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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陽互根(1) |
≪周易≫의 十二辟卦에 함의된 의미를 음미하면서‚ 음양의 끊임없는 상호교대가 자연의 변화에서 근거가 되고 있음을 미루어 인간의 수양도 動과 靜‚ 體와 用‚ 存養과 省察의 두 측면이 상보적으로 일관되어야 함을 역설한 賦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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剝復 (2) |
剝과 復의 두 卦를 통해 자연과 인간사회에서 陰과 陽‚ 治와 亂의 두 상반된 측면이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음을 관찰하면서‚ 동시에 時運의 관건은 통치자에게 있음을 말한 賦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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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四月旣望陪退溪先生泛月濯纓潭(1561‚ 二首)‚ 敬次退溪先生韻(幷序‚ 家禮‚ 小學‚ 大學‚ 附原韻)‚ 詠懷‚ 淸凉蓮臺寺次退溪先生韻以示諸丈(1564‚ 附原韻)‚ 迂溪精舍(1570)‚ 觀省齋(幷序)‚ 觀書軒‚ 驗爲寮‚ 活潑臺‚ 君子塘‚ 迂溪十景(蘆洞朝雲‚ 雲谷暮雨‚ 松嶺烟籠‚ 花嶽霞絢‚ 南陽春耕‚ 西澗秋詠‚ 蘭峯吐月‚ 芝山落照‚ 源塘活水‚ 末川川流)‚ 鶴巖‚ 釣磯‚ 庭梅‚ 溪柳‚ 詠頤洞‚ 尋春(附 李滉의 次韻)‚ 與金彦遇-富弼金愼仲-富儀金士純-誠一讀延平書 ‚ 與白文世-見龍朴士誠-允諴棲淸凉山(1567)‚ 坐普賢庵‚ 次白文世韻‚ 次李逢原-安道韻‚ 謝白文世來訪‚ 蓮臺月夜偶吟‚ 遊祝融峯(二首)‚ 山城‚ 秋夜次退溪先生韻‚ 送金鶴峯士純赴湖南(二首)‚ 與金景仁士元棲月瀾感興五絶(雨中見桃‚ 觀書‚ 思先生‚ 取友‚ 爲學)‚ 讀啓蒙(二首)‚ 次具汝膺-贊祿龍山四律‚ 輓退溪先生(1571)‚ 見金景仁作(二首)‚ 次呈雪月主人金敦敍-富倫(1573)‚ 贈朴居中欐‚ 與朴居中會巴寺‚ 次南義仲-致利韻(二首)‚ 呈南義仲(二首)(附次韻)‚ 次南義仲用金道盛-隆韻寄示(二首)(附原韻)‚ 追次退溪先生登紫霞峯所寄韻(附原韻)‚ 次金後凋彦遇惠韻又得三律兼呈‚ 易東夜吟(二首)‚ 陶山述懷‚ 陶山懷古(二首)‚ 遊域山精舍敬次先師韻呈主人權章仲-好文‚ 權定甫-宇以書論學旣報而又述其未盡之義得八絶又得二絶幷呈(1578)‚ 李君美-窩去甲子冬移居遠巖先師與門下詩以餞之弘以事未及預焉戊寅(1578)‚ 七月追次(二首)‚ 次金希仲過陶山見盆梅有感(1579)‚ 詠菊‚ 秋日齋居‚ 次呈金鶴峯尹採蓮權伊溪三同人(六首)‚ 次權松巢十五絶(松巢‚ 望淸臺‚ 參同契‚ 理學通錄‚ 晦菴詩集‚ 壽親養老書‚ 柳蘇詩集‚ 藥銚‚ 藥罏‚ 戴雲松‚ 菊墩‚ 秋聲樹‚ 巖下逕‚ 石上松‚ 邀月臺)‚ 次柳德源-淇鳴蟬韻(三首)‚ 讀啓蒙有感‚ 與柳西厓而見-成龍同舟漢江次西厓韻(二首)(附原韻)‚ 在洛寄權定甫‚ 絶句嘲李棐彦-國弼‚ 絶句四首‚ 贈別(三首)‚ 次金道盛韻(意思一般‚ 人欲難盡)‚ 又次金道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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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月城(1580)‚ 佛國寺‚ 小蓬萊‚ 次晦齋先生小蓬萊韻‚ 利見臺‚ 烏川億鄭文忠公‚ 甘浦喜日晴根次先師明字韻‚ 與姜丈浩源同遊過茸長野‚ 合四地名與姜丈集句‚ 入磻高洞(二首)‚ 次姜松巖韻(三首)‚ 通道寺‚ 長川‚ 彦陽官閣‚ 八谷茅亭謹次從叔梅巖公-叔樑韻(二首)‚ 次呈柳西厓‚ 次任卓爾-屹韻‚ 自道‚ 言學‚ 次寄李希淸‚ 送長兒蒔從李希淸學(二首)‚ 獨坐寒齋(二首)‚ 喜晴‚ 客懷‚ 次金止叔-圻韻‚ 贈許美叔篈(二首)(1583)‚ 與趙月川遊道峯書院歸路踏靑於東郭門外以近體一篇記其事次得四首(1586)‚ 敬陵齋室盆菊正開感而問之‚ 菊花答‚ 次永春漁子川板上韻 (1593)‚ 魚樂臺‚ 次西厓而見相公淸風凝淸閣韻‚ 呈陳謝使臨淵裵令公-三益(二首)‚ 次盧蘇齋-守愼道心體人心用韻‚ 次孫君立廬江韻‚ 溪上感懷贈李逢原(附次韻)‚ 訪陶山梅有感‚ 讀易見天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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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王世子書 (10) |
1592. 왜란 중에 자신의 고향에서 왕세자에게 올린 疏. 왜구를 격퇴시키기 위한 대비책으로써 鐵打와 稜杖 등의 농기구를 무기로 이용할 것‚ 이들 무기를 이용한 陳法을 새로 세울 것‚ 산간 마을의 수렵군들을 전사로 이용할 것‚ 당시 조정에서 주저하는 평양성 탈환공격을 지체없이 추진할 것‚ 적선이 해안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상륙지점의 수중에 장애물을 설치할 것 등을 건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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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行在疏-幷圖 (17) |
왜란 중에 고향인 禮安에서 宣祖에게 올린 소. 왜구를 격퇴시키고 국정을 회복하기 위한 대책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疏로써‚ 鐵打와 활(弓矢)을 이용한 새로운 진법을 사용할 것‚ 상벌을 엄격하게 적용할 것‚ 관제를 정비할 것‚ 불교사원을 철폐할 것‚ 왜군에 투항한 강원도의 관리들을 징계할 것‚ 賊船이 상륙하는 해안의 수중에 장애물을 설치할 것‚ 거북선을 적극 이용할 것‚ 金公亮·李慶全(1567-1644)·洪汝淳(1547-1609) 등 부정부패한 관리들을 징계할 것 등을 건의하고‚ 아울러 각 도에서 의병들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도 기술하고 있다. 소의 끝에 陣械圖·沈水眞木箭圖·龜甲船圖 등을 첨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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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 (1) |
1561. 공부의 순서와 修身에 대한 질의와 李滉의 답변. 최초의 스승이 琴蘭秀(1530-1604)였음을 밝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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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 (4) |
<大學章句序>에서 주희가 논의한 氣質의 개념에 관하여 小註에서 설명한 것들의 同異‚ ‘性’字를 사용하는 주희의 논점‚ 義와 智의 의미를 구분하는 것에 대한 주희의 논점 등에 대한 질의와 이황의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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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 (7) |
1562. ≪中庸章句≫ 제 24장 이하 일부 구절들의 의미‚ 1장과 終章의 의미맥락‚ ≪太極圖說≫에서 動靜의 先後관계 등에 대한 질의와 이황의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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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書 (10) |
1564. 經傳들 가운데 언급된 ‘性’字의 용례들에서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 부모에게 간쟁하는 도리‚ 巫覡에 대한 배척‚ 爲己之學으로서 공부하는 자세‚ 과거시험 준비와 道學을 겸하는 것‚ 李國弼이 기록한 ≪太極圖說質疑≫에서 繼善과 成性을 道와 器로 구분하는 것‚ 南致利(1543-1580)의 <太極圖>에 대한 해석‚ 五行이 제각기 다시 五行의 氣를 갖추고 있다는 것 등에 대한 질의와 이황의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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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 (15) |
1566. <心經贊>에서 義를 仁보다 앞세워 언급하고‚ 또 禮智를 말하지 않고 中正을 말한 이유‚ 仁義禮智를 陰陽·動靜과 결부시켜서 體와 用으로 구분하는 방식‚ 孟子가 體에 貴賤과 大小의 차이를 두는 논점 등에 대한 질의와 이황의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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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 (18) |
三寸叔母夫에 대하여 服을 입는가 여부‚ ≪大學≫ 誠意章에서 두 차례 언급되는 ‘愼其獨’의 ‘獨’에 대하여 陳定宇가 ‘心所獨’과 ‘身所獨’으로 의미의 차이를 부여한 논점이 타당한가의 여부‚ 四端과 七情의 상호관계와 理發의 의미‚ 四端七情과 人心道心의 관계‚ 理와 氣의 관계를 설명할 때 所以·能·發 등의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 ≪大學章句≫ 正心章의 주희 주석 중에서 ‘一有之’의 의미‚ 공부방식에서 道問學과 尊德性의 관계‚ 利心의 발생과정‚ 天地之性에서 ‘性’字의 의미‚ 張栻(1133-1180)이 血氣之怒와 理義之怒를 구분한 맥락 등에 대한 질의와 이황의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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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 (25) |
1567. ≪大學章句≫ 誠意章에 대한 주해들‚ 이 章과 ≪맹자≫ 浩然之氣章의 관계‚ 사람의 血氣가 虛하고 實하게 되는 이유‚ 誠의 실천은 言語 사용을 주의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司馬光(1019-1086)의 발언 등에 대한 질의와 이황의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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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 (29) |
德·性·理·心 등의 개념‚ 意와 心의 관계 등에 대한 질의와 이황의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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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 (31) |
<心經贊>의 ‘生於形氣’와 ‘根於性命’에서 生과 根의 의미구분‚ ≪中庸≫ 에서 七情을 언급할 때 喜怒哀樂 네가지만 예로 들은 이유‚ 人心이 道心보다 먼저 언급된 이유‚ 人心과 人欲의 의미구분‚ 天의 의미‚ 學問 두 글자의 의미구분‚ ‘庸言庸行’과 ‘閑邪存誠’의 의미구분‚ 誠意와 正心의 차이‚ 浩然之氣에서 氣와 理의 관계 및 聖人과 凡人의 차이‚ 按配布置의 의미‚ 顔淵이 仁에 대하여 질문하였을 때 공자가 禮를 가지고 대답한 이유‚ 上帝와 鬼神 등의 의미‚ 心과 志의 관계‚ 心의 用으로써 起滅의 의미‚ 생리적 욕구와 人欲의 차이‚ ≪中庸≫에서 明과 誠의 의미‚ ≪中庸≫의 ‘鳶飛魚躍(12장)’과 ≪孟子≫ 浩然之氣章의 ‘必有事焉而勿正’이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이유 등에 대한 질의와 이황의 답변. 이황은 人心에 대한 답변에서 人心과 人欲의 의미를 주희가 후기 저술들에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이 둘을 동일시하던 전기사상을 수정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황의 이 답변은 나중에 이덕홍이 李咸亨과 함께 편집한 ≪心經講錄≫ 가운데 수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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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 (37) |
1592. 敬의 體와 用‚ 坤卦에서 ‘龍戰’의 의미‚ ≪通書≫에서 理와 禮樂의 관계를 淡·和 등의 개념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논리‚ ≪太極圖說≫과 ≪通書≫의 관계‚ 本體와 全體의 의미구분‚ 氣를 품수받을 때 淸濁이 나누어지는 이유 등에 대한 질의와 이황의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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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退溪先生 (40) |
喪禮에서 首絰과 要絰의 사용방식에 대한 질의와 이황의 답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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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琴惺惺齋-蘭秀 (1) |
당시 학자들의 출세주의적인 공부방식과 독서의 병폐에 관해 언급함. 금란수와 이덕홍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권3 <上退溪先生(1)>에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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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南義中-致利 (1) |
주희가 <答呂子約書>와 ≪中庸或問≫에서 動靜의 관계로써 復卦를 설명하는 논점이 <答張敬夫書>에서 설명한 것과 서로 상이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전자는 주희가 陰陽相接處의 관점에서 복괘를 설명하고‚ 후자는 體用一源·顯微無間의 관점에서 복괘를 설명한 것으로서‚ 이 두 설명은 서로 보완적인 두 측면을 밝히고 있다고 이덕홍은 주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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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宇 (2) |
1659. 이황의 같은 門人이었던 權宇(?-1573)의 문안편지를 받고‚ 敬으로서 修身의 요체를 삼아 함께 정진할 것을 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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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 (3) |
復卦에 대한 권우의 새로운 설명을 서신으로 받고 자신의 견해를 답한 편지. 복괘와‚ 未發과 已發의 心學에서 動靜의 관계를 ‘體用一源‚ 顯微無間’의 관점에서 일관성 있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答南義仲-致利(1)>에서복괘의 動靜관계에 대하여 설명한 내용의 연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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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 (8) |
陳建(1497-1567)의 ≪學蔀通辨≫(1548 완성) 일부 조목들을 읽고 내용이 정밀하지 못하다고 평가하면서 뒤에 책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특히 人心을 情과 用으로‚ 道心을 性과 體로 구분하는 관점은 매우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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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 (8) |
≪學蔀通辨≫ 한 질을 보내면서 그 사상이 나흠순 사상의 연장이라고 비판하고‚ ≪性理大全≫ 1권에 들어 있는 ≪太極圖說≫ 가운데 ‘太極動而生陽’의 구절에 대한 注에서 이 구절을 喜怒哀樂의 已發之心과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에 관해 朱熹와 李侗(1093-1163)이 문답한 내용을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서 주자가 陸九淵(1139-1192)과 鵞湖寺에서 회담한 뒤에 보낸 시의 한 구절인 ‘只愁說到無言處‚ 不信人間有古今’의 의미에 관하여 질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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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 (9) |
1577. 博文은 格致공부가 성숙된 단계에 들어서 있는 사람에게 맞는 과정이라면‚ 格致는 순서에 따라 공부해야 하는 初學者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博文과 格致 사이의 의미를 구분하고‚ 주희가 육구연에게 보낸 시의 한 구절인 ‘只愁說到無言處‚ 不信人間有古今’의 의미를 해명하고 있다. 또한 ‘克己復禮’에 대해 程子가 ‘制於外‚ 所以養其中也’라고 설명한 데에서 비롯된 制·養 工夫는 敬공부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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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 (12) |
≪中庸≫ 1장의 ‘率性之謂道’에 대하여 性은 體이고 道는 用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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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 (13) |
가까이 지내던 동료들의 사망 소식이 많아져서 李滉의 遺集을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 걱정하는 안부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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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 (14) |
南致利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학설을 견강부회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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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 (15) |
涵養공부가 학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致知가 未發已發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南致利와 權宇의 논점에 대하여 未發已發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은 致知 이후의 과정인 存養과 省察공부에 해당하며‚ ≪小學≫의 灑掃進退는 致知 이전의 行이고 ≪大學≫의 誠意正心이하는 致知 이후의 行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또한 擇善과 明善에서 전자는 格物공부이고 후자는 致知공부에 해당한다고 답변하면서 근래에 李滉의 학설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는 상황을 趙穆(1524-1606)과 함께 개탄하고 있다. 한편 자신이 보낸 <心圖辨>을 교정해서 회답해 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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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 (19) |
南至孝의 知行에 관한 주장과 人心을 七情이라고 설명하는 주장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善人과 惡人이 모두 聖人을 배우고자하는 마음을 내는 것은 人心의 발동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반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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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 (20) |
이황의 문집을 교정보는 일에 대하여 상의하는 안부편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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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定甫問目 (20) |
≪中庸章句≫27장에서 尊德性과 道問學 공부의 연관성‚ 30장에서 ‘大德敦化’의 의미‚ 32장 주희 주석 가운데 至誠無息과 自然之功用의 논리적 연관성‚ ≪庸學指南≫(저자 미상)에서 動靜을 身心의 작용(功用)에서 볼 때 모두 行 가운데에서의 공부라고 주장하고 있는 설명의 정당성 여부 등 4가지 질문에 대하여 조목별로 답변하고 있다. 南致利는 ≪庸學指南≫의 설명이 잘못이라고 비판하였지만‚ 이덕홍은 知에 內外의 구분이 있고 行에 體用의 구별이 있다는 논점을 근거로 ≪庸學指南≫의 설명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아울러 擇과 明 두 글자에 대한 의미구분의 전거에 관해 밝히면서 南致利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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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子明-士誠 (32) |
≪啓蒙傳疑≫ 中本이 자신에게 없음을 말하고‚ 鄭士誠(1545-1607)이 中本을 本府로 보내서 進上할 수 있게 해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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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而得-雲龍 (33) |
1578. 柳雲龍(1539-1601)·權宇·南致利 등이 모여 ≪啓蒙傳疑≫를 함께 교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한편으로 李滉의 遺稿들을 교정하는 사업을 자신이 감당하기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아울러 南致利의 병세가 위독함을 걱정하는 안부편지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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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西厓柳相國 (33) |
1593. 柳成龍(1542-1607)이 영의정으로 승진한 것을 축하하면서‚ 자신이 수령으로 있는 永春縣에 부과된 곡물공출의 명령(作米之令)을 완화해 주도록 조정에 설득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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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昌陵齋所 (34) |
李滉이 玉堂에 재직하고 있을 때 鳳城君을 탄핵한 일이 정당한 처사였음을 힘써 변론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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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上-記退溪先生言行∕此一節記先生入學之序 (1) |
12세에 叔父 李堣(1469-1517)로부터 論語를 배워 13세에 마친 일‚ 19세에 ≪性理大全≫의 첫째권과 마지막권을 얻어 읽은 일‚ 太學生 시절 金麟厚(1510-1560)와 교제하였고‚ 한 동료로부터 ≪心經附注≫를 구해 깊이 침잠하였던 일‚ 기존의 諺解와 語錄의 잘못들을 고치는데 힘썼던 일‚ ≪心經≫을 통해 心學의 연원을 비로소 알았으며 평생 동안 이 책을 소중히 여겼다는 발언‚ 본문 이외에 조금도 덧붙이지 않으며 이미 이루어진 설명을 보는 것이 도리라고 학생들에게 항상 강조하였다는 이덕홍의 회고‚ 학생들을 가르칠 때 ≪太極圖說≫에서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자신이 공부했던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는 설명‚ ≪易學啓蒙≫이 초학자에게는 매우 불친절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말에 대한 반박‚ 이황이 新安 陳氏가 편집한 ≪古文前集≫을 가르치면서 眞宗의 <勸學文>이 처음에 나온 것을 비판한 발언‚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장을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 ≪性理大全≫에 들어 있는 ≪太極圖說≫은 자신이 사색을 발전시킨 단서였으며‚ <敬齋箴>은 자신이 수용하는 바탕이었다는 말과 ≪近思錄≫은 ≪周易≫의 설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서 초학자에게는 어려우므로 먼저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 평소에 ≪論語≫<鄕黨>의 마지막 부분 小註에 나오는 蔡元定의 말을 외우곤 하였다는 말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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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上-記退溪先生言行∕此一節記先生操存之要 (3) |
德弘의 이름에서 德字가 ‘行直心’을 의미한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훈계‚ 氣質이 치우친 것을 극복하려면 理를 밝게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 立志와 居敬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 활동할 때 마음을 收拾하기 위해서 主靜이 중요하다는 가르침‚ ‘마음 속에 한 사물도 허용하지 않는다(心中不用一物)’는 말은 사물에 의해 구애되지 않는 虛明靜一한 마음의 기상을 의미한다는 설명‚ 意와 志와 慮의 개념에 대한 구분‚ ‘豈知一寸膠求此千丈渾’에서 膠의 의미에 대한 설명‚ 算學을 독서하는 것도 ‘求放心’의 한 방법이라는 가르침‚ 공부할 때 主宰를 세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敬이며‚ 이 敬에 대한 선대학자들의 설명 가운데‚ 程頤(1033-1107)·謝良佐(1050-1103)·尹惇(1071-1141)·朱熹 등의 설명이 가장 훌륭하다는 것과‚ 초학자는 整齊嚴肅하는 과정을 통해 敬에 이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가르침‚ 心統性情에 대한 설명‚ 이황이 평소에 居敬하는 방식과 敬에 관한 선대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설명‚ 敬공부를 두고 李棐彦과 李德弘이 벌인 논쟁에 대한 평가‚ <觀書>라는 詩 구절에 대한 해설‚ ‘特達見本根’의 의미에 대한 설명‚ ≪孟子≫浩然之氣章에서 ‘必有事焉而勿正勿忘勿助長’의 의미에 대한 설명‚ 평소 자신의 修己 공부에 대한 설명‚ 군자의 학문이 爲己之學으로서 가지는 의미에 대한 설명‚ 詩를 쓰는 태도‚ 평소의 생활태도‚ 出仕 초기의 생활태도에 대한 회고와 반성‚ 1555년 淸凉山과 1570년 溪堂에서의 일화‚ 이황에 대한 趙穆과 李德弘의 평가‚ 操存을 지속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持敬이 중요하다는 가르침‚ 혼자 거처하고 싶어하는 태도에 대한 평가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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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上-記退溪先生言行∕此一節記先生窮格之妙 (12) |
≪大學章句≫와 ≪大學或問≫에서 ‘定’字에 대한 해석이 상이한 이유에 대한 질문과 답변‚ 理와 心의 관계에 대한 설명‚ 理와 氣의 관계에서 先後를 구분할 때와 구분하지 않을 때의 의미에 대한 설명‚ 理가 ‘生物之本’을 의미하는 것에 관한 질문과 답변‚ 所以然과 所當然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한 理의 의미‚ ≪中庸章句≫12장에서 ‘鳶飛戾天‚ 魚躍于淵’의 의미와 ‘活潑潑’의 함의가 불교에서 의미하는 것과 다른 점에 관한 설명‚ 소나무와 잣나무에 대한 평가‚ 이황의 평상시 생활모습‚ 1570년 陶山의 江城이 붉은 빛으로 변한 현상에 대한 설명‚ 璿璣玉衡을 이덕홍에게 제작하게 해서 天象을 살핀 일‚ ‘格物致知’에서 ‘格’의 의미에 대한 설명‚ ‘物格’의 의미에 대한 奇大升(1527-1572)의 해석과 이황의 평가‚ ‘無極而太極’의 의미에 대한 기대승과 이황의 설명‚ 卜筮와 巫覡에 대한 이황의 태도‚ 天地와 人道의 차이에 대한 설명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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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上-記退溪先生言行∕此一節記先生讀書之勤 (19) |
≪論語≫를 독서하는 법에 대한 설명‚ 이덕홍이 細註를 읽는데 집착하는 태도에 대한 훈계‚ 이황의 독서생활에 대한 묘사‚ 올바른 독서법에 대한 가르침‚ 안질에도 불구하고 독서를 중단하지 않는 이황의 모습‚ 이덕홍에게 과거공부를 겸하도록 격려한 말‚ 공부를 독실히 하라는 훈계‚ 자신의 노둔함을 걱정하는 이덕홍을 타이르면서 지어준 詩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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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山水之樂 (1) |
18세 때 연곡에 있는 연못을 보고 지은 시를 1570년에 다시 읽어보고 느낀 감상‚ 낚시를 즐기는 방식‚ 1561년 4월 李福弘·李德弘 형제와 陶山에 놀러가서 杜詩를 읊고‚ 曺植(1501-1572)의 시를 품평하고‚ 조카 교·손자 安道·그리고 李德弘과 뱃놀이하면서 <赤壁賦>를 품평하고 시를 지은 일‚ 1566년 10월 記夢詩를 지어 이덕홍에게 보여주고‚ 같은 달 24일에 月瀾으로 놀러가 考槃亭에 머물면서 근처를 유람하며 지낸 일(이 기간 동안에 있었던 李德弘이 ≪心經≫의 구절에 대하여 질문한 것‚ ‘勿忘勿助長’의 의미를 周易參同契의 火法과 관련지어 질문한 것에 대하여 水火를 중심으로 周易參同契의 구조와 內丹法을 설명한 일‚ 阿淳에게 역사를 가르치다가 ‘武后玉眞事’에 이르러 탄식한 일‚ 禮記 <樂記>의 ‘禮樂不可斯須去身’과 心經附注의 ‘言忠信行篤敬’에 대한 질문과 설명‚ 敬의 의미에 대해서 ‘旣不可著力‚ 又不可不著力’보다 程伊川의 ‘非著意‚ 非不著意’가 더 합당하다는 설명‚ 招隱臺·月瀾菴·考槃臺·凝思臺·朗詠臺·凌雲臺·馭風臺 등 <七臺詩>를 지어 보여준 일 등)‚ 柳而得의 인물됨을 칭찬하고 그의 병을 걱정한 일‚ 心經과 近思錄을 독서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時務에도 어두운 당시 사람들의 태도를 한탄한 일‚ 1570년 이덕홍이 伊洞에 놀러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황을 만나 詩 2首를 받은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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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居家之儀 (7) |
가옥을 검소하게 유지한 일‚ 玩樂齋를 건축할 때 목공들이 八尺 규모로 크게 지어놓은 것을 탄식한 일‚ 친족명칭에 대한 설명‚ ‘臣妾億兆’의 의미에 대한 설명‚ 자신의 子弟 교육에 대한 반성‚ 살림을 검소하게 운영하고 巫覡의 일을 집안에서 嚴禁시킨 일‚ 집안 식구들을 대하는 태도와 검소한 살림운영‚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정도에서 이웃의 淫祀를 제지시키라는 가르침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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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祭祀之禮 (9) |
支子로서 宗家를 대하는 이황의 태도‚ 時祭에 참여하는 이황의 태도‚ 元日마다 아침이 되기 전에 家廟에 나아가 進拜한 일‚ 제수용품을 준비하는 태도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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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辭受之義 (9) |
金而精으로부터 나귀(驢)를 선물받고 사양한 이유에 대한 설명‚ 달리 요구하는 바가 있어 생선을 선물한 사람에게 거절하면서 밝힌 이유‚ 佛僧이 生薑을 선물한 것을 거절한 이유‚ 술자리에서 碧梧公과 金而精이 서로 상대에게 사양하는 것에 대하여 훈계한 말‚ 남의 집 밤나무 가지가 담너머로 뻗어와 떨어진 밤들을 주워서 도로 던져 준 일‚ 竹嶺에서 官人으로부터 선물받고 거절한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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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接物之容 (10) |
친구를 사귀는 법에 대한 설명‚ 타인을 대하는 법에 대한 설명‚ 남의 말을 듣고 응대하는 방식‚ 門人小子를 대하는 태도‚ 家長을 대신해서 손님을 맞이해 올 때의 禮法에 대한 설명‚ 평소의 행동거지‚ 타인과 논쟁하는 태도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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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論人物之品 (12) |
≪尙書≫의 註釋을 보고 蔡沈(1167-1230)이 黃榦(1152-1221)보다 뛰어나다고 평한 말‚ 鄭夢周(1337-1392)가 辛旽(?-1371)의 소생으로 말해지는 禑王(1364-1398)과 昌王(1380-1389)을 섬긴 일이 의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변론‚ 曺植(1501-1572)이 莊子의 사상에 친근하다는 평가‚ 林薰(1500-1584)이 편지를 보내와 曺植이 淫婦家를 훼철한 일이 부당하다고 비판한 것을 긍정한 일‚ 奇大升(1527-1572)과 李楨(1512-1571)에 대한 인물평가와 曺植은 ≪莊子≫의 사상을 그리고 盧守愼(1515-1590)은 陸九淵(1139-1192)의 사상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는 비판‚ 기대승이 좀더 진보하기를 바라는 기대‚ 尹任(1487-1545)을 긍정하는 시각에서 분석한 乙巳士禍에 대한 평가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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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論處變之道 (14) |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죽고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삶을 도모하기 위해서‚ 죽은 아버지를 피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관한 논의‚ 안정을 유지하면서 예법에 맞게 일을 처리하는(靜而理) 태도가 부모상을 당했을 때도 실행되어야 한다는 논의‚ 巫覡을 빌어서 병을 치유하려는 것을 반대해도 부모가 계속해서 고집할 때 우선 부모의 뜻에 따르면서 정성을 다해 부모의 생각을 돌리도록 힘써야 한다는 가르침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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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推恕之仁 (15) |
자신의 전답이 상류에 있어 밑에 있는 남의 전답들이 물을 제대로 관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걱정‚ 전답 가운데로 난 길 때문에 농작물이 피해를 입은 것을 보고서 노비가 길을 옮겨 놓은 것을 책망하고 예전대로 길을 되돌려 놓게 한일‚ 巖栖軒에 있을 때 그 근처를 말을 타고 그냥 지나쳐간 사람을 나무라지 않은 일‚ 1566년 醴泉邑에 갔을 때 자신과 먼 친족관계에 있는 과부로부터 贖布를 줄여 달라는 하소연을 듣고 면전에서는 거절하였지만‚ 나중에 太守에게 내막을 알려서 구제해준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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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飮食之節 (16) |
식사하는 습관‚ 어른을 따라 남의 집에 들어가서 그 어른이 식사를 요구하였을 때 처신하는 예법에 대한 설명‚ 음식을 먹는 방식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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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居鄕之事 (17) |
국가의 賦役에 항상 솔선수범을 보인 일‚ 자신의 조카 辛弘에게 訟事가 일어났을 때 전혀 관여하지 않은 일‚ 어른 앞에서 我나 小人 등으로 자신을 지칭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이름을 말해야 한다는 가르침‚ 烏川에 거주하는 金富弼·富儀·富倫·琴應夾·應壎 등과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있는데‚ 이 때에 鄕黨의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나이 순서대로 좌석에 앉는다는 것을 ≪禮記≫<王制>와 ≪周禮≫<黨正>의 註를 논거로 제시하면서 설명한 것‚ 鄕人들을 대하는 태도‚ 鄕黨에서는 나이가 중시되어야 한다는 설명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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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進退之節 (19) |
孫子 李安道가 司馬試에 급제한 것에 대해 축하를 받고 자신이 會試를 보았을 때의 경험을 말한 것‚ 乙巳(1545)년 應敎를 제수받아 玉堂에 있을 때 尹大妃가 수렴청정하는 것의 정당성 여부를 놓고 동료 관리들과 토론하였는데‚ 이 때 수렴청정의 정당성을 옹호한 발언과 그 발언 때문에 尹元衡(?-1565)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한 일‚ 조정에 참여해야 할 때라는 柳雲龍의 말을 듣고 자신이 그럴만한 인물이 안되며 그럴 시기도 아니라는 변명‚ 宣祖의 등극후 나라의 장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기대하는 모습‚ 1569년 관직에서 물러나오면서 자신이 都城안에서 죽어 예법에 어긋나게 될까봐 걱정하였다는 말‚ 귀향한 뒤에 이덕홍에게 준 詩 한 수‚ 爻象이 한결같이 나쁘게 나오는 것을 보고 士林의 장래를 걱정한 일과 金氏성을 가진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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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此一節記先生臨終之命 (22) |
1570년 12월 2일 병세가 악화되었는데‚ 장인의 忌日이므로 고기반찬을 놓지 말라고 훈계한 것과 3일에 방안에서 설사를 하고 매화를 옮겨 놓은 일‚ 4일 조카 寗에게 유서를 써주고 제자들을 마지막 접견한 일‚ 5일 관을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앞으로 사나흘 더 살면 다행이라고 말한 것‚ 7일 인척을 시켜 이덕홍에게 서적을 관리하라고 시키고‚ 이덕홍이 金富倫 등과 점을 쳐서 謙卦의 ‘君子有終’의 占辭를 얻고 失色한 일‚ 8일 매화에 물을 주라고 시키고‚ 비바람치는 소리를 들었는가를 물어보고‚ 맑은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1寸가량 눈이 내리자 자신이 누울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령하고 이어 부축하여 앉자 하늘이 맑게 갠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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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山記善錄下∕記善總錄 (23) |
이황의 공부과정‚ 공부내용‚ 생활에서 실천하는 방식‚ 남긴 업적들에 대하여 이덕홍이 총체적으로 기술한 글. 이 <記善錄> 뒤에 金應祖(1587-1667)가 쓴 <跋文>이 붙어 있다. 이황은 1519년 이전에 ≪小學≫을 읽고서 灑掃之節과 孝弟之道를 알았고‚ ≪論語≫를 읽고 뜻을 세웠으며 독서에 몰두하였다는 것‚ 이어 ≪太極圖說≫을 얻어 읽고 造化之節과 人物之本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는 것‚ 中年에 이르러 ≪心經≫과 朱熹의 저작들을 읽고 朱熹를 자신의 師表로 삼았으며‚ <敬齋箴>과 <白鹿洞規>를 학생들의 일상규범으로 삼았다는 것‚ 또한 ‘敬義挾持之目’을 좌우에 그림으로 만들어 붙여두고 항상 음미하였다는 것‚ 家禮에서 오직 주희의 說만 따르고 丘濬(1421-1495)을 따르지 않았으며 단지 쓸 만한 점을 때에 맞게 수용하였다는 것‚ 당시 冠禮와 昏禮의 폐단을 걱정하여 古今의 형평을 맞추어서 간략히 실행하였다는 것‚ 宗家의 祭禮에서 어긋난 점들을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함부로 고집하지 않았다는 것‚ 주희의 관점에 따라서 音樂에 대하여 논의를 보류하였다는 것‚ 占筮에 대해서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실행하지 않았다는 것‚ 공리주의적 태도들을 비난하였다는 것‚ 제자들에게 ≪小學≫·≪大學≫·≪心經≫·≪論語≫·≪孟子≫·朱熹의 著書 등의 순서로 가르쳤다는 것 등등의 일과 이황 저서들에 대한 저작배경을 기록하고 있으며‚ 주희 사상의 진정한 계승자가 이황이라는 道統觀을 세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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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淸瀾學蔀通辨心圖說辨 (1) |
陳建의 ≪學蔀通辨≫을 읽고 그 가운데 들어 있는 <心圖說>의 내용을 비판한 글. 趙穆이 ≪학부통변≫ 한 질을 얻어 여러 동료들과 廬江書院에서 강독한 후 儒敎와 佛敎의 차이‚ 朱熹와 陸九淵의 사상적 차이에 대하여 잘 규명하였다고 평가하고서 이덕홍에게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였다. 이에 이덕홍이 읽어보고 <心圖說>에서 陳建이 性은 道心이고 知覺은 人心이라고 설명한 부분은 주희가 ≪中庸章句≫의 序文에서 설명한 논지와 합치되지 않으며‚ 특히 知覺을 人心에만 국한시켜 말해서는 안된다는 점과‚ 道心을 性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已發과 未發의 구분을 망각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비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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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行辨 (3) |
宣祖로부터 知와 行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변한 글. 이덕홍은 學의 측면에서 보면 한가지 일이지만 시행의 순서(終始)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로 구분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 知는 內外 즉 자신과 외부 사물을 兼하고 있으며 ≪小學≫과 ≪大學≫처럼 낮은 단계와 고급 단계의 차이가 있는 한편‚ 行은 動靜을 兼하고 또 先後가 있다고 답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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造化辨 (5) |
幽·明·屈·伸 등의 개념들을 가지고 天地·寒暑·晝夜 등을 설명하고 陽氣와 陰氣의 변화로 바람‚ 우뢰‚ 비와 이슬‚ 서리와 눈 등의 자연현상을 설명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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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八條目辨 (5) |
朴州가 ≪大學≫의 八條目에 대한 傳文에서 ‘良心發見處’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하여 비판한 글. 良心이 발현하는 것에 대한 언명은 經文 중 ‘明明德’의 부분에서 발견되며‚ 傳文은 發見處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明德을 밝혀서 드러내는 공부를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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絜矩辨 (6) |
≪大學≫의 ‘絜矩’에 대한 해석을 鄭介淸(1529-1590)과 柳希春(1513-1577)이 서로 다르게 하자‚ 許功彦이 어느 쪽이 옳은 지를 질문하였는데‚ 이에 답변한 글. 柳希春은 ‘絜焉而矩之’로‚ 鄭介淸은 ‘以矩絜之’로 각각 다르게 해석하였는데‚ 이덕홍은 정개청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朱子語類≫·≪大學章句≫·≪大學或問≫ 등에서 주희가 설명하고 있는 것‚ 雲峯胡氏와 李滉의 설명 등에 근거하여 주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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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倫辨 (8) |
五倫·五典·五品·五敎 등의 용어들에서 각각 강조되는 상이한 문맥을 간략히 설명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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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趙月川士敬辨未發已發 (9) |
1573. 朱熹가 <未發已發說>에서 心·性·中 등을 未發과 已發의 개념에 연계시켜 설명하는 논리에 관해 趙穆이 질문하자 이에 답변한 글. 이덕홍은 體와 用의 두 측면에서 心을 이해하여야 된다는 논지를 가지고 心·性·中 등의 명칭들이 쓰여진 문맥에 따라 함의하는 바를 설명하면서‚ 南致利의 說을 비판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권 4의 <答權定甫 (3)>에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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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十甲子陰陽辨 (11) |
六十甲子에서 陽의 數가 36이 되고 陰의 數가 24가 되는 이치에 대하여 설명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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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晦菴謂參同契非虛語辨 (11) |
朱熹는 도교 경전 가운데 하나인 ≪周易參同契≫에 관하여 ≪參同契考異≫를 지어서 ≪參同契≫의 말이 ≪周易≫의 이치와 상통한다고 말하고 배척하지 않았는데‚ 이 글은 주희의 이러한 논점에 대하여 부연설명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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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銘說 (14) |
張載(1020-1077)의 <西銘>과 ≪中庸≫의 내용이 서로 表裏가 됨을 간략히 설명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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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銘說 (14) |
張載가 지은 <東銘>의 원래 제목이 砭愚이었던 이유를 글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간략히 설명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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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月日時元會運世說 (15) |
邵雍(1011-1077)의 元會運世說을 數로 나타낸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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易初九上六爻義 (15) |
1594. ≪周易≫에서 爻의 명칭을 부를 때 유독 첫째와 마지막 爻를 初九 또는 上六 등으로 부르는 이유에 대하여 宣祖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변한 글. 이덕홍은 ≪周易≫에서 시작과 끝의 변화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첫째와 여섯째 爻에서만 명칭을 특별히 다르게 사용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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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浚問答 (16) |
1567. 李彦迪(1491-1553)의 庶孫인 李浚이 陶山에 들렀다가 李滉이 出仕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묻자‚ 이덕홍이 답변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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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三先生學 (19) |
朱熹·李彦迪·李滉 등 세 사람이 학문에 대하여 논한 것을 뽑아 자신의 학문에서 지침으로 삼은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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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退溪先生 (20) |
李滉의 인격과 학문을 기리며 쓴 祭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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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墓誌敍 (21) |
李滉의 집안 배경‚ 出仕과정‚ 학문적 특징 등등을 인용하면서 찬미한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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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墓誌銘 (24) |
이덕홍이 쓴 李滉의 묘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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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遊錄 (24) |
1580. 이해 4월 17일부터 鄭中立과 21일까지 경주 지역을 유람하고 쓴 여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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銘 (29) |
<戶銘>·<窓銘>·<燈銘>·<尺銘>·<鞱光紙銘>·<丌銘>·<冊銘>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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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 (30) |
<心體用圖>·<爲學之圖>·<惺心元>·<和氣湯>·<益元散>·<壽民丹>·<爲政之圖> 등에 관한 중요한 덕목을 조목별로 나열하고 도식화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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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婦有別圖 (32) |
1588. 五倫 가운데 夫婦有別의 의미를 <河圖>와 周易의 원리를 논거로 세워 도식화하고 설명한 것. 이덕홍은 別이 一夫一妻(婦)라는 의미와 남자와 여자의 직분에 대한 구분이라는 두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總論을 부가하여 何士信이 ≪小學集成≫에서 후자의 의미만 강조한 이래로 사람들이 무반성적으로 ‘夫外婦內’의 직분구분의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 것에 관하여 부연설명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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算法圖-幷序 (38) |
계산법의 모호한 점을 이용하여 관리들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계산법을 도식화하고 설명한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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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譜 |
1541년에 태어나서 1615년 位版이 迂溪精舍에 봉안되고 1691년 迂溪書院으로 승격되는 것까지 생애의 주요한 과정들을 정리하고 있다. 작성자는 未詳. 주요 내용을 보면‚ 1558년(17세) 琴瀾秀에게 古文과 ≪小學≫을 배웠고‚ 1559년(18세) 李滉의 門下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1565년(25세) 동문들과 이황을 모시고 ≪易學啓蒙≫을 강독하였고‚ 1566년(26세) ≪心經≫의 내용에 관하여 질의하였는데 이것은 나중에 ≪心經質疑≫로 정리되어 간행되었다. 1570년(30세) 이황의 명을 받아 璿璣玉衡을 제작하였고‚ ≪易學啓蒙≫에 관해 토론하였으며‚ 같은 해 동료 李咸亨과 四端七情에 관해 토론하였다. 이 해 이황이 죽자 이황의 명에 따라 서적들을 관리하였다. 1571년(31세) 이황의 언행록인 ≪陶山記善錄≫을 완성하였고‚ 1572년(32세) 柳雲龍(1539-1601)과 ≪易學啓蒙≫을 토론하였다. 1573년(33세) 趙穆과 未發已發의 문제에 관해 토론하였고‚ 1576년(36세) <陳淸瀾心圖說辨>을 지었다. 1578년(38세) 천거로 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고‚ 1581년(41세) 昌陵參奉을 거쳐‚ 1582년(42세) 豊儲倉奉事가 되었다. 이 해 金達遠과 ≪周易≫을 토론하였고‚ 1583년(43세) 顯陵參奉으로 옮겼다. 1588년(48세) <夫婦有別圖>를 지었고‚ 1589년(49세) 通善郞으로 승진되고 나서 겨울에 다시 宗廟直長을 제수받았다가 화재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592년(52세) 奉直郞司饔署直長을 제수받았고 이어 翊衛司右副率이 되었고‚ 11월에 龍岡山城에 가서 왕세자를 알현하고 疏를 올렸다. 1593년(53세) 行在所에 나아가 宣祖에게 왜적을 격퇴시키기 위한 대책을 밝힌 疏를 올렸다. 1594년(54세) 朝散大夫를 거쳐 朝奉大夫로 승진되었고‚ 겨울에 閔應祺와 ≪周易≫의 卦와 爻에 관하여 토론하였으며‚ 趙振(1543-?)과 知行에 관해 토론하였다. 1596년(56세) 2월 19일 사망하였고‚ 1615년 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를 추증하여‚ 位版을 迂溪精舍에 奉安하였고 다시 1691년 迂溪書院으로 승격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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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廟朝九賢薦目 (13) |
1578. 이덕홍을 비롯한 9명의 遺賢을 천거한 명목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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迂溪書院道存祠奉安文 (15) |
이덕홍의 位版을 迂溪書院에 봉안할 때 올린 글. 이 뒤에 붙은 常享祝文과 함께 金應祖(1587-1667)가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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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文 (跋1) |
1752. 權相一(1679-1760)이 지음. 1733년 迂溪書院에 들러 手澤本을 열람한 적이 있으며‚ 교정을 볼 때 기존의 <年譜>를 다소 수정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 |