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호는 1977년 '내 마음 갈곳을 잃어'로 데뷔해 '입영전야' '영일만 친구'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한국 성인가요(어덜트 컨템포러리)의 한 축을 담당해온 싱어송라이터다. 데뷔 때부터 꾸준한 활동으로 전성기를 누렸으며 1983년 '고독'으로 MBC 10대 가수상, KBS 가요대상 남자가수상 등을 수상하며 최정상에 올랐다. 이후 음악 활동 부진과 이민 등 개인사로 가요계를 잠시 떠났다가 1995년 '낭만에 대하여'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낭만에 대하여'는 발표 당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95년부터 96년까지 방영된 김수현 극본의 KBS2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사용되며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최백호는 그동안 히트한 대부분의 곡이 자작곡일 만큼 작사와 작곡에 탁월한 음악가로 손꼽히며, 여기에 더해진 깊이 있고 남성적인 목소리는 한국 대중음악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의 외로움을 드러내는 음악들
트로트풍의 노래를 진중하고 고급스럽게 부르는 보컬을 국내에서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음색은 타고난 것이지만, 창법은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트로트가 국내 대중음악계의 보편적 정서로 자리 잡고 있던 시절, 대부분의 트로트 가수는 이 창법의 기준에 끼워맞춰 갈고 다듬었다. 그래서 '꺾지 않으면' 안됐고, '구슬프게 울부짖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이었다.
최백호(62)의 존재는 그런 면에서 독창적이고 독보적이다. 그는 타고난 출중한 음색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학습법을 개발해 어떤 노래에도 '세련미'와 '고급스러움'을 놓치지 않았다. 여기에 듣는 이의 귀를 절로 집중시키는 '흡인력'까지 갖춰 보컬리스트의 또 다른 본보기로 떠올랐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에서 듣는 쓸쓸하거나 씁쓸한 정취의 미학, '영일만 친구'에서 느껴지는 강단 있는 목소리, '낭만에 대하여'가 주는 트로트풍 탱고의 세련미를 어찌 그냥 흘려들을 수 있을까. 그의 이 같은 음색과 창법은 만능 기타 플레이어 박주원의 2집 [슬픔의 피에스타] 수록곡 '방랑자'에서 극점을 찍었다. 나지막이 읊조리며 쓸쓸하게 부르는 창법 한 마디 한 마디가 주는 감동의 여운은 전신에 닭살을 돋울 만큼 짙었다. 그는 이 젊은 뮤지션과 작업하면서 새로운 장르에 눈을 뜨고, 자신의 창법을 다시 돌아봤다.
"전에 해보지 않았던 장르들을 해보면서 많은 걸 발견했어요. 제가 몰랐던 창법을 새로 알게 됐고요. 예전에는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음악이라는게 무한하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음악은 결국 감성인 것 같아요. 어떤 감성을 가지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음악 자체의 색깔이 달라진다는 걸 많이 느꼈거든요."
그가 이번 주 네이버 '뮤지션스 초이스'에 참여하며 선곡한 곡들 대부분이 감성 어린 창법의 미학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인간이 지닌 외로움'을 주제로 선택한 곡들은 찬찬히 음미할수록 더 깊은 진가를 발휘하는 수작들인 셈. "제가 젊었을 때 힘들게 살아서 그런지, 외로움 같은 정서를 좋아했어요. 밝고 신나는 노래보다 쓸쓸하면서 고독한 노래를 좋아하는 편이죠."
최백호는 박주원과 작업을 계기로 조만간 라틴과 재즈가 골고루 섞인 고급 성인 시장을 위한 음반을 가을쯤 내놓는다. 자신이 직접 곡을 쓰지 않고 젊은 작곡가들이 그의 음색과 창법에 맞춰 곡을 쓴 첫 음반이다. 그는 "내가 해 왔던 방법과 완전히 달라 너무 어렵다"면서 "그래도 뭔가 도전할 수 있다는데서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그 완성된 선율의 조각이 어떤 향기와 감동을 전해줄지 벌써부터 가슴이 뭉클해진다.
글 / 김평(대중음악 전문필자)
<선정의 변> 11월 3주, 이주의 발견 : 국내 - 최백호 [다시 길 위에서]
[다시 길 위에서]는 최백호가 12년 만에 발표한 정규앨범이다. 몇 차례 싱글과 프로젝트 앨범을 발표했지만 정규작은 2000년 [어느 여배우에게]가 마지막이다. 중견 가수의 앨범 발표마저 어려운 것이 한국 대중음악의 현실이라면, [다시 길 위에서]는 중년 가수가 한국 대중음악에 던지는 도전과 가능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재즈 연주자 말로, 박주원, 조윤성, 프로듀서 표창훈 등과의 조우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선보인 최백호의 신작은 그 결과물이 '시도'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몇 해 전 유행했던 수상소감처럼,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많은 후배들이 멋진 밥상을 차렸고 그는 그걸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모두들 알고 있지 않은가. 맛있게 먹는 것조차 얼마나 어려운지. 나아가 그의 노래에는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멋진 밥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김광현>
이번 주 이주의 발견에는 '천재' 정재일의 제대 이후 복귀작, 현재 각종 챠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어반 자카파의 두 번째 앨범 등 쟁쟁한 후보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평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2000년 이후 무려 12년 만에 발표된 가요계의 거목 최백호의 새 앨범이었다. 소위 이야기하는 '고령 가수'들의 하던 대로 하던 관행이랄까, 안전역이랄까 하는 부분에 대한 왠지 모를 선입견은 첫 트랙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와 멜로디의 퀄리티에서 단번에 깨져버렸다. 현재성있는 창작물로서 새롭게 승부에 나선 그의 보석 같은 목소리에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런 높은 수준의 음악 뒤에 숨어있는 국내 최정상급 재즈 스타들의 이름들에 새로이 무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오늘의 뮤직 네티즌 선정위원 유성은>
<전문가 리뷰> 다시 길 위에서, 다시 시작하다 - 최백호
<이 리뷰는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김광현님께서 작성해 주셨습니다.>
지난 6월 4일 방송된 KBS2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한 장면. 함께 무대에 오른 최백호와 이적이 '낭만에 대하여'와 '다행이다'를 듀엣으로 부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환호가 커진다. 최백호가 '다행이다'를 부를 때였다. 원곡자인 이적과는 또 다른,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깊어진 혹은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사랑을 노래하는 듯했다. 그렇게 최백호가 노래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는 다른 노래가 되었다.
최백호는 한국 대중음악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수다. 아니, 그의 이름 앞에는 가수보다 음유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그의 이름과 동시에 '낭만에 대하여'를 떠올리고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로 시작하는 노랫말이 흥얼거려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년에 접어든 나이라면 술 한잔에 이 노래 한번 안 꺾어 본 이들이 없을 정도인데, 17년(1995년 발표)이나 된 이 노래는 올가을에도 어김없이 거리를 물들이고 있다. 그런데 올가을은 조금 달랐다. '낭만에 대하여' 외에도 최백호의 새로운 가을 노래를 만날 수 있게 됐다. 12년 만에 새 앨범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싱글과 프로젝트 앨범을 몇 차례 발표한 적은 있지만, 정규 앨범으로는 2000년 [어느 여배우에게]를 발표한 이후 처음이다.
[다시 길 위에서]는 환갑을 넘긴 중년의 가수가 새 앨범을 발표했다는 점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지만(이는 중견 혹은 중년 가수들이 소외되는 한국 대중음악의 문제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보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최백호의 새로운 도전이다. 재즈 연주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음악적 변화를 꾀했다. 그가 재즈와 만난 것은 2011년 기타리스트 박주원의 [슬픔의 피에스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앨범 수록곡 '방랑자 (Feat. 최백호)'를 박주원의 집시 기타에 맞춰 최백호가 노래했고, 이 곡은 앨범에서도 백미로 꼽힐 만큼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를 염두에 두고 있던 JNH의 이주엽 대표(그는 말로, 박주원, 민경인 등의 앨범을 꾸준히 낸 제작자이기도 하다)의 주도로 '최백호의 재즈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사실 [다시 길 위에서]는 재즈 연주자들이 참여하고 재즈를 베이스로 하고 있지만, 재즈 앨범은 아니다. 즉, 최백호가 재즈를 노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재즈와 클래식, 월드뮤직 등의 어법이 가미된 성인가요(어덜트 컨템포러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앨범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곡도 최백호가 작사하고 최종혁이 작곡한 1976년 곡 '뛰어'다. 박주원의 기타, 말로의 스캣과 코러스가 더해진 단출한 편성이지만 최백호의 보컬을 중심으로 새롭게 탄생됐다. '뛰어'를 제외하면 모두 재즈를 바탕으로 한 곡 작업이 이루어졌다. 말로, 박주원, 조윤성 등이 작·편곡과 연주에 참여했고, 말로(Malo)의 [3집 벚꽃지다]에서 호평을 받은 이주엽 대표가 오랜만에 작사가로 나섰다. 대중가요와 재즈를 아우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프로듀서 표창훈이 키를 쥐었다. 그는 웅산의 [Yesterday]를 히트시킨 프로듀서로도 유명하다. 연주에는 앞서 언급한 말로, 박주원, 조윤성 외에도 라 벤타나, 전제덕 등이 함께하고 있다.
최백호를 아는 이들이라면 그의 작사작곡 능력 또한 인정하는데, 그가 [다시 길 위에서]에서는 후배들이 차려놓은 멋진 밥상만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걸 맛있게 먹었다. 그래서일까, 자신의 곡의 부를 때와 같은 편안함은 덜하지만, 그의 보컬은 오히려 힘을 얻었다. 가령 말로가 작곡하고 조윤성이 편곡한 '목련' 같은 곡은 곡 자체가 갖는 매력도 크지만, 최백호의 남성적이면서도 섬세한 보컬이 없었다면 완성되기 어려운 곡이었을 것이다. 이 앨범이 갖는 의미를, 한국의 중견이자 중년 가수가 오랜만에 새 앨범을 발표했다는 것으로 한정 짓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시 길 위에서]는 그야말로 다시 길에 나선 한 음악인이 한국 대중음악에 화두를 던지는 변화와 도전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네티즌 리뷰> 12년 만의 세월 앞의 장사의 귀환
<이 리뷰는 오늘의 뮤직 네티즌 선정위원 유성은님께서 작성해 주셨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우리나라의 거목 아티스트들이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발표한 앨범들이 단번에 청자의 귀를 잡아끌 만한 무언가를 지녔던 적이 언제였던가. 새롭게 만들 팬보다 이미 만들어 놓은 팬들이 더 중요한 거목들의 새로운 앨범에서 몇몇 곡의 잔잔한 도전은 있을 수 있지만, 온전한 모습의 자기 부정과 신인의 자세로 돌아간 창작에의 치열한 열정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그런 치열한 모습의 부족함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대중음악이라는 문화의 한 갈래는 청자의 어떤 시점에 도장을 찍듯,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기억되고 쌓이는 것이라, 누구에게나 과거가 소중하듯, 누구에게나 과거 자신이 좋아했던 그 음악이 소중하고, 그 음악이 들려오면 그때가, 그 시절의 자신이, 그 시절의 누군가가 떠오르는 매개체가 되기에, 어떻게 보면 가수는 자신의 과거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덕목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지 않은가.
최백호의 경우 '이런 과거 모습의 간직'이란 덕목을 수행하기에 상당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만이 낼 수 있는, 그가 거목이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바로 그의 '목소리'. 어떤 장르의, 어떤 멜로디에 실어도, 어떤 새로움과 어떤 재기 발랄함이 배경에 있더라도, 일단 최백호의 목소리가 덮이는 순간, 이것은 그의 노래가 된다. 이런 부분이 팬들에게는 과거 모습의 간직이란 덕목을 뚜렷하게 해주는 큰 장점이 되지만, 반대로 무엇을 노래해도 '그냥 최백호 노래'가 된다면, 그것은 또 그 나름대로의 한계 또한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