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으로 보낸 사람의 관등성명이 매우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임금이 하달한 명령도 너무 자세하여 확실한 물증에 근거하지 않고는 도저히 부정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하지만 <금감록>은 화자(話者)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余)라고 일인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다른 문헌에서는 대개 태조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태조는 만육공보다 26세나 나이가 많다. 그 사람이 평민이라 할지라도 자식보다도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자네도 백발이 성성하구만.”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막역지우로 대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인데, 하물며 국왕이 그런 표현을 사용했겠는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최양이 말하기를 한 동네에서 태어났고 한 이불 속에서 잠자면서 자랐으며 함께 과장에 나가서 급제하여 같은 조정에서 일했으니 지난날 정리로만 보자면 형제처럼 대한다하여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瀁對曰生於同里長於一衾科第一榜出入同朝情深昔日之兄弟禮雖
지금은 처지가 그 때와는 달라서 왕께서 비록 나를 저버린다 하더라도 나는 차마 왕을 저버릴 수는 없는 입장이거늘, 수행원들이 찾아온다 해서 국운이 불행하여 이미 왕권이 대왕에게 넘어갔는데 어찌 아무 때나 함부로 찾아 뵐 수 있겠습니까?
今日之顔面王雖負我我不忍負王故隨使來謁而國運不幸已歸大王何可時旹來耶
태조는 과거에 응시한 적이 없고 태종은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임금은 태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지만, 태종은 1367년(공민왕 16) 함경도에서 태어났고, 만육공은 1351년(충정왕 3) 전주에서 태어났다.
한 동네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다.
하지만 또 태종은 어릴 때 개성으로 올라와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와 같은 마을에 살고, 원천석에게 배웠으므로, 태종은 16세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 만육공과 전혀 인연이 없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고 16세나 나이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 한 이불 속에서 잠자며 자랐다고 표현한다면 역시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조선이 개국하여 왕자 신분이 되기 전 이방원(李芳遠)은 만육공에게 존칭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만육공은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한 태종보다 7년이나 먼저 급제한 선배인데, 함께 과장에 나가 급제했다는 말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앞서 정몽주와 박종수의 관계에서 보았던 것처럼 태종이 왕위에 올랐으므로, 후손들이 조상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하여 끌어다 붙인 것으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1424년(세종 6)에 최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 또한 비통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그리하여 3일간 조회를 파하고 거친 음식을 먹었으며 장례를 치르는 날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甲辰歲聞瀁卒余亦悲慟不知所爲輟朝三日進素膳因爲成服日遣官致祭
이 문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임금이 일인칭으로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화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태조나 태종이 아니고 세종이다.
왜냐하면 태조는 이미 16년 전에 그리고 태종은 2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太祖大王所製而世宗繼述者
<만육최선생일고>에는 <금감록>은 태조대왕이 만들었고 세종이 이어서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임금은 나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 어디까지가 태조가 지은 것이고, 어디부터가 세종이 지은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나는 부덕한 사람으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저번에 정몽주가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일은 실로 슬픈 일이라 이미 조영규에게 죄를 주기는 했지만 죽은 사람은 죽었으므로 애도할 뿐이로다.
余以否德入承大成而向來鄭夢周節死每然哀悼故己爲賜罪趙英珪然死則死故悼念而
조영규는 1395년(태조 4) 죽었고 태종은 1400년 왕위에 올랐으므로 여기에서 나라고 말하고 있는 화자는 태조가 아닐 수 없다.
앞서 1395년에 만육공을 온양 온천으로 부른 사람 역시 태조 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문과에 급제했다거나 어릴 때 만육공과 같은 마을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태조가 아니라 태종이다.
그리고 만육공 사망 소식을 듣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은 태조나 태종이 아니고 세종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금감록>에는 태조, 태종, 세종 세 임금이 나(余)라는 똑 같은 일인칭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나이를 뛰어넘어 친분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에 위서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일인칭으로 서술한 문서에서 화자가 이렇게 자주 바뀌는 경우는 <금감록> 외에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부고(訃告)를 듣고 비통하여 3일간 조회를 파하고 거친 음식을 먹었으며 장례를 치르는 날 관리를 파견하여 제사를 모시게 했다 했는데, 세종 6년에 조회를 폐한 사례는 <세종실록>에서 모두 11차례 발견할 수 있다.
<세종실록>에서 세종 6년에 조회를 폐한 사례를 살펴보면 모두 11차례인데, 대부분 왕족이거나 고위직 관원이 죽었을 때이다.
1월 25일에는 동복누이동생 정선공주가 나이 21세로 죽으니 임금이 슬퍼하여 찬수를 거두고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였다.
2월 8일에는 평양부원군 김승주가 나이 71세로 죽으니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조문과 부의를 보냈으며 장사를 관에서 도와주었는데, 김승주는 태종 때 공을 세운 익대좌명공신이다.
2월 25일에는 나이 열세 살 먹은 어린 왕녀가 죽으니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육선도 철수하였다.
5월 8일에는 태종대왕의 대상이었으므로 조회를 정지하였다.
5월 21일에는 도총제 홍부(洪敷)가 죽으니 3일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부의로 종이 70권을 하사하였는데, 홍부는 세종을 시종했던 시종신이다.
6월 10일에는 세종의 외할머니 삼한국대부인 송씨가 죽으니 조회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쌀과 콩 각 1백 석, 종이 200 권을 부의하였다.
6월 28일에는 판우군도총제부사로 치사한 조용이 죽으니 조회를 3일 동안 철폐하고 관에서 장사를 도왔다.
7월 18일 명나라 영락제가 승하하니 9월 4일에 성복하고, 7일에 복을 벗었는데, 4일에서 7일까지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형륙을 정지하고, 음악을 금지하고, 도살을 금하고, 혼인하고 시집가는 것도 금지하고, 크고 작은 제사를 정지하게 하였다.
10월 6일에는 태종의 후궁 의빈 소생 정혜옹주가 죽으니 임금이 육선을 들지 않고, 조회와 저자를 사흘 동안 정지시키고, 부의로 쌀과 콩 100석과 종이 100권을 내리고, 관에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
10월 19일에는 좌의정으로 치사한 강서가 78세로 죽으니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10월 27일에는 판우군부사 이화영이 죽으니 조회를 사흘 동안 정지하고 관에서 장사를 담당하였는데, 이화영은 개국공신 이지란의 아들이다.
<세종실록>에 조회를 폐한 것으로 수록된 이 사람들은 모두 <졸기>가 수록되어 있으나 만육공은 조회를 중지한 기록은 물론 졸기마저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3일간이나 조회를 중지했는데도 <세종실록>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특별히 명령을 내려서 자손이 만약 과거에 급제하면 지체 없이 채용할 것이며 그 자손이 혹시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다가 잡히더라도 악형을 가하지 말 것이며 군역의 폐를 당할 때는 그를 살피지 못한 관리에게는 벌을 주고 징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