁발부는 본래 내몽골의 바옌타라(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다.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해 북부 변방을 지키고자 서진(西晋. 265~316)은 탁발부에게 산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내주었다. 그곳에서 세력을 키우던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의로’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십익건’ 때 전진(前秦)의 부견왕과 싸웠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부견왕이 비수전투에서 패하고 전진이 망하자, 탁발규(拓跋珪. 후일의 도무제)는 386년 나라를 재건했다.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불렀다.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나아가 후연(後燕)마저 격파하고 하북 평야에 진출, 마침내 398년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대동)을 수도로 정하고 착실한 발전의 발전을 마련했다. 여러 번의 전투를 거쳐 태무제 때인 439년 하(夏)·북연(北燕)·북량(北凉)을 멸망시킴으로써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를 종식시키고 화북지역을 통일한다.
나름대로 발전을 구가하던 중이던 524년. 병사들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난을 진압할 때 큰 공을 세운 북방 민족의 무장(武將) 세력이 자연스레 강해졌다. 결국 그들의 수령 이주영(爾朱榮)이 정권을 전단(專斷)했지만, 얼마 안 가 이주씨(爾朱氏) 일당은 고환(高歡)에게 격멸되고 만다. 고환(高歡)은 본래 북위의 무장이었다. 내란을 틈타 북방민족계의 반란민 수령이 되더니, 532년 한인 호족의 협력을 얻어 효무제(孝武帝)를 세우고 스스로 재상이 돼 북위의 실권을 잡았다. 고환의 지나친 권력 장악에 불안을 느낀 효무제는 정서(征西)장군 우문태(宇文泰)를 고환과 대립시켜, 고환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자 고환은 북위 종실의 한 사람인 원선견(元善見), 즉 효정제(孝靜帝)를 옹립하고, 하남성 업도로 수도를 옮기고 ‘동위’를 세웠다. 고환이 죽은 3년 후에 그의 차자(次子) 고양(高洋)이 549년에 동위제로 등극하여 국호를 북제(北齊)라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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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근엄한 표정의 설법하는 부처님. |
반면 고환의 전횡을 증오한 우문태는 534년 효무제(孝武帝)를 살해하고, 이듬해 문제(文帝)를 옹립, 서위를 건국했다. 동위는 550년 고한의 아들 양(洋)에게 나라를 빼앗겨 북제(北齊. 550~577)로 나라 이름이 바뀌며, 서위는 556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 빼앗겨 북주(北周. 556~581)로 이름이 변하고 만다.
이러한 와중에도 맥적산 석굴은 착착 개착됐다. 특히 북위 무제의 폐불 이후 문성제(재위 452~465)는 불교흥륭에 더욱 매진했다. 불사 조영(造營) 또한 공전의 성황을 이뤘고, 맥적산 석굴도 이 시기 개착됐다. 70·71·80·90·100·114·115·128·143·144·148·155·156굴 등이 당시 조성된 석굴들이다. 초기 석굴에 봉안된 불상들의 특징은 당당한 체구, 힘이 넘치는 태도, 단정한 용모 등이다.
서위 시대 조성된 대표적인 석굴이 127굴이며, 141·45·55·53·18·39·22·82·48·31·27굴 등은 북주시대 만들어진 석굴들이다. 수나라, 당나라, 심지어 명나라 때도 석굴은 조성됐다.
초기불상 당당한 체구에 넘치는 힘 자랑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석굴을 보고 나오니 서쪽이었다. 산을 거의 반 바퀴 돈 셈이었다. 내려오는 계단을 따라 산기슭에 도착하니, 여기저기서 향을 팔았다. 향을 한 줌 사다 불을 피우고, 향로에 꽂았다. 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공중으로 사라지는 연기를 한 참 동안 쳐다보다 서서히 산을 내려갔다. 멀리서 다시 한번 더 맥적산을 바라보았다. 서쪽으로 떨어지는 낙조(落照)에 반사된 산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산을 향해 합장하고 천수시내로 달려갔다. 어둠이 도로 변에 서서히 깔려왔다. 서안과 난주 사이에 위치한 천수. 시내의 불빛이 멀리서 반짝거렸다. 실크로드의 불빛, 기나긴 여정(旅程)에 지친 나그네를 반겨주는 불빛처럼 보였다. 그 옛날 걷고 또 걸은 구도자에게 저 불빛은 얼마나 큰 위안이 됐겠는가. 어둠과 배고픔, 목마름, 그리고 곳곳에 도사린 위험들을 이겨내고 천수까지 온 나그네에게 불빛은 희망 자체였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게도 천수 시내 불빛은 ‘환희의 등’으로 보이는데, 옛날엔 훨씬 더 큰 만족을 주었으리라.
당나라 때 진주(秦州)로 불려진 천수는 실크로드 상의 중요한 거점 도시였다. 불교도 천수를 지나 서안에 도착하고, 우리나라에 전래됐으리라. 천수의 중요성은 현장스님 전기에도 나온다. 천축으로 구도여행을 떠난 현장스님(?~664)이 천수에서 하루 밤 묶었던 것. “진주에 효달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장안에서〈열반경〉을 배웠다. 공부를 마치고 고행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래서 삼장법사는 효달스님과 함께 진주에 이르러 하루 밤 지내고 난주로 떠나갔다(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천수 시내에 들어오자 불빛은 ‘희망’에서 이미 ‘현실’로 변해 있었고, 맥적산 석굴의 부처님들이 불빛 속에 아른 거렸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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