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34:1-15
선하신 하나님
15세기경에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처음으로 예수님의 초상을 그렸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는 유명한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어느 시골 청년을 모델로 삼았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초상의 시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점이 있습니다. 그 그림이 아무리 명화중의 명화라고 하더라도 거기에 그려진 예수님의 초상이 실제의 예수님의 얼굴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을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이런 저럼 모양으로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그분 성품의 실재 전부를 드러내어 보일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어느 정도 체험해서 그분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고 했을 때 어떤 점들을 들어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 1.악을 행치 않으십니다
본문 10절...<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않으신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악을 행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충고였습니다. 욥은 당시 까닭없는 고통과 재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악하게 여길 소지가 충분히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사이래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문제는 하나님이 과연 선하신 분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참으로 이 땅에 편만한 죄악과 고통과 죽음, 그리고 끊임없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천재 지변을 볼 때 과연 하나님의 신성이 선한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일의 쇼펜하우어 같은 염세주의 철학자는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라면 그가 악마도 만들지 않았겠느냐?>고 강변하였습니다.
참으로 이 땅에 악이 편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저 엘리후의 전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정코 악을 행치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이 단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 2.정의를 굽히지 않으십니다
본문 12절...<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정의를 버리시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욥은 당시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할 소지가 많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시라면 자기에게 까닭 없는 고통을 내리실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욥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만큼 사람들에게 의심받고 있는 속성도 없는 듯합니다.
예화 :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
그러나 하나님은 정의를 일삼는 하나님이시다.
##### 3.자기만 생각지 않으십니다
엘리후는 또 계속하여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만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천명하였습니다.
본문 14,15절...<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고 그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산 것이 진토로 돌아가고 말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자기만 생각하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가리켜 절대로 선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만큼 참된 선성과 반대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하나님께서 만약 이기적으로 행동하신다면 그런 하나님은 인간의 적이 되기 이전에 벌써 당신 자신에 대한 대적이 될 것이라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만 생각하시는 그런 이기적인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고 심지어 사랑하는 아들까지 화목제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풀기만 하시는 하나님의 선성을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만 위하는 이기주의적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기주의를 버리고 남을 위한 배타주의적인 삶을 살자.
욥 34:16-33
하나님은 아십니다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은?
##### 1.사람의 길을 아십니다
본문 21절에서 엘리후는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진정 이 말은 하나님은 누가 어디를 향하여 걷고 있는지 그 길을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편 139:3절에서도 <나의 길을 감찰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현재 걷고 있는 길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거의가 자기가 걷고 있는 길을 제대로 분간치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사람은 누구나 끝없는 밀립 속을 헤매고 있는 자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처절한 전쟁터에서 쫑기는 한 패잔병이 우군 쪽을 향하여도 망친다면서 도리어 적진 속으로 파고드는 일과도 같습니다. 자기가 지금 걷고 있으면서도 그 길이 분명히 어떤 것임을 모르고 있다는 것, 생각하면 이런 비애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라도 자기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참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길되신 주님을 따르자.
##### 2.사람의 행위를 아십니다
본문 25절...<그들의 행위를 아신다.>고 강력하게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심을 아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시편 139:2,3절에서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을 다 알고 계시는 것과 똑같이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차례도 당신의 눈길을 우리에게서 거두신 일이 없습니다.
이에 비하여 사람은 자기가 현재 행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도 않습니다.
--바사 왕국의 대신이었던 <하만>이 유대인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나무기둥을 높이 세웠던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의기 양양하게 그 기둥을 세웠지만 결국 자기가 거기에 달여 죽고 말았습니다.(에7:10)
프랑스 사람 <기로틴>은 후대에 '기로틴'이라고 붙였던 자기가 만든 사형 기구에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반드시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양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을 익히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자기가 행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자들은 자기 무덤을 파고 있으면서도 희희낙락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은 모든 행사를 마땅히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잠 16:3...<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9...<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 3.사람의 간청을 아십니다. 즉 우리의 구하는 것을 다 아십니다
본문 28절에서 엘리후는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하고 환난 받는 자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린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빠짐없이 알고 계십니다. 시편 기자도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고 시편 139:2,4절에서 고백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이처럼 작은 소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정말 듣고 계시는 것일까?' 하는 의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엄청난 소음에 비하면 내 기도는 있으나마나 한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음성보다도 우리 마음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겨우 입술만 움직이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셨고, 아벨은 외마디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 죽었지만 그의 핏소리의 호소 조차 들으셨습니다.
--세기적인 신학자 폴 틸리히는 로마서 8:26절인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를 풀이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 소리 하나도 천둥처럼 들으신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듣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간청이 어느 정도냐 하는 점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듣지 못하시는 음성은 어느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점도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길과 행위와 간청을 꿰뚫어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조금이라도 속이려 들어선 안되고 모든 일을 그분께 털어놓고 맡겨야 합니다.
간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