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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잠 27:7-10)
7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8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10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는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이 시간에 “복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일까요?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가 돌아다니기에 조금만 소개합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글입니다.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으나 가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시계는 살 수 있으나 시간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으나 지식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직위는 살 수 있으나 존경은 살 수 없다.”
그러니까 가장 귀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 시간 잠 지식 존경 건강도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도 그렇습니다. 가장 귀한 것이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살 수 있었다면 부자는 천국에 와 있고 거지 나사로는 지옥에 가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가장 부러워해야 할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1. 주님을 사모하는 심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7절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이 말씀은 수용자의 마음 자세에 따라 귀하게 느껴질 수도 반대로 천하게 느껴질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배부르면 진수성찬도 싫어하지만 배고프면 쓴 것도 달게 됩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행4:11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무 쓸모없다고 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갈망이 없었습니다. 영적인 문제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진짜 구세주를 갈망한다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중세기 위대한 교부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이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머 작가인 루코크가 현대판 사도행전에서 사모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이런 풍자적으로 바꾸어 말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린다고 광고를 했다. 그러나 적어도 120명은 모여야 할 이 예배에 참석한 자는 40명뿐이었다. 베드로는 직장에서 시간외 근무를 하느라, 요한은 골프 약속 때문에, 야고보는 시험공부 때문에 부득이 교회에 나올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불길 같은 성령도 이 다락방에 내려오는 것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 부어주심에 대한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고, 또 옛날 그 사도들과 성도들이 모여 있을지라도 진정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성령의 은혜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절대 가치여야 합니다. 하나님만 생각만 해도 좋아서 행복해지고 펄쩍펄쩍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전부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에게 있을 것임이요”(마5:3) 라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큰 선물에도 감동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난하면 작은 것에도 감동이 옵니다. 예수 한 분으로 온전히 감동될 만큼 더 심령이 가난해지시기 바랍니다.
다윗도 시42:1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했고, 시63:1에서도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생각해도 기쁨이 넘치는 그런 마음이 복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찾아오시고 그 마음에 은혜를 가득히 채워주실 것입니다(시편107:9).
2. 마음에 정한 출석교회가 있는 사람입니다.
8절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떠돌이새가 다른 둥지에 기웃거리다가는 사나운 공격을 받습니다. 어떤 둥지에서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보금자리를 떠나면 갈 곳이 없습니다.
고대 사회는 혈연 중심의 씨족사회였으므로 자기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아무 곳에도 의지할 수 없었고 그가 도착하는 지방마다 그를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철저히 소외시켰습니다. 아브라함도 이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SNS에 "자폭 테러 하겠다."는 글을 올린 인도네시아인 3명을 추방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계 어느 나라도 받아줄 수 없고 자국 인도네시아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래서 IS에게로 갔는데 그 중 한 사람은 러시아의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떠나서는 안 될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머니의 품과도 같고 보금자리와 같은 곳입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절대 신앙생활 할 수 없고 한다 해도 오래 가지 못하거나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출석교회를 정하지 못한 것처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혹은 교회출석해도 이리 가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저리가도 그렇다면 그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장로님들은 은퇴해도 상관이 없지만 은퇴 목사는 교회 출석이 난감합니다. 원로 목사가 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사들은 은퇴해도 어느 벽촌에 들어가서든지 계속 사역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은퇴란 없다는 생각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엘림 오아시스가 바로 교회입니다. 출15:27에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교회는 우리 영혼이 쉬는 곳입니다. 교회는 양을 먹이는 하나님의 목장입니다. 천국백성의 훈련소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을 양육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엡4:11-12에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했고, 고전12:28에도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를 존중하고 교회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부담 주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똑 같은 성도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무엇을 바라지 말고 교회를 위해서 내가 무얼 어떻게 섬길 것이 있는지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3.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9절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내가 잘못할 때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충성된 친구가 있다면 그보다 귀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친구도 희귀하거니와 충성된 친구가 그렇게 한다 해도 용납 못해줍니다.
몽고의 징키스칸은 항상 자신의 어깨에 앉아 있는 매를 친구로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사막에서 물을 먹으려고 하는데 매가 물을 엎질렀습니다. 목말라 죽겠는데 물을 마시려고 하기만 하면 매가 계속 엎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일국의 칸이며, 부하들도 보고 있는데 물을 먹으려 하면 매가 엎지르니 화가 나서 매를 칼로 쳐 죽였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물속을 보니 물속에 맹독사가 내장이 터져 죽어 있었습니다. 만약 물을 먹었더라면 즉사할 수도 있었을 건데 매는 그것을 알고 물을 엎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인 매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고 매의 금상을 만들고 한쪽 날개에 "분개하여 판단하면 반드시 패하리라" 다른 날개에는 "좀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벗은 벗이다" 라고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간섭하고 외쳐도 부담이 오지 않고 기쁘기만 한 외침이 있습니다. 여기 기름과 향 같은 친구입니다. 기름과 향 기분 좋게 하죠? 기름과 향 같은 그 친구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시면 그 어떤 말씀도 거부반응 없이 믿어지고 받아지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일2:27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했습니다. 이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충만해야 합니다.
전주에서 무슨 편지가 왔기에 열어보니 이단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단들 중에는 아주 양심이 화인을 맞은 사람도 있지만 장차 돌아올 사람들 마음에는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 세미한 음성이 묻혀버리지만 이 소리가 더 크게 들릴 때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올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30:20-21에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라. 늘 기도하고 말씀 보는 사람에게 이 소리는 더 크게 들려옵니다.
4. 환난 날에 예수님을 친구 삼는 사람입니다.
10절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는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형제란 피를 나눈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려울 때 귀한 도움이 됩니다. 잠언17:17에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한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형제보다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가 더 낫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형제여도 애정이 없다면 몇 번은 의무적으로 도울지 몰라도 곧 실증을 느끼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집에 불이 나서 불이야~ 할 때도, 강도가 와서 강도야~ 할 때도 가까운 이웃이 먼저 뛰어오지 멀리 있는 형제가 달려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는 무조건 잘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잘못해도 무조건 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웃도 한계가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도와줄 수 있을지라도 우리 환난에 함께 해주진 못합니다. 그러므로 환난의 날에 함께 할 친구를 찾아야 합니다. 그걸 “네 친구와 네 아버지의 친구”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희생까지도 가능한 친구이고, 아버지의 친구는 지혜를 주실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누구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의 친구라 하셨습니다. 환난의 날에 우리를 온전히 도우실 분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11:28-30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방법이 쉽다는 것입니다. “내 짐은 가벼움이라” 부담도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 복음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다 이루어놓으시고 믿음으로 누리라 하시니 이보다 더 쉽고 부담 없는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혜를 주시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만물 가운데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온갖 도움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자입니다. 이것은 은사일수도 있고 어떤 전문가일 수도 있고 섭리적인 도움의 만남일 수도 있습니다. 지혜가 여러분의 환난 날에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그래서 시121:7 말씀처럼 환난을 면제 받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가 복이십니다. 예수님이 복이십니다. 성령님이 복이십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복이요, 교회가 복이요, 믿음이 복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우리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복을 찾지 말고 하나님 잘 섬기는데서 복을 찾아 영혼도 복되고 육신도 복되고 만사가 복되고 모두가 복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