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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두운 정월 대보름
음력설날 교회는 어린이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교회는 약간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 주위가 별로 넓지 못한데다가 읍내의 아이들이 몰려들어 어디에도 발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교회주변의 빈터만 채운 것이 아니라 계단에까지 겹으로 줄을 잇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추운 것도 모르는 듯 닥은 입들은 쉴 새 없이 놀려댔다. 그런 아이들의 표정은 거의가 밝았는데, 그 얼굴 피부나 입성은 가난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떡을 받으러 온 것이었다. 김범우에게 쌀 다섯 가마니를 받은 서영민은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이지를 궁리하다가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이지숙에게 의논하게 되었다.
이지숙은 별 망설임 없이 떡을 해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나눠주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것이 염상진의 뜻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다섯 가마니의 쌀로 떡을 한댔자 읍내의 가난한 아이들을 얼마나 먹일 수 있겠는가를 서영민은 염려했다. 떡을 못 얻어먹는 아이들이 생기는 경우 그건 하지 않음만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영민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래도 안심이 안된다며 쌀 두가마니를 보태게 했다. 이지숙은 떡을 만드는 일부터 나눠주는 것까지를 떠맡았다. 이지숙은 백설기와 쑥떡 두 가지로 했고, 나무값이며 콩값이며 인건비 등속은 자신의 돈으로 충당했다. 그리고 야학의 학생들을 동원해 선전하게 했다. 와글거리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지숙의 마음은 더없이 흡족하면서도 한편으로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떡이 모자랄까봐서였다. 두 번 타는 것을 막기 위해 팔목에 찍을 도장을 준비한 것은 잘 한 일이라 싶었다. 열 살 미만인 아이들의 한 끼 밥,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백설기 한 쪽과 쑥떡 두 개씩을 나눠주기로 했다. 교회의 문이 열리고, 떡 배급이 시작되었다. 어린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질러대는 기쁨의 소리가 겨울 햇살을 뚫고 솟아올랐다. 야학 학생들이 두 패로 나뉘어 줄을 세워 떡을 나눠주었다. 그 옆에서 이지숙은 아이들의 손목에 잉크 도장을 누르며, 꼭꼭 씹어먹어라, 하는 말을 꼬박꼬박 하고 있었다. 교회 문 앞에서 멋적게 돌아서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누가 보나 열 살이 넘은 아이들이었다. 한나절이 겨워서야 아이들의 발길이 끊겼다. 다행이 떡은 약간 남아 있었다. "여러분은 다 열 살이 넘었으니까 자격미달이지만 특별히 봐주겠어요. 다 같이 나눠먹도록 해요. 고생들 했어요." 피로감과 홀가분함이 함께 어우러진 상쾌한 기분으로 이지숙은 야학 학생들을 향해 소리 높여 말했다.
그건 바람소리만이 아니었다. 뒤란의 돌담에서 울려 바람에 섞인 소리. 그건 돌이 맞갈리는소리가 분명했다. 누군가가 돌담을 밟지 않고서야 생길 수 없는 소리였다. 베틀에 올려진 명주올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그녀의 신경줄들은 격자창으로 뻗어가 있었다. 갈그락... 두 손바닥으로 가금을 누르고 누워 있던 그녀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소리는 분명 돌담을 밟는 인기척이었다. 두근거리던 그녀의 가슴은 이제 벌떡거리고 있었다. 그 심한 요동에 그녀는가슴을 꼬옥 누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숨이 가빠지도록 심한 가슴의 벌떡거림은 확연한 인기척 때문인지 너무 갑작스레 일어나 앉은 탓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분일지 몰라, 꿈에 뵈던걸, 그녀는 흐릭한 윤곽의 창에 눈길까지 박고 있었다. 특,특,특. 간격을 두고 창을 두들기는소리였다. 그렇제! 그녀는 속으로 소리치며 창문에 달라붙었다. "누, 누구시오." "소화, 나 정이요." 그녀의 가슴에서는 불꽃이 확 일었다. "기둘리시씨요." 저고리를 꿰고, 치마를 두르는 소화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하섭은 장독대 옆에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소화는 그만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우뚝 멈춰선 소화에게 다가선 정하섭은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소화, 미안하오." 정하섭의 나직한 음성이었다. 소화는 울컥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래도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따스하고 굵은 음성은 소화의 가슴속에서 메아리져 울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는 여러 개의 산들이 담겨 있었다. 그분이 준 소중한 생명을 피로 쏟아버린 안타까운 산, 너무 갑자기 어머니를 떠나보낸 한스러운 산, 낙안댁에게 냉대를 받았던 서러운 산, 견디기 어렵게 고문을 당했던 고통스러운 산, 감방에 갇힌 막막한 나날 속에서 키웠던 사무치게 그리운 산, 그 산들 사이에 그분의 음성은 메아리져 흐르고, 그 음성이 스쳐간 산들은 하나씩하나씩 흔적을 감추어가고 있었다. 나도 함께 끌어안고, 이대로 죽고 싶어라. 소화는 얼핏 이런 생각을 했고, 그 터무늬없는 자신의 욕심에 소스라치며 정하섭의 가슴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리럴 옮겨야 허는디요." "그럽시다." 정하섭은 팔을 풀었다. 소화는 어둠속 여기저기를 살피며 제각을 향해 빨리걸었다. 자정이 가까웠을 거라고 그녀는 깊이를 헤아렸다. 제아무리 감시가 철저하다 해도 이 깊은 밤에 여기를 지킬 눈은 없으리라 싶었다. 그러나 밤이라고 예전같이 마음놓을 수는 없는일이었다. 소화는 방문을 열었다. 어둠 가득한 속에서 냉기가 끼쳐왔다. 아이고 이일을 워쩌꼬, 그녀는 마음이 암담해졌다. 방으로 들어선 소화는 어둠 속을 더듬어 윗목의 이불부터 옮겼다.
"여그구만요, 여그요. 금세 군불을 땔 것잉께 이불 우에 앉아 기시씨요." "불 때지 마시오. 이불도 없이 바깥에서 자는 게 이골난 몸인데, 방안이겠다. 이불 요 있겠다, 이만하면 대궐이요." 정하섭은 어둠 속에서 태평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지가 옆에 있음서 그리는 못하구만요.
참, 진지는 워쩌셨는가요." 소화 쪽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불 켜지 마시오 밤이 깊어 불빛이 멀리 가니까." 빠른 정하섭의 말이었다. "문에 칠 이불은 따로 있구만이라."
소화의 말이었고, 아 그런 여자였지, 생각하며 정하섭은 고개를 젖혀 뒷머리를 벽에다 기댔다. 생김은 꽃같고, 마음은 어머니 같은 여자... 머리는 기특할 만큼 영리하고, 몸은 ..몸은.. "진지 워쩌셨는가요." "아, 나 밥 먹었소." 정하섭은 소화의 알몸의 환상에서 깨어나며 황급히 대답했다. 방안이 환해졌다. 방문에는 이불이 쳐져 있었다. 소화는 등잔에 불을 당겼다. 불빛을 받고 있는 그녀의 옆얼굴을 정하섭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전보다 야윈 얼굴이엇다. 율어에 들렀다가 아버지와 소화가 당한 고초에 대해 대충 들었던 것이다. 야위기는 했으나 소화는 여전히 예쁜 꽃이엇다. 아니, 전의 모습이 붉은 기운이 감도는 흰꽃이었다면 지금의 모습은 그 붉은 기가 빠져버린 그야말로 흰 꽃, 소화였다. 고초를 당하면서 더 예쁘게 피어나는 꽃... "쪼깐만 참으씨오." 소화는 정하섭 쪽으로 눈길도 못 돌린 체 일어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이 겨울에 어찌 맨발이오?" 정하섭이 놀라서 말했고, 소화는 제발을 내려다보고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치마로 발을 가렷다. 너무 경황없이 밖으로 나오느라고 버선 싣는 것을 잊어버렸음을 소화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가슴 깊은 곳까지 다 들켜버린 부끄러움으로 소화는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급한 김에 버선을 신는 것을 잊어버렸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자신의 지적에 그녀가 당황해서 발을 가린 것은 그때까지 맨발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표시였다. 이 차가운 방바닥을 딛고 있으면서도 발이 시려운 것을 느끼지 못하는 여자, 이 여자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인 것을 깨닫는 정하섭의 가슴에는 기쁨 아닌 괴로움이 먹먹한 통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버선을 가질러 갈 수도 없는 일이고, 냄새나고 더럽지만 이 양말을 신어요." 정하섭은 재빨리 양말을 벗어 소화 앞으로 밀었다. "아니구만요, 아니구만요." 소화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때 두 사람의 눈길이 엉겼다. 소화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난 이불속에 발 넣고 있으면 되잖소. 그걸 안 신을려면 불도 때지 마시오." 정하섭의 단호한 말에 소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양말을 집어들었다. "그 양말이 더럽긴 해도 버선보다는 뜨뜻할거요 미군 군인놈들 거니까." 방을 나가는 소화의 등에다 대고 정하섭은 말하며 빙그레 웃음을 짓고 있었다. "거기는 노출됐어." 염상진이 말했다. "포탄은 한 번 떨어진 자리에는 두 번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대꾸했다. "그래?" 염상진은 제법이라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있다가는, "포는 기계고 자네 상대는 사람이란 걸 구분은 하겠지?" 하며 웃었다. "물론입니다." 자신은 그 묘한 웃음의 의미를 해득하려고 신경을 모았다. "자네의 판단을 믿기로 하지. 그런데, 그 처녀무당한테 더 기대하는가?" 웃음의 의미가 포착되었다. "동일 임무는 물론 포깁니다. 그러나 다른 임무는 계속 가능합니다." "어떤 근거의 확신인가." "제 판단에 근거합니다." "당원의 판단이니 믿겠네. 단, 무리해서 하 동무네 식구들 생활터전까지 망치는 일이 없도록." 염상진은 역시 냉정한 판단력과 남다른 자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소화와 자신과의 관계를 심상치 않게 판단내리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그 말은 입에 올리지 않고 "당원"이라는 한마디로 정신을 환기시켰던 것이다. 그의 앞에 서면 자신의 몸이 투명한 유리로 변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에서 언제나 벗어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소화는 싸리나무를 아궁이 가득 밀어넣고는 부랴부랴 목욕탕으로 갔다. 그 아궁이에도 불을 지피고는 물을 퍼다 날랐다.
목욕통에 물을 채우고 나니 이마에 땀이 직득하게 내뱄다. 그녀는 양쪽 아궁이를 부산하게 왔다갔다 했다. 서너 달 동안 싸리나무는 바싹 말라 있어서 급한 마음이 시원하게 풀리도록 불땀이 좋았다. 소화는 아궁이 앞에 앉아 고무신을 벗고 양말을 내려다보았다. 투박스럽게 생긴 양말이었다. 그 생김처럼 정말 버선보다 따듯했다. 그 생각이 미치자 아까와 똑같은 부끄러움이 전신을 덮어왔다. 미친년, 버선 신는 것도 잊어묵어 뿐 것도 워디헌디, 워쩌자고 그때꺼정 맨발인 중도 몰랐는고. 근디, 워째 냉돌인디도 발이 안 시렀을꼬? 넋빼고 있다봉께 발이 시언 것도 몰랐겄제. 고것이 내 맘이 아니여, 모다모다 신령님 뜻이여. 소화는 불길이 물기에 젖어 흐릿거려지는 것을 느꼈다. 소매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냉돌에 맨발로 서도 그분 앞이라면 발이 시려운 것도 모르는 자기가 소화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그런 것은 결코 처음의 경험이 아니었다.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감방의 암울 속에서도 그분은 언제나 신령님과 나란히 서 있는 빛이었었다. 소화는 양말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았다..양말의 감촉이 새롭게 발가락들 마디마디에 자극되고, 그 짜릿거림은 수천의 불꽃이 되어 일순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건 바로 정하섭 그분이 자신의 몸에 심는 뜨거움이었다. 아니,그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인연의 씨를 다시 자신의 몸 속에 심기를 욕심하는 바로 자신의 뜨거움이었다. 소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신령님, 이년의 가슴에 가득 찬 욕심을 태워주십시요. 이년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욕심의 불을 꺼주십시오. 소화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시 아궁이 가득 싸리나무를 밀어넣고 일어섰다. 목욕물은 따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소화는 가만가만 방문을 열었다. 그분이 잠들어 잇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방에서는 냉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이불 위에 올라앉은 정하섭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다보고 있었다.
"목욕물 디워졌구만요." "아, 어느새 목욕물을.." 정하섭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밝음이 그대로 자신의 마음의 밝음이 되는 것을 소화는 느끼고 있었다. "고맙소. 미안해서 말을 못했었는데." 정하섭은 한 달 가까이 목욕을 못했음을 상기했다. 소화의 마음에서는 금방 밝음이 사그라지고 서운한 어둠이 차왔다. "고맙소"라는 말도 서운했고, "미안해서"라는 말도 서움했다.
그까짓 목욕물을 데우는 일일 뿐인데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그분이 야속했고, 행여 그런 마음의 간격을 가지고 있나 싶어 동한 서운함이었다. 욕심내덜 말어, 욕심내덜. 애시당초 현생의 집짓기를 바래지 않고 시작헌 일 아니여. 엉뚱하게도 자꾸만 방문에 쳐진 이불을 들치다 말고 돌아섰다. 그리고 소화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소화, 우리 함께 목욕합시다." 그는속삭였다. "워메!" 소화는 비명을 지르듯 하며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므로 그는 그녀가 가슴을 떠미는 곱절의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어머니 사십구제도 지나지 않았소." 그는 더 낮게 속삭였다. "그것이 아니고라, 그것이 아니고라..." 그녀는 품을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것이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다는 말이었다. 그는 그 부끄러워하는 꽃 소화를 보고 싶었고, 그 부끄러움을 찢어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새삼스럽게 부끄러워할 것 없소.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니잖소. 난 갈 길이 바쁘고, 따로따로 목욕할 시간이 없소." "그려도, 그려도..." 소화의 힘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때 그의 머리에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그는 빙긋 웃음지었다. "소화, 이게 다 신령님의 뜻이요."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녀의 눈이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묘한 빛으로 타고 있었고, 그는 눈이 매운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타고 있는 눈은 묻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이 아니라 연이어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 따라 그녀의 눈에서는 그 묘한 빛이 가라지며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끄덕거림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고개는 차츰차츰 숙어들어 마침내 그의 입술은 소화의 입술에 포개졌다. 그는 흰꽃이 내뿜는 흰빛 뜨거움을 가슴속 깊이깊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소화, 나 때문에 겪은 고생 내 다 알고 있소." 정하섭이 말했고, 소화는 엉겁결에 손을 들어 그의 입을 가리며 얼굴을 돌렸다. 만나자마자 미안하다고 했던 그 첫마디가 무엇을 뜻했던 것인지 알았고, 소화는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하섭은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소화의 손을 어루만졌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었다. 그 손은 생김새와는 달리 너무나큰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베풀기만 하고 당하기만 하면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손, 그건 소화의 마음이었다. 어머니 같은 여자... 정하섭은 어루만지던 소화의 손을 잡고 방문으로걸음을 옮겼다. 호롱불이 밝혀진 목욕탕에는 김이 자욱하게 서려 있었다. 창문이 없는데다가김이 서려 있어서 목욕탕 안은 훈훈했다."여기가 방보다 낫군." 정하섭은 눈에 익은 목욕탕을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옷을 훌렁훌렁 벗기 시작했다. 소화는 정하섭의 뒤에 등을 돌리고 굳은 듯이 서 있었다. 알몸이 된 정하섭이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스쳐갔다. "자아..." 정하섭이 소화의 어깨에다 손을 얹었다. 그때서야 소화의 손이 옷고름으로 올라갔다.
정하섭의 손으로 그녀의 저고리가 벗겨졌다. 치마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속적삼이 다시 정하섭의 손으로 벗겨졌다. "아니, 이게 뭐요!" 정하섭이 느닷없이 소리였다. 소화는 입술을 물며눈을 꼬옥 내리 감았다. 정하섭은 얼떨결에 소리쳐놓고 다음 순산 그것이 무언인지를 퍼뜩 깨달았다. 맨살로 드러난 소화의 등에 푸릇푸릇하기도 누릇누릇하기도 한 멍자국. 그건 고문을 당한 상처의 흔적이었다. "망할 자식들! 이럴 수가..." 정하섭은 뻗쳐오르는 분노에 휘감기며 이빨을 맞물었다. 분노의 열기만큼 그의 남성적 열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울음을 거친 숨결로 바꿔 토해냈다. 그는 그녀의 속곳을 끌어내렸다. 입술을 문 채 눈을질끈 감은 소화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단속곳을 끌어내렸다. 고문의 흔적은 소화의 전신에 흩어져 있었다. "소화..." 그는 소화의 두 다리를 감싸잡으며 얼굴을그녀의 허벅지에다 비벼댔다. 그까짓 살껍질이 터지고 멍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준 인연의 끈을 피로 끊어버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에 잡힌 멍이야 날이가면 시나브로 풀려가는 것이지만 마음에 잡힌 멍이야 세월이 갈수록 커져나가 뿌리가 한정없는 한이 됩니다. 임신을 했었다는 것도, 고문으로 낙태를 했다는 것도 입에 올릴 수 없음의 서러움에 사무치며 소화는 정하섭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소화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정하섭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소화..." 그가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도 그를 마주 끌어안았다. 제가 당한 일을 이리도 아파해주고 쓰라려해주는 것만으로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녀는 그의 알몸을 온힘을 다해 끌어안고 또 끌어안았다. 이대로 이 몸 바스러지리라 마음먹으며. 소화를 목욕통 안으로 끌어들인 정하섭은 그녀의 몸에 물을 끼얹어 주며 멍자국들을 핥기 시작했다.
그건 애무의 행위가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그녀의 몸은 남자의 욕정을 불러 일으키는 여자의 몸이 아니었다. 자신이 당해야 될 고통을 당한 순직한 희생물이었고, 자신은 교활하게도 예견된 위험을 피한 또 다른 가해자였다. 전신에 찍혀 있는 그 참담한 고문의 흔적 앞에서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너는 뻔뻔스럽고 간사스러운 혓바닥을 열 토막, 스무 토막을 내버려야 한다. 그 멍자국들은 어떠한 말도 용납하지도 허용하지도 않고 다만 죄의식만을 확인시키고 있었다. 부모가 자식의 종기에서 고름을 빨아내듯, 모든 짐승이 새끼의 상처자리를 핥듯이, 그는 그 순직한 인간의 몸에 찍은 자신의 죄를 건성으로 비는 마음으로 멍자국을 핥아나가고 있었다. 혁명전사는 인민해방에 복무해야 하고, 인민은 혁명투쟁에 복무해야 한다. 백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인민의 복무라는 것이 투쟁자가 미리 피한 위험의 희생물이 되는 것까지 말하는 것인가, 결코 그것은 아니다. 투쟁자의 복무의 마지막은 자아희생으로 완결되는 것이지만 인민의 복무는 선의의 협조로써 끝나는 것이다. 그것은 자각과 비자각의 차이이며, 능동과 수동의 차이인 것이다. 혁명을 자각한 자는 스스로에게 의무를 지운 것이며, 그 의무의 짐은 혁명을 성취했을 때 권리의 힘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인민은 자각의 의무를 스스로 지우지 않았으므로 혁명이 성취되어도 인민일 뿐이다. 인민은 혁명의 목적이며 바탕이되 수단일 수는 없다. 인민은 흐르는 물줄기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데로만 흐르고, 낮은 데를 만나면 스스로 그 높이를 높여 흐르고, 장애를 만나면 피해서 흐른다. 인민을 혁명의 수단으로 삼을 때 인민은 혁명적 존재가 아니라 생활적 존재다. 그러므로 인민의 복무는 생활을 침해받지 않는다는 보장 아래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인민의 수동성을 기회주의나 이기주의로 파악하는 혁명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혁명자가 아니다. 그래서 혁명은 외로움이 고통이라고 했다. 소화가 당한 고통은 인민의 복무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었다. 자신의 죄가 아니었으려면 소화가 자각된 혁명의 분자였어야 했다. 다시는 소화에게 이런 죄를 짓지 않으리라. 방으로 돌아와서 정하섭은 비로소 남자로 소생할 수가 있었다. 소화의 예사롭지 않은 뜨거움에 촉발되어 그의 남성은 거세게 불을 뿜어 올렸다. 소화의 알몸은 그대로 불덩어리였다. 그도 불덩어리가 되어 불덩어리 속으로 빨려들었다. 빨려들어갈수록 뜨거워지는 불 속,깊은 혼미함, 더 깊어지는 혼미함. 그녀는 훨훨 타오르는 불길 속을 춤추고 있었다. 불길을 마시며 마시며, 그녀는 그때처럼 소리치고 있었다. 신령님, 애를 배게 해주십시오. 땀이 범벅된 몸을 끌어안고 두 사람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등잔의 흐린 불빛이 그들의 알몸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설은 워디서 쇠셨는가요." 소화가 실오라기 같은 소리로 물었다. "산에서"
"산?" "지리산" "멀기도 혀라. 설떡은 잡숫고요?" "애들이나 먹는거지." 소화는 자신도 모르게 정하섭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그의 말이 끌어당겨 끌려간 것이다. 존대가 아닌 그의 말이 그렇게 정답고, 다정하고, 편안하고, 가깝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쭉 그리 말씸허시씨요." "무슨 소리요?" "그것이 아니고요, 말씸을 낮춰 허시랑께요." 소화는 그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반말을 했었소? 그거 미안허게 됐소." "그것이 아니랑께요. 지는 낮춘 말이 훨씬 좋구만요. 정답고..." 소화는 입을 다물었다. 정하섭은 그때서야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들꽃 냄새가 스쳐갔다. "그러지, 그럼." "고렇게요." 소화는 더 가슴으로 파고들며 바르르 떨었다. 그 떨림이 정하섭의 가슴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내가 이 여자를 너무 목마르게 만들고 있구나, 그는 마음이 어두웠졌다. "근디, 허시는 일언 지대로 잘 돼가는가요?" "소화,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안 시킬 테니까 우리가 하는 일에 관심쓰지 말어." "안되어라, 안되어라." 소화는 소리치듯 하며 그를 떠밀고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얼른 치마를 끌어다가 앞을 가렸는데, 그 얼굴이 금방 울 것 같았다. "왜 그래, 소화." 정하섭이도 일어나 앉으며 이불을 끌어다가 아래를 덮었다. "글먼 더시는 안 오시겄다는 말씸인디오." 소화의 목소리에 벌써 울음이 섞여 있었고, 붉은 입술과 그 언저리가 씰룩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야. 소화한테 죄짓는 짓 다시 안하겠다는 뜻이지, 안 온다는 말은 아냐."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제라. 시킬실 일 웂는디 지 겉은 년 보실라고 역부러 오실리 만무제라." 그것은 소화의 자학이면서, 자신의 심장을 정통으로 찔러오는 꼬챙이였다. 정하섭은 할 말이 없었다. "지가 감옥에 갇혀 있음시로, 허시는 일얼 되작되작 생각혀봤구만이라.
무식헌 소견이라 세세헌 것이야 알 방도가 웂고, 시상 워떤 사람이고 천대 천시 안허고 공평하게 사는 시상을 맹그는 것은 일 중에 질로 잘허는 일이란 생각이 들고, 그런 존 일이먼 지 겉은 연도 허고 잡다는 맘이 생기드만요." 소화의 그 엉뚱한 말에 정하섭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래, 고문을 당하고 갇히고 하면서도 정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다니, 무섭고 겁나지 않아?" "무섭고 겁나는 일이야 고비만 넴기면 되는 일이제라. 그라고, 그리 큰일 허는디 그만헌 고초야 따라댕기겠제라." 꼭 골수당원이 교육과정에서 하는 말을 한다 싶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이 혁명의식의 자각이 아니라 사랑이 매개가 된 감상의 산물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는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지 맘이 그렁께 지 겉은 것, 허시는 일에 끼주지는 안혀도 그전 맹키로 심바람을 시켜주시씨요. 더 영축웂이 헐 것잉께요." "그러지." "지 얼굴 보고 대답허시씨요." 소화는 또렷하게 말했다. 정하섭은 빙그레 웃으며 눈길을 들었다. 눈앞에 정색을 한 소화의 얼굴이 있었다. 지금까지 보인 태도는 소화답지 않은 면모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색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알았다. 그건 가장 소화다운 면모의 변형이었던 것이다. 맨발이 시려운 줄도 모르는 바로 그 열정의 변형이었다. "앞으로도 심바람시켜주시시씨요." "그러지." "신령님 앞에 약조허실 수 있으신게라?" "약조하지." "고맙구만이라."
소화가 정하섭의 가슴에 쓰러져왔다. 정하섭은 소화를 끌어안았다. 종이기를 불사하며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이리도 갈망하는 여자. 종 같은 아내를 얻은 남자가 가장 행복한 남자라적고 있는 불경이 아니더러도 그는 행복감 같은 것이 가슴에 넘치는 걸 느끼고 있었다. 정하섭은 새로운 들꽃 냄새에 휘말리며 욕정의 불꽃이 터져오름을 느꼈다. 소화를 요 위에 눕혔다.
금융조합장 유주상의 집에서는 거창한 명칭을 내건 회의가 소집되어 있었다. "벌교,보성지구좌익척결준비위원회"가 그것이었다. 이 길이도 길고 내용도 엄숙한 명칭을 작명한 것은 집주인인 유주상이었다. 행정단위가 보성군 벌교읍이 엄염한데도 그는 멋대로 행정단위까지 바꾸어 벌교를 군으로 승격시켜 놓고 있었다. 그가 척결하고자 하는 좌익의 조직도 벌교군당 아래 보성읍당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었다. 그 명칭 하나에 그의 성품이 여러모로 드러나 있었다. 벌교를 앞으로 끌어낸 것에서 약삭빠른 현실주의를, 길고도 거창함에서 허풍스런 권위주의를, 엄숙한 내용에서 음흉스런 저의주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돈을 만지는 사람답게 양지지향적 현실감각이 예민하게 발달되어 있는 한편으로 그에 못지않은 권력 욕구도 남모르게 감추고 있었다. 그 양면의 성취를 위해 그는 나름대로 주도면밀한 인생설계를 짜놓고 부단히 밀고 나아갔다. 그가 마흔이 안된 나이에 금융조합장 자리를 따내고, 봉변을 당해가면서까지 청년단장 자리를 차지한 것이 다 그 설계에 따른 것이었다. 그가 꿈꾸고 있는 인생의 목표는 금융인으로서의 성공이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성공이었다. 그의 권력지향은, 금융조합에 몸담고 있으며 돈이야 뜻한 대로 주무를 수 있지만 권력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데, 정치인이되면 권력과 돈을 한꺼번에 몰아쥘 수 있다는 파악에서 비롯되엇다. 정치가로서의 일차적입신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었고, 청년단장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 기초 포석이었다. 회의라는 명목을 붙여 오늘 사람을 모은 것도 그러한 계획과 무관할 수 없었다. 그의 방에는 걸게 차린 술상이 놓여 있었다. 그 술상에 둘러앉은 사람은 최익달, 윤삼걸, 최익도였다. 안재길은 몸이 아프다며 오지 않았고, 김범우의 집에는 아예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주상이 대상으로 삼은 것은 모두가 염상진한테 쌀가마니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사람들이었다. "오늘 이렇게 모신 것은 지난번 일로 놀라시고 속들 상하신걸 위로할 겸 저 좌익들을 뿌리뽑을 대책을 강구하자 그런 뜻이 있습니다. 위로라면 다소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설 명절이 끼어서 일부러 날짜를 늦춰잡은 겁니다. 그리고, 남원장으로 모실까도 생각했었습니다만 계집들이 새로 온 것도 아니고 그게 그 타령인데다가, 오늘 나눌 얘기가 중요한 얘기라서 신중을 기해 집으로 모신 겁니다. 편히들 드시면서 좋은 말씀들 나누십시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점잔을 빼가며 유주상은 주인으로서 한마디를 했다. "거 조합장이 벌교사람도 아님스로 자리럴먼참 맹글어뿐께 우리넌 당최 미안시럽고 면목이 웂어 얼굴을 들 수가 웂소. 하야간에 고마운 일이고, 우리가 진작에 요런 자리럴 맹글어서 빨갱이문제럴 다바고 들어야 혔을 것이요."
윤삼걸이가 말을 받았다. "말을 허자고 멍석 깔았응께 말을 안헐 수가 웂는 일인디, 그 심재몬가 사령관인가 허는 물건은 대체 멀 허고 앉었는 제겐이여. 염가눔이 정광산에 진을 치고앉었는 것은 우리덜 머리꼭대기에 불화로가 얹친 것이나 또 겉은디, 고것덜얼 팍팍 문질러뿌러 씨럴 몰리든지, 고것덜도 빈대가 아니라 사람잉께 그리 못허겄으면 조계산이고 지리산으로 몰아내얄 것이 아니냐 그말이여. 근디 그 제겐 허고 자빠졌는 쌍통머리는 머냔 말이여. 늘어진 붕알 맨지작이는 눔맨치로 태평치고 있다가 염가눔이 뻗대고 대들먼 당허고 당허고 험스로 포드시 응대허는 시늉만 허고 있다 이거시여. 그 자석 믿고 우리가 워처크름 두 발 편히뻗고 자겄소." 최익달이는 뜸도 들일 것 없이 본격적으로 치고 나왔다. 정 사장 일을 처리하는 것을 계기로 심재모에 대한 감정이 근본적으로 뒤틀렸던 그는 이번 일을 당하고는 아예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그 날밤 당한 일을 생각하면 그는 정말 불알이 오그라붙는 것을 느꼈다. 샅에 찬바람이 휘익 일어나며, 최익달의 노골적인 말은 유주상이가 바라고 있던 바였다. "예에, 바로 그 점이 문젭니다. 적을 무찌르자면 적극적으로 공격을 해야지, 적이 공격해오기를 기다리며 수비만 해서 언제 좌익의 뿌릴 뽑겠습니까." 유주상은 자기가 생각하고있는 쪽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우린 죽은 목숨이나 진배 없지요. 이리 살아 있는 것은 어찌 보면 염상진헌테 고마워해야 할 일이오. 그러니 이게 말이 됩니까. 쌀을 도로찾은 것도 그래요. 그게 어디 심재모 힘입니까. 염상진이가 힘이 드니까 한곳에 쟁겨놓아서 찾은 것이지, 만약 졸개들이 많아 그 쌀을 각단지게 가난헌 사람들 집에 풀었드라먼 무슨 수로 도로 찾았겠어요. 그러니까 심재모가 그날 밤 총질을 해댔지만 그건 말짱 헛방만 쏴질러댄 허깨비 장난이었다 그겁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심재모는 마땅히 추궁당해야 합니다." 세무서장 최익도의 말은 윤삼걸이나 최익달에 비해 아주 분석적이고 논리적이었다. "거 자네, 말 한분 조단조단 야물딱지게 잘혔네. 그려, 추궁혀야 혀고말고." 최익달이 자기 동생 자랑이라도하듯 윤삼걸과 유주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먼, 요 벌교바닥에서야 최씨, 윤씨 가문 빼먼 머 보잘것이 있소." 윤삼걸은 자기네 가문까지 높이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 기준이 농지 소유에 따른 것이 빤한데 윤삼걸은 김씨네나 안씨네는 깔아뭉개고 있었다.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놓칠 유주상이가 아니었다 "그러믄요, 금융조합도 두 성씨가문 덕에 운영되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런데, 우리의 적인 빨갱이를 척결함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책이 무엇이며, 심재모를 추궁하자면 그 방법이 무엇인지가 문제 아니겠습니까." 유주상은 유연하게 이야기를 제 길로 끌어들였다. "추궁이고 머고 다 션찮은디, 아조 싹 바까치워서 우리럴 잘 받듬시로 빨갱이도 쥐잡데끼 씨언씨언허게 때려잡을 괭이맹키로 싸나운 사람얼 불러딜일 방도를 세웁시다." 윤삼걸의 열받친 말이었다. 그 앞 뒤 없이 막가는 말에 당황한 건 유주상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일을 도모하자고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 아니었고, 현실적으로그런 방법이 실현될 가능성도 희박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동조가 있기 전에 빨리 방향을틀어야 했다. "아, 예, 윤회장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합니다. 그렇게 돼야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마음 편안하게 일할 수가 있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마음 편안하게 일을 해야 이 나라가 부강하게 잘되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허나, 빨갱이라는 것들이 우리 벌교에만 들끓는것이 아니고 저 제주도부터 장성, 진주까지 전라남도 전주,남원,고창,무주로 해서 전라북도반 이상, 하동,진주,함천으로 한 경상북도 반, 이런식으로 따져놓고 보면 거의 온 나라가 지금 빨갱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허니 어딘들 급하지 않은 데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군대라는 것은 일반 행정조직과는 달라서 어느 특정지역의 요구가 잘 통하지도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형편이 마땅치 않더라도 그 범위내에서 방법을 강구해야 되지 않을까합니다." 유식함을 내보여 상대방들 기도 죽일 겸 자기가 목적하는 대로 이야기를 몰아붙일겸 해서 유주상은 그의 생리대로 그야말로 거창하게 의견을 피력하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허어 참, 유 조합장은 금융합장으로 앉었기는 아깝소. 아는 것 많고, 말 잘허고, 똑똑허기가 우리 익도 동상허고 저울에 달면 그 눈금이 서로 숼락말락 헐, 도지사깜덜이여." 최익달은 단순한성품 그대로 순진한 감탄을 마지 않으며, "이약허든 짐에 유 조합장이 아조 그 방도꺼지 말해봇씨요." 하고는 술잔을 기울였다. "아닙니다, 최 서장님부터 말씀하시지요. 분명 좋은 의견이 있으실텐데요." 유주상은 영리하게도 작은 위험까지 살짝 피해 섰다. 찬물도 상이라면 좋더라고, 최익달의 말이 아무리 입 끝에 발린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와 최익도를 나란히 비교해서 도지사감이라고 한 것은 열 번 들어도 싫은 말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칭찬을 듣고도 최익도는 자긴만큼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이 차이가 서너 살이나 났던 것이다. 유주상은 최익도를 대접하는 척 발언의 기회를 넘겨주었다. "글쎄올시다. 지금까지 일만 가지고 심재모를 갈아친다는 건 어려운 게 사실일 것이고, 심재모를 불러다 앉혀놓고 지금까지 공격만 당해온 잘못을 따지고, 앞으로 공격을 당할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게끔 압력을 가하자는 겁니다." "아아, 역시 최 서장님이십니다. 제 생각도 바로 그것입니다." 유주상은 허풍스럽게 손바닥까지 맞때리며 동의를 표하고는, "그런데 말씀입니다, 우리가 할 말의 골자는,소극적으로 수비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라 이것인데, 심재모가, 그것도 작전이니 간섭하지마라, 이러면서 우리 공박을 피하려고 하기가 십상입니다. 심재모가 그렇게 나오면 우린 할 말이 없어지게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 최서장님 의견에다가, 심재모가 그따위로 나오지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짜야 할 것이다 하는 제 의견을 첨가합니다." 그는 정종잔을 꼴깍 비웠다. 목적한 바를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는 기분이 느긋해졌다. "맘 급헌디 고것이 먼저 싸게싸게 말혀봇씨요." 윤삼걸이 담배를 잉끄려 껐다. "아까 최 서장님이 압력을 가하자고 했는데, 압력을 가하자면 이쪽 힘이 크면 클수록 좋은 것 아닙니까?" 유주상은 다 따놓은 감 먹을 것 서두를 게 없다는 기분으로 좌중의 반응까지 확인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대답으로 당연한다는 동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쪽 힘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벌교 유지들만 모일 것이 아니라, 벌교가 중심이 되어 보성, 조성 유지들까지 단합시켜 하나의 단체를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니까 단체 명칭을 "벌교,조성지구좌익척결위원회"같은 것으로 내걸고 말입니다. 좌익을 없애자는 단체는 생길수록 나라에서도 환영하고 하니까말입니다." "아아, 고것 한분 쪼오쏘오!" 윤삼걸은 기분이 좋거나 화가 나면 하는 버릇대로 술상을 치며 소리쳤다. "어허, 과시 유 조합장은 달브당께로." 최익달은 양쪽 입꼬리가 처져내리며 끄덕였다. "단체라면 이적 구성이 문제겄지요?" 최익도는 한 발 건너뛰고 있었다. 너에게 주걱을 빼앗길 수가 없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표시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최익도는 이미 유주상의 적수일 수가 없었다. "그거야 물론입니다. 덕망 있고 능력 있는 유지들이 자리를 맡아 명실상부한 최고의 단체를 만들어야겠지요. 그러니까, 모두의 찬동에 의하여 이 자리를 "벌교,조성지구좌익척결준비위원회"로 하고, 벌교,보성,조성을 총괄하는 본부와 그 아래 각 지역단위위원회를 두는 겁니다. 그리고 세 분 중에서 본부위원회 위원장 직책과 벌교위원회 위원장 직책을 맡으시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유주상의 입에서 감투가 들먹여지자 벌써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한 세 사람은 그의 말이 끝나게 되자 더 긴장의 빛을 드러냈다.
특히 최익도는 긴장을 한 것만이 아니라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정작 유주상 본인이 차지할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근디, 우리야 의논혀서 그리 헌다 허고, 유 조합장 자리넌 워치케 되얐어?" 최익달이가 최익도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이렇게 물었다. "저야 벌교가 아직은 타향이고 나이도 제일 연하고 하니까 궃은 일이나 심부름할 자리나 하나 정해주시면 맡기로하죠, 뭐. 그런데 말입니다, 아까 본부에 위원장이라고만 했는데, 거기에 부위원장이 빠졌습니다. 지역위원회에는 필요없을지 몰라도 본부에 부위원장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유주상은 세 사람을 위해 세 개의 감투를 만들어냈다. "이거 뭐 돈 생기는 것도 아닌데 위에서부터 연장자 순으로 정하는게 어떻겠습니까?" 최익도가 던진 말이었다. "어엉, 고것 쫗네, 쪼와. 그리허세." 윤삼걸이 쫓기듯 다급하게 말하며 히멀건하게 웃고 있었다. 최익도의 뜻은 제 형을 위원장에 앉히려는 것이었고, 그 말은 바로 자기를 향해 한 것임을 윤삼걸이 모를 리 없었다. 친형제는 아니라도 형제인 데다가, 세무서장의 말이었던 것이다. "그리하먼, 유 조합장 자리넌?"
최익달이 술기운만이 아닌 불콰해진 얼굴로 유주상에게 물었다. "저야 뭐, 아까 말씀드린 대로궃은 일 하는 총무자리나 맡기로 하지요." "그렇제, 그렇제, 그 자리가 있구만. 인자 빨갱이 뿌랑구 뽑게 되얐다. 자아, 우리 항꾼에 술 한잔썩 쭈욱허니 합시다." 최익달의 말에 따라 모두는 술잔을 들었다. 모든 것은 유주상의 뜻대로 끝이 났다. 그가 내세운 좌익 척결은 첫 번째가아니라 두 번째 목적이었다. 그가 필요로 한 것릉 벌교,보성지구 유지들의 자연스런 규합이었다. 그 규합을 위해 단체가 필요했고, 그 조직을 통해 유지들과 자연스런 접촉을 꾀하려는 것이었다. 벌교,조성지구는 바로 국회의원 선거구였던 것이다. 그는 두번째 목적도 물론 누구 못지않게 중대하게 생각하는 터였다. 그 두 가지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자리가 총무였다. 모든 조직의 총무라는 자리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능력에 따라 실권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실권을 손에 쥐게 되면 유지들과의 접촉이 원활하게 되고, 총무로서 뒤로 물러나 앉아 있으면 염상진의 표적이 되는 것도 피할 수 있는 일이있다.
"열흘이 넘었는디도 워째 염가눔이 잠잠허시?" 최익달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닭장에 장닭이 홀레붙는 것이 일이데끼 그눔 허는 일이 죽으나 사나 총질허는 것인디, 워디가 워쩌크름 총질얼 헐끄나 허고 종그는 참일 것이요." 윤삼걸이가 정떨어진다는 듯 짭짭 입맛을 다셨다. "그자식 그거, 그 풍신에 그 머리로 공산당만 안했으면 좀 좋아. 지눔 좋고, 우리 좋고, 참 골칫거리요." 최익도가 혼잣말처럼 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김범우란 사람, 아니 김씨집안이 좀문제 아닙니까? 쌀을 안 찾아가 다른 분들 입장을 난처하게 만든 것도 뭐한데, 그 쌀로 결국 떡을 만들어 배급하는 바람에 더 난처하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그 행위가 염상진의 뜻에 동조한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 그걸 내가 법으로 얽어볼려고 아무리 머리를 짜봐도 법에는 안 걸리는 일이거든요. 거 참 쾌씸해서." 유주상의 말이었다. "그눔의 집구석이 옛적부텀 삐까닥혔소. 김범우란 눔도 한때 빨갱이 사상을 가졌고, 지끔도 허는 행투로 보먼 뿔근 물이 붉으딕디그리헌디, 법이란 것이 틀려묵었소. 빨갱이럴 잡자 혔으먼 고런 눔덜부텀 타작마당 검불 쓸데끼 싹싹 잡어다가 처박어야 한다. 그말이요. 그래야지 아랫것들도 갑묵고 꼼지락을 못헐 것인디, 핫바지맹키로 그냥 많이 몰려든 것 아니겄소. 김범우란 놈도 실은 염가눔하고 내통허는 빨갱인지도 모를 일이요. 우리 성님이 사람 보는 디는 귀신인디, 무담씨 고눔을 잡아가두게는 안혔을 거인디 말여..." 최익달이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가 이 나라 빨갱이를 다 어쩔수는 없는 노릇이고, 우리는 우리 사는 데만 단속하면 되니까, 오늘 만든 단체로 심재모를 밀어붙여 염상진을 죽이는 수밖에 없어요. 그눔을 죽여 소화다리에 널어버리면 우린 두 다리 뻗고 편케 잘 수 있어요." 최익도는 결론내리듯 말했다. "맞는 말이시."
"오늘 참 잘 됬네그랴." "한잔씩 쭈욱 드십시다."
한반도의 겨울기온은 삼한사온이라고 하였다. 남도지방에서는 그 자연의 변화가 신기할 정도로 잘 지켜져나갓다. 마치도 무슨 법칙이나처럼, 사흘이 추우면 나흘이 따스하고, 그 신비로운 번갈이로 겨울은 깊어갔고, 그 번갈이를 따라 겨울은 한 꺼풀씩 엷어져갔다. 그 이음목이 음력설이었다. 절기의 변화는 하늘에서 오되 땅이 먼저 깨닫고, 살아 있는 것들 중에서는 짓미에 목숨을 대고 나무들이 제일 먼저 깨닫음을 다시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력설을 고비로 절기가 달라졌음을 서둘러 알리는 것은 동백이었다. 음력설을 엄기면서 동백나무들은 서로가 다툼이라도 하듯 이 가지 저 가지에 선연한 핏빛의 꽃들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초록빛 잎사귀들에 떠받들려 매운 추위 속에서 피어나는 핏빛으로 붉은 꽃. 동백잎들은 제각기 사이사이에서 피어나는 꽃들은 초록빛 속에서 선홍의 모습을 더욱 붉게 치장했다. 동백나무는 무리를 지어 사는 까닭에 가지마다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핏빛의 꽃무덤을 이루어놓았다. 앞서 핀 꽃은 쉬 지지 않고 아랫가지의 봉오리가 벙글기를 기다리므로 선홍빛 꽃숲은 오래도록 찬바람에 시달리는 처연한 외로움이었다. 누구나가 동백꽃을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느낌은 사람도 저어하는 추위 속에 피는 까닭이리라. 아침 안개에 묻힌 동백의 핏빛 꽃들은 안타까운 서러움이었고, 흩날리는 눈발 속의 동백의 핏빛 꽃들은 사무치는 한이었다. 동백은 남도지방의 꽃이었다. 동백꽃은 질 때도 그 빛깔도 모양새도 변하지 않은 채 꽃잎 하나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운데 꽃술만 남겨놓고 본래의 모양 그대로 뚝뚝 떨어져내리는 것이다. 마치도 핏빛의 눈물을 떨구는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동백꽃을 한 많은 처녀의 넋의 희생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또는, 한 많은 청상의 환생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동백이 그 꽃을 피워올리는 것은 정월 대보름 임시부터였다. 읍내의 마을 여기저기에 동백꽃이 무더기무더기 피어 있었고, 성급한 아이들은 보름을 이삼 일 남겨둔 대낮부터 불붙는 깡통을 빙글빙글 돌려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보름을 이틀 남겨놓고 계엄사령관 이름으로 불놀이 일체를 금한다는 조처가 각 마을을 통해집집마다 전해졌다. 어두워진 다음에 아이들이 불깡통을 돌려서도 안되고, 만약 그것을 어기면그 아이의 부모를 구속한다는 것이었다. 그 조처는 물론 보름놀이의 술렁거림을 틈타 염상진네가 저지를지 모를 어떤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강력한 조처가 내려진 것이나, 누구도 건의 한마디 못하고 그 조처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루 전에 일어난 큰 사건 때문이었다. 장흥경찰서가 습격을 당해 경찰이 반이나 죽었는데, 그 주력병력이 염상진네였다. 도당의 지시를 받은 염상진은 오판돌과 함께 백명을 이끌고 지원공격을 나갔던 것이다. 설이 차분하게 새해를 맞는 명절이라면, 보름은 기운차게 새해를 시작하는 명절이었다. 보름을 기점으로 농사절기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정월 대보름이 달의 잔치이면서 또한 불의 잔치인 것은 농사의 시작을 의미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어른에 이르는 불놀이는 재미만으로 하는 명절맞이 놀이가 아니라 농사의 해충을 방제하는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풍년을 기원하는 불놀이가 곁들어지는 것이다. 해마다 벌교 사람들은 오곡밥을 먹은 다음 마을마다 자기네 뒷산으로올라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올리며 달맞이를 했다. 달이 둥실 솟아오르면 그 불길을 기운발이 센 총각들의 오줌으로 껐고, 사람들은 다투어 타다 꺼진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집어들고 산을내려갔다. 그 나뭇가지들은 처마밑에 걸리거나 꽂혀 일년 액운을 막아내는 신주 노릇을 했다.
눈에서 별이 오락가락하도록 아랫배에 힘을 넣어 모닥불을 끈 총각들은 그대로 산에 남아 돌싸움할 준비를 했다. 이웃마을 총각들과 돌팔매질을 해가며 서로의 산을 빼앗으려고 다투는놀이였다. 총각들이 떼지어 와와 소리지르며 돌팔매질을 하는 것은 꽤나 위험스런 일이기도했다. 그러나, 더러 머리가 터지거나 이마가 깨져 된장을 붙이는 일은 있어도 돌에 맞아 죽은 총각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 힘겨룸은 어느 마을이 농사를 잘 짓느냐 하는 겨룸이었고, 그 해에 장가를 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 겨룸이었다. 총각들이 돌싸움을 벌이는 동안 처녀들은 지신밟기와 달맞이를 하는 것이다. 돌싸움에 져 산을 빼앗긴 총각들은 마을에 흉작이 들게 했다고 어른들의 야단을 맞았을 뿐만 아니라 기운 없는 남자들로 취급되어 처녀들의 외면을 당했다.
처녀들은 지신밟기로 땅의 음기와 달맞이로 하늘의 음기를 흠씬 받아, 임신을 했다 하면 모두모두 아들을 낳을 몸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년에는 그 푸짐한 보름놀이들을 하나도 즐길수 없게 되고 말았다. 아이들은 제나름으로 정성을 다해 구멍을 뚫은 깡통을 빼앗기고 방에갇혔고, 총각들은 투덜거리며 사랑방을 차지를 했고, 처녀들만 몇몇씩 모여 앉아 말없는 속에 달을 바라다보았다. 정월 대보름의 밤은 적막 속에 깊어가고, 둥글고둥근 달은 외로운 걸음을 서산으로 옮겨놓고 있었다.
첫댓글 글 다 읽고 차 한잔까지 마시라는 배려...고마버..좋은 친구여~
꿈보다 해몽이 더 좋네 그려 ~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