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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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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지혜 스크랩 의사요 만능 재주꾼 김태준 수필가의 구복산의 노을 74-87
윤정근 추천 0 조회 110 15.02.09 11: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태준 수필가의 구복산의 노을 74-87| 문학 게시판

구복산 | 조회 59 |추천 0 | 2014.03.07. 11:38

 74. 사랑스러운 나의 아버지


 성근은 슬하에 아들만 3형제를 두었으니 첫째가 재홍(宰弘)으로 1962년(壬寅) 8월 4일 대구시 남구 대명동 2632번지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명대학교 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하였고, 한일약품 판촉과에 근무하고 있다. 부인은 계명대학교 음악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음악 석사이다. 이름은 은진 송씨 명숙(宋明淑)으로 생일은 1967년(丁未) 7월 23일이며 친정 부는 송방남(宋芳男)이요 모가 김순자(金順子)로 경남 진해시 여좌동 사람이다. 그러나 호적에는 경남 창원시 천선동 704번지가 본적이다. 슬하에 아들 민석(玟錫)과 민균(玟均)을 두었다. 민석은 1990년(庚午) 8월 28일 대구 이기영산부인과에서 필자의 집도하에 제왕 절개 수술하여 분만하였다. 또 둘째 아들 민균은 1995년(乙亥) 4월 17일 오후 12시 51분 3,570g으로 저자의 집도하에 이기영산부인과에서 반복 제왕 절개 수술로 태어났다.
 아버지 성근이 퇴임한 날 저녁 그랜드호텔에서 가족이 모여 조촐한 축하 파티를 하였는데 그때 성근의 첫아들 재홍은 아버지를 위한 글을 써 와서 읽었다. 다음은 그때의 글이다. 제목은 「사랑스러운 나의 아버지」이다. 필자는 깜짝 놀랐다. 딸이 아버지에게 시집보내 달라고 부르는 「 오미오 밥비노카로」노래를 이 자리에서 부르는 줄 알았다. 이 노래는 딸이 부르는 노래가 아닌가? 아들이 글로서 표현하다니... 다음은 그의 글이다.

 오늘은 나라를 위해 관직에 몸을 담아 37년 외길을 걸어오신 저희 아버님의 공직 생활을 정리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이제 또 다른 인생의 새 출발을 시작하시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뜻 깊고 중요한 날에 여러 친지 분들을 모시고 함께하는 자리가 되어 더욱 빛이 나고 의미 있는 날이 되는 것 같아 무척 기쁜 마음 감출 길 없습니다. 이 자리를 찾아 주신 많은 친지 여러분들께 저희 아버님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저희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무척 개구쟁이에다가 고집이 센, 또한 부모님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었던 아주 못난 불효자식들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더욱 세심하고 자상하시며 인자한 모습으로, 때로는 아주 엄하게 저희들을 꾸짖으시며 바른길로 갈수 있도록 타이르셨습니다. 그때는 부모님의 그 마음을 몰라주는 불효자식이었지만 이제 이렇게 커서는 저희들도 어느덧 성인이 되어 자식을 낳아 사회생활을 열심히 해 오면서 그 시절 부모님의 깊으신 그 마음을 조금은 헤아리는 듯합니다.
 저희들이 그동안 효도 한 번 제대로 해 드리지도 못했던 못난 자식들이었지만 이제 결코 부끄럽지 않은 자식들이 되고자 자라 오면서 보고 느꼈던 책임과 직분에 성실히 최선을 다하시는 아버님을 빼어 닮아 저희들도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바르게 최선을 다하는 사회인으로서 성실히 임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부모님께 다시 한 번 고개 숙이며, 자랑스러움과 깊은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세상에는 많은 아버지가 계십니다. 권력과 명예를 가진 아버지, 무수한 재물과 거대한 부를 이룬 아버지, 자식에게 많은 기회와 배경이 된 아버지… 하지만 그 많은 이름의 아버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아버지는 자식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37년 긴 세월 오직 나라를 위한 공직의 외길을 걸어오신 아버지. 주위의 많은 세속적인 유혹을 멀리하고 초연히 지나오신 아버지.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신 아버지. 자식에게 한 점 부끄럼 없는 깨끗한 삶을 보여 주신 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청순한 피와 정신을 물려주신 아버지. 저는 이 자리를 빌어 더할 수 없는 크나큰 존경과 사랑을 당신께 드린다고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진정 바람이 있다면 그동안 나라와 가족만을 위해서 애를 쓰셨는데 오늘 이후 아무런 염려 마시고, 어머님과 함께 앞으로 한 100여 년만 더 행복한 인생을 나누시며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더욱 건강하시고 저희들이 진정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시면 하는 마음입니다.
 아버님! 아버님의 37년 외길 인생은 수많은 씨앗을, 고귀한 정신과 높은 인격이라는 씨앗을 멀리 퍼뜨린 여정으로서 많은 이들의 귀감과 모범으로 그 빛이 영원하리라 생각합니다.
 아버님! 그동안 애 많이 쓰셨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많은 분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1998년 6월 26일
 아들 김재홍 올림


 75. 용구의 문중의 위치


 성근의 둘째 아들은 용구(龍九)이다. 1965년(乙巳) 4월 29일이 그의 생일이다. 영남대 공대 기계공학과를 나왔다. 용구는 1994년 5월 15일 대구 고려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인은 대구 효성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를 나온 장수 황씨 은정(黃恩貞)이며 1970년(庚戌) 4월 18일생이다. 경북 상주군 모동면 신천리 사람이며 친정 부는 황의경(黃義璟)이고 모는 이영자(李英子)이다. 슬하에 딸 2명이 있다. 첫딸은 서연(徐延)이며 1998년(戊寅) 3월 4일 아침 6시 57분 대구 이기영산부인과에서 3,650g으로 순산하였다. 저자가 받았다. 둘째 딸은 서경(徐景)이며 2000년(庚辰) 11월 11일 역시 대구 이기영산부인과에서 분만하였으며 저자가 받았다. 셋째는 아들로 이름은 이건(利建)이요, 2009년 기축(己丑) 7월 15일 대구시 범어로타리에 있는 메디파크 병원에서 분만하였다. 우리 문중에서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에 인흥 구마회 창설이 있었다. 그때 문중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문중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면서 젊은 사람으로 구성된 문중회가 있어야 한다고 이구동성 부르짖어 만들어진 회가 구마회였다. 구마회의 유래는 한자로 구는 거북 구(龜)요, 마는 말마(馬)이다. 우리 자남 할아버지의 묘소가 마비정(馬飛亭)동내의 구복산(龜伏山)에 있다 하여 마자와 구자를 취해 이름했다. 지금까지 구마회원들은 서로 단합하여 문중의 대소일을 맡아 잘 이끌어 왔다. 그 해 구마회원들이 지금 나이가 많아 판단력이 흐려짐에 이에 젊은 사람들로 구성된 제2 구마회 창설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제1회 구마회의 연령 제한은 1940년부터 1964년 까지였다. 제2회 구마회원의 나이가 1965년부터 1989년 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우리 문중에서는 한 세대를 25년으로 친다. 앞으로 제 3회 구마회는 1990년부터 2014년 까지 이에 해당된다. 우리 자남문중의 종손의 위치는 태억 사문중에서 효순 가정에서 나와야 하나 누구 하나 관심이 없어 자연히 태홍 사문중에서 종손이 나와야 하며 이 사람이 전 문중을 대표하여 종손이 되어야 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래 제 2 구마회의 회원에 해당하는 문중인 중에 1965년 생중 가장 으뜸인 장손은 용구임을 알수 있다. 용구가 제 2 구마회에 참석 하도록 용구의 부모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작은 아버지 부근도 같은 생각이었음을 확인 했다. 용구가 회장이나 총무 자리를 굳이 사양한다면 그 위치가 어떠한 자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회원으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초대 1회 구마회의 회장이었고, 지금 고문을 맡고 있는 필자의 바람이다.
      
다음에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성근의 셋째 아들은 용준(龍準)이다. 용준은 1967년(丁未) 12월 25일이 그의 생일이다.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했다. 용준은 대구시 남구 대명동 136번지의 밀양 박씨 선희(朴宣喜)와 결혼하였으니 부인은 남편보다 1년 연하의 1968년(戊申) 4월 26일생으로 친정 부는 박근태(朴根泰)요 모는 정일수(鄭一壽)이다. 부인은 1999년 8월 11일 캐나다 국적을 얻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건엽(建燁)이며 2000년(庚辰) 11월 9일 오후 6시 효성병원에서 분만하였으며 딸은 지원(祉沅)으로 1996년(丙子) 8월 18일 태어났다. 용준은 서울에 있는 한국시티은행 본부에 부부장으로 있다.


 76. 부근, 한 마리의 백조(白鳥)


 부근(富根) 그는 한 마리의 백조이다. 1944년(甲申) 2월 3일 영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결코 그가 헤엄치기에 좋은 담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 20세 때 부모가 돌아가셨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 동생 유근과 대구 시내에서 자취 생활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이 자취 생활이야말로 동생과 가장 친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대학은 대구 영남대학교 행정학과(야간부)를 다니면서 주간에는 동구청 소속 동촌출장소에 다녔다. 이때 친정 부가 신창우(申昌雨)이고 모는 조환이(曺環伊)이며 고령군 고령면 고아동 사람인 영남대학 가정과를 나온 고령 신씨 영옥(申英玉)과 결혼하였으니 결혼할 당시 부인은 백산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1947년(丁亥) 10월 27일이 부인의 생일이다. 슬하에 대구전문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한 큰딸 민아(玟我)와 동생 소연(昭延) 등 딸만 두고 있다. 
 부근은 전직 대구 수성구청 공보실장이다. 수성구청의 총무과 계장으로 있다가 1991년에 시행된 사무관 시험에 합격하여 승진하였다. 일 년간 주야로 독서실에서 시험 공부를 하다가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합격하여 오늘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한다. 꿈을 꾸면 아직도 지긋지긋한 시험 기간이 꾸일 정도로 악몽의 연속이었다 한다. 시험에 합격하고 난 후 대구 모 식당에서 여러 친지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베푼 적이 있다.
 이 축하 파티 석상에서 형수인 박종원은 우리 자남 세가(自南世家) 문중에 사무관이 두 사람이나 배출되었으니 자랑스럽고 영광이라 하였고, 특히 태홍 집의 종가에서 형제 사무관이 나왔다 하면서 퍽 대견스러워 하였다. 여기에서 형제라 함은 남편 성근과 시동생 부근을 가리키는 말이다.
 부근은 1999년 9월 대구광역시 북구청 총무국장이 되었다. 그 앞서 1996년 11월에는 국무총리 고건으로부터 총리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2004년 6월 정년퇴직하여 녹조 근정훈장을 받았다. 
 부근은 인흥구마회지에 ‘봄 속의 인생’이란 제목으로 수필을 기고하였다. 그는 글 속에서 한 마리의 백조가 평화롭게 호수에서 노는 것 같지만 물속에서 수없이 많은 발놀림으로 헤엄을 친다고 하였다. 그의 글 속에 나오는 백조가 바로 부근 자신임을 우리들은 알 수 있다. 다음 글은 부근의 봄속의 인생이라는 수필이다.

 바쁜 일상 업무에 쫓겨 동분서주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대덕산(앞산)을 바라보니 진달래와 개나리가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며 봄이 왔음을 알린다. 봄은 거리를 오가는 젊은 여인들의 얇은 의상과 보기 좋게 짧아진 치마폭에서 오는가 보다.
 또한 봄은 레코드 가게에서 들려오는 비발디의 사계 중 ‘봄’과 요한 스트라우스의 ‘봄의 왈츠’에서 오는가 보다. 그런데 자연의 봄은 정확히 시간을 지켜 오지만 인생의 봄은 아주 불규칙한 것 같다. 빨리 올 때도 있고 아주 영원히 안 올 것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묘미가 있는 것 같다. 현대인들은 인생에 대한 희망을 맞이하는 데 너무 서두르는 것 같다. 적당히 아부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부패해서 안락과 쾌락을 한 움큼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전력투구하는 모습은 어느 곳을 가 보아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자신이 추구하는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탈법과 야비성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정도를 걷고 정직해서는 인생의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 더러는 새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사기도 치고 부동산 투기도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인가에 씌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금전욕, 권력욕, 외제욕 등 지금 쓰레기를 옥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자.
 알고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은 보잘것없고 쓸데없는데 우리들은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아 진실을 순수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해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잠깐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인생, 밤하늘에 수없이 많이 떠 있는 별들 중의 하나! 수많은 모래알 중의 하나와 같은 우리들!
 우린 잠시 머무르고 갈 이 세상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다. 집착은 곧 우리 자신을 옭아매는 사슬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어느 철학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풍성하게 존재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덤덤히 수용하자. 고통과 절망이 우리들 넘어뜨리기 위해 우리에게 덤벼들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자.
 절망하자. 그리고 철저히 패배하자. 그리고 그 깊은 절망의 반작용을 내부로부터 일으키자. 절망 위에 선 희망이야말로 진실로 참다운 삶이다. 사람답게 사는 일과 역사적 참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쟁취되는 것이다.
 더욱더 철저한 자기 고뇌를 거쳐 새로운 삶을 일구어 나가자. 우리들은 흔히 자기의 고통을 확대해서 보고 타인의 고통은 축소해 보는 오류를 범한다. 백조가 호수에서 평화롭게 놀기 위해 물속에서 얼마나 많은 발놀림을 하는지 모른다. 우리의 눈에 투영되어 들어오지 않는 많은 평화에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자.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은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진달래꽃이 피는 이 4월에 한 번쯤 그 의미를 되새겨 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1992년 4월 어느 날
 대구 수성구 문화공보실 실장
 구마회 부회장 김 부 근


 77. 심장 밸브로 성공하다


 유근(有根) 그는 1947년(丁亥) 3월 22일 영돌의 넷째 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다. 유근은 막둥이인지라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상여를 붙잡고 따라가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누구나 막둥이는 다 마찬가지겠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더욱 강한 것 같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물려줄 것이 없다 하면서 공부 하나만이라도 끝까지 시키겠다며 세 살 된 어린 나를 떼어 놓고 서울로 꿀 장사하러 다녔다”며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거린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작은형인 부근과 대구에서 자취 생활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작은형 부근과 각별히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자취 생활도 부근 형이 결혼하는 바람에 끝이 났고 홀로 외톨이가 되었다가 둘째 성근 형님 댁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결혼할 당시 유근은 남북의료기상사에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이때 그는 부인을 만났으니 부인은 친정 부가 황의환(黃義煥)이요, 모는 서운이(徐雲伊)로 인천시 북구 부평동 사람인 장수 황씨 경희(黃慶姬)로 부인은 남편보다 4년 연하의 1951년(辛卯) 1월 23일생이다. 1973년에 결혼하였으며 이들 사이에 1남 2녀가 태어났다. 아들은 상엽(相燁)이요 딸은 주영(姝伶)과 남영(南伶)이다.
 현재 유근은 대아(大亞)의료기상사 대표이다. 이 상사의 주 판매 품목은 인공 심장 판막(밸브) 판매이다. 주 납품 거래처는 종합병원 흉부외과이다. 어머니가 심장판막증으로 돌아가셨기에 그 한스러움으로 이 품목을 택했는지, 지금도 돈이 없어 인공심장 밸브를 구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300만 원 이상 하는 이 기계를 무료로 지원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무침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지금은 큰 빌딩을 소유하리 만큼 부자가 되어 문중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번은 동생 유근이 필자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찾아왔다.
 “형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화술 할아버지 앞으로 된 더덕실 산을 문중에서 이전해 달라고 하니 형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는 것이다. “글쎄, 나도 듣기는 들었다마는 이전해 주어도 나쁠 것은 없다”라고 하니 “형님, 형님 것이라면 하겠습니까?” 하고 반문한다. “나라면 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더니 “형님같이 생각하는 분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하면서 반신반의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큰집의 소유로 되어 있지만 먼 훗날 언젠가 역시 유근의 후손과 형 달근의 후손 사이에는 촌수가 벌어질 것이고 그때 이 산에 대한 문제가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기될 것으로 생각되기에 유근 자신도 그렇게 성낼 필요는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차차 조용히 생각해 보자는 말과 함께 다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저자의 예측이 맞아 들어갔다. 더덕실에 있는 산의 일부를 달근의 아들 동학이 팔았고 밭두둑의 치종 선조가 누워있는 산을 정학이 팔아 버렸다. 자기 앞으로 등기된 산이라 내 산을 내가 판다고 했다. 이것으로 인해 자남문중회가 창립되었고 여태까지 존속되어 왔던 인흥구마회가 자남문중회에 소속되게 되었다. 


 78. 귀뚜라미 가을 소식 전하네


 영돌의 딸은 2명이다. 첫째는 점선(點先)이며 둘째는 이선(二先)이다. 이선은 1934년(甲戌) 5월 24일생이다. 호적의 1933년 5월 24일은 잘못 기록된 것이다. 이선은 옥천 전씨 영범(全英範)과 결혼하였으니 슬하에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전영범은 청송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퇴임하였다. 그는 대구중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1953년에 대구사범대학 체육과를 졸업하였고 1953년 4월 1일부터 안동중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교편을 잡았다. 그는 1993년 8월 28일 정년퇴임을 하였으며 퇴임하는 날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그는 문학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으니 퇴임 인사로 시를 남겼다. 그 시는 제목이 ‘귀뚜라미 가을 소식 전하며’ 이다. 아래는 그의 시이다.
  귀 밝은 귀뚜라미 가을 소식 전하는데 / 저를 아껴 주신 모든 분들 / 언제나 행복하소서 // 강포한 일제의 굴레를 벗어난 뒤 / 이념과 사상의 와중 속에 / 나라의 동량이 되라는 가르침에 / 감히 내디뎠고 // 40여 년 외길 걸어오면서 / 학생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해 온 추억이 / 너무 아름답고 아쉬워 짧아만 보입니다 // 남 느끼지 못했던 보람에 / 뿌듯하고 기쁘기도 하지만 / 항상 내 정성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 죄송스럽고 미안한 마음 앞서고 // 이제 그 무거운 짐 벗은 나의 생활 / 먼 길 넘어 석양에 붉게 물들이며 / 귀가하는 목동마냥 / 어머님 마음 옥계 마을에 쉬러 가렵니다. // 옥포에 영혼을 쉬시고 계시는 / 할아버님 할머님 아버님 어머님 / 오늘로서 소자 맡은 소임 다하고 / 할아버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이 동백장을 / 형님들과 같이 영전에 올립니다.

 그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1961년 풍양(豊壤) 중학교 교사로 부임할 때에 시를 하나 남겼다. ‘풍양중학교 부임 길에…’라는 시다.
 
 三江에는 해가 기울었고 / 네 아이 업고 안은 아내의 배는 / 바람 따라 이쪽으로 / 이삿짐 실은 남편 배는 저쪽으로 흘러가는데 / 행여 남편 아이들 마음 상할까 / 애만 태우는 내자의 모습 / 허물어져 가는 우리 둘의 행복 / 생각하면 가슴 여미어지는구려! // 그러나 당신과 나 지낸 길고 짧은 삶 / 늦철이 들어 생각하니 / 당신만이 제일 소중합니다.

 여기서 배라는 뜻은 이삿짐 배는 남편이 타고 삼강에 어두워지고 바람이 불어서 배가 갈 길을 잘 잡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한 아내는 그 당시 병환 중이었으므로 가슴이 여미어진다고 했다. 아내에 대해 잘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늦철이 들어 생각하니 당신이 제일 소중하다고 했다.
 그는 교단을 떠나면서 학생들에게 남기는 말을 했다.

 나의 학생들아 언제나 푸른 하늘은 / 너희들의 것 / 마음껏 헤집고 날아라 // 존경하는 임들이여! / 항상 영광이 함께하소서!

학생들도 교장 선생님의 퇴임식에 글을 올렸으니 그것은 윤동주의 ‘화원에 꽃이 핀다’에서 따온 말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 / 코스모스가 홀홀히 떨어지는 날 / 우주의 마지막은 아닙니다 // 단풍 세계가 있고 -履霜而 堅知- 서리를 밟거든 얼음이 굳어질 것을 / 각오하라가 아니라 // 우리는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 밟으면서 멀리 봄이 올 것을 / 믿습니다. 
 1993. 8. 28
 -청송중 ? 고등학교의 온 가족이 이 글을 드립니다

 전영범은 처가의 모든 대소사에 다 참여하며 저자와도 가깝게 지낸다. 그가 가장 가슴 아팠던 해는 1997년(丁丑) 3월 18일 그의 아내가 중풍으로 돌아갔을 때다.  
 

 79. 묏자리 지도를 주고 간 재열


 1984년 2월 어느 날 영돌의 동생 재열은 큰조카인 달근과 성근 집에 온 적이 있다. 이는 죽음을 예지한 작은아버지가 죽기 직전 큰조카들이 어떻게 사는지 두루 돌아보기 위함이요, 어쩌면 죽기 직전 마지막 대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조카들에게 앞으로 문중에 관심을 나타내고 윗대 조상의 산소를 알아 친히 조카들이 축관(祝官)이 되어 축문을 읽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조카들 집을 돌아다니면서 붓으로 묏자리 지도를 표시하였고 각 무덤마다 축문 읽는 법을 적어 놓으셨다. 지금도 유언과 같은 그 당부의 말씀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미어지듯 슬퍼지며 작은아버지의 영상이 떠오른다는 성근 배 박종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과거를 회상한다. 작은아버지가 오늘날 살아 계셔서 시동생(즉, 필자를 말함)을 만난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상상할 수가 있다 한다.
 재열(在烈) 그는 아버지 화술과 어머니 이순이 사이의 둘째 아들로 1911년(辛亥) 3월 29일 고향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인 영돌과 달리 키가 크고 야위었다 한다. 또한 학문이 깊어 농사를 짓지만 한학자라 함이 어울렸다. 이러한 학식 덕분으로 인흥 동네에서 8년간 동장 일을 맡아 보았다. 재열은 동갑내기이고 친정 부가 배석암(裴石岩)이요, 어머니가 석칠매(石七每)인 달성군 옥포면 신당동 사람인 성주 배씨 월선(裵月仙)과 결혼하였으니 부인은 1911년(辛亥) 11월 20일생이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아들들의 이름은 정수(正洙), 형수(亨洙) 및 철수(鐵洙)이고, 딸은 연향(連香), 귀향(貴香), 말향(末香)이다. 재열은 문중 일에 앞장서서 정열을 쏟았고 문중 묘사에 직접 축문을 읽기도 하였으며 1960년도 족보 발간 시 효순네 집에서 삼삼삼 굴욕을 당하기도 한 분이다.
 오늘날 재열 숙부님의 묏자리 지도가 너무나 가치가 있어 구마회에서 문중 보배로 지정하였고 만약 이 글이 없었다면 하고 가정해 볼 때 시주 계배 서산 류씨의 묘소 및 그 외 여러 선조들의 유택이 실전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전까지 묘사 지내던 분들이 이 묘가 누구의 묘인지 확실히 모르고 다만 선조의 묘라는 것만 알고 제를 지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어찌 이 묏자리 지도가 보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아찔할 뿐이다.
 재열 숙부는 아들 및 조카들에게 비단 이 글만 남긴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아픈 와중에도 친히 문중 묘사에 참석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이 누구의 묘소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애를 썼으나 다들 따라가기 싫어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호응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해식 해술 형제이다. 이때 이들 형제는 한술 더 떠 재열 숙부님의 음성을 녹음하였으니 사람은 가고 없어도 그 음성이 남아 있어 재열 숙부님의 또 다른 잔영이다.
 나는 재열 숙부님을 살아생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내가 고향을 찾기 전에 모든 상황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녹음테이프를 틀어 보고 그가 얼마나 문중을 사랑하며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심혈을 기울였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우리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생각하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그 귀감으로서 이분을 결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중에서 한때 백마 타고 나타난 한 위인으로서 그를 생각하였음이 분명하였으리라. 재열 숙부님 그는 돌아가시기 전 문중의 보물 묏자리 지도를 이 세상에 남겼다. 1984년 6월 30일이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요, 이때 나이는 수(壽) 74세였다. 이보다 앞서 재열은 부인 및 셋째 아들 철수를 데리고 둘째 아들 형수가 있는 서울로 이사 갔다. 서울로 이사 오니 그야말로 핵가족에서 대가족으로 불어났다. 묘는 인흥 동산 동변 상분 건좌(乾坐)로 썼다. 그는 아버지 및 형이 있는 불당곡(佛堂谷)으로 가지 못하였으니 이것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부인 배월선은 남편이 돌아간 후 노환으로 2002년 1월 9일(양력 2월 20일)에 돌아가셨으니 묘는 남편과 역순(逆順)으로 인흥 동산 동변 쌍분(雙墳)으로 썼다. 건좌(乾坐)이며 상석을 공유하고 있다. 여기서 역순이라 하면 남편 묘 우측에 있는 것을 말한다.


 80. 문중 전답에 대해서 


 언제부터인지 우리 문중은 시주 배 회덕 송씨가 낳은 용택 후손과 서산 류씨가 낳은 우택 수택 후손이 각각 별도로 선조의 묘를 나누어 묘사 지내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나중에 태어났지만 용택이 본처의 자손이라 큰집이라 하였고, 우택이 먼저 출생했으니 우리가 큰집이라 하여 묘사의 제주를 서로 하려다가 이렇게 되었다. 이 시기는 1911년에 발간된 신해보(辛亥譜)를 각자 갖고 헤어진 사람들이 광복과 더불어 고향에 돌아오고 난 후부터라 한다.
 빼앗긴 들에 봄은 되찾았건만 국토는 남과 북이 갈라서는 때 우리 문중에서도 이와 같이 묘사 문제로 갈라서게 되었다. 
 우택, 수택 후손들이 지내는 산소는 자남 입향조 시조가 누워 있는 구복산이요, 용택 후손들이 지내는 산소는 시주가 누워 있는 더덕실 산으로 구분되었다.
 1950년 1월 5일 용택의 후손들이 사만곡과 가까운 서쪽 전답을 돈을 내어 샀다. 지번은 790-2번지요 논이 289평, 밭이 253평, 도합 542평이다. 7명이 돈을 내어 샀고 그분들의 이름으로 등기하였으니 즉, 김명남(정열 부), 김도상(일수 할아버지), 김봉구(저자의 할아버지), 김도경(귀봉 아버지), 김해도(종열 아버지), 김태동(종석 아버지), 김암우(종명 아버지) 등이다. 문중 전답을 두는 이유는 문중의 사람들이 문중 전답을 돌아가면서 일구어 농사를 짓되 거기서 소출된 곡식의 일부를 팔아 묘사에 쓸 제물을 마련하자는 의도에서 만든 제도이다.
 우택 수택의 집안에서는 이보다 훨씬 후인 1975년경 마을 동쪽에 있는 논을 샀다. 190평이었다. 우택 수택의 집안에서는 이 논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돈을 서로 갹출하여 제를 지내 왔다고 한다. 이 논도 재열(정수 아버지), 홍열(점수 아버지), 덕남(명도 아버지), 원기(건수 아버지), 종수(성만 아버지) 등 5명의 공동 명의로 등기하였다. 서로 돌아가면서 농사를 짓기로 하였는데 우루과이 라운드로 인한 농작물의 가격이 떨어진 후 아무도 맡아 농사지으려는 사람이 없어 제물 마련할 길이 막막하였다. 1991년 여름 이 논을 팔았다. 한 평에 12만 원을 받고 팔았으니 금액은 2200만 원이나 되었다. 현재 이 돈을 은행에 예치해 두고 그 이자로 제물을 마련한다고 한다.
 우리들의 숙원 사업인 문중 단합이 이루어지고 한 조상을 받드는 일에 전처의 자식이면 어떻고 후처의 자손이면 어떠한가. 오늘날 남북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고 남북이 통일될 것을 갈구하는 이즈음에 우리 문중의 단합이야말로 절대 필요하며 시대적 요구에도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런 이야기를 재열 숙부님 이야기 끝에 올리는 것은 재열 숙부님도 돈을 내어 전답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기에 여기에서 밝히는 바이다.


 
 81. 집안에 선인장을 키우는 정수


 정수(正洙) 그는 아버지 재열과 어머니 배월선 사이에서 1933년(癸酉) 7월 12일 장남으로 인흥 땅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붓글씨를 잘 썼고 학식이 있어 역시 아버지처럼 인흥에서 동장 직을 맡기도 하여 부자가 동장이 된 집안이다. 주업은 농사짓는 일이다. 정수의 본적은 화원면 본리리이다. 이 번지는 아버지 재열(在烈)이 결혼과 더불어 분가했을 때 주소다.
 정수의 부인은 남편보다 3년 연하의 1936년(丙子) 9월 15일생이며 달성군 옥포면 본리동 사람인 평산 신씨 일현(申逸賢)이다. 일현은 친정 부가 신성수(申聖壽)요, 모가 이차선(李且仙)이다. 부모와 친동생들이 서울에서 살기 위해 떠나 버렸지만 정수는 고향의 흙을 사랑하여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 한 채와 얼마만큼의 농토를 갖고 고향을 지키고 있다. 정수는 술을 가끔씩 한다.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면 얼굴이 홍당무로 변하고 실수를 조금씩 하는 분이라 평소 술을 가까이하지 않게끔 퍽 노력하고 있다.
 누가 말했던가. 애국 애족하는 길은 고향을 사랑하고 향토를 지키는 일이라고 했다. 바로 정수가 그런 사람이다.
 정수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상곤(相坤)과 상철(相澈)이요 딸은 춘자(春子)와 인자(仁子)이다. 
 정수의 본적은 6촌 동생 점수가 지금 사는 집으로 그 집 번지인 화원읍 본리리 833번지요(인흥 음변 마을), 지금의 현 주소는 옛날 문씨 집안이었던 인흥 금강계 양변 마을인 화원읍 본리동이 그의 집이다. 정수의 집에는 마당과 실내 전부 선인장이 가득하다. 이 선인장들은 전부 몇 십년 된 것이 많고 잘 키워서 벌래가 먹지 않았다. 선인장 하나하나마다 키우는 정성이 가득했다. 정수의 가정에도 예외 없이 필자가 이기영 산부인과의 의사였기 때문에 태어나는 아이들을 손수 받아 주었다. 그들은 아래와 같다.
 정수의 둘째 아들은 상철(相澈)이라 했다. 상철의 딸은 혜진(慧珍)으로, 1996년(丙子) 10월 12일(양력 11월 22일) 이기영산부인과에서 오후 6시 5분 3,240g으로 순산, 저자가 받았다. 
 정수의 둘째 딸은 인자(仁子)이다. 1964년(甲辰)생이요 고향에서 태어났다. 달성군 현풍면 중리 259번지의 창원 황씨 홍석(黃洪錫)과 결혼, 슬하에 아들 황지성(黃知性)을 두었다. 인자의 첫째 아들 황지성은 1993년(癸酉) 2월 25일(양력 3월 17일) 오후 12시 27분 체중 2,650g으로 이기영산부인과에서 순산, 저자가 받았으며 인자의 둘째 딸은 황지현(黃知賢)으로 1995년(乙亥) 6월 21일(양력 7월 18일) 오후 1시 52분 태아가 둔위 체위로 저자가 집도하여 제왕 절개 수술하여 체중 2,970g을 분만하였다.


 82. 압구정 2동 구의원 형수(亨洙)


 서울로 간 형제들은 정수의 동생 형수 및 철수이다. 형수(亨洙) 그는 재열의 둘째 아들로 1946년(丙戌) 1월 24일 인흥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말(馬)은 태어나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人)은 태어나 서울로 가라 했으니 그는 청운의 큰 뜻을 품고  맨주먹으로 시작하여 서울에서 자리를 굳혀 자수성가해 금의환향 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노력하였다 한다.
 그는 일찍이 삼영기업이라는 개인 회사를 창립하여 한양대학교 병원 등지에 병실용 옷걸이와 빨래걸이를 납품하는 등 사업에 성공하여 청년 사업가로서 기반을 확보했다. 그는 친정 부가 이진호(李鎭晧)요 모가 최영돌(崔英乭)인 서울 관악구 사람인 연안 이씨 남숙(李南淑)과 결혼하였으니 부인은 1949년(己丑) 6월 6일생이다. 부인의 출생지는 황해도 연백이 고향이다. 결혼한 그 이듬해 즉 첫아들 상진이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 재열은 서울로 이사 왔다. 
 형수(亨洙)는 서울에서 돈을 벌었다. 슬하에 상진[相辰 1976년(丙辰) 6월 12일생]과 상완[相完 1978년(戊午) 1월 24일생] 두 아들을 두었다. 그는 1998년 5월 30일 서울 압구정 2동 구의원 후보로 나서 당선되었다. 구의원에 당선되어서 1998년 6월 5일 당선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압구정 2동 지역 주민의 뜨거운 성원에 감사 드리며 지방자치제의 근본 목적인 주민 자치 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IMF 구제금융 상태하에서 서로가 고통을 나누며 어려운 현실을 극복해 나가야 할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저는 압구정 2동 구의원 당선자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주춧돌로서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의정 활동은 이 시대가 가장 크게 요구하는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를 선택하신 주민의 뜻이 여기에 있고 이것이 주민의 뜻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강남의 균형 있는 발전과 지역 발전을 위해 예산의 효율적인 사용에 그 주안점을 둘 것이며 항상 지역 주민의 대변자이자 감시자로서 행동하는 구의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저의 중점 공약 사항 실천을 위해 헌신할 것을 약속 드리며 지역 주민과 함께 20년을 살아오면서 겪은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생산적인 의정 활동을 펴며 소신 있고 지조 있는 지역 일꾼으로 성장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 드리겠습니다. 다시금 저를 선택하신 압구정 2동 지역 주민께 감사 드리며 소신, 지조 있는 지역 일꾼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행운이 깃들기를 빌겠습니다.

 이 글은 강남구 의회 김형수 의원 사무소에서 발간한 『김형수 의원 의정 리포트』 책에서 발췌한 글이다.


 83. 퐁당 퐁[?] 자(字)


 태홍의 계열 중 작은 집 영완의 소계열은 아래와 같다.
태홍-치종-순국-기현-영완-방우-달수-원식-진혁
영완(永完) 그는 고종 20년 계미(癸未 1883년) 11월 9일 아버지 기현과 어머니 박밀선 사이의 2남으로 인흥 땅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형 화술(和述)이 있었다 함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아버지 기현은 첫아들 화술에게는 술을, 둘째 아들 영완에게는 책을 벗하는 습성을 물려주었다 하였다. 정말 영완은 술을 못했을까? 그렇지 않다. 형인 화술에 비한다면 주량이 떨어진다는 것이었지, 항상 탁주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도 탁주 곁을 떠나 본 적이 없다. 탁주. 이것은 술이 탁하다 하여 이렇게 불려졌고 농부들이 주로 먹는다 하여 농주라 하였으며 막 걸러 즉시 먹는다 하여 막걸리라 부른다는 민속주다.
 영완은 흐린 이 술을 특히 좋아하였다. 또한 그는 스스로 학자라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인흥 동네에서 자기보다 어려운 한자를 척척 읽을 줄 아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가 학자들에게 교만을 심어 주는 때로 가장 위험한 시기이다. 이 시기가 지나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강호 천지에 학식이 있는 자 어디 자기 혼자뿐이리오. 인흥 동네에서만 그를 알아주었다.
 영완은 형 화술과 비슷한 키였지만 얼굴이 야위었고 흰 수염을 달고 있어 누가 보아도 학자였다. 이 영완과 친하게 교제한 분이 인흥 땅에 계셨으니 그는 다름 아닌 6세 위인 12촌 형 봉구였다.  서로가 앞뒷집에 살아 날이 새면 늘 서로가 서로를 찾았는데 이 봉구라는 분이 저자의 조부이시다. 두 분 다 둘째라면 서럽다 할 정도로 인흥 동네에서 학식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다. 어느 날 나의 아버지(외석)가 할아버지(봉구)가 가르쳐 준 것이라면서 샘 정(井) 가운데에 점 하나 있는 자(字)가 무엇이냐고 필자에게 물었다.
 “아버지,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우스개 글자로 우물에 돌을 던지니 퐁당 하며 소리가 난다 하여 퐁당 퐁 자가 아닙니까?” 하였더니 “어떻게 아느냐? 이것은 할아버지(봉구)가 아들인 나(외석)에게 가르쳐 준 것인데, 아버지도(봉구) 이 글자를 영완(잠바우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하던데”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었다. 잠바우, 잠바우, 나는 잠바우가 누군지 그 당시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이분이 방우였고, 그 아버지가 바로 영완이었음을 알았으니 퐁당 퐁(?) 자는 영완이 봉구 할아버지에게 가르쳐 준 것임에 틀림없다.
 영완 할아버지와 봉구 할아버지는 두 분 다 농사짓는 일에는 솜씨가 없어 어쩌다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똥통을 지게에 지면 똥이 넘쳐흘러 온몸을 칠갑하기 일쑤고 멀리 나무하러 보내면 늘상 빈 지게로 돌아왔으니 소에게 멍에를 씌우고 쟁기로 밭을 갈도록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영완은 글공부를 잘한다 하여 동네에서 동장 일도 맡았다 한다. 영완의 업적 중 중요한 것은 1911년 1월 5일에 시작한 기현 저(著) 신해보(辛亥譜) 가첩이니 후대까지 계속하여 대대로 첨가해 기록한 사실은 높이 평가해 줄 만하다. 이 작업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다.
 영완 그는 합천 이씨 차련(李次連)과 결혼하였으니 그의 부인은 달성군 옥포 사람이었으며 아버지는 이도여(李道汝)요 어머니는 나선득(羅先得)이다. 1884년(甲申) 8월 15일이 그녀의 생일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4남 3녀가 태어났으니 아들의 이름은 방우(邦佑 잠바우), 해렬(海烈), 홍렬(洪烈), 창렬(昌烈)이다.
 인흥에는 언제부터인지 공동묘지가 있었다. 같은 고향 마을 사람이라도 자기가 죽어 갈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공동묘지에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영완이 형인 화술이 묻혀 있는 쌍무지개 뜨는 단초골이나 불당곡(佛堂谷)의 선산 묘지에 가지 않고 공동묘지에 간 이유를 아는 자는 없다. 공동묘지에 푯말조차 없는 무덤이 두개 있다. 그 중 하나가 이 영완의 무덤이다. 이 영완의 무덤은 상하 옆 주위에 누워 있는 자들의 푯말을 보고 찾아야 한다.  묘의 상방에는 포상 곽씨(包上郭氏) 묘요, 우측에는 이칠용(李七龍)의 무덤이 있고, 좌측에는 장자 정치호라고 씌어진 무덤의 중간 무덤이 영완의 무덤이다.
 오늘날 이 무덤에 푯말 하나 세우라고 그 후손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하였으나 서로 미루며 나서서 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  
 부인 이차련은 1951년 2월 27일 향년 68세로 돌아가셨으니 무덤은 인흥 수철곡(무시골) 대추밭 유좌(酉坐)로 모셨다. 영완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타계함은 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한다.


 84. 잠바우는 방우의 아명이다


 잠바우 그는 방우의 아명(兒名)이다. 방우(邦佑)는 고종 40년 계묘(癸卯 1903년) 10월 4일 인흥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영완이요 어머니 이차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방우는 경주 김씨 분선(金分先)과 결혼하였으니 부인은 남편보다 3년 연하의 1906년(丙午) 8월 30일생이다. 부인은 대구시 서구 내당동 4번지의 사람이며 친정 부는 김두원(金斗元)이요 모는 신금순(申今順)이다. 도시 처녀가 농촌으로 시집온 셈이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당시에도 농사일을 모르고 자란 도시 처녀가 농촌으로 시집왔을 때 생기는 어려운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길쌈하랴, 디딜방아 찧으랴, 쇠죽 끓이랴, 모든 것이 생소하기 짝이 없고 고생스러웠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김분선은 아들 달수(達洙)를 1924년에 낳으니 기쁨도 잠시, 달수가 3세 되던 해 도저히 농촌 생활에 적응할 수 없어 집을 나가 버렸다. 부인을 찾기 위해 방우는 처가도 몇 번 찾아갔고 갈 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지만 부인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오히려 처가에서는 딸을 찾아내라고 야단이었으니 첫 부인과의 결혼 생활은 결국 파국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농촌 사람은 절대 도시 처녀를 며느리로 삼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고향 인흥 마을에 남겼다.
 부인이 떠난 후 4년째 되던 해 방우는 계배 성주 배씨 갑선(裵甲先)과 결혼하였으니 부인은 1914년(甲寅) 1월 1일생이다. 말이 결혼이지 동거였다. 친정 부는 배재홍(裵在鴻)이요 모는 모른다. 어디 사람인지도 모른다. 첫 부인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호적을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계배 배갑선을 호적에 등기함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 계배 배씨 몸에서 1남 3녀가 태어났으니 전부 김분선의 자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난 아들의 이름이 준수(峻洙)라 한다. 딸은 옥향(玉香), 복향(福香), 윤향(潤香)이다. 방우는 평소 술을 좋아하여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셨는데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는 꼴이 되었다. 방우는 향년 40세의 나이로 1942년 11월 29일 사망하였으니 사망 원인은 술로 인한 간 경화증이었다. 당시 아들 달수 나이 19세요 준수 나이 5세였다.
 묘는 선친이 누워 있는 인흥 공동묘지였으며 역시 부친의 묘처럼 이 무덤 앞에도 푯말이 없다. 부친의 묘 앞에도 푯말이 없는데 그 아들 묘 앞에 푯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 묘도 역시 부친의 묘처럼 주위의 푯말을 보고 찾아야 하니 그것은 부친의 묘 우측이 이칠용 묘요, 그 우측이 반남 박씨 묘요, 이 묘 우측이 방우의 묘이다. 이 묘의 도해는 아래와 같다.
 달수의 생모 김분선은 지금까지 살아 계실 리 만무하다. 그러나 지금도 생사가 불명이니 돌아가신 해와 묘가 미상일 수밖에 없다. 계배 배갑선은 1972년(壬子) 7월 21일 향년 5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묘는 인흥 무시골 대추밭 양지요, 시어머니 합천 이씨 차련 묘 우측 상방에 유좌(酉坐)로 썼다.
 

 85. 유전 천 리(流轉千里) 달수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와 같이 정처 없이 발길이 가는 곳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잠바우의 첫아들 달수(達洙)이다. 그의 정처 없는 떠돌이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인흥에서 태어나서 자라 결혼하여 4년 동안만 고향에서 살았을 뿐 그의 나머지 부분은 여로였으니 죽을 때까지 객지에서 떠돌아다니는 삶이었고 또한 죽어서도 경기도 포천군에 장지를 두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살아야 할 미리 정한 갈 길이었음을 지나간 그의 삶을 돌이켜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방랑벽은 그의 친어머니가 달수 나이 3세 때 먼저 집을 나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어머니가 없는 아이라 처음에는 할머니 손에 자랐지만 나중에 새로 들어온 계모 배갑선 밑에서 자랐으니 계모는 성격이 강인하여 아들을 엄하게 다스렸다니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친인척들은 당시 상황을 그렇게 이야기한다.
 달수 그는 1924년(甲子) 9월 1일 태어났다. 나이 24세 때 달성군 다사면 세천동 사람인 능성 구씨 무선(具武善)과 결혼하였으니 무선은 남편보다 4년 연하의 1928년(戊辰) 6월 21일생이다. 부인은 친정 부가 구이암(具利巖)이요, 모가 김부연(金富連)이다. 구무선은 전 서울특별시장이고 현재 달성군 국회의원인 구자춘 씨와 친척 되는 분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3남 4녀가 태어났다. 아들은 원식(元植), 해룡(海龍), 현룡(賢龍)이다. 딸은 경옥(京玉), 정옥(貞玉), 순옥(順玉), 미옥(美玉)이다.
 1948년 이들 사이에 첫아들 원식(元植)이 고향 땅 인흥에서 태어났다. 아들 원식은 천연두(마마)로 앓아눕더니 병 끝에 얼굴에는 흉터가 남았고 또한 그 균이 눈으로 들어가 양쪽 눈을 실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원식 나이 2세 때라 한다. 구무선은 이런 일들이 시집와서 주님을 버린 결과라 생각하여 이때부터 고향 땅 인흥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는 신앙을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님이 된 아들의 치료와 또한 이것이 불가능할 땐 대구 맹인학교에 보내야만 한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집온 지 4년째 되던 해 대구로 이사하게 되었으니 처음에는 대구 비산동 산꼭대기에 살았으며, 이때 동생 준수와 2년 동안 같이 생활했다. 그 후 지금의 시민극장 자리로 이사했다. 이때 남편 달수는 염색 공장에 다녔다. 달수가 직업을 가진 것은 고향 땅 인흥에서 농사짓는 일 외에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 동안 대구에서 딸 경옥과 둘째 아들 해룡(1955년생)을 두었고, 대구에서 7년 살고 난 후 다시 부산으로 이사하여 딸 정옥과 순옥을 낳았다. 부산에서 10년 살다가 다시 강원도 홍천으로 이사 갔는데 부산에서 부인 구무선은 행상을 하였고 이곳 홍천에서는 잡화상을 하였다 한다.
 강원도 홍천에서는 딸 미옥과 아들 현룡(1969년생)을 낳았다. 홍천에서는 10년간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를 했고 양평에서 3년간 생활한 후 또다시 서울로 이사하여 오늘날까지 15년 동안 장사를 하며 지내게 되었다.
 
 남편 달수는 설상가상으로 직업이 없는 데다 아버지를 닮아 술을 많이 마셨는데 이 음주야말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이라 할까. 4대째 술을 마셔 폐가하였다 하였으니 여기서 4대째란 기현, 영완, 방우, 달수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금 구무선은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동원(東園)교회에 나가며 교회 권사이다.
 63세의 나이로 남편 달수는 서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물론 술이 원인이었다고 가족들은 믿고 있다. 생을 마치기 직전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1986년 3월 20일이 사망일이요 장지는 경기도 포천군 동원교회 묘지이다. 교회 식구끼리 죽어 묻히는 교인 묘지이다. 동원교회 묘지의 위치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포천군 화현면 지현리 산 27번지이다. 남편 달수가 돌아가신지 21년 후 2007년(丁亥) 2월 27일 구무선씨도 타계하여 남편과 쌍분이 아닌 합분으로 생을 마쳤다. 몸은 비록 타지에 있지만 본적만은 달성군 화원읍 620번지로 그대로 고향에 두었다.


 86. 마로니에꽃을 진혁이가 보다


 달수의 장남은 원식(元植)이다. 1948년(戊子) 11월 16일이 그의 출생일이다. 원식은 인흥에서 태어나 2세 때 장님이 되었다고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는 서울에서 친정 부가 박봉경(朴鳳景)이요, 어머니가 안인출(安仁出)인 경북 영주군 부석면 사람인 밀양 박씨 근영(朴根英)과 결혼하였으니 근영은 원식과 동갑내기인 1948년(戊子) 12월 10일생이다. 이들 사이에 아들 진혁(珍爀)을 1976년(丙辰) 6월 14일에 낳았다. 부인 밀양 박씨 근영도 앞을 못 보는 장님이다. 부인은 국민학교 5학년 때 친구에게 뺨을 맞고 실명하였다고 한다. 두 분 다 앞을 못 보는 장님이기에 생활하는 데 불편하여 아들 진혁을 어머니 구무선에게 맡겼다. 구무선은 서울에서 아들과 따로 살고 있었다. 어머니 구무선은 현룡 및 손자 진혁과 살다가 돌아가셨다.
  현재 직업은 영등포 맹인안마시술소에 부부가 함께 나가 일하고 있다. 부부가 다 안마 자격증을 소유하고 있다.
 청각장애인은 선천성이라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어 소리의 중요성이나 고마움을 실감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은 후천적으로 오기 때문에 항상 눈을 감고 있어 밤낮을 구분할 수 없고 머릿속에는 어릴 때 봤던 꽃들이 찬란한 빛을 뿜으며 현란하게 반짝임을 기억하고 있다. 그 괴로움을 상상해 보라. 그들의 간절한 소망은 그가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아내와 자식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찬란한  빛을 발하는 태양을 보는 것이다. 아니 또 마로니에 꽃을 보기 원했다.
 원식 부부는 지금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있으며 원식은 동원교회 장로다. 원식은 술을 전혀 하지 않는다. 교인이기도 하거니와 아버지까지 술꾼으로 4대째 내려오는 전통을 더 이상 대물림하지 않도록 쐐기를 박아 맥을 끊어 버렸다. 원식의 아들 진혁은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생활했기 때문에 부모가 장애자임을 조금도 부끄러워하거나 기가 죽는 일 없이 명랑하고 해맑게 자랐다. 아들 진혁이 결혼했다. 부인은 경신(庚申 1980) 11월 23일생인 부안 임씨 은영(林?瑛)이며 친정부는 임재석(林栽石), 모는 김길자(金吉子)이다.  이 두사람 사이 아들 서준(?俊)이 임진(壬辰 2012) 2월 17일에 태어났다. 진혁은 현재 서울에서 한국 필립모리스라는 외국계 담배회사에서 국회, 정부 등 상대로 대관 업무를 하고 있다. 아버지 대신 진혁이가 마로니에의 꽃을 보고 있다.


 87. 두 마리의 용(龍)
 

 원식의 두 동생 중 한 명은 바다의 용이란 뜻인 해룡(海龍)이요, 또 한명은 현명한 용인 현룡(賢龍)이다.
 해룡은 1955년(乙未) 6월 16일 달수의 둘째 아들로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경주 김씨 재순(金在順)과 결혼하였으니 부인은 남편보다 1년 연하의 1956년(丙申) 9월 23일생이다. 친정 부는 김동권(金東權)이요 모는 김해 김씨 용순(金龍順)이다. 김재순의 본적은 강원도 원주시 원동 124번지이다. 부인의 본적을 밝히는 이유는 아직 혼인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서 난 딸 율아와 아들 강혁이 어머니 호적에 입적되어 앞으로 만약 혼인 신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강혁의 후손들은 김재순의 본적으로 호적등본을 열람해야 되기 때문에 여기서 밝히는 바이다.
 부부가 다 세례받은 교인이다. 현재 김재순의 친정 식구는 전부 미국으로 이민 갔기 때문에 한국에는 없다고 한다. 해룡은 슬하에 아들 강혁(康赫)을 1985년(乙丑) 4월 25일에 두었다. 또 딸 율아(栗娥)를 두었으니 율아는 1981년(辛酉) 11월 15일(양력 12월 10일)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서 태어났다. 해룡은 2002년 미국으로 귀화 이민하였으며 캘리포니아주에 산다. 직업은 인테리어와 건축업을 한다.
 현룡(賢龍)은 달수의 셋째 아들로 1969년(己酉) 3월 19일 강원도 홍천군 홍천면 연봉동에서 태어났다. 현룡은 1977년(丁巳) 5월 26일생이요 서울 종로구 원서동 사람인 초계 정씨 정희(鄭晶熙)와 결혼하였다. 부인의 친정 부는 정호길(鄭好吉) 모는 오월선(吳月善)이다. 부인은 한양대학교 관광과를 나왔다. 슬하에 아들 2명을 두었으니 장남 승혁(承爀)은 2005년(乙酉) 6월 15일생이며 차남 승아(升雅)는 2006년(丙戌) 11월 3일생이다. 현룡은 서울 방배동 서비코 기술연구소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현룡은 어릴 때부터 조카 진혁이와 함께 할머니 구무선 씨와 살았기 때문에 아재와 조카 사이지만 남다른 정이 있어 마치 형제처럼 지낸다. 어디에 갈 때도 같이 다닌다고 한다. 이번 제2 구마회 임시 창단 모임에도 두 사람은 서울에서 대구로 같이 왔다. 진혁의 할아버지 달수와 사촌인 점수 동생은 진혁의 인품과 똑똑함이 예사롭지 않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필자의 말에 아주 감격했고,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현룡도 만나기를 희망했다. 어릴 때 본 조카 원식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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