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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수요일 한강 성당 대성전 2층에서 저녁 7시에 "욥기"를 강의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헬조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아서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셨었는데 오늘 강의에 오시는 지하철에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나서는 여러 명의 사람들을 보시고 아직은 살만하고 따뜻하구나라고 느끼시며 기쁜 발걸음으로 오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욥기"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문학적으로 보면 욥기는 지혜 문학으로 분류하는데,
지혜 문학이라는 것은 문학적인 구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제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문학 작품이 어떤 주제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가? 하는
욥기의 중간에 ”지혜 찬가"가 나오는데 우리가 지혜 사상을 야훼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욥기는 이 질문에 관해서 대답하려고 노력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지식은 공부에 관한, 지혜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정의가 가능합니다만
오늘 누군가가, 신부님께 "지혜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 체험을 해석해서 그 해석을 통해서 내가 얻은 깨달음."
그 지혜는 어리석음과는 반대입니다.
우리는 간혹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야." 라는 생각을 지혜롭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젊은 사람들이 지혜로울까요? 나이 많은 사람들이 지혜로울까요? 라는 질문을 하시며,
나이 많으신 분들이 훨씬 더 지혜로울 확률이 높은데, 많은 것을 체험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것을 바르고 풍요롭게 해석했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욥기에서도 이 문제를 건드립니다.
지혜는 원로들에게 가서 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인데, 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요즘의 신부님의 화두인 "잘 늙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일상적인 질문들을 가지고 욥기를 읽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욥기는 크게 산문과 운문부분을 나뉠 수 있습니다.
산문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로 시작하고 중간에 대화 부분이 나오는데 "세 명의 친구" 이야기는 운문, 노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맺음말은 산문입니다.
산문의 틀을 가지고 있고 가운데에는 운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면,
욥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나중에 합쳐진게 아닐까? 하고 연구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한 의문은 욥기를 읽어 가면서~~~~
욥기의 구조
머릿말(프롤로그) 1-2장 산문
대화 3,1-42,6 운문
맺음말(에필로그) 42,7-17 산문
욥기의 소개- 1,1-5
우츠라는 지역의 사람인데 우츠가 어딘지 모릅니다. 분명한 건 "이스라엘의 지명은 아닙니다." 욥이라는 이름, 히브리 말로 "이욥(איוב)״ 라는 이름도 이스라엘의 이름이 아닙니다. 아랍 쪽 이름 같은데 굉장히 고대의 이름 같습니다.(아라비아 쪽 사람이 아니었을까??) 다소 어색합니다.
요즘에 아이를 낳고서 이름을 "을지문덕"이라 짓지는 않은 것처럼.
그는 굉장히 유복한 사람이었고"경건한 사람" 이었습니다.
그 경건의 정도의 예가,
욥이 자식들을 위해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즉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욥기 1,5
'혹시나 내 아들들이 죄를 짓고,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을 저주하였는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죄를 짓고도 모를 수도 있으니 그렇게 속죄 제사를 하였다.
속죄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드릴 때 한 마리를 더 바치면서, '그 밖에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죄에도 우리가 통회하오니...'를 하는데,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정말 우리가 잘못한 죄는 죄의식 없이 우리가 저지르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상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성서적 의미는,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죄입니다.
서문
욥기 1,-12 천상 1.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이 잔치를 벌이는데, 신들의 아들들이 갔는데 사탄도 같이 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사탄도 하느님의 아들들 중에 하나였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너 어디 갔다 오느냐?" 사탄에게 묻자,
"세상을 둘러보고 옵니다."
하느님은 욥을 칭찬하십니다. 그러자 사탄이 욥의 소유를 원하고 하느님께서는
"다만 그에게 손대지 마라."라는 이야기로 말씀하십니다.
욥기 1,13-22 지상 1
욥기 2,1-7ㄱ 천상 1
욥기 2,7 ㄴ- 10 지상 2
욥기 2,11-13 세 친구의 방문
이야기가 끝나고 세 친구의 이야기를 노래체로 이어집니다.
1장과 2장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하느님과 사탄이 천상에서 만났을 때 하느님이 사탄에게 욥을 칭찬하자, 사탄이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당신께서 몸소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를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리셔서, 그의 재산이 땅 위에 넘쳐 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인 "소유"가 나옵니다.
강의에 오신 분들도 또한 각각의 사유재산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가치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내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신부님은 가진 것은 없으시지만......" 통일을 위해서라면 내 것을 내놓을 수 있어...." 하시면서 예전 일화를,
학생 신부 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을 보시고 한참을 울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의 무너진 돌들을 비싸지 않은 가격에 (1000원? 2000원?) 팔아서 신부님도 그때 산 것을 지금까지 가지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루빨리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계신다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그의 모든 소유를 뺏는다면, 그가 하느님을 사랑할까요?
하느님이 사탄과 내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라는 내용에서 우리의 갖고 있는 사고방식과는 다릅니다.
우리의 경우에는 소유가 재산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소유가 자식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사탄이 욥의 자녀들도 다 죽게 합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욥이 노래를 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하느님이 주신 것이고 하느님이 가져가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뿐이다.
신부님은 감정을 잘 조율하시는 편이라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어도 드러나지 않아서 친구들이 너무 기뻐하는 일에도
"어, 잘됐네."
4강 갈 때도 "어이구, 선수들 노력했네." 하셨는데, 거리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게 저럴 일인가?"...^^
하지만 성경에서 룻기를 읽다가 룻이 나오미에게 "어머니가 묻힌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하는 부분에서 눈물을 흘리셨고, 욥의 이 기도 부분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간혹 젊은이들을 만나서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나는 내가 원해서 이 세상에서 왔는지는 잘 모르겠고, 선택한 기억이 없다.
나중에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하느님께서 정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두 가지 사이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많습니다.
나의 어떤 선택으로 인해서 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나와 내 이웃들이 행복해지기도 하고
지혜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내가 어떤 지혜로운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이 풍요로워지기도 하고, 내 선택이 어리석을 때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거두어 가신다"는 말은
우리의 받아들임입니다.
요즘에 신부님의 또 한 가지 화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순간에는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있고, 맞서 싸워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그래서 알고 계시는 외국 신부님께 "giving-up"과 "letting go"의 영적 식별을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철학을 전공하셨는데, 내가 그 질문을 처음 들어봤는데.... 나중에 연락을 주겠다고 하시고는 아직까지 연락이 없으시다고......
어떤 것은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것은 맞서 싸워야 할 것 같은데..
신부님의 아버지께서 지병으로 아프실 때, 투병하시면서 보내실 것인가, 받아들이시면서 보내실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셨다는 아픈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그렇듯 어떤 것은 맞서 싸워야 할 것 같고, 어떤 것은 받아들여야 할 것인데...
그 식별이 또한 지혜로움의 문제라고 하셨고, 욥은 그 부분을 어떻게 식별하였는지에 대해서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 사탄, 그리고 욥의 관계에서 나오는 첫 번째 스토리가 끝나고
두 번째 스토리는 다시 한번 하늘나라에서 잔치가 벌리고 하느님과 사탄이 대화를 나누는데 사탄이 하느님께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욥기 2,4-6
"가죽은 가죽으로! 사람이란 제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를 내놓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뼈와 그의 살을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의 목숨만은 남겨 두어라."
이 말은 "지난번에는 욥의 소유만 쳤지요, 하지만 인간에게는 소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건강과 생명, 안녕입니다. 그것을 치면은 욥이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정말로 그 이후 사탄은 욥에게 끔찍한 고통을 줍니다.
신부님께서 요즘엔 한강 성당에서 하느님 말씀을 정답게 나누시고 계시지만, 2~3년 전쯤에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면역질환으로 몸에 발진이 일어나면 쇼크도 오는 경험을 하시고 어려운 기간을 보내시기도 하셨지만, 지금은 몸에 맞는 약을 드시고 관리하시면서 신부님과 그리고 그렇게 아프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시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주위의 분들이 보시고 놀라시면
욥의 고통을 백분의 일을 이해하실 것 같다는 말을 하셨다고........
욥의 아내는 욥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
신부님은 "구약 성경에 여인들"에 관하여 한번은 논문을 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여인들을 보면 엄청 특별합니다.
하와, 사라와 하가르, 레아와 라헬, 레베카, 롯 그다음에 탈출기에서 나오는 푸아와 시프라, 그렇게 유명한 탈출기의 파라오의 이름도 모세의 부모님 이름도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리고 판관기에서 나오는 여인들, 그리고 신약에서 나오는 성모님과 빈 무덤을 찾아가는 여인들에게 이르기까지.
굉장히 특별한 구약 성경의 여성들입니다.
욥의 아내는 욥의 신앙에 도움을 주지않는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막장 드라마처럼 본다면,
"아니?? 왜?? 사탄이 저 여자는 안 데려가고 자식들은 데리고 갔을까???"
그렇게 부인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욥은 말합니다.
"당신은 미련한 여인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읽고 있는 지혜문학에서 최악의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미련한 사람입니다.
윤리적으로도 많은 윤리학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소크라테스부터....
"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일까? 히틀러 시대에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훌륭한 신학자가 있었는데, 나중에 히틀러의 저항 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열흘 전쯤에), 신학자로서도 굉장히 좋은 글을 많이 남기신 분이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도 히틀러 시대의 독일을 보면서
"악함보다 더 악한 것은 어리석음이다. 악한 사람은 적어도 악이 무엇인지 알기에, 악한 사람이 회개하면 선해집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이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저지른 악함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지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기 않겠소?라는 부분은 하느님은 우리에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주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좋은 것만 받겠는가? 이 부분을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어렵습니다.
우리가 아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나쁜 것도 주십니까?
이 부분 관해서는 몇 달 전의 유일신관에 관한 이야기로 되짚어 봅니다.
"하느님은 선악 모두를 주관하신다."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모두 하느님께 속한다. 우리에게는 나쁜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 질문 』
욥기 1장. 2장에서 신들의 아들들? 하느님의 아들들?
창세 6,1-2
땅 위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 딸들이 태어났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여자들을 골라 모두 아내로 삼았다.
이미 나왔던 표현으로 하느님의 아들들( 직역: 신들의 아들들)
욥기나 창세기 6장은 굉장히 오래된 텍스트로서 구약성경이 유일신관으로 쓰여졌지만, 유일신관 이전에 있었던 다신적 신관에서 쓰인 텍스트 중 하나입니다.
그다음의 사탄이란 표현은?
민수 22,22
하느님께서는 발라암이 가는 것을 보고 진노하셨다. 그래서 주님의 천사가 그를 막으려고 뒤에 서 있었다. 그래서 주님의 천사가 『그를 막으려고』길에 서 있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사십 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요르단 동편까지 갑니다. 그곳을 가는 길목이 모압 땅인데, 모압의 발락이라는 임금이 이스라엘이 온다니까 사제인 발라암을 찾아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 발라암이 길을 떠나려고 하니까, 하느님의 천사가 그를 막아서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히브리 말로 텍스트로 직역하면,
"그래서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사탄이 되어』 길에 서 있었다." 여기서 사탄은 "적대자"라는 의미입니다.
1 열왕 5,18
그러나 이제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를 사방으로부터 평온하게 해 주시어, 적대자도 없고 불상사도 없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 이웃나라 임금에게 하는 이야기 부분으로 적대자도 없고 불상사도 없으니 나는 이제 성전을 짓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부분.
즈카 3,1-2 (환시)
그가 주님의 천사 앞에 서 있는 예수아 대사제를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오른쪽에는 사탄이 그를 고발하려고 서 있었다.
주님의 천사가 사탄에게 말하였다. "사탄아,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신다. 예루살렘을 선택하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신다. 이 사람은 불 속에서 꺼낸 나무토막이 아니냐?"
주님의 천사와 사탄, 대사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속에서 꺼낸 나무토막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대사제를 나무를 심듯이 예루살렘에 심으실 텐데, 그를 불속에서 꺼냈다? 그는 정화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무언가를 정화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불, 그리고 물.
군대들이 전쟁할 때 칼에 튀었던 피가 굳어졌다는 것은 부정해진 것이므로, 전쟁이 끝나고 나서 창이나 칼은 불로 정화하고,
옷이나 사람은 물로 정화했습니다. 따라서 첫 번째 정화는 불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나무토막이 불에 안 타고, 하느님께서 정화해서 꺼내셨다고...
즉 이 부분의 해석은,
"하느님께서는 그를 정화하셨는데, 네가 그를 고발하려고 하다니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라고 하느님의 천사가 고발자, 사탄을 꾸짖는 모습입니다.
사탄은 세 가지 의미로 적대자, 고발자, 유혹자가 있습니다.
사탄은 하느님에게 사람을 고발합니다.
사탄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이 부분에서 인간은 왜 고통을 겪는다? 사탄 때문에... 사탄이 우리를 유혹해서 멀어지게 하고, 우리를 하느님께 고발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한 가지 이해를 엿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도 그 출발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인간이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네 복음서에서는 모두 유혹받으셨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이 부분에서 유혹의 주체도 역시 사탄입니다.
그 존재에 대한 이해는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유혹받는 존재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좋지 않을까? 이런 식의 생각들로 점점 멀어지는 것.
구약 성경의 인간학이라고 볼 수 있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유혹받는 존재이다.
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가 끝나고 세 친구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세 친구(엘리파즈, 빌닷, 초바르)와의 대화가 대화 1, 대화 2, 대화 3 세 파트로 나뉠 정도로 복잡합니다.
3장 욥의 독백, 4장, 5장
두 번째 파트에서 13-14장인 욥의 항변이 있고
세 번째 파트에서 엘리파즈, 욥..
그리고 마지막 욥의 무고선언.....
한 사람이 이야기하고 대답하는 대화체라고 보기에는 이야기가 지루하고, 이야기가 진행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느낌일 것입니다.
1-2장은 재미있다가, 3장이 넘어서는 눈이 감기기 시작합니다.
특별하게 관심을 두고 보아야 할 부분은 3장 욥의 독백, 13-14장 욥의 항변, 27장 욥의 무고선언으로
욥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욥이 하고 싶은 말을 이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27장 욥의 무고선언 다음에 뜻밖의 내용인『28장 지혜 찬가』가 나옵니다.
지혜란? 얼마나 놀라운가? 지혜를 찬미하는 노래.
오늘날 우리는 지혜라고 이야기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옛날, 고대에서 지혜와 맞물려 다니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창조입니다.
이집트의 창조신은 지혜라는 도구로 창조하였고, 바빌론의 주 신인 마르둑이 지혜로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역시 하느님도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여러 가지 단어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소피아(sophia),라고 해서 필로소피(Philosophy)도 소피아에서 나왔고,
그노시스(gnosis)도, 말씀(Logos)도 지혜라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사가는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혜를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께서 사용하신 지혜가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다."(엔 아르케헤 호 로고스,)
하느님께서 맨 처음에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어, 그 지혜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지혜가 곧 하느님이셨어.
그 지혜가 바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 사건,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야.라는 지혜 찬가로 자신의 복음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 찬가가 욥기 28장에서도 나오는데, 그 지혜를 통해 창조된 이 세상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가?라는 내용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지혜의 찬가와 비슷하게 나오다가, 마지막 장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부분입니다.
욥기 28,28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며 악을 피함이 슬기다."
다음 시간에 코헬렛에 관한 강의를 해주실 텐데, 그 코헬렛에 관해서도 같은 말씀을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지혜 사상은 왜 그토록 지혜를 찾을까요?
모든 인간이 바라는 게 있는데, 그리스도인이건 그리스도인이 아니건, 행복을 바랍니다.
그리스 철학자들도 그렇고 지혜 사상가들은 우리가 왜?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였을까요?
우리가 지혜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코헬렛을 읽다 보면, 나는 온 세상을 다 여행하면서 지혜를 구했다. 그랬는데 행복해지지 않더라.
그래서 코헬렛 1,1 "헛되고 헛되다.....(하벨 하발림)"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한데 지혜 사상가는 그 코헬렛에 관해서, "너희 지혜를 쫒는 사람들, 지혜를 통해서 행복해질 줄 알고 지혜를 쫒았지? 하지만 너희는 그것을 통해서 행복해질 수 없어. 왜냐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있기 때문이야.
하느님이 어떤 선택을 하실지 어떤 결정을 하실지 그것은 우리가 짐작할 수 없어. 짐작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해."
따라서 하느님을 두려워함, 경외함이 모든 지혜의 근본이더라
그렇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을 지켜야 합니다.
구약성경의 사상가들이 하는 이야기는 "너희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해. 그래서 하느님의 율법을 지켜야 해."
그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우리는 의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곧 현자, 참 지혜로운 사람이야.
지혜란 무엇인가? 율법에 충실함이야.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다시 욥기로 돌아가서,
"보아라, 주님을 경외함이 곧 지혜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을 경외해야 하고, 욥기에 그 설명까지 나오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토라에 충실한 사람이 곧 지혜로운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그리스도의 관점과 세계관에서 바라본다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복음에 충실한 사람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노벨상을 받은 이들이 아니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묵상하면서 그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이곳까지 세 친구와 욥의 대화가 마무리됩니다.
욥은 그 세 친구들과의 대화 안에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자 욥이 때론 심판자 야훼를 청하기도 하고, 증인 야훼를 청하기도 합니다.
"아! 하느님은 내 무고함의 증인이셔." 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자 야훼를 요청하기도 하면서,
궁극적으로 욥이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 나와 함께 따져봅시다." 하고 하느님과 욥이 재판을 합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하지만 욥이 불리합니다. 욥이 고발을 했는데 심판자가 하느님입니다.
- 피해자: 욥
- 피의자: 하느님
- 재판관 : 하느님
이때 여기서 나오는 세 친구인 엘리파즈, 빌닷, 초바르는 각각 그 시대의 사상적 흐름을 대변하는 사람들입니다.
엘리파즈는 예언 신학을 대변하고, "인간의 고통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신적 벌이다"(상선벌악)
빌닷은 의인, 계약을 파기하는 행위는 벌을 받아야 한다.
초파르는 현자를 대변하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담론을 통해 앞에 있는 엘리파즈와 빌닷의 주장을 재확인합니다.
따라서 예언신학(신명기 신학: 상선벌악), 율법에 관한 신학적 입장, 세속적 지혜에 관한 가르침, 등이 세 친구에 의해서 주장되는데 욥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생각해 봐, 네가 뭔가 잘못한 게 있을걸? 그렇지 않고서 너에게 이런 일이 왜 일어나겠어?"
하지만 여기서는 욥과 친구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욥기를 묵상하다가 가끔 묵상이 이야기에 겉면에 머무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세 친구들의 헛된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는 하는 것이 아니라 욥의 상황, 지혜 사상의 상황 안에서
지혜 사상이 야훼 신앙 안에서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서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신학이,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의 가르침이 대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친구의 시간이 끝나고 갑자기,
엘리후( 그는 나의 하느님이다. 후는 그, 엘리는 나의 하느님) 등장!
일종의 신앙 고백이고, 그런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조금은 젊은 사람이면서 욥과 친구들이 대답을 하다가, 욥의 친구들이 대화를 멈추는 것을 보고 엘리후가 등장하면서 그 친구들에 대해서 화를 내고, 욥에 대해서도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 말을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옆에서 듣고 있었는데 듣자 듣자 하니까, (성경에 나오지는 않죠?? 그런데 그 톤으로^^...) 내가 왜 지금까지 듣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아! 당신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좀 많이 알고 있었을 것 같아서 내가 참고 있었는데 도저히 못 듣겠군요.
이제 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욥! 당신이 이제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고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소송의 장면이었고, 엘리후는 야훼 측의 변호사 같은 사람입니다.
야훼의 변호사로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담론을 이야기합니다.
엘리후의 첫째 담론
욥기 32,6-33,33
"자,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발견했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를 물리치셔야지."
이 의미는 세 친구가 욥과 대화 중에 대화를 멈춥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느님에게는 그것을 떠넘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할 말을 다했어. 이제 하느님께서 직접 하셔야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인 틀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후가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말하면서 욥에게 또 질문을 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그분과 싸우십니까?"
욥이 하느님과 소송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두 번째 담론으로 넘어갑니다.
엘리후의 둘째 담론(34장)에서 당시의 세속적인 지혜 사상이 야훼 신학에 던지는 질문 한 가지를 끄집어냅니다.
"하느님과 잘 지내봐야 이득이 없는 법"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면
'성당 열심히 다녀봐야 그게 무슨 뭐가 되겠어? 옆집 사는 사람 미사 한 번도 안 빠졌는데.... 그런데 아프대."
따라서 하느님께서 그런 것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
그런데 엘리후는 그것에 대해서 답변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되갚으시고 인간을 그 길에 따라 대하십니다. 하느님은 끝까지 셈하는 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신다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 담론으로 넘어가서 35장에서 당시에 지혜 사상에 있는 이스라엘의 교만한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하느님보다 의롭다." 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또한
"나를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어디 계신가? 밤에도 노래 부르게 하시는 분
우리를 들의 짐승보다 더 많이 깨우치시고, 하늘의 새보다 슬기롭게 해 주시는 분께서는 어디 계신가?"
하느님에 관한 냉소적인 이야기들입니다. 당시에 소위 지혜롭다는 사람들이 야훼 신앙을 부정하면서, 엘리후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진정 하느님께서 듣지 않으신다 함은, 전능하신 분께서 보지 않으신다 함은 거짓이랍니다.
당신을 보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지만, 당신의 송사는 이미 그분 앞에 있으니 기다리십시오."
앞서 말씀해 주셨듯이 엘리후가 하는 이 이야기는 욥이 한 이야기가 아니고 엘리후는 당시에 지혜 사상과 야훼 신앙의 관계 안에서 세속적인 지혜 사상이 야훼 신앙에 던지는 냉소들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담론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 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
그러니 순종하지 않으면 죽음의 수로를 건너게 되고 깨달음 없이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 부분은 하느님에 관한 두려움에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가 마태오 복음서에게 진복팔단을 이야기하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마태오 복음서에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행복 속에서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욥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악인에 대한 심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심판과 재판이 당신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요나서를 기억하시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나 예언자가 니느웨(니네베)로 가서 하느님 심판을 예언합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요나 예언자는 화를 냅니다.
"아니~~~~ 심판한다고 했으면 심판해야지! 용서해 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느님께 화를 냅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신약에서 나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다 쓰고 돌아온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가 기뻐해서 잔치를 연 모습을 보고 큰 아들은 화를 냈습니다.
어느 날 포도원의 주인이 밖으로 나가서 포도밭에서 일할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리고 낮에 또 나가 찾습니다. 일이 끝날 오후에 또 나가서 찾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품삯을 주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품삯을 줍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먼저 일한 사람들이 화를 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의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분들과 함께 대화하시다가 신부님께서 한번쯤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지금 정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저는 형제님 안에 가득한 분노를 봅니다. 형제님이 원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그 복수가 형제님을 행복하게 할까요?"
공정과 정의는 굉장히 중요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공정과 정의를 이야기했을 때 그 동전의 반대면에 항상 하느님의 자비로움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자꾸 기도할 때는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주님, 정의로우십시오."라고 하느님의 엄격함을 들이댑니다.
나에게 엄격해야 하고 타인에게 자비로워야 하는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에게는 자비롭고 타자에게는 엄격한 하느님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요?
요나의 모습, 돌아온 탕자에서 큰아들의 모습, 포도원 밭에서 아침부터 일한 뒤늦게 와서 일한 이들과 같은 품삯을 받도 화가 난 이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그러면서 엘리후는 다음과 같은 담론을 이야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은 당신 권능으로 숭고하신 분,
누가 그분 같은 스승이 될 수 있습니까?
누가 그분께 길(토라)을 지시하였으며
누가 "당신은 불의를 저질렀소." 하고 말하였습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만이 의로움이고 또 하느님만이 지혜로움입니다. 하느님보다 우리에게 토라를 가르쳐주시는 분이 어디 있고 그리고 그 하느님만큼 의로운 분이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
"욥이시여, 귀를 기울이십시오.
잠깐 멈추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살펴보십시오."
한강 성당 신자분들에게 신부님께서 드리고 싶으신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 안에 있는 세상의 많은 기쁨과 슬픔, 분노와 환희들이 있을 테지만 그런 것들을 잠깐 멈추시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시는 놀라운 일에 관해서 함께 기뻐하는 시간을 가지시는 것은 어떠하실까요?" 하고 엘리후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담론의 마무리는 이렇습니다.
"전능하신 분, 우리는 그분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이 뜻은? 하느님은 너무나 밝은 빛이어서 우리가 그분을 마주 볼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
"권능과 공정이 뛰어나신 분,
정의가 넘치시는 분, 그분께서는 억누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공정하고 정의로우신 분이지만, 그 공정과 정의의 잣대로 우리를 억압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또한 자유로운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경외합니다"
놀라워하고 경탄하고 그리고 두려워합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 즉 교만한 마음을 하느님을 즐기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엘리후는 자신의 담론을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야훼의 말씀과 욥의 답변(38장-40장)
여기서 하느님은 자신의 주권과 권능에 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창조주적 주권, 지혜 사상에서 지혜는 창조와 맞물려있기 때문에 여기서 하느님이 자신을 이야기하실 때 무엇보다도 창조주적 주권에 관하여 강조합니다. 그러자 욥이 대답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한번 두 번째 야훼의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세속 지혜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 세속적 지혜에 대한 하느님의 결정이 등장하고 그러자 욥이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합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분명하고 강력할까요?
반대로 예수님 부활에서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예수님이 토마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은?
"나를 보지 않고도, 듣는 것만으로도 나를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 부활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튜브에 나왔습니까?? 우리는 듣고 알았습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보다'와 '듣다' 그 구약에서는 분명, 일반적인 우리들의 상식 안에서도 보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한 인식입니다.
단지 부활에 관해서는 뒤바뀝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욥에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마지막 대목에서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 욥기 42,1-17에서 세 친구의 심판이 나옵니다. 야훼 하느님이 세 친구를 심판합니다.
너희 이제는 벌 받을 거야 하지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 제물을 욥에게 가지고 가서 속죄 제사를 바치면 용서해 줄게. 하고 세 친구가 혼이 납니다.
그리고 욥의 모든 것들, 상처들을 치유해 주시고 욥에 재산도 회복해 주십니다.
오늘날의 신학관점에서 욥기를 읽었을 때, 욥기의 문제점은 마지막에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첫 번째에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욥기의 문제점
사탄이 정말 영악했다면, 욥에게 금 아흔아홉 덩이를 주고, 그러면 욥은 그것에 한 덩이를 더 채워서 백덩이를 만들기 위해서 하느님을 떠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을 유혹하는 것은 고통뿐만 아니라 더 무서운 유혹은 중독시키는 것입니다. 부와 돈과 명예로써,
나중에 신약성경의 사탄은 영악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일 유혹할 때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약속합니다.
모든 권력과 힘에 대해서, 발전한 사탄의 모습을 봅니다.
욥이 받는 보상도
조금은 실망스럽습니다. 저것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하지만 당시의 히브리적 관점의 사고방식에서는 내세관이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히브리적 사고방식 안에서 욥기를 마무리할 수 있는 유일한 사고방식은 세속적인 보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욥기를 읽고 나서, 이런 식의 결론을 내서는 곤란합니다.
"아, 그러니까.... 그런 고통을 조금만 참으면 두배로 주신다는 거지????"
이런 식의 결론은 욥기를 올바로 읽는 것이 아닙니다.
욥기를 올바로 읽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욥의 세 친구는 왜 실패했을까? 그들은 나쁜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욥이 겪고 있는 고통에 자신의 신학적인 틀을 들이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지혜 사상이 던지는 그 문제에 관해서 기존의 신학으로 없앨 수 없었던 한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한계를 드러내면 그다음에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세 친구들은 그것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신학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 그리스도 사건에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겪고 있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인 틀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세 친구가 엘리후에 비난을 받고 야훼의 심판을 받는 이유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틀에 머무는 것, 그들이 갖고 있는 틀로서 하느님을 제단 하는 것,
반면에 욥은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 질문하고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하느님을 만납니다.
신부님이 사제 생활을 하시다 보니까 많은 분들이 하느님을 떠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행복해서 떠나고, 어떤 사람들은 불행해서 떠납니다. 온갖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떠날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인생 안 많은 사건들에서 자신들의 행복이건 불행이건 인생의 의미를 쫓고 하느님께 가까이 갑니다. 그것이 단지 고통에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여러 체험 안에서 지혜롭게 해석하면서 하느님께 다가갈 수도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욥의 훌륭한 점은,
자신이 행복했을 때 행복한 하루하루 가운데 하느님께 다가간 사람이었고, 자신이 불행했을 때 더욱 다가간 사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욥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이상적인 신앙인, 하느님 백성의 모습임을 욥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매일매일의 삶 안에서 많은 것을 체험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닮아나갈 수도 있고,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생각들, 사고의 체계들, 아니면 하느님에 관한 생각들로 하느님을 제단하고 그런 것으로 갇혀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매일매일 보여주시는 새로움에 자신을 열어가지 못할 때 세 친구들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반대로 우리가 서로 인생의 여정에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상처받더라도 계속해서 하느님에 관해서 묻고 하느님에 관해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런 신앙의 여정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하느님과 만나고 하느님과 함께 있는 축복을 느낄 수 있는 신앙에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욥기를 통해서 함께 묵상해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코헬렛 강의를 기다리며,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께 전구 드리며, 기도드립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
아멘!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못들어서 … 너무 아쉬웠어요. 게다가 욥기라니요 ㅠ
6월26일 저녁 7시에 한강성당에서 신부님의 구약강의가 있습니다. 아마도 코헬렛을 강의해 주실 것 같습니다.
@빗방울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