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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회 사무엘기상 1장-6장
<사무엘기 입문>
1. 책의 이름
사무엘기를 두권으로 나눈 것은 최근의 일이다. 1사무 28,24에 대한 마소라 본문의 각주는 이 대목이 “책의 중간”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스 말 번역자들은 이 책을 두 두루마리에 옮기면서 ‘첫째 왕국기’, ‘둘째 왕국기’라고 이름을 붙였다. 대중 라틴 말 성경도 이 구분을 받아들여 이 책을 ‘제1열왕기’와 ‘제2열왕기’라 불렀으며(오늘날 우리가 열왕기 상권과 하권으로 부르는 책들은, 각각 ‘제3열왕기’와 ‘제4열왕기’로 불렸다.), 15-16세기부터 히브리 말 성경도 두 권으로 분류되었다.
히브리 말 본문과 그리스 말 번역본을 비교해 보면 중대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칠십인역의 역자들이 마음대로 그리스 말 번역본에 첨가나 삭제를 했을 가능성은 없다. 쿰란에서 발견된 히브리 말 본문 가운데 이미 출판된 희귀본들은 때때로, 칠십인역이 번역 대본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는 본문에 더 가깝다. 그러나 수사본들이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만으로 “원문”에 더 가깝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칠십인역이나 그 히브리 말 번역 대본은 중복되거나 모순되는 문장들을 삭제하려는 경향을 지녔으며, 마소라 학자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본문보다 덜 까다로운 수정본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이미 초세기 이전부터 두 개의 본문이 공존하였던 것 같다.
사무엘기라는 이름은 사무엘 예언자를 이 책의 저자로 여긴 옛 라삐 전승에서 비롯된다. 후대의 라삐들은 1역대 29,29-30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사무엘이 죽은 후에 그의 작품이 나탄과 가드를 통하여 이어졌다고 추정하였다.
비록 사무엘기라는 정의 자체가 오래된 것이라 하더라고 여기에는 다분히 인위적인 면이 있다. 특히 사무엘기 하권의 21-24장은 같은 문체와 의도를 지닌, 다윗 왕조 내부의 사건들에서 시작하여 솔로몬의 즉위에까지 이르는 이야기를 중단시킨다. 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열왕기 상권의 처음 두 장이 2사무 21-24장으로 말미암아 중단되는 것이다. 이 삽입 대목은 판관 17-21장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이 경우에도 구원자 판관들의 이야기가 판관17-21장으로 중단되었다가 1사무 1장에서 다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2. 책의 내용
일종의 “부록”인 2사무 21-24장을 떼어 놓고 보면 현재의 사무엘기는 연대순으로 이어져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첫째 부분은(1사무 1-7) 사무엘이 태어나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자, 대판관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를 들려준다. 이야기의 배경은 실로에 있는 계약 궤의 운명과 관련이 있는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이다.
사무엘이 늙자. 외부의 위협으로 불안해진 백성은 그를 찾아와 임금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한다. 신정 제도를 옹호하는 사무엘 예언자는 이러한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선다. 그런데도 사무엘은 이스라엘 원로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사울을 임금으로 세운다. 그런 다음에 사무엘은 물러난다. 왕정에 대한 논란과 사울에 관한 이야기들이 1사무 8-12장, 곧 둘째 부분을 이룬다.
셋째 부분은(1사무 13-15) 사울이 필리스티아인들과 아말렉족과 벌인 전쟁들을 다룬다. 사울이 전쟁들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그는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두 가지 죄를 범하고, 이 때문에 사무엘은 그에게 암시적인 말로 왕좌에서 쫓겨나고 다윗이 그 뒤를 이으리라고 알려 준다.
넷째 부분으로, 다윗이 사울 앞에 소개된 때부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성별될 때까지의 이야기는 1사무 16장에서 2사무 5장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다윗의 왕위 등극사”에서 그려진다. 다윗은 어릴 때 사무엘에게 성별되어 사울을 섬기다가 필리스티아의 거인을 이기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는 전쟁에서 뛰어난 전공을 쌓아 모든 사람, 특히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이 때문에 사울은 병적인 시기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울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쟁자 다윗을 제거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자 결국 도망을 쳐 방랑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필리스티아인들을 섬기게 되지만 군대를 이끌고 동족을 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마침내 사울과 요나탄이 길보아에서 필리스티아인들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다윗은 사울의 후계자들과 싸움을 벌여 잇단 승리를 거둔다. 그리하여 사울의 집안은 갈수록 약해진다.
다섯째 부분은(2사무 6-8) 사무엘기에서 다윗의 이야기를 다루는 2부작의 연결 부분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실로의 궤를 안치하는데, 이는 자신이 점령한 성읍을 왕국의 수도로 성별하는 행위이다. 또한 나탄의 예언은 다윗의 편을 들어 다윗 왕조가 왕국의 중심이 되도록 뒷받침해 준다. 8장의 기록은 예루살렘 왕국의 창시자가 실제 왕국의 정복자였음을 상기시킨다.
2부작의 후반부는 2사무 9-20장의 내용인데, 여기에 1열왕 1-2장도 덧붙여야 한다. 여기에는 여러 사건들이 얽혀 있는데, 결국에는 솔로몬의 등극으로 끝을 맺는다. 솔로몬의 탄생과 이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 그리고 솔로몬의 등극에 장애가 되었던 다윗의 아들들, 곧 암논, 압살롬, 아도니야 등이 어떻게 제거되었는지를 들려준다.
“다윗의 왕위 계승”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삽입된 2사무 21-24장은 두 편의 시가와 여러 인물들에 관한 기록, 그리고 두 가지 자연재해와 그 액땜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 놓았다. 이 이야기들은 역사적, 종교적 면에서 중요한데도 앞 장들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3. 사무엘기와 이스라엘의 역사
사무엘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오랜 기간을 다루는데, 적어도 그 마지막 시기는 정확하게 밝힐 수 있다. 우리는 다윗의 노년기, 곧 기원전 970년에 솔로몬이 즉위하기 몇 해 전까지의 기록을 보게 된다. 판관들의 역사에서처럼 초기의 일화들은 그 연대를 분명히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이 시기와 관련된 사무엘기의 전승들에 들어 있는 요소들은 역사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필리스티아의 지배에 관한 정보, 특히 필리스티아인들이 독점했던 철기류 제조에 관한 기록(1사무 13,19-21),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장소들을 많이 언급하는 전쟁 이야기들(1사무, 17; 31), 도망 다니던 다윗에 관한 일화 등이 이에 속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다윗과 사울 집안 사이에 얽힌 이야기와 압살롬의 반역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갈등은 한층 역사적 근거가 분명한 전승이다. 2사무 8장이 들려주는 다윗의 전투들도, 비록 외적인 증거들은 없지만 결코 거짓이라 할 수 없다 기원전 10세기 초에 다윗 왕국이 건설된 시기는 이집트와 아시리아가 방어적 처지에 놓여 있을 때였고,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통치 아래 번영을 구가하며 그 세력이 지중해와 홍해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다윗의 신하들에 관한 언급과(2사무 8,15-18; 20, 23-26) 2사무 24장이 들려주는 인구 조사는 영토를 조직적으로 정비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가진 것이라곤 군대밖에 없던 사울 시대 이후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말해 준다. 반면에 사무엘기에서 왕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힘들다. 필리스티아인들의 위협이 원로들에게 사무엘을 찾아가 임금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하게 하는 동기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언제 어디에서 이러한 운동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사울을 암몬인들의 정복자이자 야베스 길앗의 구원자로 소개하는 1사무 11장의 전승을 잘 살펴보면 왕정 시작에 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승이 사울의 즉위에 관한 다른 이야기들과 역사적으로 일치하는지는 의문이다. 사울이 어디에서 왕위에 올랐는가? 라마에서인가, 미츠파에서인가, 길갈에서인가, 아니면 여러 장소에서 거듭 즉위하였는가? 사울의 통치에 관한 기록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1사무 13,1은 그의 통치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음을 암시해 준다.
4. 편집 요소들
사무엘기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기록한 연대기가 아니다. 이 책은 서로 다른 여러 자료들을 한데 모은 문학 작품이다. 이 자료들 가운데에는 대단히 오래된 것들도 있다. 이 작품은 사울과 다윗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구두 전승들을 모아 놓고 있지만, 이 전승들이 기록되기 이전에 본디 그 원초적 사료가 어떠했는지를 밝혀낼 수는 없다. 이 기록들은 아마도 솔로몬 치하에서 편집되고,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 보충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사무엘기가 “신명기계”(여호수아기-판관기- 사무엘기-열왕기)라고 하는 역사학파의 작품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신명기계 작품은 어법과 문체로 쉽게 구별된다.
주석가들은 “다윗 왕위 계승사”(2사무 9-20과 1열왕 1-2) 비교적 일관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창조 이야기로(창세 2) 시작하는 옛 민족사를 전해주는 오경의 “비사제계”(야훼계) 전승과 거의 같은 문학적 특성을 보여 준다는 데에 동의한다. 압살롬의 반란 이야기를 보면 구체적이고 생생한 세부 묘사로 가득한데, 이 사실로 미루어 이 이야기는 후대에 편집되었다기보다는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쓴 작품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가 “계승사”의 핵심을 이루는데, 솔로몬의 탄생 이야기로(2사무 9-12) 시작하여 아도니야의 패배 이야기로(1열왕 1-2) 끝맺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솔로몬 등극사”라 부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들에서는 전체적으로 객관적 상황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저자의 개인적 성향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나탄의 예언과(2사무 7) 계약 궤 이야기에(2사무 6) 들어 있는 오래된 요소들을 포함하여, 다윗 왕위 계승사 앞에 나오는 기록의(1사무 16-2사무 5) 기원을 밟아 올라가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등극사 또는 다윗의 왕위 등극사가 생각보다 더 짜임새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볼 때, 중복 기사들은 매우 특이하다. 다윗이 사울을 섬기기 위하여 입궐하고, 다윗을 해치려는 사울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며, 요나탄이 다윗의 편을 들고, 다윗이 필리스티아인들에게 피신하는 이야기, 또 지프 주님들이 다윗의 피신처를 밀고하고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 주는 일화등은 모두 중복되어 나온다. 이 때문에 많은 주석가들은 다윗의 등극사가 오경을 구성하고 있는 “사료”들을 확장한 것으로 여겼다. 여기에는 이미 구두로 정착되거나 부분적으로 기록된 여러 전승들이 들어 있었는데, 이야기의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이 전승들을 보존하면서 고정된 표현 정식이나 틀을 유지시키고, 핵심 낱말을 사용하여 각 대목의 주요 주제들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중복 기사가 있지만, 다윗 왕위 등극사와 다윗 왕위 계승사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아서 두 저자를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볼 수 있겠다. 곧 예루살렘 궁궐 서기들이 다윗 임금을 찬양하는 구두 전승들을 뽑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다윗 임금의 이상화(理想化) 과정은 편집의 마지막 단계에까지 이어진다. 이 사실은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1사무 16장의 의도가 이 두 번째 임금을 첫 번째 임금과 같은 차원에 놓고자 하는 데 있으며, 분명히 후대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15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울이 벌인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들은 하나의 편집 작품이다. 여기에서 사울 시대에 필리스티아인들과 치른 전쟁들에 관한 옛 전승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전승들에서 진짜 영웅은 다윗의 친구인 요나탄이다. 그리고 이 전승들은 대체적으로 사울에게 적대적인 경향을 보인다(1사무 13-14). 아말렉과의 전쟁 이야기가(1사무 15) 옛 전승에서 비롯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탓에 사울왕가가 멸망했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도입된 것으로, 문학적 손질 작업을 거쳤을 것이다. 사울의 파멸은 그를 이어 곧 임금이 될 다윗의 이야기에 꼭 필요한 서막이다.
왕정의 기원을 다루는 1사무 8-12장도 꽤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여기에도 다양한 기원을 가진 이야기들이 한데 모여 있다. 이 가운데에서 어떤 것들은 비록 손질을 거치기는 했지만 분명히 옛 전승들이다. 벤야민 지파의 설화에서 나와 각색된 것임에 틀림없는 암나귀 이야기(9,1-10,16), 미츠파에서 제비로 임금을 뽑은 전승(10,17-27), 사울을 적국 암몬을 물리친 영도력 있는 판관으로 그리는 11장의 이야기가 그 좋은 예들이다. 8장은 왕정의 제정과 함께 야기된 신학적 문제점을 곧바로 보여 준다. 비록 주님께서 임금을 세워달라고 하는 백성의 청을 끝내는 승낙하시지만, 이 장은 그러한 백성의 간청을 단죄한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는 사무엘이 동족들에게 경고한 이른바 “임금들의 권한”을 이스라엘 임금들의 악습을 미리 단죄한 것이라기보다는, 기원전 이천 년대 말기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행해졌던” 임금들의 관행을 상기시킨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8장의 근간은 오랫동안 학계에서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옛 전승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8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연설은 사무엘기의 다른 연설들과 마찬가지로 신명기계 역사가의 손질을 거쳤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연설은 이야기를 늘리는 데 가장 적합한 문학 유형이다. 12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고별사 역시 전형적인 신명기계 역사가의 작품이다. 이 모든 작품에서 사울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이라는 사실만이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될 뿐이다. 저자의 관심은 누가 첫 번째 임금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왕정 제도 자체에 있는 것 같다.
사무엘기의 첫 부분에서(1사무 1-7) 중심인물은 사무엘이다. 이 인물은 이상적인 신앙인으로 소개되는데, 때로는 성소와 관련지어지며 예언직의 사명을 받는다. 동시에 저자는 그에게서 당대의 참된 구원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1,27-28 참조). 이건은 사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사무엘의 선택을 강조하는 이유는 두 임금을 성별한 그가 진정 주님의 마음에 드는 심부름꾼임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다. 1-7장의 다른 요소들은 사무엘기 전체의 주요 관심사들을 고려해야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일례로서 계약 궤에 얽힌 사건들이 매우 상세하게 다루어진 이유는 이 사건들이, 다윗이 세운 도성의 보호자로 삼은 거룩한 궤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2,27-36에 나오는 “믿음직한 사제”에 대한 예고는 솔로몬 시대에 제정된 차독 가문의 사제직에 영광을 돌리려는 것이다. 그리고 2,7에서 간결하게 표현된 높임과 낮춤이라는 반명제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에게 맞서는 사무엘의 이야기뿐 아니라 사울과 그의 집안에 맞서는 다윗의 이야기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이렇게 사무엘에 관한 일화는 이어서 나오는 일화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1-6장을 구성하는 옛 전승들의 편집자는 왕정 지지파로 볼 수 있다. 7장에서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관심과 문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역사가가 판관기의 역사를 완성하려는 의도로 7장을 재편집한 것이다.
5. 왕정에 관한 교훈
이야기 저자들의 정치적, 종교적 경향을 살펴보면 사무엘기의 구성에 관한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사실 사무엘기는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를 들려주는 긴 이야기라기보다 하나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왕정이다. 저자는 왕정 제도의 애매모호함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 통치자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문제는 왕정 제도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풀려 나갔다. 주님과 그분의 대리자인 사무엘이 결국 사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왕정을 먼저 요구하였던 백성이 즉각 단죄를 받은 것은 아마도 왕정이 인간적 원의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과 이스라엘의 군주 제도는 민주적인 것도 전제적인 것도 아니라 오직 신정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사울은 개인적으로는 그의 이름이 의미하듯 백성이 ‘요구하였기’ 때문에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무엘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놀라운 이야기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경건한 사람의 권위를 드높여 준다. 사무엘기는 사울의 파멸을 불러온 잘못들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임금이라 해도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사무엘기는 예배의 대상과 관습과 인물에도 관심을 가진다. 만져서는 안 될 계약 궤와(2사무 6,7) 예루살렘의 제단에(2사무 24) 관한 일화는 그 좋은 예들이다.
사무엘기에 따르면 가장 훌륭한 임금은 다윗이다. 저자는 다윗이 용맹한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음을 드러내고 그가 거둔 전공들,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호감, 그의 관대함과 겸손 등을 강조함으로써 그를 애초부터 이상적 인물로 부각시킨다. 이 이상적 임금이 주님께 보인 순종의 정신과 그의 탄원,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하느님의 뜻을 묻고자 한 사실 등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인물이었기에 다윗은 간음을 저지르고 난 뒤에 나탄 예언자의 질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탄은 이스라엘에서 임금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윗에게 일깨워 주었다. 한편 사울과는 달리 다윗의 후손은 벌을 받지 않는다. 그는 자식들 가운데 하나가 자기 자리를 물려받으리라는 보장을 받는다. 이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며 서서히 부상한다. 사무엘기는 결국 유다 왕조를 옹호하는 작품이다. 나탄의 예언에 따르면(2사무 7) 임금들이 개인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기는 해도 다윗 집안이 예루살렘의 왕좌를 끝까지 지키게 되어 있었다. 이 예언의 골자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편집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유다의 군주 제도가 오래도록 지속되리라고 믿었던 시기에 나왔을 이 종교적 이념은 다행스럽게도 사무엘기가 구원 역사 안에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훗날 언젠가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큰 잘못을 저질러 왕국 전체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마침내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에 결정적 심판이 내려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다윗 집안에 주신 영원한 보증을 계속 믿으면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약속에 합당한 인물이 나오기를 고대하게 된다. 그분이 바로 이상적 임금이신 메시아로서, 인성으로 볼 때 그분은 분명히 기원전 천 년경에 주님께서 뽑으신 이의 후손이시다.
1사무 1,1-28 사무엘의 탄생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춥족의 라마타임 사람이 하나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엘카나였는데, 에프라임족 여로함의 아들이고 엘리후의 손자이며, 토후의 증손이고 춥의 현손이었다. 그에게는 아내가 둘 있었다.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프닌나였다. 프닌나에게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1-2).
'에프라임 산악지방은 필리스티아 중안부에 위치한 구릉 지대로서, 이곳은 필리스티아 남부에 위치한 유대 산지보다 훨씬 비옥하였으며, 특히 이곳의 서부지역은 더욱 그러하였다. 아울러 이곳은 가나안 정복 전쟁이 개시된 이후 이스라엘에 의해 제일 먼저 점령된 지역이었다. 또한 이 때문에 이 지역에 위치한 '실로'는 가나안 최초의 성지(聖地), 즉 만남의 천막이 있는 장소가 되어 여호수아 시대와 판관 시대, 그리고 사무엘 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사회의 중심지이다. 한편 이지역이 '에프라임 지파가 그 지역을 가업으로 분배받았기 때문이다(여호 17,15). 그러나 에프라임 산악지방에 에프라임 지파만이 거주 한 것은 아니었다. 에프라임 산지의 남쪽은 벤야민 지파에게 가업으로 분배되었기 때문에 벤야민 지파 사람들도 역시 거주하고 있었다(여호 18,11).
라마타임은 ‘두 언덕’이라는 뜻이다. 사무엘 가문의 조상은 춥족이라고 불리었다. 이곳은 예루살렘 북서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단순히 ‘언덕’라는 이름의 의미를 갖고 있다. '라마'는 사무엘이 태어난 고향이요, 그가 활동한 사역의 중심지이며, 또한 후일 사무엘이 죽어 장사된 곳으로, 사무엘 시대에 주요한 위치를 점하는 장소이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카나는 본문의 족보를 종합해 볼 때, 레위 지파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를 '에프라임 사람' 이라 칭한 까닭은 그가 에프라임 지파의 후손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그 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레위 지파는 타지파처럼 일정한 땅을 받지 못하고,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의 종교 생활을 지도해야만 하였다(민수 35,1-8). 또한 '라마'는 여호수아에 의해 정식으로 지정된 레위인의 성읍도 아니었다(여호 21,17). 따라서 사무엘의 조상 '춥'은 자신의 조상에게 원래 할당된 지역을 떠나 바로 이곳으로 들어와 살게 된 듯하다.
여로함의 아들, 엘리후 손자, 토후의 증손, 춥의 현손인 사무엘의 부친 엘카나 가문의 조상들이다.
엘카나는 두 아내 한나와 프닌나를 두었다. 신명기 21,15-17의 규정은 마치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용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신명기의 규정은 단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아내를 여럿 둠으로써 부득이하게 야기될 수 있는 경우를 대비케 하는 성경적 해결책일 뿐이다. 엘카나의 두 아내 가운데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지만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판관이 사무엘의 어머니가 된다.
경건한 레위인 엘카나는, 히브리 모든 남자는 매년 정한 기간에 중앙 성소로 올라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율법규정(탈출 34,23; 신명 12,5)에 따라 이 의무를 이행하였다. 물론 성경은 매년 세 차례씩 –무교절, 수확절, 장막절-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탈출 23,17). 그러나 극히 타락했던 판관 시대의 정황 속에서 엘카나가 이정도나마 신앙적 열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평가될 수 없는 것이다.
실로는 이곳은 당시 법궤가 보관된 곳, 곧 성소(Tabernacle)가 있는 지역이었다. 법궤는 처음에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 '길갈‘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가나안 정복 후 땅 분배할 동안에 '실로'로 옮겨진 후 이때까지 이곳 실로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 북쪽 약 32Km 지점에 위치한 '실로'는 여호수아 시대 말기로부터 판관 시대 및 사무엘 시대 초기까지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요, 정치적 주 무대이며, 군사적 요해지(要害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 시대 말기에 필리스티아인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실로가 파괴됨으로 말미암아 실로의 영광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5,1).
3절에 나오는 ‘만군의 주님’란 명칭은 직역하면 ‘군대의 주님’이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만군의 주님’이라는 하느님 이름을 소개한 곳이다. 이 이름에는 원래 가나안의 엘 신에게 부여했던, ‘(천상) 군대를 창조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있다. 또는 “만군”이라는 말을 ‘권능, 엄위’ 등을 나타내기 위한 추상적 복수로 해석하여 이 칭호를 ‘전능하신 주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이 명칭은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지상에 만물을 아울러 통치하는 분이심을 암시해 준다. 따라서 여기 이 명칭은 참된 경배와 제사의 대상이 되시는 분에게 적용된 명칭이다.
'엘리'는 제사장 가문 중 유력한 피느하스 가문의 후손이 아니고, 이타마르(민수 4,28)의 후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란한 판관 시대 말기에 대제사장직과 판관직을 동시에 갖고 있었음을 볼 때, 그는 유명하면서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자녀 교육 실패의 결과, 방탕한 두 아들로 인해 결국 불운한 말년을 맞게 된다.
당시 엘리는 노쇠한 관계로 제사장적 업무를 감당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추측컨데, 엘리는 제사장적 업무를 자신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에게 주로 일임하고, 자신은 판관의 직무만 감당했다. 그러나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는 불량자들로서 제사장의 소임을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들이었고, 이는 결굴 엘리 시대의 종말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모세 율법상 모든 히브리 남자가 일년 3차씩 중앙 성소에 올라가 준수해야 할 절기는 무교절(유월절), 수확절(오순절), 추수절(장막절, 초막절)이었다(탈출 23,14-17). 그런데 이중 엘카나가 택하여 제사를 드린 날은 무교절이었다. 그 이유는 이 세 절기 가운데 무교절이 가장 큰절기였고, 또한 이때는 전 가족이 함께 주님 앞에 나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1년 1차 무교절에 중앙 성소로 올라가던 관습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보편화된 것 같다(루카 2,41).
“한나는 마음이 쓰라려 흐느껴 울면서 주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서원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 그리하여 당신 여종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10-11).
이 장면은 당시 이스라엘 종교 중심지인 실로에서 펼쳐진다. 실로는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만남의 천막을 옮겨온 시대부터 종교의 중심지가 된다(여호 18,1; 판관 18,31). 몇 세기 후 예레미야는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에게서 그분의 호의를 거두시는 예로 실로의 파멸을 강조할 것이다(예레 7,12). 여기에는 실로의 파괴에 대한 묘사가 나오지 않지만 뒷부분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 필리스티아인들이 전쟁에서 실로를 파괴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느님이 한나를 축복하신 것은 그녀가 경쟁자인 프닌나 때문에 고통당하고 많은 고난을 겪은 후이다. 그 축복은 또한 “주님 앞에서”(1,2) 한나가 바친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한나는 소리 내지 않고 입으로 응얼거리는 기도를 바치는데 그러한 기도는 마음 안에 응어리가 뭍어 있기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큰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하는 한나의 기도는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엘리 제사장은 그같은 한나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잔치에서 포도주를 많이 먹고 취한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 당시는 음주가 다양한 종교적 행사와 관련되었고, 따라서 엘리는 때로 사람들이 술에 취하여 성소를 소란스럽게 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는 바로 이 같은 자신의 경험에 의거하여 슬픔이 많은 한 여인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한나의 기도는 자신의 기도에 스스로 완전히 몰입하여 하느님 앞에 온 심령을 토로하는 깊고도 은밀한 내적 기도였다. 또한 이런 기도는 간절한 소원과 깊은 신앙심 없이는 아무나 힘든 차원 높은 고상한 기도였다.
하느님의 응답은 엘리 사제를 통해 온다. 그녀는 임심하여 아들 사무엘을 낳는다. 사무엘은 삼손처럼(판관 13장) 나지르인의 서원과 같은 것으로 하느님께 봉헌된다.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 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20). 사무엘이란 이름은 문자적으로 '주님께 청을 드리다'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한나는 사무엘의 출생이 하느님의 기도 응답임을 확인하면서 그같은 이름을 지었음에 틀림없다. 만일 한나가 하느님께 구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들으실 일도 없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27-28). 한나가 한 말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머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다. 여기서 한나가 하느님께 사무엘을 드리겠다고 한 것은 일시적인 위탁이 아닌 영원히 양도하겠다는 뜻이다. 실로 그녀는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고(욥 1,21), 아울러 하느님께 대한 서원의 존엄성을 깨닫고 있었으므로(시편 15,4) 모성애를 초월한 헌신적 결단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무 2,1-10 한나의 기도
이 아름다운 찬미가는 라틴말 이름 마니피캇으로 널이 알려진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에 영감을 주었다. 이 노래의 전반부는(3-8절) 불임녀 한나의 불행한 처지가 복된 처지로 바뀐 사실을 경축한다. 나중에 사무엘이, 그리고 다윗이 한나처럼 주님에게서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노래의 마지막 부분은(9-10절)은 군왕 시편에 가깝다(시편 2,8).
“한나가 이렇게 기도하였다. ‘제 마음이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제 이마가 주님 안에서 높이 들립니다. 제 입이 원수들을 비웃으니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1).
‘제 마음이, 제 이마(뿔)가, 제 입이’라는 말은 히브리 문학에서 전형적 수사 기법으로 사용되는 3중 대구법적(三重 對句法的)표현 방식이다. 한나는 이같은 표현을 통하여 자신에게 베풀어진 주님 하느님의 은혜를 벅찬 감격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도의 응답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사무엘이 출생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은 괴로움(1,10)과 슬픔(1,15)에서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뿔'은 먼지 가운데서 짓밟힘을 당하던 비참한 처지에서(1,6) 다시 높아지게 되었다. 더구나 그녀의 '입'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처량한 신세에서(1,13)다시 크게 열려져 자신의 원수에 대하여 주님의 은혜를 마음껏 알릴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뿔'(케렌)은 이것 달린 동물이 자신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힘을 과시하며 자랑스럽게 다니다는 점에서 '힘', '능력', '권위', '자부심', '긍지', 등을 상징한다(신명 33,17;시편 75,5). 따라서 자식이 없을 때 프닌나에 의해 무참히 이 뿔을 짓밟힌 한나는 이제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뿔을 다시 높이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라는 한나의 기쁨, 곧 앞에서 언급된 3중적 대구법으로 표현된 한나의 벅찬 감격과 희열이 궁극적으로 '주님의 구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구원'(예슈아)은 일차적으로는 자식이 없을 때 당한 온갖 수모와 멸시로부터의 구원이겠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구속적 의미를 가고 있다. 이는 사무엘을 통한 타락한 종교적 상황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한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이 없습니다.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 하느님 같은 반석은 없습니다”(2). 2절에서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이 없습니다”라는 말에서 하느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거룩함'으로 찬미가를 노래한다. '거룩'(코테쉬)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으로 온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절대 완전성과 절대 구별성을 가리킨다. 또한 2절에서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에서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한나의 두번째 고백은 하느님의 절대 존재성, 곧 '유일성'(唯一性)이다. 그런데 이 유일성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속성이겠지만, 또한 앞에서 언급된 '거룩성'의 근거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한나의 마지막 고백은 “저희 하느님 같은 반석이 없습니다”에서 하느님의 '신실성'(信實性)이다. 왜냐하면 '반석'이라는 단어는 구약 전체를 통하여, 언제나 변함없이 믿은 이들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언약의 하느님에 대한 상징적 명칭으로 쓰였기 때문이다(신명 32,4; 시편 19,14).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놓지 말고 거만한 말을 너희 입 밖에 내지 마라. 주님은 정녕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시며 사람의 행실을 저울질하시는 분이시다”(3).
'교만한 말'과 '거만한 말'은 한나의 대적 프닌나가 그랬듯이(1,6), 하느님의 심오한 경륜이나 섭리를 무시한 채 자신의 소견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멸시하며, 또한 자신을 높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은 마음이 슬픈 자의 마음을 더욱 짓밟으며,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가슴에 못을 박을 뿐 아니라, 나아가 결국 하느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말이므로 마땅히 금지되어야 했다. 한편 '교만한 말'과 '거만한 말'은 동의어인데, 여기서 이처럼 두 단어가 반복 사용됨으로써 그 의미가 한결 강조되고 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전지성(全知性)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이것은, 하느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인간 사회의 이성적 법칙, 그리고 그 법칙들에 따라 벌어지는 원인, 과정, 결과까지도 완전히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임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전지(全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행한 어떤 행동의 내면적 특성까지도 철저히 파악하고 계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한나의 대적 프닌나는 한나의 불임(不姙)을 그녀의 사악성 내지는 하느님께 저주받은 증거로 오판하여, 그녀를 얕잡아 보고 고통을 주었다. 또한 프닌나는 자신의 의도대로 한나가 격동됨을 보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교만한 말을 사람들에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느님께서는 프닌나의 그러한 사악한 속 마음과 행도의 성격을 파악하셔서, 당신의 공평하고도 의로운 기준에 따라 그녀를 판단하셨을 것이다(잠언 16,2).
4절에서 용사의 '활'은 고대사회에서 용사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자, 또한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생각하는 신뢰의 대상이다. 그리고 '부러지다'(하타트)는 '산산히 부서지다', '깨지다'란 뜻으로서, 사람이나 국가가 안팎으로 철저히 붕괴되어 도저히 소생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예레 50,2). 따라서 4절에서 활을 거머쥔 용사는 상징된 바 하느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며, 또한 그러한 자신의 힘을 괴시하기를 일삼는 교만한 자들이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의 징벌에 따라(3절), 완전히 쇠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한나의 기도는, 살아있는 이를 죽음이 지배하는 영역에 떨어뜨렸다가 끌어올리기까지(2,6) 인간의 운명을 뒤엎을 하느님의 권능과 그분의 예비하심을 찬미한다. 하느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대한 확고한 단언은 후대에,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의 신학적 출발점이 된다. 이 노래를 읽는 바빌론 유배민들은 하느님의 힘을 확신하면서 희망을 간직하였을 것이다. 힘 있고 배부른 바빌론 통치자들은 하느님이 거두어가지만, 배고프고 먼지와 거름 더미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일으켜지고 귀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2,4-8). 전사의 이미지뿐 아니라(2,1.4.9) 하느님의 ‘기름 부름 받은 이’(마쉬아흐 2,10)라는 말은 어떻게 이 노래가 이스라엘의 미래 임금에게 부합하는지 상기시킨다.
“주님이신 그분께 맞서는 자들은 깨어진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천둥으로 호령하신다. 주님께서는 땅끝까지 심판하시고 당신 임금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부음받은이의 뿔을 높이신다”(10). 기름부름받은이, 곧 메시아(그리스도)는 여기서 임금의 칭호로 나타난다. 임금은 백성이 가름을 부을 수도 있고(다윗: 2사무 2,4), 하느님께서 기름을 부으실 수도 있다(사울:1사무 10,1). 메시아는 사제 아론(또는 그의 후계자)의 칭호이기도 하다(탈출 28,41).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뿔’은 힘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루카는 복음서에 예수의 어머니에 대해 쓸 때 마리아의 마니피캇을 구성하기 위해 한나의 노래에서 영감을 얻었다(루카 1,46-55). 이 노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루카의 깊은 관심과 조화를 이룬다.
1사무 2,11-17 엘리의 아들들
“엘카나는 라마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으나, 아이는 엘리 사제 앞에서 주님을 섬겼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한 자들로서 주님을 알아 모시지 않았고, 백성과 관련된 사제들의 규정도 무시하였다. 누구든지 제사를 드린 다음 고기를 삶고 있기만 하면, 사제의 시종은 살이 셋인 갈고리를 손에 들고, 냄비나 솥이나 가마솥이나 도가니에 찔러 넣었다. 갈고리에 꽂혀 나오는 것은 무엇이나 사제가 제 것으로 가졌다. 그들은 실로에 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하였다”(11-14).
저자는 어린 사무엘이 주님을 섬겼다고 자주 강조한다(2,18;3,1). 반대로 엘리의 아들은 고기를 챙기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들의 악한 행동과(2,12-17) 완고함(22-25)은 첫 번째 징벌의 예고로 이어진다(27-36). 두 번째 예고는 사무엘에게 알려진다(3,11-14). 엘리 가문의 몰락과 사무엘의 성장 사이의 대조는 사울의 몰락과 다웃의 성공에 비길 수 있다.
'불량자'였던 엘리의 두 아들이 저질렀던 죄악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미쉬파트)은 제사장들에게 보장된 법적 권한이 아니라, 그러한 권리나 권한을 뛰어넘은 월권(越權) 행위나 태도이다. '제사'에서는 제물 중 기름 부분만을 번제단에 태우고, 살코기 부분은 제사장과 제사를 바치는 사람 즉 제주(祭主)가 나누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기의 '고기'는 제사장과 제주에게 나뉘어 질 수 있는 부분을 가리킨다. 이것은 삶아진 다음 제사장과 제주에게 각각 모세 율법에서 지정한 몫에 따라 분배되어야 했다.
두 아들들의 행동은 제주(祭主)에게 당연히 돌아갈 몫까지 침범하는 분명한 죄악이었다. 레위기 율법에 따르면 제사장은 제사 후 제물의 가슴과 오른쪽 넓적 다리를(레위 7,28-36), 그리고 신명기 율법에 따르면 앞 넓적다리를(신명 18,3) 자신들의 몫으로 취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나머지 부분은 마땅히 제주(祭主)에게 돌려져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들이 자신에게 할당된 몫만을 정확히 취하지 아니하고,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무조건 자신의 몫으로 삼은 것은 결국 제주(祭主)의 몫에 대한 침범 행위이며, 나아가 하느님께서 명하사 세우신 율법을 무시하고 범하는 망령된 짓이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이 자신의 아버지 엘리 대제사장을 빙자하여 자신들의 탐욕을 채웠음을 보여준다.
제사장의 횡포에 대하여 오히려 제사 드리는 사람은 하느님께 먼저 제물이 바쳐져야 한다는 원칙을 설명한다. 아울러 자신의 몫에 대해서는 포기하겠다는 뜻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은 강제로 고기를 빼앗아 자신의 탐욕을 채운다. 이것은 당시 엘리와 그의 두 아들에 의해 주관되던 실로 성소 제사의 타락상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 준다. 정녕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자가 간절히 요청되던 시기였다.
1사무 2,18-21 사무엘이 실로에 머무르다
“사무엘은 어린 나이에 아마포 에폿을 두르고 주님을 섬겼다. 그의 어머니는 해마다 남편과 함께 주년 제사를 드리러 올라올 때면 그에게 작은 예복을 지어 가져왔다”(18-19).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의 방자한 행동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저자는 이같은 대조를 통하여 엘리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필연성과 새로운 지도자 사무엘을 통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의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편 '에폿'은 일종의 앞치마로서 소매 부분이 없는 긴 조끼 모양으로 생겼는데, 제일 겉에 입는 공식 제사 복장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에폿'은 갖가지 아름다운 실로 수 놓아진 화려한 것이었으나(탈출 28,6-14), 일반 제사장들 및 레위인들은 단순히 흰 색의 '아마포 에폿'을 입었다(22,18). 그리고 이러한 아마포 에폿은 주요 종교 행사 때에도 사용되었다(2사무 6,14). 아무튼 본절은 사무엘이 이제 본격적으로 제사 직무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하느님께서는 사무엘을 바친 한나의 사정을 익히 알고, 방문의 시기를 고려하다가 때마침 제사장 엘리의 축복 기도에 응해 방문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한나는 사무엘 외에 3남 2녀를 더 잉태하게 되었는데, 이는 처음에 불임(不姙)과 무자식의 설움을 겪은 한나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하느님의 크신 위로요, 풍성한 축복이었다. 사무엘은 주님 앞에서 영적으로 성장하였다.
1사무 2,22-26 엘리와 그의 아들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본서의 주석과 본서 4,15은 이 당시 엘리의 나이가 98세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많은 나이는 틀림없이 자식에 대한 한 책망자로서의 부친의 영향력을 상실케 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엘리는 매우 늙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갖 짓을 저지르고, 만남의 천막 어귀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들을 꾸짖었다. ‘어쩌자고 너희가 이런 짓들을 하느냐? 나는 너희가 저지른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고 있다”(22-23). ’만남의 천막에서 봉사하는 여인‘이란 당시의 성소 규례를 따라 성소 내에서 일정한 직무를 부여받았던 헌신된 여인들이었음이 틀림없다(탈출 38,8). 그러나 성경은 이 여인들이 성소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아마도 이 여인들은 자주 반복되는 희생 제사 시에 반드시 수반되는 일, 곧 식기세척 및 그 밖의 음식물 장만들의 잡다한 일에 종사하였던 것 같다. 아무튼 이들은 하느님께 특별히 헌신되어 성소의 일에 전념한 여인들이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호프니와 피느하스의 음행은 만남의 천막에서 봉사하는 여인과의 합의 하에 이뤄졌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일은 일면 이방 민족의 음란한 제의(祭儀) 풍습이 이스라엘 사회, 심지어 제사장 사회에까지 깊숙히 침투해 들어왔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민수 25,1-5). 그런데 이 같은 악행은 이스라엘의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기까지 계속된 듯하다(2열왕 23,7). 아무튼 제사장의 신분으로서 하느님께 헌신된 여인들을 더럽힌 엘리의 두 아들의 이 사악한 행위는 하느님을 심히 욕되게 한 것임이 분명했다(25절). 아울러 일반 백성들에게 악영향을 끼쳐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저질렀다(24, 25절).
1사무 2,27-36 엘리의 집안은 망하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나의 처소에서 바치라고 명령한 제물과 예물을 무시하느냐? 너희는 자신을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모든 예물 가운데 가장 좋은 몫으로 살찌웠다. 그렇게 너는 나보다 네 자식들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29).
엘리는 너무 늙어서(22절) 말로 두 아들을 책망하는 것 외에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책망조차도 엄하지 못하고, 연약했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미 타락과 방종의 길로 치닫고 있던 두 아들의 행위를 저지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분상으로 영적 지도자들인 호프니와 피느하스의 범죄 행위는(13-16, 22절)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한 제사를 멸시케 하고(17절), 하느님의 성소를 가볍게 여기게 하며, 성적으로 타락케 하기에 충분하였다.
인간과 인간 사이 다툼이나 범죄가 발생했을 때 만물의 통치자 되시는 하느님께서 중재자로 나서셔서 그 문제를 마무리 하실 수 있는 권리나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즉 인간에 대한 인간의 범죄는 중재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회개할 기회가 충분히 주어진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어찌할 권리나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관련된 문제에 중재자로 나서서 그 문재를 헤결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범죄 행위에는 오직 하느님의 심판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아들에 대한 엘리의 책망 요지는 그들의 죄가 신성 모독죄에 해당되는 중대한 대신(對神) 범죄 행위라는 것이고 따라서 즉시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하느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믿음직한 사제 하나를 일으키리니, 그가 내 마음과 생각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내가 믿음직한 집안을 그에게 일으켜 주고, 그가 나의 기름부음받은이 앞에서 언제나 살아가게 하겠다”(35). 여기서 사제는 솔로몬이 에브야타르 대신 내세운 차독을 가리킨다. 에브야타르는 아나톳으로 쫓겨났다(1열왕 2,26-27).
하느님께 성실치 않았던 엘리의 가정이 파멸에 이른 것과는 달리, 새로이 세움을 받을 제사장 가정은 커다란 축복을 받게 될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곧 이스라엘의 '왕'를 가리킨다(10절). 그러므로 이 말은 왕과 제사장의 과두(寡頭)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다스려질 것이라는 예언이다(예레 33,14-26). 즉 지금까지와는 달리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별도로 기름 부음 받은 왕이 세워져야 하는 마당에, 제사장은 그 왕과 함께 하느님의 신정 왕국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사무엘과 차독 그리고 차독의 후손들은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을 도와 제사장의 직분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1사무 3,1-21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다
3장은 사무엘의 유년 시절 이야기 마지막 부분이다. 당시 실로에는 대사제 엘리가 주님을 섬기고 있었고, 소년 사무엘이 그를 거들고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 부족들은 계약 궤를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던 사제 엘리와 그 아들들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요컨대 세습적인 사제들에 의한 부족 동맹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장에는 사무엘이 부르심 받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사무엘은 성전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는 자기를 부르시는 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을 때 사무엘은 곧바로 그분을 섬길 자세를 취한다. 사무엘은 엘리와 그가 담당하고 있는 직책을 대신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소년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때에는 주님의 말씀이 드물게 내렸고 환시도 자주 있지 않았다”(1). 1절에서 “주님의 말씀”(11-14절 참조)과 “환시”(15절 참조)는 예언자들에게 주어지는 계시의 형태이다. 주님의 말씀이 드물다는 것은 아모스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선언과 같다. 사무엘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특별히 축복받았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에, 사무엘이 주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3). 3절에서 “하느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기 전”이라는 말은 동이 트기 전이었음을 나타낸다. 탈출기 27장 21절에 의하면 사제들은 증언 궤 앞 휘장 밖에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등불을 켜 놓아야 했다. ‘증언 궤’나 ‘주님의 궤’는 계약 궤를 나타내는 말로 사무엘기 상권에서는 처음 언급된다. 그런데 사무엘은 왜 주님의 궤가 있는 야훼(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사무엘이 실로 성소에 머물러 있던 그 계약 궤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계약 궤는 주님께서 거기 계심을 나타낸다.
“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예.” 하고 대답하고는, 엘리에게 달려가서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른 적이 없다. 돌아가 자라.” 하였다. 그래서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4-5). 세 번의 부르심은 거의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사무엘의 태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첫 번째 부르심에서 사무엘은 “예.” 하고 대답하고 엘리에게 달려가는데, 두 번째, 세 번째 부르심에는 “예.”라고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일어나 엘리에게 간다. 이는 누가 부르는지 알 수 없음을 나타내는 불확실성의 표현일 것이다. 엘리는 자기가 부르지 않았다고 두 번째로 부인할 때 ‘내 아들아’라는 애정 어린 호칭을 사무엘을 부른다.
사무엘이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7절에서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드러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향후 주님의 말씀은 사무엘에게 내릴 것이고(11-14절), 그는 주님의 예언자가 될 것이다(20절).
세 번째 부르심에서 엘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적절한 답변을 준비 시킨다. 이 답변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갖출 합당한 존경심과 겸손함의 표현이자 기꺼이 듣겠다는 마음의 태도를 나타낸다. 이제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무엘에게 일렀다. ‘가서 자라. 누군가 다시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은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9).
“주님께서 찾아와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10). 10절에서와 같이 사무엘의 이름이 두 번 불리는 경우는 창세기 22장 11절과 46장 2절, 그리고 탈출기 3장 4절에서도 발견된다. 주님의 부르심에 사무엘은 엘리가 일러 준 대로 대답한다. 11-14절에서는 주님의 개입과 결과가 드러난다. 엘리는 자기 아들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꾸짖거나 제지시키지 않아서 범죄자로 낙인찍힌다.
사무엘은 당연히 엘리에 대한 이러한 심판 선언을 전해주기 두려웠을 것이다. 16절에서 엘리는 다시 “내 아들 사무엘아”라고 부르며(6절 참조) 자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한다. 주님의 부르심을 먼저 깨달았던 엘리는 사무엘에게서 주님의 심판 내용을 전해 들은 뒤 주님의 심판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사무엘은 엘리에게 모든 것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러자 엘리는 ‘그분은 주님이시니, 당신 보시기에 좋으실 대로 하시겠지.’ 하고 말하였다”(18).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19). 19절에 의하면 사무엘은 계속 성장한다. 사무엘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보증은 능력을 부여해 주는 말씀으로 모세, 기드온, 예레미야와 그 외 다른 사람들의 부르심에서도 나타났다.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신명기계 역사가의 전형적인 사상 중 하나이다(참조: 여호 21,45; 23,14; 14; 1열왕 8,56; 2열왕 10,10).
사무엘은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20절) 온 이스라엘에서 주님의 말씀을 알리는 예언자이자 사제가 되었다. 사무엘은 실로에서 봉사했는데, 실로는 계약 궤를 보관하고 있던 곳이기에 중요했다. 이동식 ‘하느님의 옥좌’인 이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고대의 상징으로, 그 속에는 지파들을 결속시키는 계약법의 석판이 들어 있었다.
이 궤는 광야에서 사용되어 약속의 땅에 정착한 뒤에는 모든 지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가나안 중심부에 있는 실로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계약 궤는 판관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공통된 신앙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실로는 약속의 땅에 정착한 초기에 그들 모임 장소였으며 주된 예배 중심지였다. 계약 궤는 하느님 현존의 상징이었으며, 계약을 맺은 백성에게는 일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실로의 중요성은 지속되지 못했다. 필리스티아인과의 전쟁 중 그 궤를 빼앗기고 실로도 파괴됨에 따라 그 역할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사무엘의 부르심을 전하는 이 설화는 두 가지의 의도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첫째는 엘리 집안의 사제직에 대한 심판 말씀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무엘이 주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받았고, 그에 따른 예언자 자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무엘이 세 번에 걸쳐 엘리에게 간 것과 그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순진하고 소심해 보이지만, 사무엘은 스스로를 주님의 종이라 부르며 말씀을 듣고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표명한다.
성경 저자는 주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계시며 그분이 그에게 주신 모든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것, 또한 모든 이스라엘이 그를 예언자로 승인했으며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그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 등을 전함으로써 사무엘이 왕정 제도 도입(7-12장)의 임무와 왕권의 영광을 다윗에게 옮기는 일에 대해 명백한 자격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1사무 4,1-22 계약 궤 이야기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합시다”(3).
성경 저자는 사무엘의 지도자 역할을 이야기하기 전에 엘리와 그의 아들들의 죽음과 계약 궤를 빼앗긴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계약 궤 이야기에 사무엘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무엘이 잠시 사라진 사이 계약 궤와 그것의 상실과 복귀에 관심이 집중된다. 이는 동시에 사무엘에게 에벤 에제르의 전쟁과 계약 궤를 빼앗긴 책임이 없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학자들은 신명기계 역사가가 사무엘기를 편집하기 훨씬 전부터 ‘계약 궤 이야기’가 전해 왔었다고 본다. ‘계약 궤 이야기’는 현재 사무엘기 상권 1-3장과 4장 1절-7장 2절과 사무엘기 하권 6장에 해당된다. 이 ‘계약 궤 이야기’가 언제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다. 예를 들면, 다윗 혹은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에 모셔 둔 계약 궤에 대한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순례자에게 들려준 이야기라는 등의 의견이 있다. 계약 궤 이야기가 어떤 의도로 언데 형성되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신명기계 역사가가 그 이야기를 현재의 문맥에 배치한 뜻이라 하겠다.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과의 전쟁에서 자기들이 불리해지자 계약 궤를 전쟁 장소로 모셔온다. 그러나 필리스티아인은 그 궤를 빼앗아 전리품으로 삼아 가져갔다. 그 후 실로 성소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는데, 이는 아마도 실로가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예레 7,12-14 참조).
실로는 파괴되고 고대부터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상징이었던 계약 궤는 적군에게 빼앗겼다. 곤경에 빠진 이스라엘은 부족 동맹 자체가 흔들렸다. 이 사건이 이스라엘에게 준 충격과 실망은 18절 이하에서 잘 드러난다.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고, 엘리의 며느리는 아들을 낳자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는 의미로 아이의 이름을 ‘이카봇’이라 지었다. “전령이 주님의 궤를 언급하자, 엘리가 대문 옆 의자에서 뒤로 넘어지더니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사람은 늙은 데다 몸까지 무거웠던 것이다. 엘리는 마흔 해 동안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일하였다”(18).
2절에서 이스라엘은 첫 번째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천명 가량이 전사했다. 그런데 두 번째 전투에서는 일곱 배반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수의 전사자를 내었다(10절).
3절에서 이스라엘 원로들은 주님의 역할을 깨닫고 패배의 원인을 묻는다. 그에 대한 답은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그들의 다음 행동으로 미루어, 그들은 거기에 계약 궤가 없어서라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신명기계 역사가는 그 패배를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으로 본다.
4절에서는 주님께서 계약 궤의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다고 한다. 현재 문맥에서 계약 궤는 주님의 전쟁에서 군사들을 이끌면서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상징하는 역할을 한다. 계약 궤를 모셔 온 사람들 중에는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있는데, 이로써 신명기계 역사가는 하느님의 사람과 사무엘이 했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도한다(2,27-36; 3,11-14).
5절의 “큰 함성”은 주님의 전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여호 6,5; 판관 7,20; 1사무 17,52).
성경 저자는 본문에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만, 6절에서 필리스티아인은 이스라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을 고집한다. 이는 당시 필리스티아인들이 가졌던 문화적 우월감을 드러낸다.
7절 이하에서 필리스티아인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10절). 필리스티아인들이 느낀 이러한 두려움은 이스라엘 신의 패배가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를 강조한다. 계약 궤는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다. 사실 두 번째 패배가 놀라운 것은 주님의 궤가 전장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는 점이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상징인 계약 궤조차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마저 죽었다. 5장에서는 다곤 신이 주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4장의 나머지 부분(12절 이하)에서는 계약 궤 상실로 빚어진 이스라엘의 엄청난 상실감을 보도한다.
또한 계약 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강조된다. 필리스티아인들의 예기치 않은 승리는 그들 신의 우월성의 표시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계약 궤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엘리와 그의 며느리가 죽게 된 사실은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중대한 문제인지 보여 준다. ‘이카봇’이라는 이름은 신의 부재 문제를 날카롭게 표현한다.
12절에서 이 두려운 사실을 실로의 엘리에게 알리는 전령은 첫 번째 임금 사울과 같은 벤야민 지파 사람이다. “그날 벤야민 사람 하나가 싸움터에서 빠져나와 실로로 달려왔다. 그의 옷은 찢어지고 머리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12).
18절에서 전령이 계약 궤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 주자 아흔여덟의 노령에 눈이 굳고(15절) 몸까지 무거웠던(18절) 엘리는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는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엘리에 대한 심판이라기보다는 계약 궤를 잃은 충격이라 여겨진다.
19절에서 임신하여 산기가 찬 피느하스의 아내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죽음과 더불어 계약 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진통이 닥쳤다. 갑작스러운 진통은 조기 출산을 암시한다. 20절에서 죽음이 암시된 피느하스의 아내는 해산을 도운 여인들의 격려에 대답도 없고 관심조차 없다. 그는 숨을 거두려는 순간에도 이 사건이 의미하는 상징이 담긴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 준다. 22절은 모든 불행 중 계약 궤를 잃어버린 일이 가장 심각한 것임을 일깨운다.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구나.’ 하면서, 아이를 이카봇이라 하였다. 주님의 궤를 빼앗기고 시아버지와 남편마저 죽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주님의 궤를 빼앗겼기 때문에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말하였다”(21-22).
명백한 패배와 주님의 실제적 부재는 다음 장에서 하느님께서 계약 궤를 탈취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당신의 우월성을 보여 주실 기회를 제공한다. 계약 궤를 탈취당한 사건이 주님의 영광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다.
이 이야기로 신명기계 역사가는 자신의 독자에게 희망과 위로를 준다. 유배 시대의 예언자 에제키엘의 말대로(에제 10,18) 기원전 587년 주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에서 떠났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너무도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주님의 약속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유배기의 저자들은 주님의 영광이 과거와 똑같이 미래에도 나타날 것을 기대했다. 이를 가리켜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의 영광이 재건된 성전으로 돌아왔다(에제 43,1-5)고 하였다.
1사무 5,1-12 필리스티아인들이 주님의 궤 때문에 벌을 받다
“필리스티아인들은 주님의 궤를 빼앗아 에벤 에제르에서 아스돗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에 필리스티아인들은 주님의 궤를 들어, 다곤의 신전으로 가져다가 다곤 곁에 세워 두었다”(1-2).
'주님의 궤'(the Ark of God)는 필리스티아인에게는 자신들의 역사 이래 최대의 전리품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리스티아인이 아벡 전투에서 주님의 궤를 탈취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담대하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들의 처음 염려(4,6-8)와는 달리 그 궤가 어떤 능력을 나타내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그 궤로 인한 공포에서 벗어났기 때문인 듯하다.
'아스돗'(Ashdod)은 원래 여호수아에 의해 유다 지파에게 분배되긴 하였으나(여호 15,47) 그 지파에 의해 정복되지는 못했다. 이 도시는 강대국 이집트와의 교역을 위한 근거지였고, 또한 이집트로 통하는 관문이라는 점에서 필리스티아의 도시 중 중요하게 여겨졌다. 수 11,22;13,3 주석 참조. 한편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이때 주님의 궤를 이곳으로 가져온 가장 큰 이유는, 이곳 신전(神殿)에 모셔진 자신들의 다곤 신에게 그 궤를 일종의 예물로서 바치기 위함이었다.
여호수아 이래 계속 실로(Shiloh)에 있었던 법궤는 마침내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이르러 옮겨졌다. 즉 엘리의 두 아들의 주관하에 법궤는 실로로부터 에벤 에제르와 아펙(Aphek)사이의 전쟁터로 이동되었다(4,4.5). 그러나 이 싸움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에게 법궤를 빼앗겼다(4,11). 법궤를 빼앗은 필리스티아인은 처음 그것을 아스돗으로 가져갔다가, 곧 갓으로 그리고 나서 에크론으로 옮기었다(5,1-10). 그 이유는 법궤가 가는 성읍마다 독한 종기가 생기는 재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필리스티아 통치자들은 법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고, 논의 끝에 암소 두 마리가 모는 수레에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이후 법궤는 곧 키르얏 여아림 땅의 엘아자르 집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법궤는 이곳에서 근 20년 동안 안치되었다(7,1.2).
다곤(Dagon) 신상은 고대로부터 이 우상은 메소포타미아, 앗시리아, 베르게 지역 등지에서 널리 숭배되어 온 우상이다. 필리스티아인은 이 우상을 베르게 족속들에게서 수입하여 자신들의 민족 수호신(民族守護神)으로 삼은듯하다. 그것은 이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 '아스톳' 뿐만 아니라 '가자'(판관 16,23) 등 필리스티아의 주요 성읍 여러 곳에 세워진 사실로 미루어 보아 분명해진다. 한편 이 다곤의 어원(語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상호 이견이 있는데, 크게 다음 두 가지 견해로 대별될 수 있다. 즉 '다곤'을 '물고기'란 뜻을 지닌 '다그'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보고, 곧 '다곤(Dagon) 신'은 '물'과 '물고기'를 토템(Totem)으로 한 신으로서, 자연의 활력 및 무수한 번식력을 상징하는 '풍요의 해양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다른 하나는 '다곤'을 '곡식', '곡물'이란 뜻을 지닌 '다간'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보고,곧 '다곤(Dagon) 신'을 땅의 비옥과 땅의 열매를 상징하는 '풍요의 농경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다곤 신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바, 콜사밧(Khorsabad)에서 출토된 양각(陽刻) 조각품의 그림에 따르면, 몸의 상반신은 수염이 있는 남자의 모습으로 왕관을 머리에 쓴 형상이고, 몸의 하반신은 물고기의 형상으로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전자의 견해대로 다곤 신이 '물' 또는 '물고기와 밀접히 관련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마리(Mari), 우가릿(Ugarit) 등지에서 발견된 고대 문헌을 살펴보면 필리스티아인은 분명 이 우상을 곡식의 풍작을 위하여 숭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필리스티아인은 이 다곤 신에 해양 민족의 특성을 가미시키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가나안의 농경신의 영향을 받아 이 우상을 '곡식의 풍작을 위해' 숭배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전쟁에서 이긴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다곤 신전에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주님의 궤가 함께 있으면 다곤의 위대함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다곤 신상의 몸통은 주님의 궤 앞에 쓰러져 있고, 머리와 두 손이 잘려 나가 문지방 위에 널려 있었다.
하느님께서 다곤의 목과 손을 부러뜨린 채 문지방에 걸쳐 놓으신 이유는, 하느님의 공격에 대해 잡귀 따위의 도움이나 받아야 하는 다곤 신의 비겁한 모습을, 다곤 신의 우월성을 믿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분명히 보이시려는 의도 때문이었다(판관 19,25-27). 아울러 다곤 신을 경배하기 위해 다곤 신전의 문지방을 넘나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곤 신의 무능력함을 똑똑히 보여 줌으로써 경멸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곤의 숭배자들이 다곤 신당의 문지방을 밟지 않고 피해 넘어간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들이 숭배하는 다곤 신상의 머리와 손이 일시 놓여져 있었던 곳이므로 그곳을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곤 신도 보호를 요청하는 만큼, 그 문지방 밑의 귀신들을 성나지 않도록 하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같은 풍습은 그 후에도 이방인들에게서 계속되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첫번째 능력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섬기던 다곤 신에게 나타났었으나(3, 4절), 이제 그 능력이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까지 내려졌다. “주님의 손이 아스돗인들을 짓누르시어 망하게 하셨다. 그분께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종기로 치신 것이다”(6). 하느님의 궤가 옮겨진 필리스티아 지역인 갓이나 에크론에서 난리가 났다. “”그들이 그 궤를 그리로 옮기자, 주님의 손이 그 성읍을 치셔서 매우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분께서 그 성읍 사람들을 낮은 자 높은 자 가릴 것 없이 내려치시니, 종기가 그들 몸에 솟아났다(9).
필리스티아인이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취한 방책이었다. 만일 필리스티아인들이 하느님의 궤를 자신들의 또 다른 도시로 보낸다 해도, 옮겨진 그 도시 역시 앞의 다른 도시들처럼 하느님의 맹렬한 진노를 받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궤가 원래 보관되었던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필리스티아인은 많은 재앙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주님 하느님의 크신 능력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1사무 6,1-21 하느님의 궤가 돌아오다
주님의 궤가 필리스타아인들 지역에 머문지 칠개월이 지났다. 그 당시 주님의 궤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 들(field)에 보관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주님의 궤가 들어간 도시마다 여지없이 하느님의 진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즉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주님의 궤를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들에 보관함으로써 하느님의 진노를 피하려 한 것이다.
일곱 달이란 성경의 숫자 표기상 '일곱'(7)이라는 숫자가 보통 '완전함'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주님의 궤가 필리스티아 사람들에 의하여 대체없이 빈 들에서 너무 오래 방치되어 있었음을 강조한 말로 볼 수도 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주님의 궤를 잘못 다룸으로써 엄청난 재앙을 만났다고 생각한 나머지, 이제 정치적인 방법(5,8.10.11)을 포기하고 종교적인 방식에 의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사제들과 점쟁이들을 불러 놓고 주님의 궤에 대한 문제 해결을 찾고자 하였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이스라엘 하느님의 궤를 돌려보내려면, 그냥 보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 하느님에게 보상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병이 나을 것이고, 그가 왜 여러분에게서 손을 거두지 않는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느님에게 무엇을 보상 제물로 바쳐야 합니까?’ 하고 필리스티아인들이 묻자, 그들이 이렇게 일러 주었다. ‘필리스티아인들의 통치자들 수만큼, 금으로 종기 다섯 개와 쥐 다섯 마리를 만들어 함께 보내십시오. 같은 재앙이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통치자들에게 닥쳤기 때문입니다”(3-4).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주님의 궤 및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돌려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한편 바로 이같은 사실들은,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 실수로 타인의 소유물이나 사람을 취했을 경우에는 그 실수를 깨달은 직후 잘못 취한 물건이나 사람을 돌려 보내면서 실수에 따른 보상금(補償金)을 지불 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당시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무언가 잘못을 범하였음을 인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편 '보상제물'는 모세 율법대로 따른다면 하느님의 성물(聖物)이나 인간에게 해(害)를 끼치는 죄를 범했을 경우에 그 죄를 속죄받기 위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 혹은 예물이다. 죄를 범한 자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피해자에게 피해물 외에 별도로 1/5을 배상금 조로 주어야 했다(레위 6,5). 따라서 모세 율법에서 언급되고 있는 보상제(repayment offering)는 배상(賠償)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필리스티아 점술사들이 주님께 예물을 바치려고 했던 첫번째 이유가 있다. 이는 '종기병'은 말한 나위 없이 쥐에 의해서 전염되어지는 독종(毒種), 곧 흑사병(pest)의 일종이었다. 그들은 예물을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진노가 멈춰진다면, 필리스티아가 하느님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그같은 진노가 내려진 것으로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란 점을 언급한 것이다.
고대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에게 어떤 소망을 빌거나, 혹은 감사의 표시를 할 때 그 내용을 형상화(形象化)하여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질병의 치료를 원하는 자가 그 질병 든 모습을 금이나 은으로 형상화하여 신에게 바치는 경우, 해방된 노예가 그 쇠고랑을 신전에 바치는 경우, 승리한 검투사가 자신의 검을 신에게 바치는 경우 등이 있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하에서 여기 필리스티아 점술사들이 하느님께 드릴 예물을 자신들의 나라 바깥으로 보내고자한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임할 재앙도 자신들의 나라에서 떠날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금으로 된 종기 다섯개'와 '금 쥐 다섯마리'를 제후의 수효대로 다섯개씩 만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즉 주님의 재앙이 임했을 때 필리스티아의 다섯 통치자들(5,8)도 일반 백성들처럼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들의 대표가 될 수 있었고, 따라서 그 대표의 수효에 따라 금독종과 금쥐 형상을 각파 다섯 개씩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새 수레 하나를 마련하여,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어미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그 수레에 묶고, 새끼들은 어미에게서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십시오”(7). '새 수레'(a new cart)는 한 번도 세속적(世俗的)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적이 없는 수레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같은 수레는 존재치 않았을 것이므로 필리스티아의 제사장들은 그것을 새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필리스티아 사제들이 이처럼 주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실어 보내고자 한 이유는 이스라엘의 신이신 주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그에게 경외심을 보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멍에를 매어 본 적이 없는 어미소 두 마리’란 이것 또한 세속적 목적을 위해서 전혀 사용되지 아니한 소를 가리킨다(민수 19,2). 모세 율법에서도 정결 의식에 필요한 희생 제물은 이같은 조건에 부응해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신명 21,3).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수레에는 주님의 궤 뿐만 아니라 그 궤로 인해 발생된 독종 재앙과 쥐 재앙을 형상화(形象化)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도 함께 보내졌다(4절). 이것들은 주님의 궤를 진정시키기 위한 속건 예물용으로서(3절), 상자에 담겨져 주님의 궤 옆에 놓여졌다(8절).
주님의 궤를 빼앗긴 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던 만큼, 법궤의 귀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특히 제사장의 성읍(여호 21,13-15)인 벳 세메스 사람들에게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다.
필리스티아인을 대표하는 다섯 통치자들은 주님의 궤의 귀환 과정을 빠짐없이 모두 목도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궤로 인해 파생된 일련의 모든 사건들이 분명 이스라엘의 신 하느님의 역사였음을 마음 속 깊이 깨닫고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도시 에크론과 그들의 신 다곤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필리스티아인들의 다섯 통치자들은 이것을 보고 그날 에크론으로 돌아갔다. 필리스티아인들이 보상 제물로 주님께 바친, 금으로 만든 종기들은 아스돗 몫으로 하나, 가자 몫으로 하나, 아스클론 몫으로 하나, 갓 몫으로 하나, 에크론 몫으로 하나였다”(16).
주님의 궤를 들여다 보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범하는 일이기 때문에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민수 4,5). 그럼에도 불구하고 벳 세메스 사람들이 그것의 내부를 들여다 본 것은 사악한 세속적 호기심 때문이었으며, 그 같은 호기심은 결국 하느님을 분노를 사게 되었다(19).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그 궤를 전리품 취급한 필리스티아를 징벌하셨듯이, 그 궤를 단순히 세속적 구경거리로 삼은 벳 세메스 사람들도 엄히 징벌하신 것이다.
19절에 벳 세메르 사람들 가운데 주님의 궤를 본 사람이 주님의 징벌을 받았다. 그 백성 가운데 일 흔명과 오만 명을 쳤다고 나온다. 여기서 오만이라는 숫자는 필사자의 실수에서 기인한 듯하다. 즉 숫자 표기를 종종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내는 고대의 숫자 표기 방식에 따라 '칠십명'(쉬베임 이쉬)을 달리 설명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겨 '오만'이라는 말이 삽입된 것 같다. 어쩌면 '아인'(70)을 '눈'(50,000)으로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후일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의 인구가 최고로 번성했을 때에도 7만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여기의 '오만 칠십 인'은 그냥 '칠십 인'으로 봄이 타당하다.
하느님의 징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벧세메스 사람 '칠십인'은 한 가정의 가장(家長) 등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인물들이었을 것이므로, 그 두려운 사건은 각 지역 주민들에게 큰 충격이 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징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주님의 거룩성'을 깊이 깨달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