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오후6시부터 수원문학인의 집에서 '나혜석의 전쟁'이라는 주제로 나혜석의 삶과 예술에 대한 방민호 서울대교수의 특강이 열렸다. 수원문인협회가 주최한 이 행사에서 먼저 권월자 시인이 오프닝 시낭송을 해주었고, 강사에 대한 약력 소개가 있었다. 문학평론가이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방민호 교수는 2007년 제18회 김달진 문학상 등 많은 수상을 하였고, 2000년 '비평과 도그마를 넘어'(창작과 비평)외 많은 저서를 출간했다.
그는 강의 서두에 수원 사람은 나혜석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처 모르는 것도 있을 것이라며, '저는 나이는 젊지만 나혜석과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하고 소개했다. 충남 예산이 고향이라는 것이다. 외조부께서 일제 때 덕산면서기로 지냈고, 나혜석으로부터 그림 3점을 면서기 월급보다 훨씬 더 많이 주고 샀다고 했다. 당시 수덕여관에 머물며 그림을 그려 팔아야 했던 나혜석은 돈도 명예도 다 추락하고, 그런 생활상이 상상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방 교수는 수원시로부터 나혜석에 대해 논문 하나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외조부와의 관계를 좀 더 사실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다며, 네이버 검색에서 '고의화'라는 자신의 외조부 이름을 쳤더니 옛 신문기사 중에 그 사연이 나왔다고 한다. 당시 그렇게 샀던 그림 3점을 유족들이 찾는다고 하여 되팔았다는 내용의 사연이었던 것이다. 그런 외조부의 손자라면 저도 대단한 인연이 있는 것 아니냐며 으스대는 바람에 강의는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나혜석과 김일엽, 여성 문학의 두 길
나혜석과 김일엽은 나이가 같다. 두 사람 중에 먼저 공부와 여성의 운명에 눈 뜬 것은 나혜석이다. 그녀는 1913년부터 1918년까지 우여곡절 많은 유학 생활을 했다. 같은 시기에 김일엽은 이화여전에 다녔고, 졸업하면서 40대의 이노익과 결혼했다. 나혜석은 1920년에 상처하고 딸 한명이 있는 김우영과 결혼했다.
나혜석과 김일엽 두 사람의 사상적 변모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은 기독교로부터 불교로의 개종이라 할 수 있다. 1933년경 김일엽은 수덕사에 출가했다. 같은 시기에 나혜석역시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김일엽이 입산하여 세속의 인연을 끊는 승려의 길을 나갔다면, 나혜석은 산사 아래 머물 때도 여관에 들었고, 승방에 들지 않았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의 강의가 시작되고,
1935년 2월에 나혜석은 수원 서호 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글에는 다시 파리로 가겠다고 했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1937년 말에는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있었다. 그리고 1938년에는 해인사 아래 홍도여관에 머물다 1939년에는 다시 수덕여관에 머물렀다. 연보에 따르면 1944년경에 나혜석은 수덕사를 떠나 아이들이 있는 서울에 자주 나타났다고 한다. 오빠 집에 숨어들었다가 들켜 쫓겨나기도 하고, 1947년경에는 안양에서 목격되기도 하고, 1948년 말에 유명을 달리했다.
나혜석의 사소설 '현숙'의 의미
나혜석의 세속주의는 1934년에서 1937년까지 사이에 절정을 이룬다. 이때 나혜석은 세상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제적 궁핍 속에서 하숙과 여관을 전전하며, 남자들의 유혹과 놀림감이 되면서도 자신을 부당한 불행에 빠뜨린 세상에 공개적으로 맞섰다. 먼저 나혜석은 전남편 김우영을 상대로 '이혼장'을 썼다. 또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 했다. 정조유린과 그로인한 파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었다. 좌절과 분노와 복수심이 뒤얽힌 제소였다. 나혜석 자신도 이 소송을 분풀이라고 표현했다.
'삼천리'(1935,2)에 '현숙'이란 글을 쓸 때까지 그녀가 독신자로서 금욕생활을 이어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때 "나는 금욕생활을 계속하자."는 다짐이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다짐은 이혼이 회복 불가능한 것이 되고,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자명해졌을 때 더 이상 순수하게 유지될 수 없는 것이 되어 갔다. 이런 나혜석의 '초상'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독신여성의 정조론'과 '현숙'그리고 '어머니와 딸'이 그것이다. 나혜석은 '독신자'의 장 같은 곳에서 정조를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토로하고 있다. 독신여성의 정조론의 주인공은 자신에게도 '로맨스'.'중년의 연애'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나혜석과 모윤숙, 영혼의 사랑이냐 영육의 사랑이냐
나혜석에게 가해진 처벌은 무서웠다. 사회적 배척과 함께 그림도 팔기 어려웠고, 취직도 할 수 없었다. 형제친척들도 경원시했다. 친우, 지인들도 냉대했을 뿐이다. 보고 싶다는 자녀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불가피한 독신자의 생활을 하며 나혜석은 정조의 의미를 도덕도 법률도 아니고 오직 취미일 뿐이라고 토해냈다. 또 연애관을 둘러싼 모윤숙과의 논쟁은 정조론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나혜석은 1937년12월 '삼천리'에 모윤숙의 '나의 연애관'을 논박하는 글을 발표한다. '영이냐 육이냐'가 그것이다. 그녀는 '형의 연애관은 어대까지 영을 편애하고 육을 멸시하는 거시오, 내 연애관은 어대까지 영육이 합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한다. 나혜석은 영육이 단단히 결부된 사랑, 연애를 주장하면서 현실의 제재조차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욕보이고 추방하려한 세상, 남성들을 향해 반격을 가하면서 영혼과 육체의 단단한 결합으로 사랑을 추구해 나갔다.
나혜석과 이광수, 그 바이런 적 악마주의
'이혼 고백장'에서 김우영으로부터 이혼 요구를 받은 나혜석은 당황한 나머지 이광수를 찾아간다. '나는 눈물이 낫스니 속으로 우섯다. 세상을 그러케 빗두로 얼켜맬거시 무어신가 한 번 남자답게 ㅅ걸 ㅅ걸 우서두면 만사 무사히 되난 것 아닌가 나는 씨가 요지부동할 거슬 알앗사외다. 옵바 이혼을 하자니 엇절가요?' 그러자 이때 이광수는 '그러면 내 중재해보지' 하였지만 타협될 희망이 업스니 단념하라, 그만치 요구하난 거슬 안드를 필요가 무엇 잇나, 씨는 소설가이니만치 인생 내면에 고통보다 사건 진행에 호기심을 가진 거시엇외다. 나는 여긔서도 만족을 엇지 못하고 도라왓나이다.'
이 장면에서 나혜석은 이광수를 '옵바'라 부르고 있다. 도꾜 유학시대로 가면 조선 유학생 사회는 아주 좁았고, 복잡한 남녀관계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장차 식민지 조선을 개혁해 나갈 이상을 짊어진 동지가 되어야 했다. 기독교적인 금욕 논리를 수용하고, 오누이와 같이 남녀로서의 사랑이 배제된 관계를 맺어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이광수는 물론 나혜석을 좋아했고, 사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영숙의 존재로 엇갈렸고, 두 사람은 오누이와 같이 성적관계가 배제된 남녀로 남았다.
'나혜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카인의 반항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삶, 예술의 유한성과 그것에 대척되는 불멸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고 결론을 냈다.
강의장은 숨을 죽인 듯 고요 했다.
이어서 질문시간이 주어졌고, 한 질문자는 문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말해달라고 했다. 이에 방 교수는 "김일엽이 수덕사에 있을 때 어머니가 김일엽을 만나러 수덕사에 자주 갔다. 그를 통해 소설을 많이 읽었으며, 김일엽과 나혜석, 이광수에 대한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많이 들었다. 어머니는 이광수의 '사랑'이라는 소설을 좋아했으며, 이광수의 소설로 '사랑'과, '유정'을, 그리고 정지용과 백석의 시집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또 다른 질문자는 나혜석에 대해 아직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더라며 그 점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대뜸, 뭐가 잘못이냐는 것이다. 삶의 행적 자체가 현대문화에 떠 받들만한 그런 분이 없다는 것이다. 염상섭 작가도 나혜석에 대해 쓴 그의 소설 '해바라기'에서 아까운 분이 떠났다고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문학은 정치나 역사의 시선으로서는 볼 수 없다. 특히 문학인은 좀 더 깊이 본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수원이 내세울만한 훌륭한 선각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며, 부정적 시각에 대해서는 너무 구애되면 잃는 것이 많다고 했다. 또 탐구해야할 부분이 많다며, 깊이 많이 기억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수원 인으로서 나혜석을 생각하고 바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며, 뜨거운 박수가 한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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