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사회참여의 도마와 같다. 술 잔을 놓고 다양한 스페트럼(spectrum)을 비춘다.
속으로 미소를 짓는다 “술을 마시는가 아니마시는가” 이다. 술 대신에 음료로 대신하기도 한다. 금주교육을 받고 성장한 교회 청년들이 도서관에서 고시공부를 하고 평생직장 에 입사하고 술자리 회식으로 고민을 한다. 술을 “마셔야 하는가 아니마셔야 하는가”이 다.그리스도인의 술자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윤리적인 신앙적 콤플렉스 (complex)가 되고 술자리 회식을 피하는 생활이 계속된다면 인간관계 대인관계 뿐만 아니라 평생직장 자리도 술자리 때문에 편안하지가 않는 것이다. 한국사회 초기 선교사 들의 신앙 교육은 근본주의 교육을 했다. 기독교인은 술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간과할 수 없다. 검증 단계의 관문을 거치는 신입 오리엔 테이션의 절차와 같은 수없는 시행착오를 평생 거친다. 술자리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더군다나 한국교회 교인감소와 목회 자의 이중직 참여 생존해야 하는 가장의 바닥생활은 술자리에서 목회자의 정체성을 검증하는 야릇한 시험대가 된다. 대중들은 기독교인 술을 마시면 않된다는 것을 직간접으 로 듣고 보아서 알고는 있다.
술 차원이 아니더라도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시대, 종교다원화 시대, 핵가족 다원화된 4차 혁명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 술이 있었다. 한국 기독교 모태신앙으로 평생동안 금주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술에 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술의 윤리는 타락과 실패 감각기능의 무력화, 타인에 대한 이성적인 행동으로 범죄를 일으키는 술의 혼수상태는 절제되어야 하고 당연히 금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병원에서 수술을 한 환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자해 행위와 같은 것이다. 당연히 절주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의 의지가 있어서 절제의 용기가 있으면 좋지만 개인의 의지는 사회구조에서 오는 술자리 요구에 저항하기에는 바위에 계란 던지기이다.
한국사회 현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 술을 대한 편안한 관계로 사회 생활할 수 있는 넓은 의식의 변화가 요구된다. 술은 술일 뿐이다 . 술을 마시고 마시지 않는 것은 선택이다. 비그리스도인이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교육의 잣대로 술을 바라다보기 보다는 술은 선택의 문제이다. 술은 음식이다. 술을 마시는 자체를 죄로 율법적으로 규정하기 보다는 개인의 취향이고 선택인 것이다. 의사 선생님이 술을 금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 금주하면 되는 것이고 사회생활과 마음의 평안을 위하는 권리를 논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술자리를 만들어 신앙교육을 한다면 사회생활과 구별이 없을 것이다. 거룩성. 신성성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가하고 비판의 눈으로 교리화 보다는 신학적 선택을 인정할 필요는 있다. 노동일을 마친 후 노동자들과 음료를 하면서 육체적인 아픔과 삶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것을 너그럽게 인정하는 것이다. 노동 일이 아니더라도 정신적인 긴장과 다양한 계층의 현대사회에서 건강한 회식자리는 술이라는 음식은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인 것이다. 다만 술이 타자에게 불편이 된다면 타자를 위한 배려가 요구된다. 술은 한국사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더구나 한국교회가 쇠퇴하고 이중직으로 바닥생활을 하는 목회자들에게 술자리가 결코 검증의 자리가 아니라 공감의 자리가 될 수도 있다.
2024년 5월 31일
에베소서 5:18 술취하지 말라 Do not get drunk on w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