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95 96 97
《 조선왕조실록(95) 》숙종 3
- 서인의 복귀와 노론,소론 분열
경신환국의 연출자는 김석주이지만,
결국 떠난 남인의 자리를 채운 건
서인이었습니다.
서인은
곧바로 잃어버린 6년의 복구에 나서,
먼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복권시켰습니다.
임금도, 대비도 높이 받들고,
영상 이하 대신들도 모두 다 제자들이니,
송시열은
예전의 그 권위를 모두 되찾았다
할 만 했습니다.
노론과 소론을 이끌었던 윤증(좌)과 송시열(우)
송시열의 유배생활은
사형수의 하루하루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남인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목숨을 원했고,
결단이 빠른 왕이 언제 ‘아뢴대로 하시오’라고 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인 정권을 몰아낸 김석주는
구원자나 다름이 없었고
이런 이유로 송시열은 여러 방면에서
김석주와 뜻을 같이 했습니다.
최강 권력자의 꿈을 이룬 김석주는
남인의 복귀 가능성을 우려해
남인을 사실상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우고,
어영대장 김익훈을 파트너로 삼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김익훈은
남인들을 역모로 엮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무리수를 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때 외척의 발호와 공작정치에
크게 염증을 느낀 서인측 신진사류들은
증거도 없이 사건을 만든 김익훈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쳤습니다.
이러한 순간에,
서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등장한 송시열은
김익훈을 싸고돌며 그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송시열의 한마디로 사태가 잠잠해졌겠지만,
송시열이 김석주로 인해 변했다고 생각한
신진사류들이 이번에는 반발했고,
이때 사림에
송시열 다음으로 존경을 받던
박세채가 소를 올려 신진사류들을 옹호했습니다.
이에 신진사류들이 박세채를 떠받들었고, 박세채는 일약 신진사류들의
영수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소론이라 불렀고,
송시열을 따르는 이들을 노론이라 불렀습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가 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선조 때 동인, 서인으로 파당이 형성되었다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하고,
남인이 청남과 탁남으로 분파했으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한 것입니다.
한편 공작정치의 달인 김석주는
자신과 송시열에 반대한 박세채를 겨냥해
세찬 공격을 하던 중,
51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빠른 죽음이
그에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방자함이 그를 어떤 불행에 빠트렸을지 넉넉하게 예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담회로~~
[출처] 조선왕조 실록 95|작성자 DJ Song
《 조선왕조실록(96) 》숙종 4
- 숙종의 여인 장희빈
숙종 6년에
왕비 인경황후가 세상을 뜨고,
그 이듬해에 새로 왕비를 들이니
이 사람이 노론 핵심인사인 민유중의 딸
인현황후입니다.
그런데 인현황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었으니,
이사람이 뒤에 장희빈으로 불리게 된 여인
장씨입니다.
장희빈은
1659년 장경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널리 알려진대로 그 오빠이자 맏아들은
장희재입니다.
장희빈의 가계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숙부가 역관 장현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역관은 중인이었지만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매개로
권력도 어느정도 누릴 수 있었는데,
장현은 남인들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장희빈의 어릴적 환경은
비빈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하지 못했습니다
드라마 동이에서 장희빈, 숙종, 최숙빈(동이)
이러한 배경의 여인이 입궁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편안한 환경이 여유와 평화를 주며
자신을 둘러한 환경이 험난하다면,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는 그것을 이겨낼
의지와 강단이 꼭 필요한 사례가 많듯.
장차 나타나는 장희빈의 행동과 품성은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 하겠습니다.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우의정 조사석 처가의 종이었는데,
조사석과 사통(私通)한 사이였고,
조사석은
인조의 후궁 조귀인의 손자 동평군에게
정부(情婦)의 딸을 입궁시켜달라고 부탁했으며,
이 요청에 따라,
장희빈이 나인으로 입궁했는데,
그녀는 미모가 특출나게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희빈은
인경황후가 죽은 그해 21세의 나이에
처음 숙종의 성은을 입었고,
이때부터 이미 큰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장희빈의 꿈은
바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습니다.
당파적 색채가 강한 왕대비 명성왕후가 장희빈으로 인해
남인이 진출할 수도 있다고
보아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인 1681년
노론의 핵심가문 출신의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나이는 장희빈이 8세 위였습니다.
장희빈을 내쫓은
왕대비 명성왕후가 죽자,
장희빈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인현왕후가 명문가 출신의 현숙한 여인답게
숙종에게
“성상의 은혜를 입은 여인을
사가에 둘 수 없으니 불러들이소서”라는
청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숙종은 장희빈을 불렀습니다.
이 때 장희빈의 나이 25세였습니다.
담회로~~
[출처] 조선왕조 실록 96|작성자 DJ Song
《 조선왕조실록(97) 》숙종 5
- 장희빈(2)
인현왕후의 청으로
다시 궁궐로 돌아온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매우 컸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을 숙원(종4품)을 거쳐
소의(정2품)로 승급시켜 주었고,
장희빈역의 김혜수
장희빈은
이러한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왕실의 큰 어른 자의대비의 환심을 사는 한편,
오빠 장희재와 그의 첩 숙정을 통해
밀려나 있는 남인과 연대를 구축했습니다.
이에 집권 서인은 긴장했고,
부교리 이징명과 김만중이 나서 장희빈을 견제하는 소를 올렸지만,
숙종은
오히려 이들을 유배형에 처했습니다.
그만큼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희빈의 권세가 높아지자
현숙한 여인 인현왕후로서도 언제까지나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은근히 장희빈을 경계하는 말을 하기도 했고, 숙종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구는,
그녀를 불러다 종아리를 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희빈은
이를 악물고 종아리를 맞으며
반드시 중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688년 장희빈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왕자 윤(뒤의 경종)을 낳았습니다.
그녀의 나이 29세에 찾아온 거대한 행운
이었습니다.
나이 스물여덟에
처음으로 아들을 얻은 숙종의 기쁨은 컸고,
특히 그 아들이 총애해 마지않는
장희빈이 낳은 것이니,
그 기쁨은 말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숙종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장희빈의 모친이
옥교를 타고 대궐에 들어오자
사헌부 지평 이익수가, 당하관의 아내가
뚜껑이 있는 옥교를 타고 왔다는 이유로
그 종들을 잡아다 다스리게 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일을 알게 된 숙종은
전교에 따라 입궐한 왕자의 외조모에게
모욕을 주었다며 크게 분개해,
사헌부 법리들을 잡아다 다스리게 했는데,
이들을 얼마나 세게 때렸던지
둘 모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숙종 15년 1월,
대신들을 모두 불러들인 숙종은
마뜩치 않아 하는 대신들의 뜻을 누르고
아직 뒤집기도 하지 못하는 장희빈 소생
아들에게 원자의 명호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장희빈을 희빈(정1품)으로 책봉하였습니다.
숙종과 인현왕후는 아직 젊었고(28세와 21세),
따라서 정비인 인현왕후가
대군을 낳을 가능성은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국본(國本)을 확정한 것은,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또한 반대로 상당한 부작용이 우려되는 무리수
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무리한 결정은
거대한 정치적 사건으로 번졌습니다.
아니 어쩌면 뒤집기의 달인 숙종이
또다른 뒤집기를 위해 거대한 정치적 사건을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담회로 ~
[출처] 조선왕조 실록 97|작성자 DJ S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