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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온 뒤 공기가 상큼한 토요일 아침 작가회 정기모임을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5월은 날씨도 좋고 행사도 많은 달이라 참가자가 적었는데, 오늘도 연휴라서 많이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다시 관심을 보여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다.
오랜만에 김미라선생님이 오셔서 큰 도움이 되는 자료를 준비해 주셨고, 점심 식사까지 챙겨 주셔서 기쁨이 2배로 컸고, 박송희 선생님은 커피로 마무리를 해 주셨다. 강여진(강복례선생님이 개명을 하셨으니 앞으로 이 이름으로 불러주세요.)선생님은 손수 만든 빵을 가져와서 토론 시간에 입을 즐겁게 해 주셨고, 유영자회장님은 넓은 마음으로 우리들을 품어주셨다.
1부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7장, 8장 요약을 하고 나서 여러 선생님들과 의견을 나눴고, 2부는 김미라선생님이 <합평회의 이론적 기초1>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3부는 채기병의 ‘KO패의 교훈’, 강여진 선생님의 ‘혹시 당신을 만난다면’, 박송희선생님의 ‘가슴 뛸 때’, 유영자회장님의 ‘팔순 감회’, 김미라선생님의 ‘춘설-봄처럼 떠나다’ 순서로 합평회를 하였다.
7. 문학은 즐거운 놀이다
▲ 드봉 쓰봉 따봉
(소피 마르소가 바지를 입은 모습이 멋있다)
“-봉 –봉 –봉” 3개 국어가 ‘-봉’의 되풀이되는 데서 오는 쾌감
리리릿자로 끝나는 말은 개나리 보따리 대사리 소쿠리 유리 항아리
판소리<흥보가> ‘귀’자 근본을 들어보오. 한 발 달린 돌저뀌, 두 발 달린 까마귀, 세발 달린 통노귀, 네 발 달린 당나귀 ...........
이러한 것들은 놀이 하는 기분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발견한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일과 놀이의 교직(交織)이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삼라만상의 육중한 무게를 드러내는 뜻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즐거움 또한 있어야 한다.
▲‘공당문답’의 문학적 암시
양주동 선생의 《여요전주》라는 책 ‘공당문답(公堂問答)’의 예
맹사성 일화
무슨 일로 서울 가는공? 벼슬하러 간당
무슨 벼슬인공? 녹사취재(錄事取才)당
내가 시켜줄공? 아니당
-
-
어떤공? 죽어지이당
맹사성 같은 고명한 정승이 이런 말하기를 즐겼다는 것이 중요
문학은 이런 즐거움을 추구하는데서 출발한다.
위의 예들은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면 즐겁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는 아이 울음이나 자동차 소음 등은 되풀이한다고 즐겁지 않다.
그렇다면 같은 소리가 되풀이되기는 하되 무엇인가 다른 요소가 있을 때 즐겁다고 보아야 한다. 이를 가리켜 기대와 확인의 기쁨이라고 한다.
어떤 자리에 어떤 소리가 오리라는 기대와 확인, 이것이 문학의 틀이 되고, 그 틀에 맞추어 놀이를 하는 즐거움에서 문학의 형식성은 기쁨을 수반한다.
일정한 위치에서 같은 소리를 되풀이 하는 형식성은 이른바 압운(押韻)의 기본 원리이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형식은 형식으로서 가치를 가짐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내용과 유기성을 가질 때 그 의의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소리에도 그 소리가 주는 느낌이 있어서, 그 느낌과 뜻이 잘 어울리면 그 가치가 그만큼 커진다는 말이다.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절로 절로’의 ‘리을’[ㄹ] 음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유동감을 준다. 즉, 소리의 유동감과 내용이 딱 맞아 떨어진다. 물 흐르듯 되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시조의 내용과 안팎이 딱 들어맞는다. 이점에서 유기성이 드러난다.
▲‘태정태세 문단세........’의 비밀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광인효현 숙경영, 정순헌철 고순종
비슷한 길이를 가진 것 두 마디씩 짝을 지어서 소리를 내면 그처럼 자연스럽고 흥겨워진다.
이런 현상은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철수야 노올자」
비슷비슷한 길이를 가진 말마디끼리 두 개씩 짝을 지어 소리를 내면 흥겨운 느낌을 준다.
남대문 시장의 장사꾼
「골라/골라 // 맘대로/골라 //......」
이를 가리켜 리듬 의식이 주는 놀이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3.3.4조 「엄마야/누나야/강변 살자」
→ 실제 소리 「엄마야/누나야//강변-/살-자」
▲바보의 ‘응?’ ‘으응!’과 짝짓기 원리
바보가 길을 가는 데 혼자말로 ‘응?’하고는 곧 이어서 ‘으응!’ 그런다
바보의 독백에서도 「응?」과 「으응!」의 짝짓기를 발견한다. 「응?」이 의문이라면 그 대답으로서 「으응!」이라고 할 수 있고, 「응?」이 놀라움이라면 안도감으로서의 「으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짝짓기가 그 범위를 확대하면서 ‘이것’과 ‘저것’의 짝을 비롯하여‘너’와 ‘나’, ‘시작’과 ‘끝맺음’, ‘맺힘’과 ‘풀림’, ‘행’과 ‘불행’......... 등으로 무수한 짝을 이루는 발상법으로 몰아가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남의 집 서방님은 자전거를 타는데/우리 집 서방님은 논두렁만 타네」
논어 「그 자리에 있지 않거든 그 정사를 도모하지 말라」(不在其位 不謨其政)
맹자 「고정된 재산이 있는 자는 일정한 마음이 있고, 고정된 재산이 없는 자는 일정한 마음이 없다」(有恒産者有恒心 無恒産者無恒心)
▲ 짝짓기의 인간론적 확장
삶과 죽음의 관계가 이러하듯이 모든 삼라만상은 짝을 이룸으로써 그 뜻이 분명해진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문학의 상대성 원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나 율문에서만 짝짓기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산문이며 서사 혹은 극 양식 모두가 이 짝짓기의 원리에 기대어 있음은 분명하다.
‘주동 인물’과 ‘반동 인물’의 짝짓기도 이런 정신 위에 서 있는 것이고, ‘운명’ 앞에서 처절하게 몰락해 가는 리어왕이라는 ‘인생’의 비극도 그런 짝짓기의 인식을 담고 있다.
예) 이상의 날개
이 소설의 공간이 ‘나’의 방과 ‘아내’의 방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 말놀이의 흥미와 신비
원리는 원리로만 머물러 있는 법이 아니다. 그것은 원리이기에 그 원리를 응용하는 무수한 변형을 낳는다. 짝짓기가 문학의 즐거움이라는 아주 간단한 원리도 여러 가지로 변형을 이룬다.
예 1) 구약성서 시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의 반복
짝이 짝을 낳고 그 짝이 다시 새로운 짝을 낳으면서 이 짝은 연쇄를 이룬다.
시편 136편은 26회의 짝이 되풀이 되고 있다.
예 2) 아이들이 흥얼거리며 이어지는 연쇄도 짝짓기를 응용한 확장의 한 예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빨간 건 사과-...............-높은 것은 백두산
예 3) 제주도의 전승문답 192쪽
억새풀은 희다-희면 할아버지다-..........무당은 두드린다-두드리면 대장장이다
제아무리 위대한 문학도 이러한 즐거움을 그 기본 동기로 한다는 점울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작가가 위대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작가도 글을 쓰는 즐거움으로 작품을 탄생시킨다는 뜻이다.
동질성을 통해 짝을 이루도록 생각해 내는 발견이 위대한 문학에 이르는 길이 되기도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 초현실주의의 말놀이 세계
예) 조이스의 율리시즈 193쪽
서술자의 눈이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다시 거기로, 거기서 또 다른 데로
옮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주도의 전승문답의 시선 이동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말놀이에는 설명이 있는데, ‘율리시즈’에는 설명이 없어서 좀 어렵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따름이지 기본 원리가 다른 것은 아니다.
문학을 잘하는 사람은 제때제때 기발한 동질성을 찾아서 짝짓기를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남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짝짓기로 파격적인 신선함을 찾아내는 싱싱한 초현실주의자들임이 분명하다.
조이스가 현실을 떠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던 힘은 상식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내는 능력에서 가능했음을 이미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엄청나게 위해한 특정인의 일이 아니고 어린이들이 즐기는 문답에서 이미 발휘되는 것이고, 사람 잘 웃기는 말솜씨 좋은 사람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능력이 아니던가.
나무 타령-‘십리 절반 오리나무 방귀 뽕뽕 뽕나무.......’,
장타령-‘술 취한다 청주장 해 넘어간다 서산장.........’
이런 것을 부를 줄 아는 모든 사람은 이미 짝짓기 놀이의 원리와 즐거움을 통한 문학의 길에 들어서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문학은 그런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내는 짝짓기의 즐거움에 기대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런 일상인들은 이미 문학의 본질을 터득하고 향유하고 있다는 말이 이래서 입증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문학이 추구하려는 즐거움이 진리의 발견이라면 아이들 문답이나 우스개는 단지 웃고 말자는 단순성에 그 목표가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 말놀이의 즐거움과 이야기의 구조
사람에게는 말을 하고 듣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본능이 있음이 분명하다.
남자들 군대 얘기, 무뚝뚝한 사람이 술이 들어가면 되풀이 하는 얘기 등등.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와서 그 이야기를 서너 시간도 넘게 할 수 있는 힘이 솟아나기도 하는 것은 말하고자 하는 본능과 하되 즐기면서 하기 위한 재미를 추구한 결과다.
모든 소설이나 서사 양식의 기본 원리는 이야기를 엮어 가는 재미에 터를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문학이 어찌 즐거운 놀이가 아닐 수 있으랴.
▲ 새장의 안과 밖-얽매임과 벗어남
“결혼이란 새장과 같다. 밖에 있으면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안에 들어가면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법이다.”
결혼만 그러하겠는가? 사람 사는 일이 모두 이와 같아서 그저 자기 발 디딘 반대편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법이고, 그것이 문학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문학이 말하는 즐거움의 추구라고 할 때도 이런 문제는 생긴다. 말하는 즐거움 속에 소리의 짝짓기며 뜻의 짝짓기 같은 틀을 추구하는 쾌감도 있다는 말을 했지만, 그 틀을 속박이라고 여기고 한사코 거기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음도 또한 사실이며 문학의 역사를 보더라도 중요하다. 틀을 중시해서 거기에 맞추려는 노력이 있었는가 하면 거기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문학의 자유를 삼기도 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말한다면 틀이 강조된 것은 고전적 정신의 발로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근대적 정신의 고양이라고 할 것이다.
나타난 현상은 속박과 자유로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그것이 인간답기를 지향한다는 점만은 동일한 뿌리에 닿아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는 있다.
현대가 자유의 시대라고 해도 삶이 가져야 할 혹종의 질서는 있다고 본다든지, 다소간 전형화된 문학의 모습으로 드러내기를 추구할 때 대체로 일정한 틀 속에 들어가서 그 형식미를 즐길 수가 있다. - 패러디
▲ ‘노세 노세 젊어 노세’의 문학
문학은 다른 모든 문화의 양식이 그러하듯이 낡은 틀을 즐기면서 그것을 벗어나는 이중적인 모습을 지닌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 얘기 얘기 무슨 얘기, 노래 노래 무슨 노래----aaba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산아 산아 추영 산아, 형님 오네 형님 오네 분고개로 형님 오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 일일어 울어라 새여,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1연 봄의 소쩍새 울음, 2연 여름의 천둥, 3연 내 누님 된 꽃, 4연 가을의 무서리, 3연을 제외한 나머지 1,2,4연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한 시련’이라는 점에서 공통되고, 3연만 다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난날의 문화를 모방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가 우리에게 끼쳐 준 틀이다. 그러나 ‘나는 왕이로소이다’나 ‘국화 옆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문화와도 다른 신선한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들은 물려받은 틀을 깨뜨리고 나온 꽃임이 분명하다.
▲ 얽매임과 벗어남의 모순된 즐거움
이제 우리는 문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전통성과 창조성의 이해를 위하여 ‘얽매임’과 ‘벗어남’이라는 이중성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 둘은 서로 모순되는 관계지만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문학을 창조하고 즐기는 행위 그 자체가 그 모순의 본질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문학이 말하는 즐거움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 또한 틀에 얽매이면서 동시에 벗어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됨으로써 쾌감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 김동인의 배따라기
‘배따라기’는 서도 민요 가운데 하나로 ‘이선악’이라고도 불리는 노래다.
김동인은 익숙한 ‘배따라기’의 틀에 들어서면서 동시에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배따라기의 사연을 창조해 낸 것이다.
‘얽매임’과 ‘벗어남’이 동시에 구현되는 장이 소설 ‘배따라기’의 실상이다.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물려받아 생활로 누리고 있는 일상의 모든 틀 속에 자기를 얽매어 두면서 그 곳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릴 때 그 기쁨은 희열의 경지로 발전한다.
8. 문학에는 담도 없고 벽도 없다
▲ 옷과 가리개의 국경 분쟁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경계나, 문학에서도 시니 소설이니 하는 것의 경계나 모두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문학에서는 담도 없고 벽도 없다는 말을 앞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만 ‘팬티’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옷인데도 겉에 입었으니까 바지라라고 불러 주듯이, 문학에서도 그럴 만한 요소를 따라서 구분을 하고 이름을 붙여 주는 것뿐이다.
문학과 비문학 사이에 확연한 금이 그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짧은 바지는 바지가 아니라 ‘팬티’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낡은 생각이다.
▲ 문학에 담은 있는가
이순신 장군의 시조, 조선 후기 규방가사인 계녀가, 박용구 ‘불멸의 음악가’, 데카메론, 장자의 ‘제물론’ 등의 예
온대지방과 열대지방의 구분이 횟가루로 금 그어져 있지 않듯이, 문학과 문학 아닌 것 사이에 담장이 서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 두는 게 중요하다.
문학은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요소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문학은 보다 더 많이 문학적이거나 보다 덜 문학적이거나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일 따름이다.
이 말은 아주 범속한 시장 언어에도 문학이 있고, 하찮게 보이는 아이들의 언어에도 문학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잘’과 ‘더 잘’ 혹은 ‘서투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 ‘사실 대 허구’의 허구성
문학과 문학이 아닌 것을 가르는 벽이 사실과 허구의 준별이라는 식의 오해가 널리 퍼져 있다. 문학은 상상력의 소산이어서 사실의 기록과 엄밀하게 구분된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문학이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문학의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도 아닐뿐더러 필요충분조건은 더더욱 못된다.
문학이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문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된 벽을 세운 데서 온 오해일 따름이다.
문학이 허구성을 지닌다는 것은 사실과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만으로 엮어 가느냐, 아니면 사실을 가지고 생각을 해서 엮어 가느냐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 때 사실과 허구의 차이는 같은 손의 손바닥과 손등 같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상상’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도 실은 우리가 사물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상이라는 것이나 허구라는 것이나 모두 사실을 보는 시각의 문제며, 따라서 사실과 허구의 차이는 정도의 문제요 방향의 문제일 뿐이다.
▲ 표현과 전달의 연립주택
예) 부부싸움, 조선조 인조 때 남평 조씨의 ‘병자 일기’, 양정신 목사의 ‘이 어둠을 비추이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표현과 전달은 문학의 담도 벽도 될 수 없다.
사실 문학이 표현 혹은 전달의 어느 쪽에 뿌리를 둔 것이냐 하는 문제는 더 이상 문학의 담장도 울타리도 아니다.
문학이란 본디 표현의 본능에 뿌리를 내린 것이고, 표현은 전달을 기능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그것은 연립주택 이웃집 혹은 아래층, 위층을 따름이다. 여기서도 문학이 별난 언어로 된 것이 아님은 입증된다.
▲ 감정 대 논리의 비논리성
예) 병장의 신병 괴롭힘, 사마천의 사기 열전의 <오자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호화 여객선 귀부인의 일기
논리와 감정 혹은 주관과 객관이라는 식의 담장이 문학의 경계선일 수 없다.
▲ 문학이라는 누각
형체를 가진 것은 언젠가는 그 형체를 버린다는 진리가 암시하듯이 문학이 지닌 모든 요소는 결국 가변적인 것일 따름이다.
시속에 만화가 등장하고, 긴긴 이야기를 시로 쓰는 마당에 장르의 구별이 무슨 힘을 쓰겠는가?
문학이란 담장도 벽도 없는 집이다. 저 산마루에 선 누각 같은 것이다. 바람도 거기 지나고 피곤한 길손도 거기서 땀을 들인다. 비가 뿌리면 비를 가릴 거적을 둘러칠 수도 있고, 호화로운 화문석으로 비를 막은 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혹 무슨 필요가 있어서 발을 치거나 외를 엮어서 그 누각에 칸을 막은 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문학은 그냥 집일 따름이다. 집인데 오두막이거나 잘 지은 저택이거나 같을밖에 도리가 있는가?
아파트와 기와집만 집이 아니라 지금은 거의 사라진 초가집이며 양철 지붕을 한 집도 집이듯이, 시, 소설, 희곡만이 문학이 아니라 비석에 쓴 글도 문학이고 대문에 써 붙인 입춘첩도 문학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장르의 해체가 이미 문제되고 있음은 문학의 그같은 속성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가 문학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뜻보다는 문학이 본디 담도 벽도 없는 특성을 가졌다는 사실의 가시화(可視化)다.
문학이 일상의 말 속에 있듯이 작가도 따로 있지 않다.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면 이미 문학의 한 몫을 넉넉히 구현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결국 문학은 일상인의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잘 짓고 못 짓는 분별이 있을 따름이다. 좋은 연장을 갖고 그 연장을 다루는 솜씨가 빼어난 목수처럼 작가도 사물을 보아내고 그것을 언어로 그려내는 능력이 남다른 사람이다. 누가 목수가 되느냐 마느냐는 그 일에 바친 노력과 능력이 결정하듯이 작가가 되고 못 되고 혹은 훌륭한 작가가 되고 못 되고도 전적으로 거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긴 바지와 짧은 바지가 있을 뿐, 반바지와 팬티의 구분을 가지고 논쟁을 시도하는 어리석은 이가 또 있으랴.
첫댓글 회장님 벌 이렇게 훌륭한 글 올리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우리초우는 정말 명사의 전당인가봅니다
작가회 앞날이훤히 보여 흐뭇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열성 덕분입니다.
집안 일로 불참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정리해서
올려주신 채 기병 부회장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복습 복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개근상 받으실 줄 알았는데, 보고 싶었습니다.
채기병선생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열심히 참석해 보려했지만 무슨일이 꼭 있네요~
감사합니다^^ 이번엔 오시려나 했는데 담에 봬요.
공백의 수업에도 채워지는 공간 만들어 주신 채기병 회장님 좋은 내용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핵심 멤버가 빠지니 허전했습니다.
채기병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나오셔서 힘이 되었습니다.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밥까지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문학은 놀이다로 시작해서 문학이란 담도.벽도 없다 로 간추린 방대?한 글 워드 치느라 고생하신 회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학이라는 누각에 방점을 찍고 기분 좋은 아침을 엽니다.
감사합니다^^ 늘 함께 하셔서 기쁘고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